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발표는 언제쯤 생각합니까?”
재하의 목소리에 서인은 생각을 거뒀다.
“두 달 뒤요.”
“이유는?”
“지금 바로 터뜨리면 우진이 한성을 버렸다는 확인 사살이 되잖아요. 적어도 채권단 협상 끝날 때까진 기다리고 싶어요.”
재하는 잠시 계산하듯 눈을 내리깔았다.
“두 달.”
“길어요?”
“아뇨.”
무심한 대답이었다.
“그 정도면 맞춰드리죠.”
역시 빨랐다.
서인은 이제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그동안은 여기 있을게요.”
재하가 눈을 들었다.
“여기?”
“네. 갑자기 본가나 호텔로 옮기면 기자들이 먼저 눈치챌 테니까.”
한성그룹이 휘청이는 시점이었다.
그 와중에 한성의 장녀가 남편과 살던 집을 나왔다는 사실까지 알려지면 어떤 기사가 붙을지는 뻔했다.
경영 위기.
사위인 권재하의 지원 거절.
그리고 이혼.
사실이 어떻게 생겼든 사람들은 가장 자극적인 순서대로 이야기를 엮을 것이다.
지금은 굳이 먹잇감을 하나 더 던져줄 필요가 없었다.
“그러세요.”
재하는 별다른 이견 없이 받아들였다.
“공식 일정도 예정된 건 그대로 참석하고요.”
“네.”
“양가에도 당분간은 발표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
그 말에는 재하가 잠시 서인을 바라봤다.
“장인어른도?”
“네.”
“이혼하자고 한 건 압니까?”
“아뇨.”
“알면 난리 나겠는데.”
“그러니까 모르셔야죠.”
서인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아버지가 지금 이혼 이야기를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보지 않아도 알았다.
당장 우진에 사과하라고 할 것이다.
어떻게든 결혼을 붙들라고 할 것이고, 필요하다면 딸의 자존심쯤은 기꺼이 담보로 내놓을 사람이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럴 생각이 없었다.
한성이 망하면 망했지, 그 대가로 이 결혼을 붙잡을 생각은 없었다.
“알겠습니다.”
재하가 말했다.
그뿐이었다.
왜 아버지에게 말하지 않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다시 생각해보라고 하지도 않았다.
서인이 결정했다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럼 정리하면.”
서인이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법적인 절차는 바로 시작하고.”
“네.”
“발표는 두 달 뒤.”
“네.”
“그전까지 밖에서는 지금처럼 지내요.”
“그러죠.”
“예정된 공식 일정도 그대로 참석하고.”
“네.”
“집에서는 각자.”
그 말에 재하가 서인을 힐끗 봤다.
“원래도 각자 지냈으면서.”
서인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웃었다.
“그렇긴 하네요.”
재하도 피식 웃었다.
결혼을 끝내는 대화치고는 놀라울 만큼 평화로웠다.
재산 문제는 더 간단했다.
애초에 혼전계약서가 있었다.
각자 결혼 전에 소유했던 재산은 각자의 것.
결혼 기간 발생한 자산 역시 명의에 따라 귀속.
양가의 지분과 계열사 관련 권리는 재산 분할 대상에서 제외.
두 사람이 헤어질 경우를 가정한 조항까지 이미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삼 년 전에는 지나치게 철저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이제 와 보니 꽤 유용했다.
“집은요?”
재하가 물었다.
“재하 씨 명의잖아요.”
“그래도 삼 년 살았는데.”
“제 건 따로 알아보면 돼요.”
“알겠습니다.”
끝.
서인은 순간 조금 허탈해졌다.
삼 년을 살았다.
같은 주소지에 이름을 올렸고,
수없이 많은 사진에서 서로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대한민국에서 두 사람의 결혼을 모르는 사람이 드물 정도였다.
그런데 막상 끝내려고 보니 정리할 것이 별로 없었다.
아이도 없었다.
공동으로 가진 재산도 없었다.
서로에게 받아야 할 사과도, 끝내 확인해야 할 마음도 없었다.
재산 문제는 혼전계약서대로.
언론 발표는 두 달 뒤.
그전까지는 대외적으로 부부.
