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7화

Author: 락희
평소처럼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주율천은 심장이 뭔가에 찔린 듯 찌릿했다.

주율천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갑자기 왜 버려? 평소 이 웨딩드레스를 엄청 아꼈잖아.”

온채아는 부정하지 않았다.

지난 3년간 그녀는 옷장에 특별히 자리를 마련해 웨딩드레스를 걸어두었고 매년 세탁소에 보내 관리하기도 했다.

그렇게 아낀 이유는 인생에서 결혼이 한 번뿐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웨딩드레스를 당연히 기념으로 잘 간직해야지.

하지만 지금은 이혼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다. 주율천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할지도 모르는데 남겨둬서 뭘 하겠는가?

웨딩드레스는 그녀처럼 이 집에서 불필요한 존재였다.

온채아가 웃으며 말했다.

“망가졌어요. 큰 구멍이 난 걸 며칠 전에 봤지 뭐예요?”

“그렇다고 그냥 이렇게 버려?”

주율천은 그녀가 억지로 웃는 모습을 보고 아쉬워한다고 생각했다.

“그럼 이렇게 하자. 웨딩드레스 가게에 연락해서 고칠 수 있는지 물어볼게...”

“괜찮아요.”

온채아는 고개를 젓고는 주율천을 똑바로 쳐다봤다.

“이미 망가진 건 고칠 수 없어요.”

그녀가 말한 건 사람의 마음이었고 이 결혼이었다.

말을 마친 온채아는 주율천이 뭐라 더 말하기 전에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걸음이 어딘가 이상한 걸 보고서야 주율천은 마침내 생각난 듯 성큼성큼 다가갔다.

“또 다쳤어? 이삼일이나 지났는데 왜 아직도 절뚝거려?”

‘이제야 관심을 보여? 그런데 너무 늦었어.’

주율천이 죄책감이라도 느끼게 하려고 온채아는 고개를 숙이고 솔직하게 말했다.

“원래 거의 나았는데 어젯밤 성씨 본가의 눈밭에서 무릎을 네 시간 꿇었어요.”

“뭐?”

주율천은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 붉게 부은 그녀의 손바닥을 본 순간 눈빛이 급격하게 흔들렸다.

“손은 또 왜...”

온채아가 눈을 깜빡였다.

“맞았어요.”

목소리가 차분하기 그지없었고 억울한 기색조차 없었다.

주율천이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렇게 오래 꿇었어? 그리고...”

더 생각하기가 두려웠다.

‘채아 그래도 성씨 가문의 아가씨 아니었어? 한 번 다녀왔는데 왜 이렇게 심하게 다친 거야?’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던 온채아는 한때 온 마음을 다해 그와 결혼하고 싶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땐 정말로 주율천과 백년해로할 꿈을 꿨었다.

온채아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마음속 씁쓸함을 억누르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빠가 같이 안 갔으니까요.”

주율천이 마음속의 불쾌함을 애써 참으며 말했다.

“지금 웃음이 나와? 안 아파?”

“아파요.”

온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젠 익숙해요.”

“익숙하다고?”

“네.”

온채아는 손바닥을 만지면서 마치 남의 일처럼 덤덤하게 말했다.

“오빠가 같이 안 가면 늘 이렇게 맞았어요.”

사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소원희는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녀에게 벌을 내리곤 했다. 자갈이 깔린 그곳은 온채아를 위해 특별히 만든 곳이었다.

성씨 가문에 온 지 1년도 안 됐을 무렵 고작 여섯 살밖에 안 된 그녀는 무릎을 꿇는 법을 배웠다. 어떻게 꿇어야 소원희가 만족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무릎, 종아리, 발등이 자갈과 완벽히 맞닿아 일직선을 이루어야 했다.

주율천은 몸을 숙여 온채아의 긴 치마를 살짝 들추었다. 무릎이 심하게 부어 있었고 커다란 멍이 퍼져 있었다.

종아리 피부도 온전한 곳 없이 온통 피멍이었다. 피부가 하얗고 부드러워 상처가 더욱 끔찍해 보였다.

이틀 전 심서정의 살짝 붉어진 무릎과는 그야말로 비교도 안 될 정도였다.

분노가 치밀어 오른 주율천은 온채아를 번쩍 안아 소파에 앉힌 뒤 얼굴을 찌푸렸다.

“이렇게 맞았는데 왜 나한테 전화 안 했어?”

