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8화

Author: 락희
주율천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다. 발걸음을 멈추고 온채아의 맑은 두 눈을 마주한 순간 저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온채아...”

온채아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

“뭘 그렇게 긴장하고 그래요? 오빠랑 형님이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인 거 알아요. 이름을 부르는 게 익숙한 것도 당연하죠.”

검은색 마이바흐가 정원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며 온채아는 소파에 천천히 몸을 기댔다.

그녀 스스로도 이렇게 충동적일 줄은 몰랐다. 이미 얌전하고 착한 척하는 데 익숙해져서 주율천의 죄책감을 이용하여 순조롭게 이혼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왜 불필요한 말을 덧붙였을까?

천장을 한참 동안 올려다보니 눈이 점점 마르는 것 같았다.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정다슬에게서 전화가 왔다.

“채아야, 저녁에 술 한잔할래?”

“좋지.”

온채아는 바로 대답했다가 이내 멈칫했다.

“그런데 좀 늦을 거야. 건강 관련 라이브 방송이 있는데 아마 10시쯤에 끝날 것 같아.”

한의원의 일이었다. 원래는 그녀의 일이 아니었는데 담당 직원이 일이 생긴 바람에 그녀에게 한 번만 대신해달라고 부탁했다.

온채아는 주씨 가문과 성씨 가문을 고려해 처음엔 거절했지만 동료가 필터를 추가하면 친엄마도 못 알아볼 거라 설득한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동의했다.

외모가 뛰어나고 목소리도 나긋나긋해서 라이브 효과가 놀라울 정도로 좋았다. 그 뒤로 한의원에서 가끔 그녀에게 라이브를 맡기곤 했다.

“알았어. 그럼 야근 끝나고 데리러 갈게. 시간 딱 맞을 거야.”

“그래.”

정다슬과 몇 마디 나누고 나니 온채아의 기분도 한결 나아졌다. 곧장 방으로 돌아가 오늘 저녁 방송 자료를 다시 확인했다.

생각해보면 주율천과 결혼한 가장 큰 장점이 바로 자유로워졌다는 점이었다.

주율천은 그녀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고 성씨 가문은 그녀가 너무 높이 날아오르지 못하게만 막을 뿐 더 이상 일거수일투족을 조사하지 않았다. 주씨 가문을 어느 정도 의식해야 했으니까.

그 덕에 온채아는 의술을 갈고닦았고 틈틈이 한의원에서 진료를 보기도 했다. 3년 동안 그래도 꽤 많은 돈을 모았다.

저녁 10시에 라이브 방송이 끝났다.

온채아가 기분 좋게 아래층으로 내려오자마자 정다슬의 차가 도착했다. 차에 오른 그녀를 보며 정다슬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기분 좋아 보이네. 이혼이 순조로운가 봐?”

“나름 괜찮아.”

온채아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축하주 한잔할 만 해.”

두 사람이 술집에 도착했을 땐 한창 손님이 많은 시간이었다. 다행히 정다슬이 사장과 아는 사이라 미리 자리를 남겨주었다.

정다슬이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온채아가 이미 마신 걸 보고는 실소를 터뜨렸다.

“네가 술 마시는 걸 주율천도 알아?”

“당연히 모르지.”

온채아가 입가에 보조개를 머금은 채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웃었다.

“나도 예전에 몰랐어. 그 사람이 마음에 둔 사람이 심...”

“키스해.”

“키스해. 키스해.”

“형수님, 적극적으로 나가요.”

“...”

댄스플로어 쪽에서 터져 나온 함성에 온채아가 하던 말을 멈췄다. 고개를 돌린 순간 표정이 확 굳어졌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던 정다슬의 안색도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저 사람 주율천이지?”

주율천의 준수한 얼굴이 흔들리는 조명 아래 선명하게 보였다. 품에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를 안고 있었는데 참으로 아름답고 매혹적이었다.

늘 침착하고 이성을 잃지 않던 그가 애정 가득한 눈빛으로 누군가를 쳐다보고 있었다.

