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제7화

작가: 락희
평소처럼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주율천은 심장이 뭔가에 찔린 듯 찌릿했다.

주율천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갑자기 왜 버려? 평소 이 웨딩드레스를 엄청 아꼈잖아.”

온채아는 부정하지 않았다.

지난 3년간 그녀는 옷장에 특별히 자리를 마련해 웨딩드레스를 걸어두었고 매년 세탁소에 보내 관리하기도 했다.

그렇게 아낀 이유는 인생에서 결혼이 한 번뿐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웨딩드레스를 당연히 기념으로 잘 간직해야지.

하지만 지금은 이혼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다. 주율천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할지도 모르는데 남겨둬서 뭘 하겠는가?

웨딩드레스는 그녀처럼 이 집에서 불필요한 존재였다.

온채아가 웃으며 말했다.

“망가졌어요. 큰 구멍이 난 걸 며칠 전에 봤지 뭐예요?”

“그렇다고 그냥 이렇게 버려?”

주율천은 그녀가 억지로 웃는 모습을 보고 아쉬워한다고 생각했다.

“그럼 이렇게 하자. 웨딩드레스 가게에 연락해서 고칠 수 있는지 물어볼게...”

“괜찮아요.”

온채아는 고개를 젓고는 주율천을 똑바로 쳐다봤다.

“이미 망가진 건 고칠 수 없어요.”

그녀가 말한 건 사람의 마음이었고 이 결혼이었다.

말을 마친 온채아는 주율천이 뭐라 더 말하기 전에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걸음이 어딘가 이상한 걸 보고서야 주율천은 마침내 생각난 듯 성큼성큼 다가갔다.

“또 다쳤어? 이삼일이나 지났는데 왜 아직도 절뚝거려?”

‘이제야 관심을 보여? 그런데 너무 늦었어.’

주율천이 죄책감이라도 느끼게 하려고 온채아는 고개를 숙이고 솔직하게 말했다.

“원래 거의 나았는데 어젯밤 성씨 본가의 눈밭에서 무릎을 네 시간 꿇었어요.”

“뭐?”

주율천은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 붉게 부은 그녀의 손바닥을 본 순간 눈빛이 급격하게 흔들렸다.

“손은 또 왜...”

온채아가 눈을 깜빡였다.

“맞았어요.”

목소리가 차분하기 그지없었고 억울한 기색조차 없었다.

주율천이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렇게 오래 꿇었어? 그리고...”

더 생각하기가 두려웠다.

‘채아 그래도 성씨 가문의 아가씨 아니었어? 한 번 다녀왔는데 왜 이렇게 심하게 다친 거야?’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던 온채아는 한때 온 마음을 다해 그와 결혼하고 싶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땐 정말로 주율천과 백년해로할 꿈을 꿨었다.

온채아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마음속 씁쓸함을 억누르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빠가 같이 안 갔으니까요.”

주율천이 마음속의 불쾌함을 애써 참으며 말했다.

“지금 웃음이 나와? 안 아파?”

“아파요.”

온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젠 익숙해요.”

“익숙하다고?”

“네.”

온채아는 손바닥을 만지면서 마치 남의 일처럼 덤덤하게 말했다.

“오빠가 같이 안 가면 늘 이렇게 맞았어요.”

사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소원희는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녀에게 벌을 내리곤 했다. 자갈이 깔린 그곳은 온채아를 위해 특별히 만든 곳이었다.

성씨 가문에 온 지 1년도 안 됐을 무렵 고작 여섯 살밖에 안 된 그녀는 무릎을 꿇는 법을 배웠다. 어떻게 꿇어야 소원희가 만족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무릎, 종아리, 발등이 자갈과 완벽히 맞닿아 일직선을 이루어야 했다.

주율천은 몸을 숙여 온채아의 긴 치마를 살짝 들추었다. 무릎이 심하게 부어 있었고 커다란 멍이 퍼져 있었다.

