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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Author: 락희
주율천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다. 발걸음을 멈추고 온채아의 맑은 두 눈을 마주한 순간 저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온채아...”

온채아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

“뭘 그렇게 긴장하고 그래요? 오빠랑 형님이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인 거 알아요. 이름을 부르는 게 익숙한 것도 당연하죠.”

검은색 마이바흐가 정원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며 온채아는 소파에 천천히 몸을 기댔다.

그녀 스스로도 이렇게 충동적일 줄은 몰랐다. 이미 얌전하고 착한 척하는 데 익숙해져서 주율천의 죄책감을 이용하여 순조롭게 이혼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왜 불필요한 말을 덧붙였을까?

천장을 한참 동안 올려다보니 눈이 점점 마르는 것 같았다.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정다슬에게서 전화가 왔다.

“채아야, 저녁에 술 한잔할래?”

“좋지.”

온채아는 바로 대답했다가 이내 멈칫했다.

“그런데 좀 늦을 거야. 건강 관련 라이브 방송이 있는데 아마 10시쯤에 끝날 것 같아.”

한의원의 일이었다. 원래는 그녀의 일이 아니었는데 담당 직원이 일이 생긴 바람에 그녀에게 한 번만 대신해달라고 부탁했다.

온채아는 주씨 가문과 성씨 가문을 고려해 처음엔 거절했지만 동료가 필터를 추가하면 친엄마도 못 알아볼 거라 설득한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동의했다.

외모가 뛰어나고 목소리도 나긋나긋해서 라이브 효과가 놀라울 정도로 좋았다. 그 뒤로 한의원에서 가끔 그녀에게 라이브를 맡기곤 했다.

“알았어. 그럼 야근 끝나고 데리러 갈게. 시간 딱 맞을 거야.”

“그래.”

정다슬과 몇 마디 나누고 나니 온채아의 기분도 한결 나아졌다. 곧장 방으로 돌아가 오늘 저녁 방송 자료를 다시 확인했다.

생각해보면 주율천과 결혼한 가장 큰 장점이 바로 자유로워졌다는 점이었다.

주율천은 그녀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고 성씨 가문은 그녀가 너무 높이 날아오르지 못하게만 막을 뿐 더 이상 일거수일투족을 조사하지 않았다. 주씨 가문을 어느 정도 의식해야 했으니까.

그 덕에 온채아는 의술을 갈고닦았고 틈틈이 한의원에서 진료를 보기도 했다. 3년 동안 그래도 꽤 많은 돈을 모았다.

저녁 10시에 라이브 방송이 끝났다.

온채아가 기분 좋게 아래층으로 내려오자마자 정다슬의 차가 도착했다. 차에 오른 그녀를 보며 정다슬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기분 좋아 보이네. 이혼이 순조로운가 봐?”

“나름 괜찮아.”

온채아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축하주 한잔할 만 해.”

두 사람이 술집에 도착했을 땐 한창 손님이 많은 시간이었다. 다행히 정다슬이 사장과 아는 사이라 미리 자리를 남겨주었다.

정다슬이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온채아가 이미 마신 걸 보고는 실소를 터뜨렸다.

“네가 술 마시는 걸 주율천도 알아?”

“당연히 모르지.”

온채아가 입가에 보조개를 머금은 채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웃었다.

“나도 예전에 몰랐어. 그 사람이 마음에 둔 사람이 심...”

“키스해.”

“키스해. 키스해.”

“형수님, 적극적으로 나가요.”

“...”

댄스플로어 쪽에서 터져 나온 함성에 온채아가 하던 말을 멈췄다. 고개를 돌린 순간 표정이 확 굳어졌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던 정다슬의 안색도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저 사람 주율천이지?”

주율천의 준수한 얼굴이 흔들리는 조명 아래 선명하게 보였다. 품에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를 안고 있었는데 참으로 아름답고 매혹적이었다.

늘 침착하고 이성을 잃지 않던 그가 애정 가득한 눈빛으로 누군가를 쳐다보고 있었다.

여자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정다슬이 충격받은 얼굴로 입을 쩍 벌렸다.

“주율천이 마음에 품었다는 여자가 심서정이었어?”

“응. 아주 충격적이지?”

온채아는 잔에 남은 술을 단숨에 들이켜고는 살짝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예전엔 몰랐어.”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심서정이 발끝을 세워 키스했다. 그리고 주율천은 본능적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우와!”

“형수님 대박!”

“형 오늘 집에 못 가겠는데?”

“...”

온채아보다 나이가 많으면서도 늘 형수라 부르며 놀리던 사람들이 흥분한 얼굴로 소리쳤다.

