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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위선

Author: 밤이불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4 06:18:30

“이런 건 녹음을 해야지.”

나지막한 목소리가 병실의 정적을 갈랐다.

“당하고만 있을 반푼이로는 안 보이는데.”

어이가 없어 남자를 바라봤다.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누워 있는 사람에게 할 말인가.

“……지금 저한테 반푼이라고 하신 거예요?”

“아니면 저 문밖에 있는 남자한테?”

남자가 턱짓했다.

문 너머에서는 여전히 차강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됐어. 내가 직접 알아볼 테니까 이만 끊어.”

통화가 끝나는 듯 보였다.

“……남편이에요.”

“압니다.”

“어떻게 아세요?”

“아까부터 저렇게 떠들어 대는데 모를 수가 있습니까?”

순간 얼굴이 뜨거워졌다.

“다 들으셨어요?”

“보다시피 귀가 있어서.”

남자의 대꾸는 막힘이 없었다.

이쯤 되니 궁금해졌다.

“근데 누구신데요?”

“백도겸입니다.”

“그러니까 백도겸이 ㄴ…….”

누구냐고 되물으려는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우연아……!”

차강현이었다.

그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놀란 얼굴로 다가왔다. 조금 전까지 복도에서 투자금 걱정에 열을 올리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표정이 빠르게 바뀌어 있었다.

“우연아, 괜찮아? 괜찮은 거 맞아?”

내 얼굴을 살피는 손길도,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평소보다 애틋했다. 금방이라도 나를 끌어안고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괜찮아.”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 갑자기 사고를 당했는데.”

차강현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손등을 감싸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잠깐 착각할 뻔했다.

아까의 통화 내용을 듣지 못했더라면 차강현의 지난 행동들이 다 사고에서 온 망상이라고 믿었을만큼 눈앞의 그가 애처로워보였다.

그때 차강현의 시선이 침대 옆에 서 있는 남자에게로 향했다.

찰나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대표님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

대표님?

백도겸은 별다른 표정 없이 차강현을 내려다봤다.

“…….”

“사고 현장에서부터 신경 써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이렇게 병원까지 와 주시고…… 제가 어떻게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백도겸은 차강현의 감사 인사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잡힌 내 손을 한 번 내려다보더니, 다시 강현의 얼굴을 바라봤다.

“부부 사이가 좋으신가 봅니다.”

그 말에 내 손이 굳었다.

“그럼요. 제 아내인데요.”

차강현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우연이는 제게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입니다.”

나는 손끝이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

그 말을 하는 입으로, 조금 전 내 존재를 귀찮은 변수처럼 취급했으면서.

차강현, 너는 대체.

“제가 옆에서 잘 챙겼어야 했는데…….”

차강현이 자책하는 듯 고개를 숙였다.

“남편으로서 면목이 없습니다.”

‘내가 옆에서 잘 챙겼어야 했는데.’

속으로 그의 말을 되뇌었다.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답은 간단했다. 백도겸이 여기 있으니까.

“응?”

차강현은 백도겸 앞에서 내가 아는 남편의 모습을 연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방금 전까지 그 연기에 속아 살았던 사람이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그가 내 이마에 손을 대려 했다.

“나 이제 안 속아.”

“우연아?”

그의 눈에 의아함이 스쳤다.

그때 문득 백도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ㅡ ‘이런 건 녹음을 해야지.’

그래. 녹음의 부재를 떠올렸다.

온통 머릿속이 하얘져서, 증거를 남겨야 한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지금은 모르는 척해야 했다.

그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나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놀란 기색을 감추려 애쓰는 대신, 오히려 의아하다는 듯 그를 바라봤다.

“……왜 그렇게 봐요?”

“네가 갑자기 안 속는다잖아.”

“아.”

나는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작게 웃었다.

“꿈에서 당신이 바람피우는 걸 봤어.”

말을 내뱉고 나서도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차강현의 표정이 잠깐 굳었다가, 이내 어이없다는 듯 풀어졌다.

“꿈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거야?”

“그런가 봐. 현실로 착각할만큼 정신이 없네.”

나는 관자놀이를 짚으며 힘없이 웃었다.

“미안. 괜히 놀랐지?”

오히려 내가 그를 달래는 꼴이었다.

“놀라긴 했지. 네가 갑자기 그런 말을 하니까.”

평소와 다름없는 내 태도에 차강현의 얼굴에서 긴장이 조금씩 풀렸다. 그는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연아, 내가 너한테 어떻게 그래. 알잖아. 나한테는 너밖에 없는 거.”

그 말에 목 안쪽이 서늘해졌다.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을 이제는 한 글자도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이 우스웠다.

나는 웃었다.

이번에는 조금도 어색하지 않게.

“응. 알지.”

차강현이 안도한 듯 내 손을 꼭 잡았다.

“그래. 그러니까 몸부터 얼른 회복하자. 내가 계속 옆에 있을게.”