종아리 피부도 온전한 곳 없이 온통 피멍이었다. 피부가 하얗고 부드러워 상처가 더욱 끔찍해 보였다.

이틀 전 심서정의 살짝 붉어진 무릎과는 그야말로 비교도 안 될 정도였다.

분노가 치밀어 오른 주율천은 온채아를 번쩍 안아 소파에 앉힌 뒤 얼굴을 찌푸렸다.

“이렇게 맞았는데 왜 나한테 전화 안 했어?”

주씨 가문과 성씨 가문이 예전에는 막상막하였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성유준이 성씨 가문을 맡아 과감한 개혁을 진행한 끝에 두 가문의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율천의 아내를 이렇게 함부로 괴롭혀도 되는 정도는 아니었다.

온채아는 맑은 눈동자로 그를 보면서 일부러 말했다.

“아까 갈 때 급한 일 있다고 했잖아요. 중요한 일인 것 같아서 방해하고 싶지 않았어요.”

주율천은 할 말을 잃었다.

그러다가 문득 심서정의 맞선을 막으러 간 바람에 온채아가 이렇게 다친 거라면 끝까지 온채아를 버리고 갔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망설이다가 고개를 들었는데 온채아의 순하고 얌전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주율천은 가슴이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 약상자를 가져와 약을 발라주며 다정하게 물었다.

“전에 맞았을 때 왜 한 번도 나한테 말 안 했어?”

온채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때 그녀는 진심으로 주씨 가문의 둘째 안주인 역할을 잘하고 싶었고 주율천이 좋은 반쪽이 되어줄 거라 믿었다.

사람들의 눈에 성씨 가문은 온채아의 친정이나 다름없었다. 누가 자기 남편 앞에서 친정이 얼마나 혹독하게 대했는지 말하겠는가?

그녀는 어리석지 않았고 남편이 그녀를 별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며칠 전에 깨달았다. 별로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아예 사랑한 적조차 없었다는 것을.

다행히 온채아는 누구의 사랑에 의지해 살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온채아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가 나 때문에 성씨 가문이랑 껄끄러워지는 게 싫어서요. 어쨌거나 은성 그룹이 성씨 가문이랑 계속 협력해야 하잖아요.”

진실을 얘기할 수 없었던 그녀는 그저 진심을 담아 둘러댔다.

온채아의 말에 주율천은 목구멍에 뭔가 막힌 듯 말을 잇지 못했고 그녀에게 너무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이해심이 그녀에게 상처를 주는 구실이 돼서는 안 되었다.

주율천은 마음속의 답답함을 억누르려고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온채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달랬다.

“미안해. 이번엔 내가 잘못했어. 결혼기념일도 같이 보내지 못했고. 뭐 갖고 싶은 거 없어? 꼭 사줄게.”

집, 차, 보석, 가방, 뭐든지 다 사줄 생각이었다. 지금까지 온채아에게 돈은 아낌없이 썼다.

“음...”

온채아는 잠시 생각하다 맑고 고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오빠한테 준 생일 선물을 좋아했으면 좋겠어요.”

“그게 다야?”

“네.”

온채아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스무 살 때 온채아의 생일 소원은 주율천과 결혼하는 것이었지만 스물넷이 된 그녀의 소원은 주율천과 깔끔하게 헤어지는 것이었다.

주율천의 진지한 눈빛과 마주친 순간 온채아는 마음이 약간 찔렸다. 그런데 그때 주율천의 핸드폰이 울렸다.

일반 벨 소리와 다른 전용 벨 소리였다.

온채아가 화면을 힐끗 봤는데 발신자는 역시나 심서정이었다.

주율천이 전화를 받았다. 상대가 무슨 말을 했는지 굳은 얼굴로 벌떡 일어섰다.

“많이 다쳤어? 어쩌다가 발을 삐끗한 거야? 기사님을 부를 거지, 왜 혼자 가고 그래? 위치 보내. 지금 바로 갈게.”

