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식탁 위에는 정적이 흘렀고 하예원은 분한 마음을 억누르며 입을 다물었다. 사교성이 없고 무뚝뚝하기로 유명한 하도연마저 온채아를 이토록 감쌀 줄은 꿈에도 몰랐다.그때 하지훈이 불쑥 웃음을 터뜨리며 불난 집에 부채질을 했다. “아버지, 들으셨어요? 큰누나가 아버지의 금지옥엽한테 입 닥치라고 하는데 안 혼내세요?”“...”하선호는 미간을 찌푸리며 하지훈을 노려봤다. “너도 입 다물어.”이 집안에서 하도연에게 훈계를 듣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하용건으로 하여금 수십 년간 이어진 지독한 담배 유혹을 강제로 끊게 만든 것도 하도연이었다. 가끔 몰래 피우다 걸리기라도 하면 하용건 역시 호되게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하지훈이 콧방귀를 뀌었다. “다들 사람에 따라 대접이 달라지네.” 하희민이 웃으며 거들었다. “네가 그렇게 반항아처럼 굴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집안의 실세는 너였을지도 몰라.”과거 하지훈이 의학을 공부하겠다고 고집을 피웠을 때 하용건은 그를 부대 군의관으로 보내려 했다. 하지만 하지훈은 하용건의 감시 아래 부대에 갇혀 있느니 죽는 게 낫다며 야반도주하듯 경성으로 도망쳤고 성유준과 딱 붙어 지내기 시작했다.하지훈은 전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대꾸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랬으면 큰누나 손에 제명에 못 죽었을걸.”하도연이 그를 슬쩍 훑어보며 말했다. “한 마디만 더 해봐. 지금 당장 부대로 보내버릴 테니까.”“...”하지훈은 입을 꾹 다물었다.옆에서 지켜보던 온채아는 절로 웃음이 났다. 하예원을 제외하면 하씨 가문의 분위기는 정말 화목하고 좋았다. 온채아는 문득 자신에게도 형제자매가 있다면 가끔 이렇게 티격태격하며 지내는 게 참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차경희는 자식들의 소란에 못 말리겠다는 듯 뒷머리를 짚었다. “그만들 해라. 그만. 머리가 다 지끈거리네.”차경희 곁에 앉아 있던 강미진이 물었다. “어머님, 또 지병이 도지신 거예요?”차경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에 잠을 좀 설쳤더니 머리가 아프네.”풍파
하용건의 생일 파티 당일, 온채아는 일찍 일어나 강미진에게 먼저 치료를 해주었다. 생일 파티는 저녁으로 예정되어 있었기에 아침 식사 자리에는 하씨 가문 식구들을 제외하면 손님은 온채아뿐이었다. 강미진은 온채아가 서먹해할까 봐 일부러 곁에 앉히고는 정성껏 음식을 집어주었다.하예원은 마치 친 모녀처럼 다정한 두 사람의 모습에 식탁 아래로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붉은 자국이 남았다. 하아린을 낳았을 때부터 강미진의 관심이 멀어지기 시작했었다. 그런데 지금 또다시 이런 상황이라니.만약 온채아가 정말 하씨 가문의 다섯째가 된다면 식구들이 얼마나 그녀를 아끼고 사랑할지 하예원은 감히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그렇게 되면 이 집에 과연 하예원의 자리가 남아있기나 할까! 하예원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런 일이 벌어지게 둬선 안 된다고 다짐했다.온채아는 강미진의 걱정만큼 서먹해하지 않았다. 건강 관리에 관심이 많은 차경희가 어제 아침부터 온채아를 붙들고 한참이나 이야기를 나눴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온채아는 다른 건 몰라도 이 분야만큼은 차경희의 마음을 사로잡을 줄 알았다.차경희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약간 배고픈 듯 지내는 게 더 좋다는 거니?”“그럼요.”온채아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답했다. “늘 배부른 상태를 유지하는 건 오히려 건강에 좋지 않아요. 특히 할머니께서는 자극적이지 않게 드시되 적당히 배를 채우시는 걸로 충분해요.”조금 배고픈 것은 건강에 아무런 지장이 없다. 물론 이는 차경희의 몸 상태에 맞춘 조언이었다. 건강 관리는 사람마다 방식이 다르기 마련이니까.“들었죠?”차경희가 하용건을 얄밉다는 듯 째려보며 말했다. “이제 나보고 말랐다고 타박하지 마세요.”평소 하용건은 부대에서 영상 통화를 할 때마다 밥 좀 많이 먹으라고 잔소리를 늘어놓곤 했다. 하루 세 끼도 모자라 가사 도우미에게 간식을 두 번이나 더 챙겨주라고 당부할 정도였다. 하용건은 군인 생활을 오래 해 미간의 주름이 깊고 엄격한
