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8화

Author: 락희
주율천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다. 발걸음을 멈추고 온채아의 맑은 두 눈을 마주한 순간 저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온채아...”

온채아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

“뭘 그렇게 긴장하고 그래요? 오빠랑 형님이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인 거 알아요. 이름을 부르는 게 익숙한 것도 당연하죠.”

검은색 마이바흐가 정원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며 온채아는 소파에 천천히 몸을 기댔다.

그녀 스스로도 이렇게 충동적일 줄은 몰랐다. 이미 얌전하고 착한 척하는 데 익숙해져서 주율천의 죄책감을 이용하여 순조롭게 이혼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왜 불필요한 말을 덧붙였을까?

천장을 한참 동안 올려다보니 눈이 점점 마르는 것 같았다.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정다슬에게서 전화가 왔다.

“채아야, 저녁에 술 한잔할래?”

“좋지.”

온채아는 바로 대답했다가 이내 멈칫했다.

“그런데 좀 늦을 거야. 건강 관련 라이브 방송이 있는데 아마 10시쯤에 끝날 것 같아.”

한의원의 일이었다. 원래는 그녀의 일이 아니었는데 담당 직원이 일이 생긴 바람에 그녀에게 한 번만 대신해달라고 부탁했다.

온채아는 주씨 가문과 성씨 가문을 고려해 처음엔 거절했지만 동료가 필터를 추가하면 친엄마도 못 알아볼 거라 설득한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동의했다.

외모가 뛰어나고 목소리도 나긋나긋해서 라이브 효과가 놀라울 정도로 좋았다. 그 뒤로 한의원에서 가끔 그녀에게 라이브를 맡기곤 했다.

“알았어. 그럼 야근 끝나고 데리러 갈게. 시간 딱 맞을 거야.”

“그래.”

정다슬과 몇 마디 나누고 나니 온채아의 기분도 한결 나아졌다. 곧장 방으로 돌아가 오늘 저녁 방송 자료를 다시 확인했다.

생각해보면 주율천과 결혼한 가장 큰 장점이 바로 자유로워졌다는 점이었다.

주율천은 그녀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고 성씨 가문은 그녀가 너무 높이 날아오르지 못하게만 막을 뿐 더 이상 일거수일투족을 조사하지 않았다. 주씨 가문을 어느 정도 의식해야 했으니까.

그 덕에 온채아는 의술을 갈고닦았고 틈틈이 한의원에서 진료를 보기도 했다. 3년 동안 그래도 꽤 많은 돈을 모았다.

저녁 10시에 라이브 방송이 끝났다.

온채아가 기분 좋게 아래층으로 내려오자마자 정다슬의 차가 도착했다. 차에 오른 그녀를 보며 정다슬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기분 좋아 보이네. 이혼이 순조로운가 봐?”

“나름 괜찮아.”

온채아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축하주 한잔할 만 해.”

두 사람이 술집에 도착했을 땐 한창 손님이 많은 시간이었다. 다행히 정다슬이 사장과 아는 사이라 미리 자리를 남겨주었다.

정다슬이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온채아가 이미 마신 걸 보고는 실소를 터뜨렸다.

“네가 술 마시는 걸 주율천도 알아?”

“당연히 모르지.”

온채아가 입가에 보조개를 머금은 채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웃었다.

“나도 예전에 몰랐어. 그 사람이 마음에 둔 사람이 심...”

“키스해.”

“키스해. 키스해.”

“형수님, 적극적으로 나가요.”

“...”

댄스플로어 쪽에서 터져 나온 함성에 온채아가 하던 말을 멈췄다. 고개를 돌린 순간 표정이 확 굳어졌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던 정다슬의 안색도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저 사람 주율천이지?”

주율천의 준수한 얼굴이 흔들리는 조명 아래 선명하게 보였다. 품에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를 안고 있었는데 참으로 아름답고 매혹적이었다.

늘 침착하고 이성을 잃지 않던 그가 애정 가득한 눈빛으로 누군가를 쳐다보고 있었다.

여자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정다슬이 충격받은 얼굴로 입을 쩍 벌렸다.

“주율천이 마음에 품었다는 여자가 심서정이었어?”

“응. 아주 충격적이지?”

온채아는 잔에 남은 술을 단숨에 들이켜고는 살짝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예전엔 몰랐어.”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심서정이 발끝을 세워 키스했다. 그리고 주율천은 본능적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우와!”

“형수님 대박!”

“형 오늘 집에 못 가겠는데?”

“...”

