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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탄산요정
‘위약금을 감당할 수 없다고?’

남우는 은희를 너무 우습게 봤다.

은희는 망설이지 않았다. 두 손으로 악보 원고를 움켜쥐고 강하게 잡아당겼다.

두 사람이 붙잡은 악보는 그 자리에서 찢어졌다.

곧 은희는 몸을 낮춰 남은 악보까지 잘게 찢었다. 하얀 조각들을 남우의 머리 위로 흩뿌렸다.

“자, 가져가. 네가 원하던 악보야.”

그녀는 한 글자씩 뱉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분노로 폐까지 아팠고, 눈앞이 어지러웠지만 버텼다.

남우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우습게도 지난 6년 동안, 은희는 모든 약함을 이 남자에게 내보였다.

하지만 남우는 단 한 번도 다정한 곁을 내준 적이 없었다.

남우는 갑작스러운 행동에 완전히 격분했다.

그는 앞으로 다가와 은희의 손목을 잡으려 했다.

“미쳤어?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알아?”

은희는 몇 걸음 물러섰다. 몸이 휘청였다.

“안 미쳤어. 아주 또렷해. 이 곡은 절대 맑음이에게 안 줘.”

‘보미야, 엄마가 너를 위해 쓴 곡을 다른 아이한테 주지 않을 거야.’

‘절대로.’

어지럼은 더 심해졌다. 속이 뒤집히듯 울렁거렸다.

그녀는 벽에 기대섰다. 눈에는 여전히 남우를 향한 적의가 가득했다.

기세는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남우는 눈앞의 은희가 점점 어릴 때의 제멋대로인 모습과 닮아 간다고 느꼈다.

지난 6년간 조용히 남우의 말대로 따르며 살았던 모습은 진짜 은희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잠시 멈칫한 뒤에도 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그래. 이제야 성질 좀 나오네?”

은희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입술이 떨렸다.

“5천만 원은 낼 수 있어. 처음 의뢰받을 때 정한 위약금이니까.”

남우는 그 말을 듣고 눈썹을 치켜올리며 웃었다.

“5천만 원? 작곡가님이 계약서를 제대로 안 읽었나 봐.”

그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이미 납기일을 사흘이나 넘겼어. 지연 위약벌 조항까지 붙으면 열 배야. 5억.”

‘5억?’

은희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래도 억지로 웃었다.

그런 돈은 은희에게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굴복하면 보미에게 죄를 짓는 것이다.

그녀는 엄마 자격도 없게 된다.

“정말 이렇게까지 할 거야?”

남우는 한때 은희의 베개 옆에 있던 사람이었고, 누구보다 그녀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가장 잘 아는 사람이 가장 아픈 데를 알고 깊이 찌른다.

남우는 은희에게 5억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를 벼랑 끝으로 몰아붙이려는 것이었다.

이 모든 일이 남우의 첫사랑 딸, 맑음 때문에 벌어졌다는 사실이 또 비참했다.

그런데 보미는 사랑 하나도 받지 못했다.

세상에 이렇게까지 치우친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남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네가 자초한 일이야. 얌전히 곡을 넘겼으면 아무 일도 없었어.”

은희는 그를 바라보다가, 문득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웃었다.

“5억이면 5억. 천천히 갚을게. 하지만 너와 소영은 씨의 딸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야.”

말을 끝낸 그녀는 돌아서려 했다.

남우는 빠르게 따라가 은희의 팔을 붙잡았다.

“오늘 여기서 나가면 이 일이 쉽게 끝날 줄 알아?”

그 손에 힘이 들어갔다.

“보미도 불러. 보미로 날 협박할 생각하지 마.”

‘보미?’

그 이름을 듣자 은희는 비웃었다.

‘아직도 내 딸 보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니.’

‘보미에게 참 불행한 일이야.’

은희는 남우의 손을 세게 뿌리쳤다. 몸이 다시 휘청였다.

“한 번만 말할게, 잘 들어. 보미는 죽었어. 네가 소영은 씨와 함께 소맑음 생일을 축하하던 그때.”

그 말을 또 들은 남우는 분노를 참지 못했다.

그는 은희의 팔을 다시 붙잡고 험악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정말 독한 여자야. 어떻게 친딸을 두고 몇 번씩이나 그런 말을 해? 내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은희의 몸이 힘없이 무너졌다.

그녀는 그대로 남우의 품으로 쓰러졌다.

“이 수법은 안 통해. 너는 반드시 갚아야...”

남우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은희의 상태가 정말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하얗고, 입술은 바짝 말라 있었다.

“효찬아!”

