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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우리 아직 이혼 안 했어

마지막 한 마디를 이진은 이를 악문 채 한 글자 한 글자 피를 토해내듯 토해냈다.

“이…… 불효막심한 년!”

이기태는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언제나 고분고분하던 큰딸이 이런 배신을 할 거라고는 또 이렇게 미쳐 날 뀔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으니.

하지만 그 모습을 본 이진은 오히려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과찬이시네요. 남은 시간 동안 노후 문제나 천천히 생각하시는 게 어때요?”

“너! 너!”

불효막심한 딸의 태도에 화가 날 대로 난 이기태는 끝내 참지 못하고 앞으로 다가가 손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이진의 뺨을 내려치기 전에 누군가에 의해 손목이 붙잡혔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이진의 계모 백윤정이었다.

“이진아, 우리 한 식구잖니.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 네 아버지가 지난 몇 년간 너를 얼마나 그리워했다고. 혹시 아줌마 때문에 그러는 거면 아버지 오해하지 마.”

이기태를 부축하며 사정하는 백윤정의 모습은 얼마나 처연한지 사람들의 동정을 자아냈다.

“그래요. 이진 대표님 같은 식구끼리 홧김에라도 그런 말 하지 마세요.”

“그러게요. 그런데 이 대표님은 어쩜 이렇게 복도 많으신지. 따님이 이렇게 훌륭하게 자라줘서 대견하겠어요.”

불쌍한 척하는 백윤정의 연기가 잘 먹혀 들었는지 그녀를 도와 말하는 사람까지 생겨났다.

하지만 그때, 입구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확인해 보니 방금 끌려나간 이영이 다시 나타난 거였다.

‘경호원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이진은 보기 드물게 얼굴에 인상을 썼다.

하지만 이영은 어느새 무대 아래까지 달려왔다.

“아빠, 괜찮아요?”

이기태를 잠시 걱정하던 그녀는 고개를 홱 들어 이진을 째려봤다.

“나를 쫓아내고 술을 뿌리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하다 하다 연세가 있으신 아빠한테까지 그렇게 악독하게 굴어야 해? 아빠가 널 키우느라 얼마나 고생하셨는데!”

‘날 키웠다고?’

이진은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 상황이 우습고 같잖았다. 한 집식구가 모여 그녀와 대치하는 모습이 참 가관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저 사람이 나를 키워줬다고? 언제? 설마 내 어머니가 돌아가신 일주일 뒤 너와 저 여자를 데리고 집에 들어온 걸 말하는 거야? 그건 널 키워주기 시작한 날이겠지.”

지금껏 약한 모습 한번 보이지 않던 이진은 끝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애써 슬픔을 참고 있는 모습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게다가 충격적인 사실까지 알게 되자 사람들이 가만있을 리가 없었다.

이 씨 가문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그간 이기태는 두려울 것 없이 행동해 왔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닌데 말이다.

“그러고 보니 예전 GN 대표가 이진 대표 어머님이셨죠. 그때가 GN 그룹 전성기였는데 얼마 안 돼서 그런 일이…….”

“누가 아니래요. 그때 이진 대표도 어렸을 텐데…… 쯧쯧.”

말이 채 끝나지 않았지만 이기태를 겨냥하는 듯한 말투에 그는 맞지도 않은 뺨이 얼얼해졌다.

사람들의 대화에 이진의 눈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

‘그때 그 일만 생각하면…….’

“이 대표님, 이래도 저한테서 아빠 소리 들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 엄마가 나 키우려고 벌어 놓은 돈으로 내연녀와 그 딸을 기른 지난날의 행동에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나 보죠? 그 돈은 제 엄마가 피땀으로 번 돈이에요!”

이진은 고개를 들어 숨을 크게 들이켰다. 더 이상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자꾸만 흘러내리는 눈물을 애써 참았다.

그리고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표정으로 돌아서더니 무대 아래에 온 사람들에게 공손하게 인사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여러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오늘 인수합병 파티는 여기서 끝마치겠습니다. GN 그룹을 인수하는 계획도 변동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이진…….”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사태에 이기태는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픽 하고 쓰러졌다.

하지만 이진이 자리를 떠나려던 그때, 손 하나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누구…….”

언짢았는지 눈살을 찌푸리며 돌아보니 윤이건이 마치 따져 묻기라도 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 바로 그녀의 전남편 윤이건.

“내 아내가 AMC 대표였다는 걸 모르고 있었네?”

남자의 말에 이진은 두 눈을 희번덕거렸다.

예전 모습을 하고 있었다면 멀리 도망쳤을 사람이 지금은 오히려 가까이 붙어오다니 어이없었다.

“나한테 설명이 필요한 거 아닌가?”

“이봐요. 윤 대표님, 몇 시간 전 우리 이혼한 거 잊었어요? 자중하세요.”

“자중?”

한평생 누군가에게 이 두 글자를 듣게 될 줄 몰랐던 윤이건은 재밌다는 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혹시 자중이란 단어를 모르시나? 우리 이혼했다고. 남들 앞에서 이러는 거 보지 안 좋아요. 남녀가 유별하기도 하고.”

“이진 씨가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우리 아직 이혼 안 했어. 내가 아직 사인 안 했거든.”

이진이 멈칫하는 반응을 보자 윤이건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그러니 우리 아직 부부야. 자중이란 단어는 쓸 필요 없는 것 같은데.”

‘아직도 부부라고?’

이진은 의아한 듯 윤이건을 바라봤다.

‘이혼 서류에 아직 사인 안 했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깊은 숨을 들이켠 이진은 어렵사리 미소를 쥐어 짜냈다. 당장 뭐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지금 윤이건과 모순을 자아내 봤자 그녀만 손해였기에 상대가 사인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회사 대표님이시니 사무가 다망한 건 저도 알아요. 그런데 아무리 바빠도 시간 내서 꼭 사인하세요.”

이진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윤이건의 눈앞에는 그녀가 방금 전 무대 위에서 보여줬던 모습이 또다시 아른거렸다. 곧이어 얼마 전까지 위장했던 또 다른 가짜 모습도 뇌리를 스쳤다.

‘대체 어떤 게 진짜 모습인 거야?’

가늘게 접힌 눈 사이로 날카로운 빛이 번뜩이는가 싶더니 윤이건은 입꼬리를 천천히 내렸다.

하지만 입을 열어 다시 대화를 이어나가려고 할 때, 비서가 그에게 다가왔다.

“대표님,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입니다.”

그 말에 윤이건은 놀란 듯 멈칫하더니 이미 떠나간 이진의 뒷모습을 보고는 결국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저는 유연서 씨의 주치의입니다. 지난번 말씀드렸던 의사와 소식이 닿았습니다.”

전화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의사의 목소리와 말투에는 공손함이 담겨 있었다.

“혹시 전에 말했던 그 명의‘이안’이라는 의사를 말하는 건가요? 연서 상황은 어떻죠?”

“네, 맞습니다. 이안 님과 소식이 닿았습니다. 유연서 씨는 아직 큰 문제는 없지만 수술은 빨리 진행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의사의 말에 윤이건의 눈에는 안도와 친절이 묻어났다.

그리고 곧바로 긴 다리를 뻗으며 파티장 밖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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