주씨 가문과 성씨 가문이 예전에는 막상막하였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성유준이 성씨 가문을 맡아 과감한 개혁을 진행한 끝에 두 가문의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율천의 아내를 이렇게 함부로 괴롭혀도 되는 정도는 아니었다.

온채아는 맑은 눈동자로 그를 보면서 일부러 말했다.

“아까 갈 때 급한 일 있다고 했잖아요. 중요한 일인 것 같아서 방해하고 싶지 않았어요.”

주율천은 할 말을 잃었다.

그러다가 문득 심서정의 맞선을 막으러 간 바람에 온채아가 이렇게 다친 거라면 끝까지 온채아를 버리고 갔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망설이다가 고개를 들었는데 온채아의 순하고 얌전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주율천은 가슴이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 약상자를 가져와 약을 발라주며 다정하게 물었다.

“전에 맞았을 때 왜 한 번도 나한테 말 안 했어?”

온채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때 그녀는 진심으로 주씨 가문의 둘째 안주인 역할을 잘하고 싶었고 주율천이 좋은 반쪽이 되어줄 거라 믿었다.

사람들의 눈에 성씨 가문은 온채아의 친정이나 다름없었다. 누가 자기 남편 앞에서 친정이 얼마나 혹독하게 대했는지 말하겠는가?

그녀는 어리석지 않았고 남편이 그녀를 별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며칠 전에 깨달았다. 별로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아예 사랑한 적조차 없었다는 것을.

다행히 온채아는 누구의 사랑에 의지해 살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온채아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가 나 때문에 성씨 가문이랑 껄끄러워지는 게 싫어서요. 어쨌거나 은성 그룹이 성씨 가문이랑 계속 협력해야 하잖아요.”

진실을 얘기할 수 없었던 그녀는 그저 진심을 담아 둘러댔다.

온채아의 말에 주율천은 목구멍에 뭔가 막힌 듯 말을 잇지 못했고 그녀에게 너무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이해심이 그녀에게 상처를 주는 구실이 돼서는 안 되었다.

주율천은 마음속의 답답함을 억누르려고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온채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달랬다.

“미안해. 이번엔 내가 잘못했어. 결혼기념일도 같이 보내지 못했고. 뭐 갖고 싶은 거 없어? 꼭 사줄게.”

집, 차, 보석, 가방, 뭐든지 다 사줄 생각이었다. 지금까지 온채아에게 돈은 아낌없이 썼다.

“음...”

온채아는 잠시 생각하다 맑고 고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오빠한테 준 생일 선물을 좋아했으면 좋겠어요.”

“그게 다야?”

“네.”

온채아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스무 살 때 온채아의 생일 소원은 주율천과 결혼하는 것이었지만 스물넷이 된 그녀의 소원은 주율천과 깔끔하게 헤어지는 것이었다.

주율천의 진지한 눈빛과 마주친 순간 온채아는 마음이 약간 찔렸다. 그런데 그때 주율천의 핸드폰이 울렸다.

일반 벨 소리와 다른 전용 벨 소리였다.

온채아가 화면을 힐끗 봤는데 발신자는 역시나 심서정이었다.

주율천이 전화를 받았다. 상대가 무슨 말을 했는지 굳은 얼굴로 벌떡 일어섰다.

“많이 다쳤어? 어쩌다가 발을 삐끗한 거야? 기사님을 부를 거지, 왜 혼자 가고 그래? 위치 보내. 지금 바로 갈게.”

그러고는 바로 나가려 했다. 그런데 온채아에게 약을 발라주던 중이라 약 묻은 면봉을 보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온채아는 면봉을 받아들고 배려 깊게 말했다.

“내가 알아서 바를게요. 바쁜 일 있으면 가봐요.”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준다는 말이 있었지만 온채아의 인생은 달랐다.

울고불고 떼를 쓰면 떡은커녕 그녀를 기다리는 건 가문의 징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언젠가 스스로 떡을 살 수 있을 거라고. 그것도 아주 많이.

“그래...”

주율천이 안도하면서 변명을 덧붙였다.

“서정이가 다쳤대. 밖에서 혼자 아이를 케어하기 힘드니까 아무래도 가봐야 할 것 같아.”