부르기도 전에 이미 효찬이 달려왔다.

남우의 품에 쓰러진 은희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사람을 어떻게 몰아붙였길래 또 쓰러져? 벌써 두 번째야. 지금 몸 상태가 말이 아니라고.”

그의 시선이 남우에게 날카롭게 꽂혔다.

“너 진짜 집에서 아내한테 손찌검하는 거 아니냐?”

남우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치료나 해.”

효찬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은희를 침대에 눕혔다.

“지난번에도 말했잖아. 상실감이 심한 데다가 제대로 먹지도 못했어. 쉬어도 모자랄 판에 이렇게 몰아붙이면 쓰러질 수밖에 없지. 일단 영양 수액부터 맞혀야 해.”

그는 빠르게 의료 도구를 준비해 수액 라인을 잡았다.

남우는 침대 옆에 서서 종잇장처럼 창백한 은희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돌아서서 은희가 찢어 버린 악보 조각을 하나하나 주웠다.

효찬도 놀란 듯 쳐다보았다.

“그걸 붙이려고?”

“응. 중요해.”

두 사람 사이의 일이라, 효찬은 더 묻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는지 모를 만큼 시간이 흐른 뒤, 은희가 천천히 눈을 떴다.

낯선 천장과 침대 옆에 앉은 남우를 보자, 앞서 벌어진 일이 떠올랐다.

그녀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남우가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도우려 하자, 은희는 그의 손을 쳐냈다.

“나 만지지 마.”

목소리에는 짙은 혐오가 배어 있었다.

남우는 미간을 찌푸리고 입을 열어 말하려고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효찬이 들어왔다. 은희가 깨어난 걸 보고 안도의 숨을 쉬었다.

“이제 깼네요. 아직 몸이 많이 약하니까 움직이지 마세요.”

은희는 효찬을 보고, 다시 남우를 보았다. 차갑게 웃었다.

“내가 쓰러지니 겁났나 봐? 죽으면 위약금 못 받을까 봐?”

남우의 미간이 깊어졌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헛소리 그만해. 난 보미를 봐야겠어.”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은희가 말을 잘랐다.

“말했지. 다시는 못 본다고”

남우는 은희와 더 말다툼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옆 테이블에서 죽 한 그릇을 집어 들었다.

“먹어.”

은희의 눈에는 그 친절마저 수상하기만 했다.

“싫어.”

두 사람이 또다시 부딪칠 기세가 되자, 효찬이 끼어들었다.

“두 분, 일단 그만하세요. 은희 씨는 아직 회복이 덜 됐습니다. 지금은 쉬어야 해요. 위약금 이야기는 몸부터 추스른 뒤에 하시고요.”

폭탄 같은 계약 조항으로 사람을 몰아붙여 쓰러지게 해 놓고, 이제 와서 좋은 사람인 척하는 모양이었다.

“괜찮아요. 위약금은 갚을게요. 한 푼도 빚지고 싶지 않아요.”

말을 끝낸 은희는 고집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오려 했다.

남우는 불쾌한 듯 다시 그녀를 막아섰다.

“그 몸으로 어디 가려고? 고집부리지 마.”

그 고집스러운 얼굴을 보자 남우도 참을성이 바닥났다.

그는 한 손으로 은희의 얼굴을 붙잡고, 다른 손에 든 죽을 한 숟가락 떠 제 입에 넣었다.

금방이라도 입으로 넘겨 먹일 듯한 자세였다.

그때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남우는 은희를 놓고 입안의 죽을 삼켰다.

익숙한 벨 소리였다. 영은이었다.

그는 전화받으며 목소리를 부드럽게 낮췄다.

“무슨 일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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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제 당신을 버릴 차례   제30화