이후 서인이 이 집을 나가는 것으로 끝.
삼 년짜리 결혼을 정리하는 데 십 분도 걸리지 않았다.
서인은 머릿속으로 지금까지 나온 조건을 한 번 더 훑었다.
빠진 건 없는 것 같았다.
“그럼 됐죠?”
“그런 것 같습니다.”
“내일 세경에서 서류 보내드릴 거예요.”
“확인하죠.”
“네.”
정말 끝이었다.
서인은 침대 위에 걸쳐 있던 시트를 걷어냈다.
바닥에 떨어진 가운을 주워 맨몸 위에 걸쳤다.
이제 씻고 자면 됐다.
내일 오전에는 변호사를 만나고,
오후에는 회사에 가고,
그 이후에는 한성 쪽 상황을 확인한다.
평소보다 일정이 조금 많아졌을 뿐이었다.
서인은 가운의 끈을 느슨하게 묶으며 욕실을 향해 걸었다.
하나.
둘.
세 걸음쯤 옮겼을 때였다.
“한서인 씨.”
뒤에서 재하가 불렀다.
서인이 멈춰 섰다.
돌아보니 재하는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채였다.
“네?”
“하나 빠졌는데.”
서인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뭐가요?”
재하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서인을 한 번 바라봤다.
그리고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두 달 동안 같이 살 거라면서요.”
“네.”
“밖에서는 부부고.”
“그렇죠.”
“집에서는 각자.”
“네.”
서인은 잠시 기다렸다.
재하가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요?”
재하의 검은 눈이 서인에게 닿았다.
잠깐의 정적.
“그러면.”
그가 물었다.
“섹스는?”
“그 정도는 돼요.”서인은 손을 잡고 일어났다.몸을 세우자 아직 남아 있던 어지럼증에 중심이 잠깐 흔들렸다. 재하가 곧바로 팔을 붙잡았지만 서인이 제대로 선 것을 확인한 뒤에는 별말 없이 손을 놓았다.두 사람은 천천히 복도를 걸었다.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했을 때 문이 열렸다.안에는 네댓 명이 타고 있었다.서인은 별생각 없이 발을 내딛으려 했다.그런데 움직이지 않았다.아주 잠깐이었다.스스로도 이유를 알 수 없어 그대로 서 있는 사이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닫혔다.재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닫힌 문을 한번 보고는 옆에 있는 비상계단 표지로 시선을 옮겼다.“계단으로 가죠.”서인이 그를 봤다.“여기 4층이에요.”“알아요.”“나 멀쩡해요.”재하는 이미 비상계단 문을 열고 있었다.“천천히 가면 됩니다.”서인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뒤따라 들어갔다.재하가 먼저 한 계단을 내려가 몸을 돌렸다.“와요.”“혼자 내려갈 수 있어요.”“압니다.”그러면서도 재하는 서인보다 한 계단 아래에서 내려갔다.서인이 난간을 짚고 천천히 뒤를 따랐다.---결국 이혼 신청은 하지 못했다.재하가 이미 병원에 연락까지 해둔 탓에 더 실랑이를 벌이는 것도 의미가 없었다.기본적인 검사를 받고 의사와 이야기를 나눈 뒤에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이번에도 큰 이상은 없었다.과로하지 말 것.당분간 비슷한 증상이 반복되는지 지켜볼 것.필요하다면 추가 검사를 받아볼 것.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이야기였다.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저녁이었다.서인은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내려왔다.테이블 위에는 법원에서 그대로 들고 돌아온 서류봉투가 놓여 있었다. 오후 내내 가방 안에 있었던 탓인지 한쪽 모서리가 조금 구겨져 있었다.서인은 손끝으로 그 부분을 눌러 폈다.맞은편 소파에는 재하가 앉아 있었다.“회사 안 나가요?”재하가 휴대폰에서 시선을 들었다.“오늘 일정 정리했습니다.”“나 이제 멀쩡해요.”“알아요.”“알면서 왜 안 가요.”재하가 잠시 서인