여자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정다슬이 충격받은 얼굴로 입을 쩍 벌렸다.

“주율천이 마음에 품었다는 여자가 심서정이었어?”

“응. 아주 충격적이지?”

온채아는 잔에 남은 술을 단숨에 들이켜고는 살짝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예전엔 몰랐어.”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심서정이 발끝을 세워 키스했다. 그리고 주율천은 본능적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우와!”

“형수님 대박!”

“형 오늘 집에 못 가겠는데?”

“...”

온채아보다 나이가 많으면서도 늘 형수라 부르며 놀리던 사람들이 흥분한 얼굴로 소리쳤다.

정다슬이 벌떡 일어나자 온채아가 급히 그녀를 잡았다.

“가지 마.”

“나 그 정도로 바보 아니야.”

정다슬은 재빨리 사진 두 장을 찍은 다음 온채아를 잡아당겼다.

“너만의 계획이 있는 거 알아. 여기 너무 더러우니까 다른 데로 가자.”

온채아는 술을 못하면서도 마시고 싶어 하는 스타일이었다.

단 두 잔에 다음 날 오후가 되어서야 깨어났다. 머리가 지끈거렸고 눈도 살짝 부었다.

잠시 후 계좌에 거액이 입금되었다는 문자를 본 순간 잘못 본 건 아닌지 의심했다. 은행 계좌로 12억 원이 입금된 것이었다.

온채아는 눈을 비비고 입금한 사람이 심서정임을 확인하고서야 어제의 기억이 서서히 떠올랐다.

정말로 보낼 줄은 몰랐다. 이것만 봐도 심서정이 최해경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알 수 있었다.

다만 어젯밤 그 둘의 모습으로 보아 십중팔구 주율천이 준 돈일 것이다.

부부의 재산 중에서 절반은 온채아의 몫이었기에 당연히 받아야 했다.

온채아는 핸드폰을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꿀물을 한 잔 탔다.

오경애가 그녀의 안색이 좋지 않은 걸 보고 말했다.

“작은 사모님, 뭐 좀 드시겠어요? 방금 약선 요리랑 제비집 좀 만들었어요. 아니면 속이라도 달래게 콩나물국이라도 만들어드릴까요?”

1년 사계절, 각 절기에 맞춰 온채아는 그녀와 주율천의 건강 상태에 맞는 약선 처방을 오경애에게 건넸다.

온채아는 속이 울렁거려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제비집 좀 주세요.”

그러고는 집 안을 둘러보면서 덤덤하게 물었다.

“율천 오빠랑 형님 어젯밤에 안 들어왔어요?”

“그런 것 같아요.”

오경애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제비집을 가지러 주방으로 들어갔다. 온채아가 달달한 걸 좋아하는 걸 알고 황설탕을 조금 더 넣었다.

거실에 있던 주시윤이 뛰어오더니 허리에 손을 얹고 혀를 내밀었다.

“어젯밤에 삼촌이 우리 엄마랑 같이 있었어. 너 이제 삼촌한테 버려질 거고 더는 숙모가 아니야. 너 같은 나쁜 여자는 삼촌이랑 어울리지 않아.”

마지막엔 씩씩거리면서 통통한 손가락으로 온채아에게 삿대질하기도 했다.

“그래.”

온채아는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이의 통통한 손을 살짝 옆으로 쳐냈다.

“그럼 네 엄마가 삼촌이랑 결혼하면 넌 뭐가 되는지 알아?”

“뭐가 되는데?”

“짐 덩어리.”

온채아는 몸을 숙여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앞으로 넌 그냥 짐 덩어리야. 삼촌이랑 네 엄마가 동생이라도 낳으면 더 이상 아무도 널 좋아하지 않을 거야. 어때? 기쁘지? 짐 덩어리야.”

“엉엉...”

주시윤이 목청 터져라 울면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재빨리 태블릿 PC를 찾아 심서정에게 영상통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화가 난 주시윤이 온채아를 노려보며 계속 전화를 걸었다. 눈물이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엉엉... 아니야. 삼촌이랑 엄마 동생 안 낳을 거야.”