원한이 있다는 건 최소한 양쪽 모두 문제가 있다는 걸 말해줄 수 있다.아니, 어쩌면 일방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하지훈이 정다슬을 선택했을 때 집안 사람들은 아무리 화가 나도 기껏해야 욕 몇 마디 하는 게 전부이고 그를 외면하거나 내치지는 않는다.하지만 가문을 선택하면 정다슬은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그의 답에 온채아는 조금 놀랐다.“전혀 원망하지 않는다고요?”“응. 안 해.”온채아는 방으로 돌아가서도 여전히 그 질문이 머릿속에 맴돌았다.사실 하지훈이 이렇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확고한 답을 할 줄은 전혀 몰랐다.그럼 성유준은 어떨까?욕실에서 샤워하고 나온 온채아는 머리가 축축한 채로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성유준이라면 어떤 답을 할지 진지하게 생각했다.어쩌면 강미진이 말한 것처럼 그에게 물어보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어쨌든 이미 최악의 상황을 준비한 상태였으니까.그녀는 침대에 누워서 성유준이 옥상에서 했던 말을 떠올리며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고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졌다.온채아는 심호흡 하며 곰곰이 생각하다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성유준에게 직접 물어보기로 결심했다.며칠 후 경찰로부터 소식이 들려오면 경성으로 돌아가서 직접 물어볼 생각이었다.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속에 눌려 있던 돌덩이가 조금은 옮겨진 것 같았다....다음 날, 하씨 가문은 오전부터 유난히 시끌벅적했다.내일은 하용건의 생일잔치였기에 타지에서 온 손님들이 해성에 도착하여 하씨 가문의 본가를 방문했다.온채아는 아침을 먹을 때 하용건과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었고 아침을 먹은 후에는 그들이 손님을 맞이하는 걸 방해하지 않기 위해 방으로 돌아갔다.점심쯤 되자 민은하도 하씨 가문 본가에 도착했고 함께 온 사람은 심서정이었다.사실 심서정을 데리고 올 생각은 없었으나 하씨 가문에 가겠다고 하도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동행했다.민은하는 그제야 온채아가 참 좋다고 느꼈다. 적어도 이런 뻔뻔한 짓은 하지 않으니까.두 사람은 본가 문 앞에서 주율천과
하희민은 재빨리 은침을 꺼내 온채아에게 건넸다.하희민과 하선호가 나가자 온채아는 침을 쥔 채 혈자리에 정확히 침을 놓았다.그렇게 2분도 채 지나지 않아 강미진이 의식을 되찾았고 온채아는 서둘러 그녀의 몸을 눌렀다.“움직이지 마세요. 침놓고 있어요.”“아, 알겠어요.”대답을 이어가던 강미진은 쓰러지기 전의 기억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온채아를 바라보며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예원이의 말은 신경 쓰지 말아요.”그건 오전에 하예원이 온채아를 내쫓았던 일에 대한 사과였다.그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밥 먹을 때 얘기했던 것도 신경 쓸 필요 없어요.”그 말은 강미진의 입장을 명확히 나타냈고 하씨 가문은 하예원과 성유준의 결혼을 결코 추진하지 않을 거라는 뜻이기도 했다.신경 쓰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온채아는 자신이 그런 걸 고려할 위치가 아니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그러니 애초에 먼저 포기를 했던 것이다.그녀는 손끝으로 손바닥을 가볍게 쓸며 조용히 말했다.“아가씨가 말한 그 일은 저랑 아무 상관 없어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아가씨가 오빠랑 만나든 말든 제가 간섭할 입장이 아니거든요.”“정말 상관없어요?”강미진은 그녀를 이해한 듯이 바라보았다.온채아와 성씨 가문의 일은 하씨 가문이 나서서 확인했었다.그래서 강미진은 온채아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어 불가피하게 그들을 안타까워했다.“내가 채아 씨라면 단도직입적으로 어떻게 할 건지 물어봤을 거예요. 명확한 답을 듣게 된다면 두 사람의 관계도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답을 회피하고 무조건 할머니의 편을 든다면 그때 가서 결단을 내리고 각자의 길을 걸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해요. 지금 이런 상황은 채아 씨에도, 성 대표에게도, 뱃속의 아이에게도 공평하지 않아요.”하지만 강미진은 온채아의 현재 선택도 이해할 수 있었다.그동안 참고 견뎌온 시간이 너무 길었다. 게다가 의지할 가족이 없는 온채아는 자신의 인생에 실수가 생기는 걸 용납