온채아보다 나이가 많으면서도 늘 형수라 부르며 놀리던 사람들이 흥분한 얼굴로 소리쳤다.

정다슬이 벌떡 일어나자 온채아가 급히 그녀를 잡았다.

“가지 마.”

“나 그 정도로 바보 아니야.”

정다슬은 재빨리 사진 두 장을 찍은 다음 온채아를 잡아당겼다.

“너만의 계획이 있는 거 알아. 여기 너무 더러우니까 다른 데로 가자.”

온채아는 술을 못하면서도 마시고 싶어 하는 스타일이었다.

단 두 잔에 다음 날 오후가 되어서야 깨어났다. 머리가 지끈거렸고 눈도 살짝 부었다.

잠시 후 계좌에 거액이 입금되었다는 문자를 본 순간 잘못 본 건 아닌지 의심했다. 은행 계좌로 12억 원이 입금된 것이었다.

온채아는 눈을 비비고 입금한 사람이 심서정임을 확인하고서야 어제의 기억이 서서히 떠올랐다.

정말로 보낼 줄은 몰랐다. 이것만 봐도 심서정이 최해경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알 수 있었다.

다만 어젯밤 그 둘의 모습으로 보아 십중팔구 주율천이 준 돈일 것이다.

부부의 재산 중에서 절반은 온채아의 몫이었기에 당연히 받아야 했다.

온채아는 핸드폰을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꿀물을 한 잔 탔다.

오경애가 그녀의 안색이 좋지 않은 걸 보고 말했다.

“작은 사모님, 뭐 좀 드시겠어요? 방금 약선 요리랑 제비집 좀 만들었어요. 아니면 속이라도 달래게 콩나물국이라도 만들어드릴까요?”

1년 사계절, 각 절기에 맞춰 온채아는 그녀와 주율천의 건강 상태에 맞는 약선 처방을 오경애에게 건넸다.

온채아는 속이 울렁거려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제비집 좀 주세요.”

그러고는 집 안을 둘러보면서 덤덤하게 물었다.

“율천 오빠랑 형님 어젯밤에 안 들어왔어요?”

“그런 것 같아요.”

오경애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제비집을 가지러 주방으로 들어갔다. 온채아가 달달한 걸 좋아하는 걸 알고 황설탕을 조금 더 넣었다.

거실에 있던 주시윤이 뛰어오더니 허리에 손을 얹고 혀를 내밀었다.

“어젯밤에 삼촌이 우리 엄마랑 같이 있었어. 너 이제 삼촌한테 버려질 거고 더는 숙모가 아니야. 너 같은 나쁜 여자는 삼촌이랑 어울리지 않아.”

마지막엔 씩씩거리면서 통통한 손가락으로 온채아에게 삿대질하기도 했다.

“그래.”

온채아는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이의 통통한 손을 살짝 옆으로 쳐냈다.

“그럼 네 엄마가 삼촌이랑 결혼하면 넌 뭐가 되는지 알아?”

“뭐가 되는데?”

“짐 덩어리.”

온채아는 몸을 숙여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앞으로 넌 그냥 짐 덩어리야. 삼촌이랑 네 엄마가 동생이라도 낳으면 더 이상 아무도 널 좋아하지 않을 거야. 어때? 기쁘지? 짐 덩어리야.”

“엉엉...”

주시윤이 목청 터져라 울면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재빨리 태블릿 PC를 찾아 심서정에게 영상통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화가 난 주시윤이 온채아를 노려보며 계속 전화를 걸었다. 눈물이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엉엉... 아니야. 삼촌이랑 엄마 동생 안 낳을 거야.”

뭔가를 증명하려는 듯 몇 번을 걸었지만 여전히 아무도 받지 않았다.

온채아가 웃으며 말했다.

“봐봐. 내 말 맞지? 벌써 널 좋아하지 않아.”

사실 그녀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어젯밤 두 사람의 분위기를 보면 심서정의 뱃속에 이미 동생이 들어섰을지도 모른다.

“아니야. 엉엉...”

주시윤이 팔을 들어 눈물을 거칠게 닦았다. 하지만 눈물이 계속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온채아가 꿀물을 들고 식탁에 앉았다. 핸드폰을 열자 정다슬의 문자가 떴는데 한 연예 기사를 보냈다.

마침 제비집을 들고나온 오경애가 울음소리를 듣고 물었다.

“시윤 도련님 왜 저렇게 심하게 울어요?”

온채아가 핸드폰 화면을 오경애에게 보여줬다.