뭔가를 증명하려는 듯 몇 번을 걸었지만 여전히 아무도 받지 않았다.

온채아가 웃으며 말했다.

“봐봐. 내 말 맞지? 벌써 널 좋아하지 않아.”

사실 그녀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어젯밤 두 사람의 분위기를 보면 심서정의 뱃속에 이미 동생이 들어섰을지도 모른다.

“아니야. 엉엉...”

주시윤이 팔을 들어 눈물을 거칠게 닦았다. 하지만 눈물이 계속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온채아가 꿀물을 들고 식탁에 앉았다. 핸드폰을 열자 정다슬의 문자가 떴는데 한 연예 기사를 보냈다.

마침 제비집을 들고나온 오경애가 울음소리를 듣고 물었다.

“시윤 도련님 왜 저렇게 심하게 울어요?”

온채아가 핸드폰 화면을 오경애에게 보여줬다.

“이 뉴스를 봤나 봐요. 자기 엄마가 내연녀가 됐는데 당연히 속상하겠죠.”

뉴스 사진과 제목을 본 오경애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은성 그룹 대표 주율천, 밤늦게 한 여성과 술집에서 뜨거운 키스를!]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이제 와서 빌어? 나 임신했어!   제136화

    전혀 타격 없는 온채아의 모습에 심서정은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내리친 듯한 기분이 들었고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구르며 짜증을 부렸다.하지만 고개를 숙여 가방에 던져놓은 옥 펜던트를 보는 순간 금세 침착해졌다.‘내가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것 같아?’이제는 옥 펜던트 외에, 반드시 다른 카드가 필요했다.그 시각 주차장으로 빠르게 걸어간 온채아는 손끝이 주머니에 있는 옥 펜던트에 닿자 서서히 마음이 안정되었다.심서정에게 주었던 것은 하지원을 통해 복제한 것이고 진짜 옥 펜던트는 그녀가 갖고 있었다. 드디어 주인에게 돌아갔다.부모님이 남긴 유일한 물건을 되찾은 온채아는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차에 오르려는 찰나 한 손이 문을 잡더니 차에 타려는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크고 가느다란 손은 마치 맑고 투명한 백옥같이 깔끔했다.온채아는 고개를 들지 않고도 그 손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짜증이 밀려온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입을 열었다.“옥 펜던트는 이미 심서정 씨에게 돌려줬어요. 됐죠?”주율천과 눈조차 마주치고 싶지 않은 듯 온채아는 고개를 푹 숙였다.얼굴에 웃음이 가득 담긴 채 반짝이는 눈으로 쳐다보던 과거의 온채아는 이제 없었다.두 사람의 관계가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되었는지 몰랐지만 온채아는 영원히 그의 아내일 것이라고 주율천은 확신했다. 그러기 위해선 반드시 인내심 있게 달래야만 한다.주율천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널 찾은 이유는 그게 아니야. 사실 방금 네가 서정이한테 한 얘기를 조금 들었어.”그는 잠시 망설이며 말했다.“옥 펜던트의 주인이 서정이가 아니라는 게 사실이야?”“네.”온채아는 드디어 고개를 돌려 그를 보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어릴 적에 그 옥 펜던트를 본 적이 있어요. 하지만 그게 심서정 씨에게 있었던 건 아니었어요.”동공이 급격하게 흔들린 주율천은 다급하게 온채아의 팔을 움켜잡았다.“확실해?”평소와 다른 힘은 그의 불안한 감정을 대변하는 듯했다.“지금 날 의심해요?”온채아는 눈살