그러고는 바로 나가려 했다. 그런데 온채아에게 약을 발라주던 중이라 약 묻은 면봉을 보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온채아는 면봉을 받아들고 배려 깊게 말했다.

“내가 알아서 바를게요. 바쁜 일 있으면 가봐요.”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준다는 말이 있었지만 온채아의 인생은 달랐다.

울고불고 떼를 쓰면 떡은커녕 그녀를 기다리는 건 가문의 징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언젠가 스스로 떡을 살 수 있을 거라고. 그것도 아주 많이.

“그래...”

주율천이 안도하면서 변명을 덧붙였다.

“서정이가 다쳤대. 밖에서 혼자 아이를 케어하기 힘드니까 아무래도 가봐야 할 것 같아.”

그러고는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 온채아가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오빠는 왜 형님을 형수님이라 부르지 않아요? 한 번도 못 들어본 것 같아서요.”
이 책을.
QR 코드를 스캔하여 앱을 다운로드하세요

최신 챕터

  • 이제 와서 빌어? 나 임신했어!   제356화

    임지연은 잠시 멈칫했다.‘이렇게 공과 사를 잘 구분하는 사람이었나?’성유준의 안색이 썩 좋지 않았다.“그럼 내가 불러?”임지연은 어이가 없었다.‘딱 봐도 싸웠네.’별수 없이 사무실을 나서며 온채아에게 전화를 걸어 얼른 오라고 전했다.온채아가 전화를 끊으려 할 때 임지연은 다시 한마디를 덧붙였다.“조심해. 대표님 오늘 기분이 별로인 것 같아.”“알았어요.”온채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피드백 데이터를 손에 들고 사무실로 올라갔다.대표 사무실 앞에 도착하고선 숨을 한번 깊이 들이쉬고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들어와.”안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온채아는 눈을 살짝 내리깐 후 문을 열고 들어가 성유준에게 다가갔다. 곧이어 서류를 테이블에 내려놓고선 차분하고 단호하게 얘기했다.“이건 방금 피드백이 온 데이터예요. 예상한 것보다 결과가 좋아서 조금 더 지켜본 후 문제가 없다면 출시 준비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온채아는 거의 화장을 하지 않았고 연한 색의 실크 블라우스와 검은색 치마를 입고 있었다. 치마 끝은 종아리까지 내려갔고 직장인으로서의 단정한 느낌은 그녀의 단호함을 한층 더 부각했다.작은 얼굴에선 그 어떤 표정 변화도 없었고 심지어 성유준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않았다.그 모습을 보고 화가 치밀어 오른 성유준은 비웃는듯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주율천이랑 얘기할 때도 이런 태도야?”온채아는 미간을 찡그리며 무의식적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성유준이 주율천보다 실력이 좋은 건 익히 알고 있었다. 당연히 다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터라 성유준 얼굴에 생긴 멍을 본 순간 흠칫 놀랐다.조각 같은 얼굴에 생긴 시퍼런 멍은 유난히 더 눈에 띄었다.신경 쓰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둘밖에 없으니까 반말해도 되지? 주율천이 때린 거야?”“맞아. 걔가 날 때렸어.”성유준은 마치 이 질문을 할 때까지 기다렸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날 때렸는데 그래도 재혼할 거야?”불쌍한 척이라도 하

