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약혼자’ 그 세 글자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마치 두 사람이 오랫동안 함께해 온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말이다.성유준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 어딘가를 누군가가 살짝 긁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묘하게 간질거려서, 입꼬리도 저절로 올라갔다.집사는 별다른 이상을 느끼지 못했지만 온채아의 옆에 선 이 남자가 절대 평범한 인물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물론입니다. 물론이죠.”말을 마치고 그는 공손하게 손짓하며 앞장섰다.서강진의 침실에 들어서 침대에 누워 있는 그를 보자마자, 온채아는 무의식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안색이 어둡고, 분명 어제보다 상태가 좋지 않았다.서강진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병세는 확실히 악화하여 있었다.집사가 먼저 말을 꺼냈다.“회장님, 온 선생님 오셨습니다.”서강진은 그제야 천천히 눈을 떴다. 힘없이 온채아를 바라보며 몸을 일으키려 하다가 집사를 한마디 꾸짖었다.“온 선생님이 오셨으면 나를 부르러 올라오지 그랬냐?”온채아는 다가가 그를 눕혔다.“그냥 누워 계세요. 괜히 더 악화할 수 있어요.”“번거롭게 해서 미안해요. 온 선생님.”서강진은 그렇게 말하며 옆에 서 있는 키 큰 남자를 보더니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성... 성 대표님께서도 오셨어요? 이런, 제대로 맞이도 못 하고...”성유준은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저를 아세요?”“물론이죠.”서강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존경을 담아 말했다.“젊은 나이에 큰 권력을 쥔 분인데, 경성에서 모르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성유준은 그를 흘끗 보며 무심하게 답했다.“과찬이세요.”더 대화를 이어갈 생각은 없어 보였다.서강진도 눈치 좋게 상황을 맞추며 온채아에게 손을 내밀었다.“온 선생님, 부탁드립니다.”온채아는 그의 맥을 짚은 지 채 1분도 되지 않아 손을 떼었다.“서 회장님, 화를 많이 내면 몸에 치명적이에요... 지금 상태로는 저도 방법이 없어요.”서강진은 어젯밤 감정의 기복이 상당히 심했던 것으로 보였다.‘분노는 몸을 해친다’는 말은
병원 문을 나서자마자 성이가 차를 몰고 와 있는 것이 보였다.온채아를 보자마자 그는 재빨리 내려 문을 열어주며 웃었다.“아가씨, 이제쯤 나오실 줄 알았어요.”“고마워요. 성이 씨.”온채아는 웃으며 말했다. 마치 학창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그때도 성이는 항상 그녀 하교 시간을 정확히 맞춰 학교 앞까지 차를 가져다주곤 했다.다만 그때는 늘 뒷좌석에 성유준이 앉아 있었고, 지금은 각자 바쁜 삶을 살고 있을 뿐이었다.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는 열린 뒷좌석 문을 보다가 검은 눈동자와 눈이 딱 마주쳤다.잠시 멍해진 그녀에게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너희 병원은 퇴근하면 벌서게 해?”정말 말 한마디가 독했다.분명 일부러 데리러 온 거면서.온채아는 따지지 않고 웃으며 차에 올라탔다.“왜 왔어?”성유준은 그녀가 듣고 싶은 걸 아는 듯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데리러 왔지.”온채아는 만족스러웠다.“나 서 회장님 집에 먼저 가야 해.”그녀는 솔직하게 말했다.“아침에 전화 왔는데 몸이 안 좋대. 갑자기 병세가 악화한 건 아닌지 걱정돼서.”어제 치료를 했더라도, 환자의 상태는 언제든 나빠질 수 있었다.성유준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내가 같이 갈게.”