그러고는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 온채아가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오빠는 왜 형님을 형수님이라 부르지 않아요? 한 번도 못 들어본 것 같아서요.”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이제 와서 빌어? 나 임신했어!   제711화

    하도연은 그제야 문득 떠올랐다.그때 구민호가 며칠 전부터 시간을 반복해서 확인했었다.이유는 다름 아닌, 구씨 집안 다른 사람들은 시간이 없었고, 구정훈조차 임시로 북영시 출장을 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금씨 가문과 중요한 프로젝트를 논의한다는 소문이었다.전화 목소리가 서운해 보이자, 하도연은 아무리 바빠도 시간을 내어 일정을 조정했다.그래서 이 사진이 남게 된 것이다.다만 최근 2년 동안 그녀는 승승장구하며 각종 업무가 많고 복잡해졌고, 게다가 집안일도 연이어 터져 여유가 없었다.구민호가 재작년에 이미 석사 학위를 받았다는 사실은 그녀의 머릿속에서 잊혀 있었다.늘 어떤 일이든 여유롭게 해내던 하도연은 어색하게 웃으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그러면 앞으로 무슨 계획이야? 해성에 남을 거야? 아니면 북영시로 갈 거야?”“음...”하도연의 전화에 구민호의 기분은 금방 풀렸다. 무언가를 생각했는지 그의 목소리는 온화해졌다.“누나는 나중에 다시 해성으로 돌아올 거야?”“나?”하도연은 잠시 생각했다.“갓 경성으로 발령받았으니, 이변이 없는 한 향후 2년은 여기 있을 것 같아.”성유준은 당분간 경성을 떠날 가능성이 없고, 막내의 생활과 업무 중심도 모두 이곳에 있다.그녀가 경성에 머물러야 막내가 무슨 일을 만났을 때 더 의지할 수 있을 테니까.“아...”구민호는 감정을 알 수 없는 대답을 하며 입술을 깨물었다.“나도 아마 해성에 남지 않을 것 같아. 외할아버지가 계속 회사 경영을 빨리 맡으라고 하시거든.”사실 그는 작년부터 대부분의 시간을 북영시에서 보냈다.다만 무엇 때문에 망설였는지, 외할아버지로부터 금씨 그룹을 넘겨받는 것을 좀처럼 답하지 못하고 있었다.구씨와 금씨의 집안일에 관한 것이니, 곧 이혼하게 될 하도연이 섣불리 조언하기는 어려웠다.“좋네.”“뭐가 좋아?”구민호는 아이처럼 투덜거렸다.“누나, 내가 북영시로 가면 앞으로 밥 한번 사달라고 할 수도 없잖아.”해성과 경성은 그리 멀지 않았다.200킬로, 차로 두 시간 남

  • 이제 와서 빌어? 나 임신했어!   제710화

    하지훈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웃었다.“심심해서 방금 CCTV나 좀 훑어봤지.”웃긴 건, 하씨 가문 사람 중에 휴대폰에 집안 보안 시스템을 연동해 놓은 사람은 유독 그뿐이라는 거였다. 그 이유 또한 지극히 당당했다. 막내가 언제 집에 돌아왔는지 제때 알려주지 못할까 봐 미리 대비한 것이라고.하지만 그날은 하도연이 집에 없었기에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그 설명을 듣고서야 하도연의 얼굴빛이 조금 누그러졌다.“나도 나서기 힘든 판에, 너는 더더욱 안돼. 자칫 힘 있는 자가 약자를 괴롭힌다는 말거리나 잡힐 수 있어.”하지훈의 평소 평판으로 봐서, 남들이 괜한 트집을 잡기엔 너무나 좋은 먹잇감이기는 했다.하지만 하지훈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나는 원래부터...”“원래부터 뭐?”하도연이 그의 말을 막아서며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일렀다.“지훈아, 지금 너의 언행 하나하나가 한화 그룹을 대표하는 거야. 예전처럼 행동해서는 안 돼.”“알았어.”하지훈은 성의 없이 대답하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누나한테까지 덤비는 놈이 있는데 혼내줄 수도 없으니, 한화 그룹 부대표가 무슨 의미가 있겠어.”“마음에 둔 사람을 아내로 맞이할 때가 되면 의미가 있게 될 거야.”하도연이 드물게 그를 놀리며 받아쳤다.“됐어, 샤워하고 올게. 무슨 일이든 신중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해.”하지훈이 대답하기도 전에 통화는 끊겨버렸다.그는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산더미처럼 쌓인 자료와 서류들을 바라보다가, 해외에 출장 중인 하희민에게 영상 통화를 걸어 괴롭혔다.하희민은 오늘 아침 일찍 F국으로 출장을 떠났다....샤워를 마치고 나온 하도연은 순백색 목욕 가운 하나만 걸친 채였다.그녀는 슬리퍼를 질질 끌며 창가로 다가갔다. 앞마당을 비추는 희미한 노란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테라스로 나가서 고개만 살짝 숙이면, 황아림이 정말 떠났는지 확인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녀는 미닫이 유리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너무 추웠으니까.그 여자가 떠나든 말든, 그녀와