  • 이제 와서 빌어? 나 임신했어!   제355화

    정말이지 듣기 거북한 말이었다. 듣는 이의 귓가가 찢어질 만큼 날카롭고 모질었다.하지만 정다슬은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 가볍게 벽에 몸을 기대고는 붉은 입술을 부드럽게 말아 올렸다.“내가 어떤 신분으로 물어야 성심성의껏 대답해주시겠어요? 원하시는 대로 할게요.”그는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마음대로 생각하라지.하지훈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그 질문을 그대로 되돌려 던졌다.“어떤 신분으로 물어야 내가 성심성의껏 대답할 것 같아요?”“그럼 전 여자친구로 할게요.”정다슬은 무심한 듯 웃었다. 적당히 힘을 뺀 표정이 오히려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이었다.“당신은 늘 장현진을 못마땅해했잖아요, 그렇죠?”그녀와 장현진은 그야말로 죽마고우였다. 같은 골목길에서 태어나고 자라, 기억력만 좋았다면 서로의 엉덩이까지 기억했을 것이다.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단 한 번도 떨어져 본 적이 없었다.대학 시절 정다슬이 하지훈과 막 사귀기 시작해 아직 장현진에게는 알려주지 않았을 때였다. 장현진은 아무것도 모르고 여자 기숙사 앞에서 노래까지 부르며 그녀에게 고백했었다.그녀는 바로 단호하게 거절했고 둘은 계속 친한 친구로 지내자고 약속했다.하지만 하지훈만은 그 둘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장현진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며 두 사람이 사적으로 만나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았다.지금 그녀가 굳이 그 이야기를 꺼내자 하지훈은 또다시 폭발할 뻔했다.“내가 그 자식 싫어하는 거 알면서 계속 연락해왔단 말이에요?”“하지훈 도련님.”정다슬은 웃음이 나오는 걸 간신히 누르며 말했다.“우린 이미 오래전에 헤어졌어요. 제가 몇 년 됐는지 세어드릴까요?”곧 있으면 6년이다.온채아와 성유준이 다시 만나지 않았다면 그녀와 하지훈이 다시 엮일 일도 없었을 것이다.하지훈은 비웃듯 입꼬리를 비틀었다.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그럼 내가 상기시켜줄까요? 우리가 헤어지고 난 다음 장현진과 애매한 관계를 유지했잖아요.”짝!정다슬의 손이 번개처

  • 이제 와서 빌어? 나 임신했어!   제354화

    그가 대꾸할 사이도 없이, 성유준에게 영상 통화가 걸려왔다.성유준은 나른한 표정으로 전화를 받았다.“대낮에 무슨 일이야.”입원 병동에서 막 나온 하지훈이 한 손을 의사 가운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말했다.“너 다쳤다길래 문안 좀 하려고 전화했지.”성유준의 목소리에는 냉기가 서려 있었다.“문안이 아니라 구경하는 거 아니고?”“...쿨럭.”하지훈은 정곡을 찔리고 말았다. 그는 성유준의 광대에 들어있는 멍을 보고는 말했다.“채아 엄청 마음 아파하겠는데?”...왜 하나같이 이 모양인지. 남의 속도 모르고.온채아는 어젯밤 그가 주율천과 싸웠다는 걸 알면서도 한 통의 메시지도 보내지 않았다.오늘 아침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려보려 했지만 정다슬이 말하길 그녀는 아침 일찍 이미 나갔다고 했다.일에 대한 열정은 참으로 대단했다.성유준은 짜증이 치밀어올라 쏘아붙였다.“다른 일 없지? 없으면 끊어.”하지훈이 어찌 성유준을 놀릴 이런 절호의 기회를 쉽게 놓치겠는가.“채아 아직도 너 무시하고 있어?”“...”성유준이 말하려던 순간, 하지훈은 무언가를 봤는지 영상을 그대로 끊어버렸다.3초 뒤, 문자가 도착했다.[나 채아 친구 봤어. 기다려. 내가 널 위해 이 한 몸 희생해 색기 한번 부려서 정보 캐올게.]성유준은 웃음이 터질 뻔했다.대체 누구를 위해 희생한다는 건지, 그쪽에서 그의 ‘색기’를 반기기나 할지.참으로 희한했다.정다슬은 어딘가 조급해 보였다. 병동에 들어오자마자 곧바로 엘리베이터로 향했고 날 선 하이힐 소리와 함께 스커트 자락이 바람에 흔들렸다.하지훈이 뒤쫓았지만 놓치고 말았다.다행히 개인 병원이라 환자가 상대적으로 적었기에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사람 또한 드물었다.하지훈은 엘리베이터가 멈추는 층을 확인한 뒤 위로 올라갔다.그가 오자 간호사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하 선생님, 진료실로 안 돌아가시나요? 혹시 뭐 두고 가셨어요?”“아니요.”그는 카운터에 손을 올린 뒤 복도를 바라보며 물었다.“조금 전 빨간 원피스