그 말을 듣자 온채아는 한결 마음이 놓였다.사실 성이가 함께 있어도 크게 걱정할 일은 없었지만, 옆에 이 남자가 있으면 이상하게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다만 그녀는 성유준이 이미 서강진을 의심하고 있는 만큼, 자신이 그와 접촉하는 걸 막을 거로 생각했었다.“안 말려?”“왜 말려?”성유준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실제로 시험해 보기 전에는 제대로 알 수 없잖아.”그는 이 사람이 단순하지 않다고 느끼고 있었다.서강진의 신분이 아무리 명확하고 깨끗해 보여도 말이다.온채아는 그의 우려를 이해하며 말했다.“그럼 사람 보는 눈 밝은 성 대표가 직접 한번 만나봐.”사람을 판단하는 데는 상업계에서 오래 구른 성유준이 자신보다 훨씬 낫다는 걸 인정하고 있었다.서강진의 집에 도착하자, 여
온채아는 잠시 멈칫했다가 천천히 진료실로 걸어가며 물었다.“어디가 불편하세요?”어제 막 침 치료도 했고 처방도 바꿨기 때문에 문제가 생길 리는 없었다.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숨이 가쁘고 힘이 없어 보였다.“그러네요...”서강진은 숨을 고르며 말했다.“오늘 아침에 일어나니까 가슴이 답답하고 숨쉬기가 힘들어요.”온채아는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알겠습니다. 일단 옆으로 누워 계세요. 진료 끝나는 대로 바로 갈게요. 그 전에 증상이 더 심해지면 구급차 불러요.”어제 직접 맥을 짚어봤기 때문에 그의 상태는 알고 있었다.호흡 곤란은 병세가 악화하면 나타날 수 있는 증상이었다.하지만 어제 치료를 했는데 오늘 바로 이런 상태가 된 건 걱정스러웠다.서강진은 안도한 듯 말했다.“그래요.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전화를 끊은 온채아는 마음을 가다듬고 진료를 시작했다.정오가 가까워져 마지막 환자를 보고 나자, 강태무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그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온채아도 웃으며 물었다.“무슨 좋은 일 있어요? 기분 좋아 보이네요.”“이거 한번 봐.”강태무는 자신감 넘치게 말하며 자료를 내밀었다.온채아는 그것을 받아들고 확인한 뒤, 더 크게 웃었다.“실험 결과가 이렇게 빨리 나왔어요?”신형 특효약의 실험 보고서였다.그녀는 최소 일주일은 더 걸릴 거로 생각했었다.“응.”강태무는 맞은편에 앉으며 부드럽게 말했다.“네가 급해 하는 거 알아서 요즘 좀 야근했어.”온채아는 살짝 한숨 섞인 웃음을 지었다.“정말 ‘좀’이기만 했을까요?”직접 연구를 해본 경험이 있기에, 그 말이 절대 가볍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강태무는 화제를 돌렸다.“보고서부터 봐.”“네.”온채아는 서둘러 보고서를 펼쳐 읽었다.이번 결과는 그녀 예상보다 훨씬 좋았다.“약효가 조금 부족해요.”온채아는 차분하게 특정 약재를 가리키며 말했다.“이걸 아출(莪术)로 바꾸고, 용량을 조금 조절하면 우리가 원하는 수준까지 갈 것 같아요.”“알겠어. 더 수정할
한바탕 격정적인 일이 끝났을 때, 온채아는 막 물에서 건져 올린 사람처럼 온몸이 흠뻑 젖어 땀에 젖은 채 베개에 엎드려 있었다. 더는 남아 있는 힘이 한 점도 없었다.성유준은 물티슈를 꺼내 그녀를 꼼꼼하게 닦아주며 정리해 주었다.“씻으러 갈래?”“안 갈래.”온채아는 재빨리 거절했다.요즘은 끝날 때마다 성유준이 그녀를 욕실로 안고 가서 군소리 없이 씻겨주긴 했지만, 오늘은 가고 싶지 않았다.이 남자는 믿을 수가 없었다. 씻다가도 욕조에 그녀를 눕혀 다시 한번 시작해버리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지금 이 순간 그녀는 그저 잠만 자고 싶었다.원래도 눈매가 요염한데, 지금은 생리적인 눈물까지 눈가에 맺혀 더욱 사람을 홀릴 듯했다.성유준은 목울대를 한 번 굴리며, 아랫배로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욕망을 억눌렀다. 그리고 온채아를 안아 소파에 내려놓고, 난장판이 된 침구를 새로 갈아준 뒤 다시 그녀를 안아 침대로 데려왔다.“그럼 자.”남자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난 씻고 올게.”