    이틀 뒤.세준은 지루한 얼굴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이제 때가 됐다고 판단했다.그는 쓰지 않던 핸드폰 하나를 꺼냈다. 입가에는 장난기 어린 웃음이 걸렸다.곧 남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하남우, 고은희는 하세준의 집에 있다.]메시지를 보낸 그는 만족스럽게 아직 깊이 잠든 은희를 바라보았다.이어 의자에 느긋하게 앉아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기다렸다....남우는 맑음의 병상을 지키고 있었다.그때 핸드폰이 진동했다.낯선 번호의 문자를 본 그는 잠시 멈칫했다. 곧 얼굴이 무섭게 어두워졌다.‘고은희가 하세준과 함께 있다고?’‘역시 둘은 한패였어.’‘두 사람이 공모해 맑음이를 납치한 것이 분명해.’남우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섰다. 곁에 있던 의자를 발로 차 넘어뜨렸다.‘그래, 그래서 이혼하겠다고 한 거였구나.’‘오래전부터 다른 남자가 있었고...’‘이제는 그 남자와 손잡고 맑음이까지 죽이려 했어!’‘그것도 모자라 자신이 애를 구하러 간 척 연기까지...’‘고은희, 네가 감히...’...은희는 시끄러운 소리에 눈을 떴다.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아 머리는 무겁고 어지러웠다. 간신히 눈을 뜨자 바로 앞에 남우가 서 있었다.남자의 고함이 방 안에 울려 퍼졌고, 은희는 놀라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고은희, 이 독한 여자! 하세준과 한패로 나타나서 대체 무슨 짓을 꾸민 거야!”세준이 곧바로 앞으로 나서 은희 앞을 막았다. 불만스러운 얼굴이었다.“형, 지금 뭐 하는 거야? 내 집에 놀러 온 줄 알았더니, 내 손님한테 손대려고? 너무하네.”남우는 차갑게 웃었다.“손님? 하세준, 이 여자와 함께 맑음이를 납치하고 뒤에서 내통한 주제에... 내가 너를 가만둘 것 같아?”세준은 태연했다. 그는 뒤돌아 은희를 한 번 보고는 억울하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형, 나도 너무 억울해. 우선 난 절대 아니야. 형수님도 안 했어. 이건 형수님이 한 일이 아니야.”“만난 지 며칠 되지도 않았지만, 나도 형수님은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믿어!

  • 이제 당신을 버릴 차례   제29화

    하지만 곧 남우의 눈빛은 다시 차갑게 얼어붙었다.‘고은희, 정말 잔인하군. 맑음이를 산 채로 때려죽이려 했나?’“남우야, 나도 알아. 은희 씨가 나와 맑음이를 싫어한다는 거. 보미에게 갈 사랑을 맑음이 빼앗았다고 생각하겠지.”“하지만 맑음이에게 이렇게까지 하는 사람 곁에는 못 있겠어. 나는 두려워. 감당할 수 없어.”영은은 코를 훌쩍이며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남우의 다리를 붙잡고 울었다.남우는 천천히 몸을 낮춰 그녀를 일으켰다.“네 탓 아니야. 전부 고은희가 독해서 그런 거야. 맑음이에게 이런 짓을 하다니.”그는 이를 갈듯 낮게 중얼거렸다.이어 옆에 선 부하를 향해 차갑게 물었다.“고은희는 지금 어디 있지?”부하는 고개를 숙인 채 조심스럽게 답했다.“이미 사라졌습니다. 현장이 워낙 혼란스러워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보이지 않았습니다.”“사라져?”남우의 눈썹이 깊게 구겨졌다.‘그렇게 심하게 다쳤는데... 그런 몸으로 어떻게 갑자기 사라질 수 있어?’치료하지 않으면 오래 버티지 못할 몸이었다. 역시 독한 여자는 자기 자신에게도 독했다.잠깐 은희가 걱정되는 마음이 스쳤다. 하지만 곧 사라졌다.‘어차피 다 고은희가 꾸민 일이잖아.’‘당연히 빠져나갈 길도 준비했을 거고.’‘자기 목숨을 진짜로 걸 만큼 어리석지는 않을 거니까.’남우의 목소리는 더 차갑게 가라앉았다.“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고은희를 찾아. 어디 숨었든 끌고 와. 자기가 한 짓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부하들이 곧바로 남우의 명령을 받고 흩어졌다.남우는 다시 중환자실 문 앞에 섰다. 유리창 너머로 의식을 잃고 누워 있는 맑음을 바라보았다.가슴이 칼로 도려지는 듯했다.“맑음아, 아빠가 꼭 지켜 줄게. 다시는 누구도 너를 해치지 못하게 할 거야. 그 독한 여자도 절대 그냥 두지 않을게.”그 말을 들은 영은의 몸이 눈에 띄게 움찔했다. 하지만 곧 성공했다는 듯한 웃음이 떠올랐다.‘고은희, 이번에는 죽지 못해 살아남았지.’‘그래도 절대 편히 살지는 못할