정다슬이 벌떡 일어나자 온채아가 급히 그녀를 잡았다.

“가지 마.”

“나 그 정도로 바보 아니야.”

정다슬은 재빨리 사진 두 장을 찍은 다음 온채아를 잡아당겼다.

“너만의 계획이 있는 거 알아. 여기 너무 더러우니까 다른 데로 가자.”

온채아는 술을 못하면서도 마시고 싶어 하는 스타일이었다.

단 두 잔에 다음 날 오후가 되어서야 깨어났다. 머리가 지끈거렸고 눈도 살짝 부었다.

잠시 후 계좌에 거액이 입금되었다는 문자를 본 순간 잘못 본 건 아닌지 의심했다. 은행 계좌로 12억 원이 입금된 것이었다.

온채아는 눈을 비비고 입금한 사람이 심서정임을 확인하고서야 어제의 기억이 서서히 떠올랐다.

정말로 보낼 줄은 몰랐다. 이것만 봐도 심서정이 최해경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알 수 있었다.

다만 어젯밤 그 둘의 모습으로 보아 십중팔구 주율천이 준 돈일 것이다.

부부의 재산 중에서 절반은 온채아의 몫이었기에 당연히 받아야 했다.

온채아는 핸드폰을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꿀물을 한 잔 탔다.

오경애가 그녀의 안색이 좋지 않은 걸 보고 말했다.

“작은 사모님, 뭐 좀 드시겠어요? 방금 약선 요리랑 제비집 좀 만들었어요. 아니면 속이라도 달래게 콩나물국이라도 만들어드릴까요?”

1년 사계절, 각 절기에 맞춰 온채아는 그녀와 주율천의 건강 상태에 맞는 약선 처방을 오경애에게 건넸다.

온채아는 속이 울렁거려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제비집 좀 주세요.”

그러고는 집 안을 둘러보면서 덤덤하게 물었다.

“율천 오빠랑 형님 어젯밤에 안 들어왔어요?”

“그런 것 같아요.”

오경애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제비집을 가지러 주방으로 들어갔다. 온채아가 달달한 걸 좋아하는 걸 알고 황설탕을 조금 더 넣었다.

거실에 있던 주시윤이 뛰어오더니 허리에 손을 얹고 혀를 내밀었다.

“어젯밤에 삼촌이 우리 엄마랑 같이 있었어. 너 이제 삼촌한테 버려질 거고 더는 숙모가 아니야. 너 같은 나쁜 여자는 삼촌이랑 어울리지 않아.”

마지막엔 씩씩거리면서 통통한 손가락으로 온채아에게 삿대질하기도 했다.

“그래.”

온채아는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이의 통통한 손을 살짝 옆으로 쳐냈다.

“그럼 네 엄마가 삼촌이랑 결혼하면 넌 뭐가 되는지 알아?”

“뭐가 되는데?”

“짐 덩어리.”

온채아는 몸을 숙여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앞으로 넌 그냥 짐 덩어리야. 삼촌이랑 네 엄마가 동생이라도 낳으면 더 이상 아무도 널 좋아하지 않을 거야. 어때? 기쁘지? 짐 덩어리야.”

“엉엉...”

주시윤이 목청 터져라 울면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재빨리 태블릿 PC를 찾아 심서정에게 영상통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화가 난 주시윤이 온채아를 노려보며 계속 전화를 걸었다. 눈물이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엉엉... 아니야. 삼촌이랑 엄마 동생 안 낳을 거야.”

뭔가를 증명하려는 듯 몇 번을 걸었지만 여전히 아무도 받지 않았다.

온채아가 웃으며 말했다.

“봐봐. 내 말 맞지? 벌써 널 좋아하지 않아.”

사실 그녀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어젯밤 두 사람의 분위기를 보면 심서정의 뱃속에 이미 동생이 들어섰을지도 모른다.

“아니야. 엉엉...”

주시윤이 팔을 들어 눈물을 거칠게 닦았다. 하지만 눈물이 계속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온채아가 꿀물을 들고 식탁에 앉았다. 핸드폰을 열자 정다슬의 문자가 떴는데 한 연예 기사를 보냈다.

마침 제비집을 들고나온 오경애가 울음소리를 듣고 물었다.

“시윤 도련님 왜 저렇게 심하게 울어요?”

온채아가 핸드폰 화면을 오경애에게 보여줬다.

“이 뉴스를 봤나 봐요. 자기 엄마가 내연녀가 됐는데 당연히 속상하겠죠.”

뉴스 사진과 제목을 본 오경애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은성 그룹 대표 주율천, 밤늦게 한 여성과 술집에서 뜨거운 키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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