갑자기 닿은 입술에 성유준은 순간 얼어붙었다.비록 키스는 많이 서툴렀지만 그 스킨십만으로도 성유준의 감정은 또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그리고 그는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고 있었다.곧이어 성유준이 분위기를 주도했다. 그는 온채아를 완전히 품에 안은 채 긴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더욱 격렬하게 키스를 퍼부었다.성유준의 입술에서는 은은한 향기가 퍼졌고 온채아는 잠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이대로 멈추면 얼마나 좋을까?’스쳐 지나간 서늘한 바람에 온채아는 정신을 번쩍 차리고 그의 품에서 재빨리 몸을 떼어냈다.더 이상 빠져들지 않게 급하게 숨을 내쉬며 이성을 되찾으려 했다.호흡은 거칠었지만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원한다고 해도 소용없어. 나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을 아이의 아빠로 만들고 싶지 않아.”“소용없다고?”순간 어이가 없었던 성유준은 입술을 가볍게 만지며 말했다.“그럼 이 키스는 뭐야? 갑자기 왜 키스했어?”관계를 끊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끝까지 이용하려고 하는 건 주율천에게 배운 게 틀림없다.온채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그냥 운이 나빴다고 생각해.”성유준은 점점 화가 치밀어 올라 인내심을 잃어가며 차갑게 말했다.“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그냥 솔직하게 말 좀 해봐. 온채아, 내가 너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온채아는 그 말을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눈을 내리깔았다.“천하의 성유준이 그럴 리가 없잖아.”그를 원하는 여자들은 해성 고속도로를 몇 번을 오갈 수 있을 정도로 많았다.하지만 성유준의 귀에는 그저 비꼬는 말로 들렸다.표정이 싸늘하게 돌변한 채 말을 하려는 찰나 갑자기 계단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부랴부랴 숨을 헐떡이며 뛰어오던 집사는 온채아를 보자마자 말했다.“채아 씨, 사모님이 갑자기 기절하셨어요. 얼른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기절했다고요?”온채아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다행히 강미진의 건강 상태를 잘 알고 있던 터라 재빨리 계단을 내려가며 상황을 파악했다.“왜 갑자
식탁 위의 분위기는 잠시 굳어버린 듯했다.온채아는 성유준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았지만 마음속에서는 수많은 불확실함이 뒤엉켜 있었다.그녀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 눈앞의 남자를 한 번 쳐다보았다.밝은 식탁 불빛 아래에서 성유준의 이목구비는 더욱 깊고 강인해 보였고 그가 풍기는 차갑고도 무심한 기운은 여전히 그대로였다.온채아는 심지어 자신이 방금 들은 그 말이 정말로 성유준의 입에서 나온 것인지 혼란스러웠다.하지만 그의 짙고 검은 눈동자가 마주쳤을 때 온채아는 확신 했다.맞았다.온채아는 성유준의 시선에 마음이 뜨겁게 달아올랐지만 고개를 살짝 숙이며 애써 그 눈빛을 피했다.마음 속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빠르게 밀려왔고 차마 막을 수가 없었다.하예원은 거절당한 후의 어색함 따위는 전혀 느끼지 못한 채 얼굴에 웃음을 지으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그럼 저랑 내기할래요? 대표님이 먼저 나한테 호감이 생길지, 아니면 그분이 먼저 대표님한테 마음을 열지?”하지훈은 체면이 완전히 구겨져 싸늘하게 말했다.“유준이가 너한테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게 안 느껴지냐? 제발 그냥 조용히 밥 좀 먹어.”그는 누구보다 성유준에 대해 잘 알았다. 그러니 절대 하예원에게 마음이 갈 일이 없다는 것도 알았다.성유준은 평생 온채아에게 빠져 있을 게 확실하다.꿈 깨라고 그동안 하예원에게 여러 번이나 직설적으로 말했으나 전혀 타격이 없었고 점점 더 당돌하게 행동하는 하예원을 보며 하지훈은 다소 당황스러웠다.팩폭을 맞은 하예원은 표정이 굳어졌다.“하지훈, 이러고도 우리가 가족이야?”하선호는 하지훈을 쳐다보며 한마디 했다.“간만에 집에 돌아와서 한다는 일이 네 누나 화나게 만드는 거니?”“누나는 무슨.”하지훈은 입가에 미소를 띠며 진지하게 말했다.“나한테 큰누나랑 막둥이 동생밖에 없는데요?”“아빠!”하예원은 눈물이 글썽이며 말했다.“지훈이가 하는 말 좀 들어봐요. 언니랑 오빠도 똑같아요. 왜 나한테만...”하예원은 7살에 입양되어 하씨 가문 남매와 함께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