서인은 고개를 들었다.어느새 돌아선 재하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네.”재하의 시선이 서인의 얼굴에 머물렀다.“왜 그래요?”서인은 대답하려 했지만 제대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재하의 표정이 굳었다.그는 더 묻지 않고 곧바로 다음 층 버튼을 눌렀다.“잠깐만요. 내릴게요.”앞에 서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돌렸다.공간이 좁아 바로 움직이지 못하자 재하가 몸을 틀어 서인 앞의 공간부터 만들었다.“다음 층에서 내릴 거예요.”서인은 대답하지 못했다.시야 가장자리부터 흐려지고 있었다.엘리베이터가 멈췄다.문이 열렸지만 앞에 있던 사람들이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내립니다. 잠깐 비켜주세요.”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사람들이 조금씩 몸을 틀어 길을 만들었다. 재하는 서인의 팔을 잡은 채 천천히 밖으로 이끌었다.첫발은 괜찮았다.두 번째 발을 내딛다가 발을 헛디뎠다. 손에서 가방이 떨어지고 몸이 한쪽으로 기울었다.재하가 그대로 받아냈다.“한서인 씨.”서인은 반사적으로 재하의 재킷을 움켜쥐었다.바닥이 기울어지는 것 같았다. 숨을 쉬려고 할수록 호흡은 더 엉켰고, 눈앞의 윤곽이 자꾸 흐려졌다.“잠깐…….”재하가 몸을 낮췄다.“나 봐요.”서인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한서인 씨.”손등 위로 재하의 손이 덮였다.잠시 뒤 낮은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나 보라고.”짧은 말이 이상할 만큼 또렷하게 들렸다.서인은 겨우 고개를 들었다.흐릿한 시야 안으로 재하의 얼굴이 들어왔다.“숨 쉬어요. 천천히.”서인은 그의 목소리를 따라 숨을 들이마셨다.한 번.다시 한 번.처음에는 제대로 되지 않았지만 몇 차례 반복하자 짧게 끊기던 호흡이 조금씩 길어졌다.재하는 서인을 복도 한쪽 의자까지 데려가 앉혔다. 떨어진 가방을 주워 옆에 내려놓고는 서인 앞에 몸을 낮췄다.“그대로 있어요.”서인은 눈을 감았다.귓속을 채우던 이명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차갑게 식었던 손끝에도 감각이 돌아왔고, 멀리서 지나가는 발소리와 안내 방송이 다시 들리기
수요일 오후.서인은 약속한 시간보다 십 분 먼저 법원에 도착했다.차에서 내리기 전 가방 안을 한 번 확인했다. 신분증과 미리 준비해둔 서류가 차례로 들어 있었고, 도윤이 전날 보내준 확인 사항도 빠짐없이 챙겼다.입구 근처에는 재하가 먼저 와 있었다.“왔어요?”“일찍 왔네요.”“나도 방금.”재하는 혼자였다. 서인이 주변을 한번 둘러보다 물었다.“비서실은요?”“차에 있어요.”“웬일이에요.”재하가 법원 건물을 한번 올려다봤다.“이혼하는 것도 구경시켜야 합니까?”서인의 입가에 짧게 웃음이 걸렸다.맞는 말이었다.두 사람은 나란히 법원 안으로 들어갔다. 평일 오후인데도 건물 안은 제법 붐볐다. 서류봉투를 든 사람들이 민원실과 복도를 오갔고, 안내판 앞에는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층을 확인하는 사람들이 서 있었다.서인은 걸음을 옮기며 휴대폰을 꺼냈다.도윤에게 메시지가 와 있었다.[도착하셨어요?][네. 지금 들어왔어요.][서류 확인하시고 문제 있으면 연락 주세요.][알겠어요.]답장을 보내고 화면을 끄자 옆에서 재하가 물었다.“차도윤?”“네.”“오늘도 친절하시네.”“담당 변호사니까요.”“그러네요.”그게 끝이었다.재하는 더 묻지도 않았고 서인의 휴대폰을 다시 쳐다보지도 않았다.엘리베이터 앞에는 이미 사람들이 여럿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뒤 문이 열리자 앞쪽에 있던 사람들이 차례로 들어갔고, 서인도 그 틈을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재하가 마지막으로 타자 문 앞까지 사람이 찼다.서인은 안쪽 벽에 가까이 섰고 재하는 자연스럽게 그 앞에 자리했다. 한 손에는 서류봉투를 들고 있었다.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한 층 위에서 몇 사람이 내렸지만 그보다 많은 사람이 새로 들어왔다. 앞에 선 남자의 어깨가 서인 쪽으로 밀려오자 재하는 별말 없이 몸을 비스듬히 틀었다. 넓은 등이 사람들과 서인 사이를 가렸다.서인은 잠깐 그 등을 바라보다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아직 여유가 있었다.화면을 끄고 가방에 넣었다.그때부터였다.