“고마워요, 여보.”

입에 붙지 않은 호칭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나는 강현의 손을 마주 잡고 그의 눈을 바라봤다. 손바닥에 닿는 온기는 익숙했지만, 더는 그 온기에 마음을 기댈 수 없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진실을 털어놓는 용기가 아니었다.

그가 내게 거짓말을 계속하도록 내버려 두는 인내심이었다.

나는 그가 원하는 아내의 얼굴을 해 줄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보기 좋네요.”

백도겸이었다.

“난데없이 도로에 뛰어들길래 반푼이 아닌가 했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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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제 와서 나를 사랑한다고?   9. 업보 청산

    “…….” 검색 결과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백도겸 대표, 투자회사 대표, 국내외 부동산 투자, 호텔 및 물류 사업. 기사마다 조금씩 표현은 달랐지만, 공통점은 분명했다. 그가 손을 댄 사업은 규모가 컸고, 그가 투자한 회사는 시장의 주목을 받았다. 나는 첫 번째 기사를 눌렀다. 〈Verdant 백도겸 대표, 대규모 투자 유치로 업계 주목〉 두 번째 기사에는 그가 인수한 호텔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세 번째 기사에는 해외 물류 기업과의 협력 소식이 담겨 있었다. 한 사람의 이름을 검색했을 뿐인데, 생각보다 많은 정보가 쏟아졌다. “…….” 나는 사진 속 남자를 확대했다. 병실에서 마주쳤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ㅡ ‘이런 건 녹음을 해야지.‘ ㅡ ’당하고만 있을 반푼이로는 안 보이는데.‘ 처음에는 무례하다고 생각했다. 사고를 당해 정신도 제대로 차리지 못한 사람에게 할 말인가 싶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는 내가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 꽤 정확하게 짚어 냈다. 남편에게 배신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내. 그 사실을 들켰다는 걸 남편은 아직 모른다. “……백도겸.” 소리 내어 이름을 읽어 봤다. 그래서 차강현이 그토록 빌빌 기었구나 싶었다. 나는 다시 검색창으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단어를 덧붙였다. [흥신소]. 검색 결과가 주르륵 나타났다. 사람 찾기, 외도 증거 수집, 개인 신원 조사, 기업 관련 조사. 지금 와서 생각하면 확인하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알아야 할 건 따로 있었다. 차강현의 뒤를 조사해 달라고 의뢰하면 어디까지 알아낼 수 있을까. 결혼 전부터 나를 이용할 생각이었는던 것, 투자 유치를 위해 내 이름을 어디까지 들먹였는지, 내가 모르는 사이에 벌인 일들까지 모조리 다 파헤칠 수 있을까. 다만 흥신소를 통해 얻어 낸 증거가 법정에서 어디까지 효력이 있을지가 미지수였다. 나는 검색창에 다시 시선을 고정했

  • 이제 와서 나를 사랑한다고?   8. 아무것도 모르는 아내

    “우연아!” 고개를 돌릴 새도 없이 엄마가 침대 곁으로 달려왔다. 뒤따라 들어온 아버지도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나를 살폈다. “세상에, 우연아……!”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얼마나 급하게 달려왔는지 숨조차 제대로 고르지 못한 채였다. “어디 봐. 의식은 제대로 있는 거야?” 질문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엄마는 내 이마와 뺨을 번갈아 어루만지다가, 뒤통수에 감긴 붕대를 발견하고 그대로 굳었다. “……머리가 왜 이래?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나는 무심코 손을 들어 뒤통수를 가리려 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엄마의 눈에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그때. “뭘 하고 있었는가.” 낮은 목소리가 불호령처럼 떨어졌다. 우림리테일의 대표이사, 연우림. 창업주인 할아버지는 하나뿐인 아들의 이름을 따 회사명을 지었다. 그렇게 탄생한 우림리테일은 오랜 세월 유통업계에서 입지를 다져 온 굴지의 기업으로 자리 잡았다. 아버지가 침대에 누운 나를 돌아봤다. 뒤통수에 감긴 붕대를 확인하는 순간, 굳게 다문 턱에 힘이 들어갔다. “내 딸이 저 지경이 될 때까지 뭘 했느냐는 말이야.” “죄송합니다, 장인어른. 제가 더 세심하게 챙겼어야 했는데…….” “세심하게?” 아버지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내가 사람을 잘못 봤어.” “…….” “우연이를 자네랑 결혼시키지 말았어야 했어.” “아빠.” 끼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머리가 너무 아파요. 이제 그만 나가줘요.” 아버지는 내가 아프다는 말에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장인어른, 제가 잘못했습니다.” 차강현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우연이에게 더 잘하겠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자네가 해야 할 책임을 다해. 헛물 켤 시간에 자네가 할 최소한의 도리를 지키란 말이야.” 아버지는 차강현의 사업을 말 그대로 ’헛물‘이라 지칭했다. “……명심하겠습니다.” “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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