“이 뉴스를 봤나 봐요. 자기 엄마가 내연녀가 됐는데 당연히 속상하겠죠.”

뉴스 사진과 제목을 본 오경애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은성 그룹 대표 주율천, 밤늦게 한 여성과 술집에서 뜨거운 키스를!]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이제 와서 빌어? 나 임신했어!   제100화

    그는 너무나 바빴다. 심지어 자신에게 아내가 있다는 사실조차 잊을 정도 말이다.온채아는 잠시 숨을 고른 후, 다시 그에게 시선을 돌려 물었다.“어떻게 알았어요?”“그냥 짐작했을 뿐이야.”그녀가 반박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주율천은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가슴이 솜으로 막힌 듯 답답하고 숨쉬기조차 불편해졌다.온채아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당신은 알아차리지 못할 줄 알았는데.”그는 그녀를 똑바로 쳐다봤다. 숨쉬기 힘든 느낌에 미간까지 찌푸려졌다.“내가 그렇게도 형편없었어?”“당신은 정말 훌륭했어요.”온채아는 입꼬리를 더욱 끌어올리며 말했다.“심서정 씨 앞에서만요.”그는 훌륭한 남편은 아니었지만 훌륭한 연인이었다.그녀는 진지하게 말했지만 그 말은 주율천의 귀에 가시처럼 박혔다.주율천은 답답한 가슴을 진정시키려 탁한 숨을 내쉬며 말했다.“최대한 빨리 내보낼게. 그때 내가 데리러 갈게.”“글쎄요.”온채아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지만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하지만 주율천은 그녀의 가벼운 세 글자를 듣자 가슴이 더욱 답답해지고 불안감마저 들었다. 그는 다급하게 그녀의 손목을 붙잡으며 물었다.“무슨 뜻이야? 돌아올 생각이 없는 거야?”온채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하고 싶었다.하지만 그녀는 아직 받지 못한 이혼 증명서에 발목이 잡혀 있었다.“아니에요. 오해하지 마세요. 됐어요, 친구가 20분 안에 오라고 했으니 서둘러 가봐야겠네요.”온채아는 재빨리 손목을 빼내어 코트를 여미고 뒤돌아섰다.주율천은 차 안에 앉아 아까 전 그녀의 차분하다 못해 냉랭하게 느껴졌던 눈빛을 떠올렸다.예전의 그녀는 결코 저런 표정을 짓지 않았는데...전에 느껴본 적 없는 불안감이 주율천의 마음을 휩쓸었다.하지만 온채아가 무슨 생각을 하든 그는 그녀의 합법적인 남편이었다.그 점을 생각하니 주율천의 마음은 조금 안정되는 듯했다.그가 동의하지 않는 한, 그녀는 평생 그의 아내일 것이다....레스토랑은 한빛 그룹 빌딩 바로 맞

  • 이제 와서 빌어? 나 임신했어!   제99화

    주율천은 갑자기 그녀를 바라보며 시선을 떼지 못했다.“‘도’라니? 누가 또 구아인데?”구아는 아주 흔한 아명이었다.그러니 이름이 겹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하지만 주율천의 시선은 온채아에게 꽂혀 왠지 모르게 간절해 보였다. 온채아는 경계심을 느꼈다.온채아는 살짝 눈을 내리깔며 감정을 감추고 둘러댔다.“아니에요. 그냥 흔한 이름이라고 생각해서요.”그녀는 오늘 주율천이 심서정을 얼마나 감싸는지 똑똑히 지켜보았다.‘그가 심서정이 과거에 나를 괴롭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분명 심서정을 감싸고돌겠지. 심지어 오히려 나에게 화를 낼지도 모른다.’게다가 그녀 자신도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아직 완전히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다만 이 옥 펜던트는...온채아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주율천을 올려다보며 최대한 순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율천 오빠, 이 옥 펜던트 디자인이 정말 예쁜데 며칠만 빌려줄 수 있을까요? 주얼리 만드는 친구한테 부탁해서 똑같이 하나 만들어보고 싶어요.”아마도 주시윤의 일 때문에 그가 죄책감을 느끼고 있어서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온채아에게 빚진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인지 주율천은 온채아의 간절한 눈빛에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다만 이 옥 목걸이가 심서정에게 의미가 남다르다는 것을 생각하고는 다시 따뜻한 목소리로 당부했다.“그럼 당분간 네가 잘 보관해줘. 흠집 나지 않도록 조심하고.”“네.”온채아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들어 주율천 앞에서 이렇게 솔직한 모습을 보인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았다.마치 과거의 얌전하고 사려 깊던 소녀를 다시 보는 듯 주율천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자, 어서 밥 먹어. 입에 맞는지 한번 봐봐.”“네.”이날, 온채아는 기쁜 마음으로 식사를 했다.가장 소중한 것을 되찾으니 밥맛도 훨씬 좋아졌다.레스토랑에서 나왔을 때, 시간은 아직 일렀다.하지만 겨울은 해가 짧고 밤이 길어 경성 전체가 막 켜진 화려한 조명 아래