  • 이제 와서 빌어? 나 임신했어!   제135화

    심서정은 순간 멈칫하며 얼어붙더니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려 애썼다.“그게 무슨 뜻이죠?”‘X발. 도대체 또 뭘 알아낸 거야?’당시 고등학교를 자퇴한 심서정은 대학에 갈 가능성이 전혀 없자 양아치 무리들과 어울려 다니며 밥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하며 살아갔다.그런 그녀를 주율천이 알아봤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목에 걸린 옥 펜던트를 알아본 것이다.그때부터 심서정의 인생은 완전히 뒤바뀌었고 공주 대접을 받았다.주율천은 늘 심서정에게 잘해줬고 그녀가 행여나 눈물을 흘리기라도 하면 금수저 집안을 이용해 기분을 달려주려고 온갖 방법을 다 썼다.그때부터 심서정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해도 주율천이 다 받아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그래서 그녀는 주율천의 형, 주석현과 결혼했다.주율천과 결혼하면 주씨 가문의 자원과 재산을 절반만 얻을 수 있지만 주석현과 결혼하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그녀는 주율천과 주석현이 갖고 있는 전부를 소유하려는 욕망이 있었다.하지만 그 욕망은 주석현의 죽음으로 인해 산산조각이 났고 심서정은 계획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게다가 하필이면 주율천은 예전처럼 그녀를 대해주지 않았다.‘만약 저 X이 뭔가 알고 있다면...’경직된 몸으로 눈빛마저 불안하게 떨리는 심서정의 모습을 눈여겨보며 온채아는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날카로운 말로 그녀의 가식적인 가면을 찢어 놓았다.“내 말은, 이 옥 펜던트의 원래 주인이 심서정 씨가 맞냐는 거였어요.”예전에는 그저 의심이었다면 이제는 백퍼센트 확실했다.심서정은 어린 시절 고아원에서 온채아를 괴롭힌 사람이었다.“헛소리 좀 그만해요.”심서정은 목소리를 떨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건 어릴 때부터 제가 갖고 있던 옥 펜던트예요. 내 물건이 아니라는 증거 있어요?”“증거요?”온채아는 뒤로 기대어 앉았다. 건방지게 앉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기세는 심서정보다 한참 위였다.“서정 씨가 이렇게 발악하는 게 증거인 것 같은데요?”“누가 발악을 했다는 거죠?”심서정은 애써 흥분을 억제했지

  • 이제 와서 빌어? 나 임신했어!   제134화

    “채아 씨랑 같이 왔으면 미리 말이라도 해주지.”성유준은 싸늘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네가 입이 이렇게 가벼운 줄은 몰랐거든.”그 말을 끝내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뿜어냈다.수년간 형제로 지내온 하지훈은 뭔가 알아챈 듯 그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식자 자리가 별로였나 봐?”성유준은 싸늘하게 대답했다.“임 비서가 왔어.”“왜?”“같이 먹으려고.”“그래서 채아 씨가 기분이 나빴다는 거야?”하지훈은 그와 온채아가 싸운 줄 알았으나 사실 그게 아니었다. 곧이어 성유준은 냉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기분 나빴다고? 아니. 채아는 당장이라도 임 비서를 새언니라고 부를 기세였어.”“그럴 리가 없지.”하지훈은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채아 씨는 너를 오빠라고 인정 안 하잖아.”성유준은 그를 힐끗 보며 물었다.“넌 도대체 누구 편이냐?”“당연히 네 편이지.”하지훈은 술 진열장을 열어 맥캘란 한 병을 꺼내더니 천천히 술을 따랐다.“솔직히 말하면 네 성격이 유별나잖아. 채아 씨가 재혼할 생각이 있어도 너랑은 안 할 거야.”“누가 걔랑 하고 싶대?”“그래, 그래. 마음대로 얘기해.”하지훈은 잔 하나를 밀어주더니 술을 따르며 일부러 성유준을 더 자극했다.“채아 씨가 주율천이랑 결혼하겠다고 난리 쳤을 때 위출혈이 생길 정도로 술 마시던 게 누구더라?”거실은 쥐 죽은 듯한 정적이 흘렀다.성유준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감정 섞인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때 일은...”“너는 잘못한 게 없어. 솔직히 그때는 너도 위험한 상황이었잖아. 채아 씨랑 관계를 끊는 게 맞았어.”하지훈은 잔을 집어 성유준과 맞대며 덧붙였다.“하지만 채아 씨가 주율천을 좋아한 것도 잘못은 아니지. 네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채아 씨와 점점 멀어질 거야.”...며칠 후, 하지원이 전화를 걸어와 온채아에게 옥 펜던트 복제품이 완성되었으니 가져가라고 했다.온채아는 한의원 진료 전에 먼저 하지원의 작업실