  • 이제 와서 빌어? 나 임신했어!   제709화

    “성이 황씨 라고요?”하도연이 되묻자 가정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오라고 하세요.”구정훈, 아니 구씨 가문이 저질러 놓은 난장판을 수습해 줄 의무는 없었다. 조용히 저녁 식사를 마치는 게 훨씬 중요했다.가정부가 멀어지는 것을 보자 강미진이 물었다.“정훈이 그 비서니?”“네.”어머니 앞이라 숨길 것도 없었다.“정훈 씨랑 비서 사이의 일을 할아버지께 말씀드렸거든요.”하용건 회장에게 알렸다는 건 곧 구씨 가문 어른들이 다 알게 됐다는 뜻이다.완벽한 혼사를 구정훈이 망쳐놓았으니 그 화살은 당연히 황아림을 향했을 것이다. 다만 그녀가 이곳까지 찾아올 줄은 몰랐다.강미진은 언짢은 기색을 내비쳤다.“이런 시국에 널 찾아오다니, 보통 눈치 없는 여자가 아니구나. 안 나가는 게 맞아. 얼른 밥 먹으렴.”그녀는 딸의 접시에 반찬을 얹어주었다. 모녀가 몇 마디 나누기도 전에 가정부가 다시 들어왔다.이번엔 아주 난처한 표정이었다.“아가씨, 그 황아림 씨가 대문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아가씨를 기다릴 테니 볼일 다 보시고 만나주시면 된다고 합니다.”“가서 내 휴대폰 좀 가져와요.”강미진이 거실 쪽을 가리키며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무릎을 꿇으려면 구씨 가문 본가에 가서 꿇을 일이지 우리 집 대문 앞은 왜 찾아와서 저 난리야? 우리가 언제 구박이라도 했어?”가정부가 움직이려 하자 하도연이 제지했다. 오히려 여유롭게 어머니를 달랬다.“무릎 꿇고 있는 건 그 여자인데 엄마가 왜 화를 내세요?”그러고는 가정부에게 지시했다.“뒤쪽으로 가서 서진이 좀 불러와요.”서진은 영문도 모른 채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타났다.“아가씨, 그 황 비서가 왜 우리 집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겁니까?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대답도 안 하던데요.”“신경 쓰지 마.”하도연의 입가에 차가운 기운이 서렸다.“너는 오늘 밤부터 언론 쪽 동향만 잘 살펴. 누가 이 일을 빌미로 기사를 크게 터뜨리지 못하게 말이야.”설령 황아림에게

  • 이제 와서 빌어? 나 임신했어!   제708화

    하지만 하도연은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이혼하는 마당에 굳이 스스로 걸림돌을 놓을 생각은 없었다.구씨 가문의 후계자 자리가 가진 무게가 너무 무거웠으니까.아무리 구정훈이 겉으로는 태연한 척해도 그 자리를 쉽게 내려놓을 사람은 아니었다.“당신의 어리석음을 가려줄 의무 나한테 없다는 거예요.”말을 마친 하도연은 가차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그렇다. 이건 어리석은 짓이었다.‘구정훈은 대체 무엇을 믿고 자신이 참고 넘어갈 거로 생각한 걸까?’그가 이혼 사실을 하용건 회장에게 찔렀다면 자신은 이혼 사유를 구씨 가문에 알리는 것이야말로 공평한 것이다.그는 아직 하도연에게 희생을 요구할 자격이 없었다.침실로 들어온 하도연은 소파 위로 휴대폰을 던지려다 전화를 끊기 전 구민호가 할 말이 있었던 것 같아 슬쩍 카톡을 확인했다.쌓여 있는 안 읽은 문자 중에 그의 것은 없었다. 딱히 중요한 용건은 아니었던 모양이다.어제 주식 양도 문제로 밤을 거의 꼬박 새우다시피 했다. 하용건이나 하선호 쪽 모두 쇠뿔도 단김에 빼듯 몰아붙여야 했다.그렇지 않으면 언제 마음이 바뀌어 막내가 거액의 지분을 놓치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지금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건 온채아가 결혼하기 전에 최대한 혼전 자산을 챙겨주는 것, 그다음이 이혼이었다.다행히 두 가지 일 모두 순조롭게 풀려가고 있었다.하도연은 가볍게 샤워를 마친 뒤 침대에 눕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도시의 불빛이 창밖을 수놓고 있었다.그녀는 잠귀가 밝고 잠이 짧은 편이라 아무리 피곤해도 서너 시간 정도면 충분했다.똑똑.가정부가 노크 후 문을 아주 살짝 열고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아가씨, 깨셨어요? 사모님께서 아가씨가 위장병 도질까 봐 걱정하시며 저녁 식사를 방으로 올리라고 하셨습니다.”강미진 역시 딸이 피곤하다는 걸 알기에 따로 깨우지 않은 것이다.다만 가정부에게 방안 기척을 잘 살피다 깨는 대로 식사를 챙겨주라고 일러두었다. 불이 켜진 것을 확인한 가정부가

