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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Author: 락희
평소처럼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주율천은 심장이 뭔가에 찔린 듯 찌릿했다.

주율천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갑자기 왜 버려? 평소 이 웨딩드레스를 엄청 아꼈잖아.”

온채아는 부정하지 않았다.

지난 3년간 그녀는 옷장에 특별히 자리를 마련해 웨딩드레스를 걸어두었고 매년 세탁소에 보내 관리하기도 했다.

그렇게 아낀 이유는 인생에서 결혼이 한 번뿐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웨딩드레스를 당연히 기념으로 잘 간직해야지.

하지만 지금은 이혼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다. 주율천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할지도 모르는데 남겨둬서 뭘 하겠는가?

웨딩드레스는 그녀처럼 이 집에서 불필요한 존재였다.

온채아가 웃으며 말했다.

“망가졌어요. 큰 구멍이 난 걸 며칠 전에 봤지 뭐예요?”

“그렇다고 그냥 이렇게 버려?”

주율천은 그녀가 억지로 웃는 모습을 보고 아쉬워한다고 생각했다.

“그럼 이렇게 하자. 웨딩드레스 가게에 연락해서 고칠 수 있는지 물어볼게...”

“괜찮아요.”

온채아는 고개를 젓고는 주율천을 똑바로 쳐다봤다.

“이미 망가진 건 고칠 수 없어요.”

그녀가 말한 건 사람의 마음이었고 이 결혼이었다.

말을 마친 온채아는 주율천이 뭐라 더 말하기 전에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걸음이 어딘가 이상한 걸 보고서야 주율천은 마침내 생각난 듯 성큼성큼 다가갔다.

“또 다쳤어? 이삼일이나 지났는데 왜 아직도 절뚝거려?”

‘이제야 관심을 보여? 그런데 너무 늦었어.’

주율천이 죄책감이라도 느끼게 하려고 온채아는 고개를 숙이고 솔직하게 말했다.

“원래 거의 나았는데 어젯밤 성씨 본가의 눈밭에서 무릎을 네 시간 꿇었어요.”

“뭐?”

주율천은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 붉게 부은 그녀의 손바닥을 본 순간 눈빛이 급격하게 흔들렸다.

“손은 또 왜...”

온채아가 눈을 깜빡였다.

“맞았어요.”

목소리가 차분하기 그지없었고 억울한 기색조차 없었다.

주율천이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렇게 오래 꿇었어? 그리고...”

더 생각하기가 두려웠다.

‘채아 그래도 성씨 가문의 아가씨 아니었어? 한 번 다녀왔는데 왜 이렇게 심하게 다친 거야?’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던 온채아는 한때 온 마음을 다해 그와 결혼하고 싶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땐 정말로 주율천과 백년해로할 꿈을 꿨었다.

온채아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마음속 씁쓸함을 억누르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빠가 같이 안 갔으니까요.”

주율천이 마음속의 불쾌함을 애써 참으며 말했다.

“지금 웃음이 나와? 안 아파?”

“아파요.”

온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젠 익숙해요.”

“익숙하다고?”

“네.”

온채아는 손바닥을 만지면서 마치 남의 일처럼 덤덤하게 말했다.

“오빠가 같이 안 가면 늘 이렇게 맞았어요.”

사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소원희는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녀에게 벌을 내리곤 했다. 자갈이 깔린 그곳은 온채아를 위해 특별히 만든 곳이었다.

성씨 가문에 온 지 1년도 안 됐을 무렵 고작 여섯 살밖에 안 된 그녀는 무릎을 꿇는 법을 배웠다. 어떻게 꿇어야 소원희가 만족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무릎, 종아리, 발등이 자갈과 완벽히 맞닿아 일직선을 이루어야 했다.

주율천은 몸을 숙여 온채아의 긴 치마를 살짝 들추었다. 무릎이 심하게 부어 있었고 커다란 멍이 퍼져 있었다.

종아리 피부도 온전한 곳 없이 온통 피멍이었다. 피부가 하얗고 부드러워 상처가 더욱 끔찍해 보였다.

이틀 전 심서정의 살짝 붉어진 무릎과는 그야말로 비교도 안 될 정도였다.

분노가 치밀어 오른 주율천은 온채아를 번쩍 안아 소파에 앉힌 뒤 얼굴을 찌푸렸다.

“이렇게 맞았는데 왜 나한테 전화 안 했어?”