  • 이제 와서 빌어? 나 임신했어!   제353화

    온채아는 오전 진료를 마친 뒤 간단히 끼니를 때우고 바로 연구원으로 향했다.오늘은 시험 약물의 1차 피드백 데이터가 나오는 중요한 날이었다.“채아야, 데이터 나왔어!”연구원에 들어서고 가방을 내려놓은 순간 강태무가 환하게 웃으며 뛰어 들어왔다. 그러나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곧바로 웃음을 거두었다.마침 돌아서던 전윤호가 그 표정을 보고는 웃으며 말했다.“강 원장님, 데이터 어때요? 온 팀장님과 원장님이 미리 예측하신 대로 나왔죠?”“어딜요, 전혀요.”강태무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차이가 너무 커요. 피시험자 상태가 다 이상적이지 않아요.”온채아의 미간이 좁혀졌다.“자료 좀 줘봐요.”그녀는 서류를 받아들고 그중 한 장을 훑어보았다. 그녀의 얼굴 역시 어둡게 내려앉았다.전윤호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위로할 말을 찾던 찰나, 돌연 휴대폰이 울렸다.발신자를 확인한 그는 곧바로 긴장한 채 밖으로 나가며 전화를 받았다.“어머니, 낮에는 일해야 한다고 했잖아요.”아무도 없는 비상 통로로 들어온 그는 슬쩍 녹음 버튼을 누르고 목소리를 낮췄다.“이쪽 데이터 나왔습니다. 확실히 좋지 않습니다.”전화기 너머 심서정은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실망 섞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별로라고? 피실험자들 부작용은 어때?”온채아가 임상 신청서에 올린 데이터는 전윤호가 미리 조작해둔 상태였다.때문에 요즘 피시험자들에게 강한 부작용이 시작되어야 마땅하다.전윤호는 고개를 저었다.“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강 원장님과 온 팀장님 표정이 아주 안 좋더라고요.”“그래.”심서정의 얼굴에 어려있던 긴장감이 천천히 풀려나갔다.“좀 더 확실하게 알아봐.”만약 온채아 측에서 이 부정적 데이터를 덮으려 한다면, 그녀는 모든 걸 세상에 까발릴 생각이었다.그렇게만 된다면 온채아는 과학계에 더는 발도 붙이지 못할 것이다.전윤호가 멀리 사라진 뒤에야 강태무는 온채아와 눈을 맞추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축하해. 데이터가 아주 좋아. 네가 예상한 그대로고.