  • 이제 와서 빌어? 나 임신했어!   제133화

    티슈로 손을 닦던 온채아는 순간 흠칫했다.어쩌면 성유준이 이런 사소한 일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그 배려는 찌그러진 온채아의 가슴을 조금이나마 달래주었다.“대표님.”반쯤 열린 문밖에서 지적인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임지연이 조심스레 문을 밀고 들어오더니 온채아를 보고 웃으며 인사했다.“채아 씨도 있었네.”온채아는 당황했지만 애처 아무렇지 않은 척 인사를 건넸다.“임 비서님, 안녕하세요.”임지연은 성유준 옆자리로 걸어가며 친근하게 말했다.“같이 식사해도 괜찮을까?”온채아는 미소 지었다.“괜찮아요.”사석에서도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는 두 사람의 모습에 온채아는 말문이 막혔다. 성유준은 솔로가 아니라며 말한 적 있고 임지연은 그의 취향을 캐묻기 바빴다.서로 마음은 있지만 고백할 용기가 없어 눈치만 보고 있는 소설 속 남녀 주인공 같았다.‘나 같은 외부인이 거절할 자격은 없지.’성유준은 깊고 그윽한 눈매로 온채아를 힐끗 쳐다봤다. 그러고선 무심한 얼굴로 돌변하더니 미간을 찌푸린 채 임지연을 바라보며 물었다.“여긴 왜 왔어?”온채아는 흠칫 놀랐다.‘대표님이 부른 게 아니었나?’“친구가 여기서 밥 먹고 있다가 대표님을 봤다고 해서요.”임지연은 웃으며 자리에 앉아 설명했다.“혹시 업무상 미팅 중일까 싶어서 대신 술이라도 받아주려고 왔어요. 그런데 지금 보니 아닌 것 같네요.”성유준은 몸을 느긋이 뒤로 젖히며 감정 없는 눈빛으로 임지연을 바라봤다.“술 받아줄 필요 없으니까 이만 가줄래?”온채아는 민망함에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었다. 하물며 임지연은 오죽했을까.아니나 다를까 얼굴에 걸린 웃음은 점차 굳어졌다.“저는...”“대표님.”이 상황이 너무 난처했던 온채아는 자신이 초대자인 입장에서 말했다.“어차피 음식도 많이 시켰잖아요. 같이 드셔도 될 것 같은데요?”성유준의 표정은 더 냉랭해졌고 무심하게 한 마디 던졌다.“배려심이 대단하네.”그 말은 어딘가 의미심장했다.온채아는 곱씹어볼 틈도 없이 임지연