  • 이제 당신을 버릴 차례   제28화

    “도와준 건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집에 가고 싶어요. 제 몸 상태는 제가 알아요.”세준은 눈앞의 여자가 자기 상태를 제대로 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그리고 부하들의 손이 얼마나 거친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게다가 명령을 바꾼 타이밍도 조금 늦었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은희는 정말 부하들의 손에 맞아 죽었을지도 몰랐다.이렇게 매력적인 여자가 죽는 건 아까웠다.세준은 입꼬리를 올리고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둘 사이의 거리가 좁아졌고,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은희는 본능적으로 피하려 했지만 몸이 아파 움직이지 못했다.세준이 낮게 말했다.“형수님, 얌전히 있는 게 좋습니다. 여기서 치료받는 동안은 아무 짓도 안 하겠다고 약속하죠.”그 말투가 살짝 달라졌다.“하지만 말을 안 듣고 굳이 나가겠다고 고집부리면, 그때는 무슨 일이 생겨도 장담 못 합니다.”은희는 기가 막혔다. 하지만 지금 그녀에게는 세준과 더 다툴 힘도 없었다.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다. 결국 잠시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의사가 다가오도록 가만히 있었다.의사는 바쁘게 움직이며 은희의 몸 상태를 꼼꼼하게 확인했다.세준은 한쪽에 서서 팔짱을 낀 채 흥미로운 듯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검사가 끝나자 의사는 마스크를 벗고 미간을 찌푸렸다.“고은희 씨는 몸이 매우 약합니다. 장기간 무리한 흔적이 있고, 이번 외상까지 겹쳤습니다. 지금 제대로 쉬면서 치료하지 않으면 후유증이 남을 수 있습니다.”세준은 일부러 화난 척 혀를 찼다.“우리 남우 형도 참, 여자 대할 줄을 몰라요. 우리 예쁜 형수님을 이렇게 만들어 놓다니... 형수님, 제 생각엔 차라리 형과 이혼하고 나랑 만나는 게 낫겠어요.”“적어도 저는 정말 형수님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공주님처럼 아끼고 사랑할 거예요.”은희는 눈을 흘기며 쏘아붙였다.“이혼은 하겠지만 그쪽은 아니에요. 그런 허튼 생각 하지 마세요.”세준은 조금도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오히려 웃었다.“말을 그렇게 딱 잘라 할 필요 있

  • 이제 당신을 버릴 차례   제27화

    [계획이 실패했으면 또 다른 방법을 찾으면 되죠. 게다가 고은희가 당장 엄청난 위협도 아니잖아요. 살아 있어도 큰일을 뒤집을 정도는 못 돼요. 괜히 화내다 몸이나 상하지 마요.]영은은 하마터면 핸드폰을 던질 뻔했다.“전무님, 지금부터 제가 할 말을 잘 들으세요. 다음에 또 제 계획을 망치면 아무리 전무님이라도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이어서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소파 위에 거칠게 던졌다....세준은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라이터를 한쪽에 던져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여자들은 참 번거롭다니까.”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침실 쪽을 바라보았다.은희가 깨어났을 때, 자신이 푹신한 침대에 누워 있다는 걸 알았다.‘여긴 어디지?’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온몸의 상처 때문에 움직일 수 없었다.그때 방문이 조용히 열렸다.세준은 여전히 정장을 입고 있었다. 머리도 말끔하게 넘겼고, 얼굴에는 그 특유의 가벼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손에는 김이 오르는 물 한 잔을 들고 있었다.은희는 그를 보자 몸이 굳었다.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나 침대 헤드에 기대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뭘 하려는 거예요?”세준은 은희의 경계 어린 모습을 보고 물컵을 협탁 위에 내려놓았다.두 손을 들어 해칠 생각이 없다는 듯한 동작을 했다.“형수님, 겁먹지 마세요. 나쁜 의도 없어요. 그냥 구해 드리고 싶었을 뿐이에요.”“구해요? 제가 왜 그 말을 믿어야 하죠?”그는 침대 옆에 천천히 앉았다. 목소리는 부드러웠다.“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전 남우 형하고 한편이 아니에요. 형수님이 억울하게 몰린 걸 알아요. 남우 형은 형수님을 전혀 모르고, 믿지도 않죠.”“그렇게 당하는 걸 가만히 보고 있기가 좀 아까워서, 남우 형 손에서 빼내 온 거예요.”은희는 민영순에게서 세준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세준의 말은 쉽게 믿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그녀가 대답하지 않아도 세준은 신경 쓰지 않았다. 계속 말을 이었다.“형수님을 처음