  • 이제 와서 빌어? 나 임신했어!   제707화

    구민호의 어머니는 북영시 명문가 금씨 집안의 외동딸이었다.어릴 때부터 지나치게 귀하게 자라서일까. 결국 사랑 하나 보고 구정훈의 아버지와 재혼을 선택했다.북영시의 쟁쟁한 혼처를 다 마다하고 굳이 구정훈의 새엄마가 되겠다며 고집을 피웠던 것이다.기씨 집안 어르신들은 처음엔 속이 뒤집어졌지만 하나뿐인 귀한 외동딸을 이길 수는 없었다.구민호가 구씨 가문의 후계자 자리를 꿰차지 못한 건 구정훈과 하도연의 정략결혼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본인이 그 자리에 큰 욕심이 없어서이기도 했다.다른 일이었다면 구민호의 지지가 든든했겠지만 이혼 문제에 있어서는...하도연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일단 고마워.”딱히 도움은 안 되더라도 이 살벌한 명문가에서 진심은 귀한 것이니까.그 웃음소리는 해성에 있는 구민호의 귀에 들렸다. 그 웃웃음소리는오늘따라 허탈해 보였다.구민호는 그녀가 이혼 때문에 힘들어한다고 오해했는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누나, 구정훈 그 형은 누나한테 과분해요. 누나는 훨씬 더 좋은 남자를 만날 자격이 있어요.”아직 어려서 그런지, 아니면 다정한 성격 덕분인지 하도연은 다시 한번 웃음이 났다.“그래, 네 말이 맞아.”‘구정훈 이 남자는 구씨 가문 후계자 자리조차 내 도움을 거쳐 얻은 주제에 무슨 자격으로 나와 나란히 한단 말이야?’이번엔 구민호도 하도연의 웃음에서 그녀의 진심과 자부심을 읽어냈다.그의 두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졌다.“아참, 누나 언제 해성으로 돌아와요? 내가 누나한테 맛있는 거...”“미안, 전화가 또 오네. 일단 끊어야겠다.”하도연은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하느라 그가 하는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용건 있으면 문자 남겨줘. 나중에 확인할게.”“네.”구민호는 시원스럽게 대답했지만 가늘고 긴 눈매는 묘하게 위로 휘어 올라가 있었다.하도연이 새로 걸려 온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입을 떼기도 전에 휴대폰 너머로 질책이 쏟아졌다.“내가 분명히 말했지, 황아림이랑은 아무 사이도

  • 이제 와서 빌어? 나 임신했어!   제706화

    담담하게 이어지는 하도연의 말투에는 그 어떤 감정의 동요도 섞여 있지 않았다.개인적인 감정에 휘둘린 것이 아니라 철저히 하씨 가문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두고 내린 결정이라는 사실이 명확히 드러났다.하용건은 그제야 목소리를 조금 가다듬으며 물었다.“다른 방법은 없어? 정훈이가 그리 멍청한 놈은 아니니 네가 직접 나서서 주변 정리를 좀 도와준다고 하면 그 녀석도 군말 없을...”“할아버지.”하도연은 질문에 정면으로 답하는 대신 나직하게 덧붙였다.“아까 정훈 씨가 여기 들어와 있을 때도 그 비서는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어요.”구정훈에게 황아림이 어떤 의미인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정말 할아버지 말씀대로였다면 하도연이 처음 황아림에 대한 불쾌감을 드러냈을 때 구정훈은 진작에 그녀를 더는 눈에 띄지 않게 치웠어야 했다. 이렇게 매번 보란 듯이 하도연의 눈앞에 얼쩡거리게 둘 게 아니라.그 말에 하용건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그는 단호하게 결단을 내렸다.“그래. 이왕 이혼하기로 마음먹었다면 화끈하게 끝내거라. 그놈이 질질 끌면서 네 시간 낭비하게 두지 말고. 다음에 해성으로 돌아가면 바로 이혼 서류 정리하거라.”“네.”할아버지가 동의해 줄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막상 확답을 듣자 하도연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하용건은 서른을 갓 넘긴 손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이 아이에게 늘 다정한 할아버지이기보다는 엄격한 스승에 가까웠다.그 탓에 지금의 하도연이 만들어졌다. 이성적이고 독립적이며 때로는 냉혹할 만큼 결단력 있는 영민한 여자가 되었다.하씨 가문의 주인으로는 완벽했으나 결혼 생활에서는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는 성격이다.하용건은 하도연의 손을 가볍게 다독이며 한숨을 내쉬었다.“집안의 일 때문에 네가 고생이 많구나.”“하지만 구씨 가문 그놈이 정신 못 차리고 있으면 정신 번쩍 들게 해줘야지. 그 집안 형제들 하나같이 만만한 놈들 아니다. 그런 놈들 제치고 정훈이 그놈이 어떻게 후계자 자리를 차지했는지 알아? 다 너와의 혼약 덕