  • 이제 와서 빌어? 나 임신했어!   제132화

    온채아는 성유준의 의도를 짐작하지 못하고 살짝 몸을 피했다.“왜요? 대표님이 소개해 주시려고요?”“못 해줄 것도 없지.”성유준은 어깨와 등이 넓어 몸을 조금만 숙이기만 해도 온채아를 온전히 감싸는 듯한 자세가 되었다.“어떤 스타일을 원하는데?”기세 넘치게 대답했던 터라 이제 와서 물러서면 또 비웃음을 살 게 뻔했기에 온채아는 차라리 진지하게 기준을 생각해 보기로 했다.예전 그녀의 이상형은 주율천 같은 사람이었다. 점잖고 온화하며 젠틀한 스타일.하지만 지금 제일 극혐하는 타입이다.당장 자신이 뭘 원하는지는 떠오르지 않았지만 싫어하는 건 분명했다.“일단 점잖고 온화한 스타일은 별로예요. 그 반대라면 딱이겠네요. 주씨 가문을 안 두려워하는 사람이면 더 좋고요.”“아가씨, 그 반대라면 단호하고 차가운 타입이네요?”성이가 웃으며 받아쳤다.“그럼 우리 대표님이네요. 경성에서 주씨 가문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대표님밖에 없는데요?”온채아는 그 말에 머릿속이 하얘진 듯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솔직히 그녀가 말한 기준은 딱 성유준 그 자체였기에 성이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하지만 간이 부은 게 아닌 이상 성유준과의 그런 관계는 꿈꿔서도 안 된다.차는 일정한 속도로 달리고 있었고 거리의 불빛이 깜빡이며 성유준의 얼굴 위로 스쳤다.그는 조금 더 가까이 온채아에게 다가가며 알 수 없는 눈빛을 보냈는데 마치 언제부터 그렇게 간 큰 생각을 하게 된 거냐고 묻는듯한 느낌이었다.순간 심장이 두근거린 온채아는 뭔가 해명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녀보다 먼저 성유준의 낮고 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오픈 마이드가 아니라 금기의 관계를 원했던 거야?”9년간 남매로 지낸 그들은 가족으로 보는 게 맞다.어릴 때부터 맡아온 은은한 침향목 향기가 온채아를 감쌌고 그 향기는 마치 그녀의 생각이 얼마나 불순한지를 알려주는 듯했다.온채아는 얼굴뿐만 아니라 귀까지 뜨겁게 달아오른 걸 느끼며 눈앞의 성유준을 확 밀어냈다.“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아무리 정

  • 이제 와서 빌어? 나 임신했어!   제131화

    성유준은 확답을 피한 채 입을 열었다.“왜? 벌써 가려고?”“응. 볼 일이 있어서.”같은 업계를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이라 온채아는 속일 수 있어도 성유준을 속이기는 어렵다.주율천은 차라리 솔직하게 말했다.“조카가 갑자기 고열이 나서 잠깐 들러보려고.”그러고는 담배 한 개비를 꺼냈다.“혹시라도 채아 마주치면 그냥 모르는척해 줘. 괜히 쓸데없는 오해가 생길 수도 있으니까.”성유준은 담배를 받아들며 알겠다는 듯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그래. 알았어.”온채아는 고서화를 현관 수납장 위에 대충 올려두고 엘리베이터 쪽이 잠잠해지길 기다리다가 아무런 인기척이 들려오지 않는 확신이 생겼을 때 집 문을 나서서 밖으로 나왔다.아파트 출입구 앞은 텅 비어 있었고 검은색 벤틀리는 아까 그 자리에 없었다.그럼에도 온채아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성유준은 원래도 인내심이 좋은 사람이 아니거니와 그녀가 갑자기 약속을 깨버렸으니 기다리지 않고 떠난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지금 성유준에게 밥 한 끼 하자고 줄 선 사람만 해도 진안로 한 블록은 넘을 텐데 굳이 여기서 온채아를 기다릴 이유도 없었다.고개를 푹 숙인 채 다시 집으로 올라가려던 찰나 익숙한 벤틀리 차량이 천천히 다가왔다.곧이어 성이가 내려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아가씨, 주차 자리에 마땅치 않아서 좀 멀리 세웠어요.”순간 멈칫한 온채아는 장난 어린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는 성유준을 발견했다.“얼른 타. 배고프다.”온채아는 몸을 숙여 뒷좌석에 앉았다.그런데 어딘가 분위기가 묘했다. 내리기 전까지만 해도 기분이 언짢아 보이던 남자가 지금은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 웃고 있었다.성유준이 말했다.“방금 주율천 만났어.”온채아는 별 반응이 없었다.“그래요?”감정 없는 담담한 말투에 실망도 화도 없었다.성유준은 주율천이 떠나기 전 했던 말을 떠올리며 눈빛을 거두었다.“형수 만나러 갔대.”운전 중이던 상이는 그 말을 듣고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주 대표님이 아까 분명히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