  • 이제 당신을 버릴 차례   제26화

    의식이 흐려지는 와중에, 은희는 남자들이 갑자기 큰 소리로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고은희 씨, 하 대표님 곧 오십니다. 이 정도면 됐죠? 저희도 더 때리기는 미안합니다. 하 대표님이 보면 분명 걱정하실 겁니다.”‘이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경찰이 오는 게 아니었나?’‘왜 하남우가 온다는 말이 나왔어?’‘하남우는 나를 믿지 않는데...’은희는 몸의 통증 때문에 생각의 속도가 느려졌다.그리고 제대로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거친 발소리가 가까워졌다.남우가 철문을 걷어차듯 열고 들어왔다.상처투성이인 맑음을 보자 남우의 눈이 붉게 달아올랐다.조금 전 남자들이 은희에게 한 말을 들었다.듣지 못했다면 속았을지도 모른다.은희 역시 구석에서 몸을 웅크린 채 고통으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고은희, 연기 실력 참 대단해.’그 말은 남우에게 확실한 증거였다.모든 것이 은희가 스스로 꾸민 일이라는 증거.‘이 여자... 어떻게 이렇게 독할 수 있을까?’‘맑음이에게도, 자기 자신에게도.’“고은희, 넌 정말 구제 불능이구나.”남우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분노를 겨우 누르고 있었다.“내가 너까지 걱정했는데, 전부 네가 꾸민 짓이었다니. 어떻게 이렇게 악독해? 아이 하나도 못 봐줘?”은희는 입을 열어 설명하고 싶었다.하지만 목은 바싹 말라 있었고,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아팠다. 온몸이 바늘에 찔리는 것 같았다.남우는 그녀에게 설명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그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가 맑음을 안아 들었다.맑음은 눈을 감은 채 의식을 잃어 있었다. 작은 얼굴에는 공포가 남아 있었다.아이의 상처를 본 남우는 숨이 막힐 듯 가슴이 아팠다.“맑음아, 무서워하지 마. 아빠 여기 있어. 아빠가 여기서 데리고 나갈게.”그는 아이를 달래며 몸을 돌렸다.“하 대표님, 오해하신 겁니다. 고은희 씨는 정말 맑음이를 구하러 온 겁니다!”방금까지 주먹을 휘두르던 남자가 일부러 남우의 화에 또 기름을 부었다.“입 다물어!”남우가 거칠게

  • 이제 당신을 버릴 차례   제25화

    “여기서 더 시간 낭비하지 말고 흩어져서 맑음이를 찾아.”세준과 영은은 시선을 맞췄다.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눈빛이었다.두 사람은 아무렇게나 방향을 고르는 듯했지만, 이미 계획은 정해져 있었다.집 정원 쪽에는 미리 준비해 둔 단서가 있었다. 은희를 유인하기 위한 함정이었다.그곳에는 반드시 은희가 가야 했다.하지만 공교롭게도 남우가 작은 정원 쪽으로 향하려 했다.영은은 이미 대비해 두었다. 그녀의 몸이 갑자기 휘청였고, 눈이 스르르 감겼다.곧바로 바닥으로 쓰러졌다.“소영은 씨!”세준은 재빠르게 반응해 영은을 받쳤다. 큰 소리로 외쳤다.“형, 소영은 씨가 쓰러졌어!”남우의 얼굴이 급격히 변했다.그는 영은 곁으로 달려왔다.“효찬아, 빨리 와서 봐줘.”효찬은 근처에 있었다. 곧바로 무릎을 꿇고 영은의 상태를 확인했다.큰 문제는 아니었다. 지나친 걱정으로 기절한 척하는 상태에 가까웠다.그 사이 은희는 이미 정원으로 향했다. 돌 위에 놓인 종이 한 장이 눈에 띄었다.종이에는 또렷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한 사람만 와라. 다른 사람을 데려오면 소맑음은 죽는다.]‘역시 누군가에게 납치된 거야.’‘아마 하남우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일 가능성이 컸겠지.’‘하남우 혼자 가는 게 맞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정도뿐이고.’은희는 쪽지를 들고 앞쪽으로 달려갔다. 그때 영은도 정신을 차린 척하고 있었다.“이걸 찾았어. 한 사람만 오라고 되어 있어. 아니면 맑음이를 죽이겠대. 네가 가.”은희는 빨리 자신의 혐의를 벗고, 동시에 맑음을 구하고 싶었다.그러나 남우는 쪽지를 받아 들자마자 의심부터 했다.“내가 네 말을 믿을 것 같아? 이 쪽지도 네가 직접 쓴 거겠지. 함정을 만들어 놓고, 영은이 쓰러진 틈에 사람들을 따돌린 뒤 맑음이를 빼돌리려는 거 아닌가?”“왜 하필 네가 이 쪽지를 찾았지? 그렇게 우연한 일이 일어날 수 있나?”사람은 너무 어이가 없으면 대꾸하고 싶지도 않아진다.은희는 말문이 막혔다. 눈가가 붉어졌지만, 눈물은 억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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