온채아는 눈꺼풀이 떠지지도 않아 대충 대답했다.“응... 얼른 가...”다음 날.항상 자연스럽게 눈이 떠지는 온채아는 두 번째 알람이 울리고 나서야 겨우 느릿하게 일어났다.어젯밤 성유준이 그녀가 출근해야 한다는 걸 감안해 시간을 조절하긴 했지만, 강도까지 줄인 건 아니었다.그래서 너무 피곤했다.옷을 갈아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려는 순간, 문이 열리고 성유준이 들어왔다. 검은색 정장을 말끔히 차려입은 그는 매우 상쾌하고, 한껏 만족한 표정이었다.“잘 잤어?”온채아는 일부러 그러는 걸 알고 그를 흘겨보았다.“잘 잤는데, 잘 못 잤어.”말 속의 ‘잤다’라는 단어에 힘을 살짝 주었다.성유준은 눈썹을 치켜들며 그녀 팔에 걸린 캐시미어 코트를 받아 들고 함께 계단을 내려가면서, 그녀의 귀에 가까이 다가가 태연하게 물었다.“어떤 건 잘 잤고, 어떤 건 못 잤는데?”아주 진지한 표정이었다.모르는 사람이 보면 무슨 기밀 프로젝트라도 얘기하는 줄 알 정도였다
기분 좋아 보이는 성유준의 표정에 온채아는 그가 농담하는 줄 알고 덩달아 거들었다.“그래, 희민 오빠가 대표 자리를 나한테 넘겨준대?”“...”성유준은 피식 웃으며 샤워하는 동안 뜨거운 열기에 붉게 물든 여자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 “네가 말하면 진짜로 줄지도 몰라.”하씨 가문에서 대뜸 지분 5%를 주는 건 확실히 예상 밖이었지만 그들이 온채아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에 기분이 좋았다.온채아는 성유준을 흘겨보며 더 이상 농담을 주고받고 싶지 않았다. “빨리 머리나 말려 줘.”한동안 성유준이 워낙 세심하게 챙겨준 덕분에 보살핌받는 것에 익숙해진 모양이었다.직접 머리를 말린 게 언제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였다.성유준은 애정 어린 눈빛으로 말했다. “네, 아가씨.”말하며 온채아를 소파로 데려가 앉힌 뒤 드라이기를 가져와 능숙하게 머리를 말려주었다.머리를 말리고 난 후 온채아는 성유준과 특효약 프로젝트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요즘 연구소에 갈 시간은 없어도 강태무와 줄곧 기획안을 조정하고 있었다.온채아는 기획을, 강태무는 실험을 담당했다.직접 참여할 때보다 진도가 느리긴 해도 제법 나쁘지 않은 진전이 보였다.성유준은 못 말린다는 듯 그녀를 침대에 눕히며 말했다. “일 얘기는 출근 시간에 하고 지금은 쉬는 시간이니까 자야지.”온채아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얼굴에 물음표를 띄우더니 이렇게 대꾸했다. “한밤중에 나를 붙잡고 프로젝트 진행 상황을 보고하던 사람이 누군데?”추운 겨울 강태무를 차에 태워 보낸 뒤 곧장 악랄한 자본가에게 끌려가 차에서 일 얘기를 나눠야 했다.그런데 이제 와서 공과 사를 명확하게 구분한다니.예전 같으면 성유준은 절대 인정하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당당하게 말했다.“그때 일 말고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기는 했어?”‘업무’ 핑계를 대야만 온채아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그제야 온채아는 정신을 차리고 귓불이 붉어지며 투덜거렸다.“그렇게 업무 핑계로 사리사욕 채우는 사람일 줄 몰
사실이었다.하씨 가문의 누구도 오랜 세월 동안 막내를 되찾는 것을 포기한 적이 없었다. 하선호조차도 말이다.하용건이 지분 문제로 몇 번이나 망설였던 것도 단지 네 남매가 훗날 이 지분 때문에 사이가 틀어질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그들이 마음을 굳게 먹은 것을 보고 차경희는 남편을 흘끗 쳐다본 뒤 자연스럽게 말을 꺼냈다.“막내에게 미안한 건 너희들뿐만이 아니야. 나랑 너희 할아버지도 언젠가 막내를 데려오면 내 명의로 된 호텔을 전부 넘겨주기로 진작 결정했어.”그건 친정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차경희가 정당하게 상속받은 사업이었다.지금 벌어들이는 엄청난 수익이 전부 차경희 본인 재산으로 되어 있었다.