  • 이제 와서 빌어? 나 임신했어!   제59화

    심서정뿐만 아니라 온채아도 당황했다.그녀는 눈을 들어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둘 중 하나를 선택해요. 저 사람들한테 먼저 해명하든지, 아니면 계속 심서정이랑 차를 가지러 가든지.”그녀는 그의 외도를 받아들였고 그들을 위해 해명하는 것도 받아들였다. 하지만 어정쩡한 건 싫었다.그가 이렇게 그녀를 따라가 버리면 다른 사람들 눈에는 심서정이 주씨 가문의 사모님이 된다.그럼 그녀는 뭐가 되는 거지? 남의 가정을 파탄 내는 불륜녀가 되는 것이다.주율천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채아야...”“주 대표님, 나는 바빠서 이만 갈

  • 이제 와서 빌어? 나 임신했어!   제24화

    민은하가 차분히 말을 이었지만 표정이 점점 차가워졌다.“네가 겉으로는 여전히 주씨 가문 사람이니까 성씨 가문도 우리한테 최소한의 체면은 줄 거야.”온채아가 주먹을 꽉 쥐었다. 민은하와 시선을 마주했을 때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사돈 어르신이 정말 널 아꼈다면 그때 네가 한방 병원에 다니는 걸 왜 못 다니게 했겠어?”민은하가 계속 말했다.“네가 성씨 본가에서 돌아올 때마다 걸음걸이가 이상했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어.”그 말에 온채아는 온몸이 굳어버렸고 시선이 멀리 서 있는 오경애에게로 향했다.오경애는 죄책감에 그녀의 눈

  • 이제 와서 빌어? 나 임신했어!   제17화

    온채아는 탑승구에 도착하자마자 강태무를 만났다. 깔끔한 캐주얼 룩을 입고 있었고 늘씬한 키와 준수한 외모가 돋보였다.그도 온채아를 찾고 있었는지 두 사람의 시선이 정확히 마주쳤다.오랜 세월을 알았음에도 맨얼굴의 온채아를 본 순간 그의 눈에 놀라움이 스쳤다. 바로 몇 걸음 다가가 그녀의 백팩을 받아 들었다.손바닥만 한 온채아의 얼굴을 훑어보던 강태무는 또다시 직업병이 도졌다.“요 이틀 병원에서 제대로 못 잤지?”“조금요.”이틀 전 병실에 한 아주머니가 새로 입원했는데 사람은 정말 좋았지만 코 고는 소리가 엄청났다.비행기에

  • 이제 와서 빌어? 나 임신했어!   제15화

    수액 병이 아주 정확히 심서정의 이마로 날아갔다.피가 흘러나오는 속도가 온채아가 오전에 계단에서 굴러떨어졌을 때보다 훨씬 빨랐다.주율천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스치더니 머리보다 몸이 더 빨리 반응했다. 버럭 화를 내면서 온채아를 밀치고는 차갑고 실망한 목소리로 말했다.“뭐 하는 거야? 온채아, 지금까지 보여준 얌전하고 착한 모습이 다 연기였어?”온채아는 바닥에 넘어진 채로 그의 눈을 마주했다.‘그래. 다 연기였어. 이젠 더 이상 연기하고 싶지 않아.’주율천은 온채아가 이 정도 힘도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넘어질 정도로 심하게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