주씨 가문과 성씨 가문이 예전에는 막상막하였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성유준이 성씨 가문을 맡아 과감한 개혁을 진행한 끝에 두 가문의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율천의 아내를 이렇게 함부로 괴롭혀도 되는 정도는 아니었다.

온채아는 맑은 눈동자로 그를 보면서 일부러 말했다.

“아까 갈 때 급한 일 있다고 했잖아요. 중요한 일인 것 같아서 방해하고 싶지 않았어요.”

주율천은 할 말을 잃었다.

그러다가 문득 심서정의 맞선을 막으러 간 바람에 온채아가 이렇게 다친 거라면 끝까지 온채아를 버리고 갔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망설이다가 고개를 들었는데 온채아의 순하고 얌전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주율천은 가슴이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 약상자를 가져와 약을 발라주며 다정하게 물었다.

“전에 맞았을 때 왜 한 번도 나한테 말 안 했어?”

온채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때 그녀는 진심으로 주씨 가문의 둘째 안주인 역할을 잘하고 싶었고 주율천이 좋은 반쪽이 되어줄 거라 믿었다.

사람들의 눈에 성씨 가문은 온채아의 친정이나 다름없었다. 누가 자기 남편 앞에서 친정이 얼마나 혹독하게 대했는지 말하겠는가?

그녀는 어리석지 않았고 남편이 그녀를 별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며칠 전에 깨달았다. 별로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아예 사랑한 적조차 없었다는 것을.

다행히 온채아는 누구의 사랑에 의지해 살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온채아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가 나 때문에 성씨 가문이랑 껄끄러워지는 게 싫어서요. 어쨌거나 은성 그룹이 성씨 가문이랑 계속 협력해야 하잖아요.”

진실을 얘기할 수 없었던 그녀는 그저 진심을 담아 둘러댔다.

온채아의 말에 주율천은 목구멍에 뭔가 막힌 듯 말을 잇지 못했고 그녀에게 너무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이해심이 그녀에게 상처를 주는 구실이 돼서는 안 되었다.

주율천은 마음속의 답답함을 억누르려고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온채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달랬다.

“미안해. 이번엔 내가 잘못했어. 결혼기념일도 같이 보내지 못했고. 뭐 갖고 싶은 거 없어? 꼭 사줄게.”

집, 차, 보석, 가방, 뭐든지 다 사줄 생각이었다. 지금까지 온채아에게 돈은 아낌없이 썼다.

“음...”

온채아는 잠시 생각하다 맑고 고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오빠한테 준 생일 선물을 좋아했으면 좋겠어요.”

“그게 다야?”

“네.”

온채아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스무 살 때 온채아의 생일 소원은 주율천과 결혼하는 것이었지만 스물넷이 된 그녀의 소원은 주율천과 깔끔하게 헤어지는 것이었다.

주율천의 진지한 눈빛과 마주친 순간 온채아는 마음이 약간 찔렸다. 그런데 그때 주율천의 핸드폰이 울렸다.

일반 벨 소리와 다른 전용 벨 소리였다.

온채아가 화면을 힐끗 봤는데 발신자는 역시나 심서정이었다.

주율천이 전화를 받았다. 상대가 무슨 말을 했는지 굳은 얼굴로 벌떡 일어섰다.

“많이 다쳤어? 어쩌다가 발을 삐끗한 거야? 기사님을 부를 거지, 왜 혼자 가고 그래? 위치 보내. 지금 바로 갈게.”

그러고는 바로 나가려 했다. 그런데 온채아에게 약을 발라주던 중이라 약 묻은 면봉을 보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온채아는 면봉을 받아들고 배려 깊게 말했다.

“내가 알아서 바를게요. 바쁜 일 있으면 가봐요.”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준다는 말이 있었지만 온채아의 인생은 달랐다.

울고불고 떼를 쓰면 떡은커녕 그녀를 기다리는 건 가문의 징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언젠가 스스로 떡을 살 수 있을 거라고. 그것도 아주 많이.

“그래...”

주율천이 안도하면서 변명을 덧붙였다.

“서정이가 다쳤대. 밖에서 혼자 아이를 케어하기 힘드니까 아무래도 가봐야 할 것 같아.”

그러고는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 온채아가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오빠는 왜 형님을 형수님이라 부르지 않아요? 한 번도 못 들어본 것 같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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