강미진은 두 어르신이 진심으로 막내에게 보상해 주려는 마음은 느낄 수 있었지만 다른 세 자식의 마음도 생각해 줘야 했다.“너희 생각은 어때? 채아는 이런 거에 관심 없을 거야. 돌아오기로 해도 그건 아마 가족들 때문일 거라 이런 걸로 사이가 틀어지는 걸 원치 않을 거야. 그러니까 마음 불편한 거 있으면 그냥 얘기해. 너희 모두 똑같게 나눠줄 수 있어.”말하다가 차경희의 눈치를 살피며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 뒤야 다시 입을 열었다.“적은 금액이 아니니까 생각이 달라도 나와 너희 할아버지 할머니는 이해하실 거야.”솔직하게 얘기하면 막내에게 더 마음이 가는 건 사실이었다.하지만 하도연이나 다른 자식들에게도 너그럽게 베풀면서 막내에게만 양보하고 막내만 아껴주라고 할 수는 없었다.하도연은 별말 없이 두 남동생에게 물었다. “그럼 난 그린 빌라 별장 하나 보탤게.”“그럼 난 그린 빌라 별장 하나 보탤게.”하지훈과 하희민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말이 떨어지자마자 두 당사자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특히나 하지훈을 향해 놀라운 시선을 보냈지만 그가 먼저 하희민에게 말했다.“내가 막내에게 주는 선물인데 왜 이래? 왜 말도 없이 같은 걸 준비해.”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하희민이 드물게 웃음을 터뜨렸다.“너처럼 아직 연차도
“난 이제 엄마가 없어.”어린 온채아는 울음이 터질 것 같은지 입술을 움찔하더니 미소를 지었다. 온채아는 성유준의 손을 잡고 밖으로 뛰어가 하늘의 별을 가리키며 말했다. “엄마는 아빠랑 같이 하늘의 별이 됐어. 매일매일 채아를 지켜보고 계신대.”“오빠네 엄마 아빠도 분명 오빠를 지켜보고 계실 거야.”온채아는 떠나기 전 남은 사탕 한 알마저 성유준의 손에 쥐여주었다. 성유준이 물었다. “너 먹을 사탕은 있어?”“없어.”온채아는 고개를 저으며 조그만 머리를 치켜들고 말했다. “하지만 난 이제 필요 없어.”성유준은 나중에
게다가 몇 년 전부터 이미 약물 연구 개발을 시작해 왔다. 명안 한의원의 제품들은 현장에 있던 많은 사람이 사용해 봤고, 심지어 집에 상비해 두기도 했다.심서정과 소원희는 허를 찔려 더 안절부절못했다....그녀가 의학을 배운 지 이미 이렇게 오래되었다니, 명안 한의원의 약들이 그녀가 개발한 것이라니, 게다가 여승운의 제자라니!소원희는 눈앞이 캄캄해져 기절할 뻔했고, 성탁수가 재빨리 그녀를 부축했다. 심서정의 얼굴도 핏기 없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끝났어, 모두 끝났어.’하지만 심서정은 여전히 굴복하고 싶지 않아서, 이를
심서정의 이 말은 오히려 현장에 있던 사람들 마음속에도 약간의 의혹을 불러일으켰다.이 약은 많은 제약 회사가 거금을 투자하면서도 지금까지 연구 개발하지 못한 것인데 뜻밖에도 한 소녀가 개발해 냈다.비록 비용은 많이 들었지만, 약효는 실질적으로 훌륭했다.이는 어느 제약 회사가 연구 개발하든 앞으로 수십 년간 확고한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온채아는 눈을 살짝 치켜뜨며 당황하지 않고 물었다.“무슨 속임수가 있다고 생각하시나요?”그녀는 스스로 이 프로젝트에 대해 마음에 부끄럽지 않다고 생각했기에 두려워할 것도 없었다.온채아
식사를 마치자 성유준은 누가 내쫓기라도 하듯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이 늦었어. 하루 종일 고생했을 텐데 일찍 쉬어.” 그 말을 남기고는 주율천이 눈치가 있든 없든 상관없다는 듯 먼저 집을 나섰다.성유준이 그 정도로 말했으니 주율천 역시 더 머물 처지가 못 되었다. 주율천은 식기들을 식기세척기에 넣는 것을 도와준 뒤 말했다. “나도 이만 가볼게.” 주율천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는 진지한 눈빛과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축하한다는 말을 깜빡할 뻔했네. 이제 네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게 된 거 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