  • 이제 와서 빌어? 나 임신했어!   제352화

    용씨 가문과 깊게 엮이는 순간 인생은 끝장이다.주율천은 경원으로 돌아가 간단히 씻고 곧장 회사로 향했다.그가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담결이 뒤따라와 보고했다.“대표님, 그놈들 오늘 아침 출소했습니다. 그런데...”주율천이 미간을 좁혔다.“사고 났어?”“네.”담결의 목소리엔 어딘지 모를 홀가분함이 묻어 있었다.“해성 대교를 지나던 중 차량이 통제 불가 상태로 추락했습니다. 지금까지 시신 다섯 구가 인양됐습니다.”총 여덟 명.만약 전원이 죽었다면 온채아도 잠시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성씨 가문 권력은 거의 전부 성유준의 손에 쥐어져 있으니, 늙은이는 고작 온채아에게 화를 내는 것밖에 하지 못할 것이다.하지만 주율천의 생각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오히려 더 굳어졌다.“경찰 쪽 상황 계속 확인해. 여덟 구 전부 인양돼 대조 완료되기 전엔 절대 안심하지 마.”그는 무언가 께름칙한 기분이었다.그렇게 허술한 놈들일 리가 없다. 20년 동안이나 감옥에서 버텼는데 나오자마자 사고로 죽는다고?무언가 떠오른 주율천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성씨 가문 본가 쪽 움직임도 눈여겨봐.”“성씨 가문 본가요?”담결의 목소리가 떨어지자마자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민은하였다.“요즘 왜 이렇게 바쁜 거야? 얼굴 보기도 힘들어. 대체 뭘 하고 있어?”그녀는 오늘 어렵게 골라온 명문가 규수 하나를 그에게 소개해 볼 생각으로 찾아온 것이었다.그런데 문 앞에서 아들의 성씨 가문을 주시하라는 말을 들은 순간 침착함을 잃어버렸다.주율천은 냉랭한 얼굴로 말했다.“제가 일일이 보고해야 하는 건가요? 결혼에 끼어들더니 이젠 회사 일까지 참견하시려고요?”“...”다른 사람 앞에서 이렇게 면박을 주니 민은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다행히 눈치 빠른 담결이 먼저 빠져나갔다.“대표님,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문이 닫히고 난 뒤, 민은하는 얼굴을 굳힌 채 말했다.“너 설마 온채아를 돕기 위해 성씨 가문과 맞서는 거야? 주율천, 너 제정신이야?

  • 이제 와서 빌어? 나 임신했어!   제351화

    심서정은 그가 주율천의 친구들 중에서 자신을 가장 못마땅해하는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지금 이곳에 온 목적도 있기에 끓어오르는 화를 억누르고 직원 한 명을 불러와 도움을 청했다.차에 오른 뒤, 심서정은 뒷좌석에서 곤히 잠든 주율천을 백미러 너머로 한번 바라보고는 근처의 오성급 호텔로 향했다.다음 날 정오.주율천은 머리가 깨질 듯한 통증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 관자놀이를 문지르려 팔을 들려던 순간, 자신의 팔이 무언가에 깔려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김현우, 당장 일어나.”짜증 섞인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옆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자신의 곁에 누워 있는 이가 심서정이라는 걸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와 심서정 두 사람 모두 거의 옷을 걸치지 않고 있었다.심서정의 눈동자엔 애틋함이 어려있었다.“율천아...”주율천은 곧바로 그녀를 멀리 밀쳐내고는 벌떡 일어나 셔츠와 바지를 입으며 분노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왜 여기에서 자고 있어?”심서정은 하마터면 침대에서 굴러떨어질 뻔했다.“나 어젯밤 술집에 널 데리러 갔었어. 집에 가는 길에 네가 토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가까운 호텔로 온 거야.”주율천의 관자놀이가 툭툭 튀어 올랐다.“네가 왜 날 데리러 와? 누가 오라고 했는데?”“난...”심서정은 울먹거리며 진실과 거짓말을 적당히 섞어 말했다.“그게... 친구가 술집에서 널 봤는데 너무 취한 것 같다고 말해줬어. 걱정돼서 가봤지.”주율천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럼 지금 이건 뭐야? 날 걱정했다면서, 내 침대엔 왜 올라와 있어?”“그게 아니라...”심서정이 무안함과 수치심이 뒤섞인 얼굴로 더듬거렸다.“어젯밤에 네가 나를 온채아로 착각해서...”그건 그녀가 미리 준비해둔 가장 ‘그럴듯한’ 이유였다.주율천의 이마에 핏줄이 선명히 떠올랐다.“그래서... 내가 널 건드렸다는 거지?”심서정은 시선을 떨구며 고개를 끄덕였다.“응...”“그래...”주율천은 이를 악문 채 허리띠를 잠그며 믿기 어려울 만큼

더보기
좋은 소설을 무료로 찾아 읽어보세요
GoodNovel 앱에서 수많은 인기 소설을 무료로 즐기세요! 마음에 드는 책을 다운로드하고, 언제 어디서나 편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앱에서 책을 무료로 읽어보세요
앱에서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세요.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