  • 이제 와서 빌어? 나 임신했어!   제98화

    주율천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그녀도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었던 것뿐이야.”“정말 순간적인 실수였는지, 아니면 계획적인 범행이었는지, 당신도 알고 있잖아요.”온채아는 그의 자기합리화 능력에 혀를 내둘렀다.그녀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결국 주율천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온채아, 서정이가 철없이 군 건 사실이야. 내가 그녀 대신 너에게 사과하고 보상해줄게...”말을 마치기도 전에 테이블 위에 놓인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온채아는 발신자 표시도 보지 않았지만 그의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만 보고도 심서정에게서 온 전화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미안, 잠깐 전화 좀 받고 올게.”온채아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그러세요.”그녀에게 밥을 사주고 사과를 하겠다고 하더니 음식도 나오기 전에 정작 일의 원흉에게서 전화가 걸려 온 것이다.모든 것이 짜증스럽게 느껴졌다.“저기요, 손님?”종업원이 두 번이나 부르고 나서야 온채아는 정신을 차리고 탁자 위에 이미 몇 가지 요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무슨 일이죠?”“이 옥 목걸이는 손님과 같이 오신 남자분께서 의자에 떨어뜨린 것 같아요.”종업원은 옥 펜던트를 건네주며 말했다. “혹시 모르니 잠시만 맡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중에 잃어버리실 수도 있으니까요.”“네, 감사합니다.”온채아는 무의식적으로 옥 펜던트를 받아 들고 탁자 위에 내려놓으려다 문득 멍해졌다.이것은 그녀의 옥 펜던트였다.예전에 보육원에서 빼앗겼던 바로 그 목걸이와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동안 그녀는 되찾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보육원에 머물렀던 시간이 너무 짧아서 그 소녀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나중에 한 번 찾아갔었지만 그 보육원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그녀는 찾고 싶었지만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지 몰랐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다시 그녀의 손에 돌아올 줄이야.온채아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손에 들고 있던 옥 목걸이를 누군가 갑자기 빼앗아갔다

  • 이제 와서 빌어? 나 임신했어!   제97화

    임지연은 그 말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하지만 엘리베이터 안의 분위기는 눈에 띄게 어색해졌다.온채아는 주율천의 얼굴에 스쳐 지나가는 불편함을 보고 오히려 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러나 고개를 들자 바로 성유준의 시선과 정면으로 마주쳤다.“온 조장은 프로젝트 때문에 정신없이 바쁠 텐데, 칼퇴근을 다 하네?”그는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공격적인 태도를 보였다.그의 말투에는 모든 직원이 야근을 당연하게 여기며 뼈 빠지게 일해야 한다는 자본가적인 사고방식이 짙게 배어 있었다.온채아는 굳은 표정으로 딱딱하게 대꾸했다.“남은 일은 집에 가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습니다.”“아, 그래?”성유준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비꼬았다.“사랑에 푹 빠진 사람은 퇴근 후에도 일에 집중할 수 있나 봐?”온채아는 할 말을 잃었다.그녀는 좀처럼 당황하는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엘리베이터 천장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심정이었다.아마 모든 사람이 그녀가 그토록 주율천과 결혼하고 싶어 했던 이유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그를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그래서 주율천은 그녀의 당혹감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랑스러워하며 미소를 지었다.“그만 놀려. 채아는 수줍음이 많잖아.”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엘리베이터가 지하 1층에 안정적으로 멈춰 섰다.모든 사람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옆 엘리베이터 문도 열렸고 한 부서의 총괄이 헐떡거리며 뛰어나와 성유준에게 다가가 말했다.“성 대표님, 긴급 결재 서류입니다. 사인 부탁드립니다.”성유준은 정색하며 서류를 받아 들고 양복 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 망설임 없이 서명했다.그의 글씨는 온채아도 알고 있었다. 힘이 넘치고 개성이 뚜렷했다.성유준은 한때 온채아에게 서예를 가르쳤었고 온채아의 글씨체에는 그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온채아가 몸을 돌리려는 찰나, 무언가에 홀린 듯 시선이 멈췄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성유준에게 물었다.“성 대표님, 그 만년필이 어

  • 이제 와서 빌어? 나 임신했어!   제96화

    프로젝트팀원 모두에게 돌아갈 만큼 넉넉한 양이었다.장현택은 팀원들에게 모두 로비에 가서 오후 차를 가져오라고 하자 온채아도 어울려야 한다는 생각에 로비로 향했다.그런데 막 도착하자 임지연이 그녀를 붙잡았다.“채아야, 어젯밤 괜찮았어? 성 대표님이 가끔 좀 심하게 말하긴 하지만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저... 괜찮아요.”온채아는 약간 의아해하며 그녀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했다.“오후 차 고마워요.”‘분명 성유준은 나와 거리를 두려는 듯한 태도를 보였는데 임지연은 왜 이렇게 살갑게 대하는 걸까?’“별소리 다 하네.”임지연은 웃으며 한약 팀의 세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채아가 여자라고 함부로 대하면 안 돼요. 업무에 있어서는 서로 잘 협력해야 합니다.”“임 비서님.”온채아는 입술을 오므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실 저를 매번 여동생처럼 챙겨주실 필요는 없어요. 저와 성 대표님 관계는 생각하시는 것과는 달라요.”“그럼 어떤 관계인데?”임지연은 빙긋 웃으며 물었고 이어서 말했다.“그리고 내가 보기에 그분은 여동생을 꽤 챙기는 것 같던데.”적어도 그녀는 성유준의 얼굴에서 그날 밤처럼 당황한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온채아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그녀는 케이크 한 조각을 건네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성 대표님이 어떻든 간에 나는 채아 너랑 코드가 잘 맞는 것 같아.”온채아는 거절하지 않았다.“고마워요.”임지연은 한빛 그룹에서 꽤 인기가 있는 듯했다. 그러니 그녀가 배려해주는 만큼 온채아도 예의를 갖춰야 했다.퇴근 시간이 가까워질 무렵 프런트에서 온채아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온 조장님, 남편분께서 퇴근 마중 오셨어요.”“남편?”“네, 주율천이라고 하셨어요.”온채아는 멍해졌다. ‘주율천이 무슨 바람이 분 거지?’“기다리라고 해요. 일 끝나고 퇴근할 테니까.”그녀는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주율천은 회색 스리피스 정장을 차려입고 소파에 앉아 초조해하지 않고 여유롭게

  • 이제 와서 빌어? 나 임신했어!   제95화

    온채아는 두 명의 경찰과 함께 감시 카메라가 있는 방으로 갔고 강태무는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경찰은 감시 카메라 영상을 보고 얼굴색이 변했다.“사모님,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네.”온채아가 대답하자 경찰 중 한 명이 문밖으로 나가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돌아온 경찰은 온채아에게 이렇게 말했다.“사건은 취하되었습니다. 감시 카메라는... 복사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누구의 입김이 작용한 것인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강태무는 주율천이 이 정도로 제정신이 아닐 줄은 정말 몰랐다.이는 스승이 했던 말이 사실임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그 남자는 온채아에게 턱도 없이 부족한 사람이었다.온채아는 전혀 놀라지 않은 표정으로 물었다.“알겠습니다. 그런데, 심서정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수 있나요?”“사모님...”경찰은 난감해했지만, 그래도 직업 윤리상 조심스럽게 말했다.“그건... 그건 혐의 입증이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왜 혐의 입증이 쉽지 않은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온채아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오늘 와주셔서 감사합니다.”강태무가 경찰을 배웅하는 동안, 온채아는 혼자 감시 카메라 실에 한참 동안 머물렀다가, 겨우 감정을 추스르고 진료실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한빛 그룹 연구소로 갈 준비를 했다.하지만 그녀는 심서정이 내연녀였다는 사실이 한의원에 삽시간에 퍼졌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현재, 진료실 문 앞에는 많은 동료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가장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아침에 그녀가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했던 간호사였다.그 간호사는 죄송한 표정으로 온채아를 보자 용기를 내어 말했다.“채아 언니, 죄송해요... 난 정말 몰랐어요. 심서정이 계속 진실을 왜곡해서 우리를 잘못된 쪽으로 믿게 만들었고 언니를 그런 사람으로 오해하게 했어요...”그 말을 하며 그녀의 얼굴은 분노로 가득 찼다.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마침 심서정이 좋지 않은 표정으로 근처를 지나가자 누군가가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