말이 먼저 나갔다. 서인의 시선이 아주 느리게 재하에게 돌아갔다. 재하도 보고 있었다. 몇 초.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다 재하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그럴 수도 있죠.” 낮은 목소리였다. 서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재하가 태연하게 덧붙였다. “운동.” “…….” “요즘 못 했잖아요.” 서인은 그를 잠시 바라봤다. “그 얘기였어요.” “나도.” 입꼬리가 여전히 올라가 있었다. 뻔뻔한 얼굴이었다. 서인은 혀를 한번 찼다. “누가 뭐래요.” 재하가 낮게 웃었다. 서인은 그대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유리 위에 희미하게 비친 재하의 얼굴에 아직 웃음기가 남아 있었다. 차가 완만한 커브를 돌았다. 이번에는 무릎이 닿지 않았다. *** 주말이 지나자 법원에 갈 날이 가까워졌다. 월요일 오후, 서인은 차도윤의 사무실에 들렀다. 제출할 서류와 이후 절차를 마지막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도윤은 서류를 한 장씩 넘기며 필요한 부분만 짚었다. “이건 당일에 두 분 다 서명하시면 되고요.” “네.” “신분증은 꼭 챙겨 오세요.” “알겠어요.” “확인기일은 신청하고 바로 잡히는 건 아니니까 일정 나오면 다시 말씀드릴게요.” 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윤이 다음 서류를 집으려다 손을 멈췄다. 시선이 서인의 손으로 향했다. “손 베였어요?” “네?” 서인이 손을 내려다봤다. 검지 옆에 가느다란 상처가 나 있었다. 아침에 서류를 넘기다 종이에 베인 모양이었다. “아.” 도윤이 서랍을 열어 작은 밴드 하나를 꺼냈다. 서인 앞에 내려놓았다. “붙여요.” “이 정도 가지고.” “물 닿으면 따가워요.” 그 말만 하고 다시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서인은 잠시 밴드를 내려다보다 포장을 뜯었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도윤은 이미 다음 페이지를 읽고 있었다. 서인은 밴드를 붙인 뒤 펜을 들었다. “다음은요?” 도윤이 서류 한 장을 앞으로 밀었다. “이거요.” 서인은
잔 부딪히는 소리가 귓가로 밀려들었다. 웃음소리와 샴페인 향, 천장에 매달린 조명의 빛까지 한꺼번에 제자리를 찾았다. 그 한가운데 재하의 손만 여전히 허리에 남아 있었다. 서인이 옆을 돌아봤다. 재하는 이사의 말을 들으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걸고 있었다. 가끔 짧게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옆얼굴을 타고 높은 콧대에 조명이 스쳤다. 허리를 감싼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시선이 마주쳤다. 재하가 눈썹을 살짝 들었다. “왜요?” “뭐가요?” “아까부터 보길래.” 서인은 잠시 그의 얼굴을 봤다. “얼굴 좀 봤어요.” 재하의 입꼬리가 느리게 올라갔다. “마음에 들어요?” “쯧.” 서인이 고개를 돌렸다. 낮은 웃음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 그때 누군가 두 사람을 불렀다. “권 대표님, 한 전무님. 사진 한 장만 부탁드릴게요.”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몸을 돌렸다. 재하의 손이 다시 서인의 허리를 감쌌다. 이번에는 조금 더 가까웠다. 찰칵. 플래시가 터졌다. 서인은 카메라를 보며 웃었다. *** 행사는 생각보다 길었다. 사진을 몇 번 더 찍고, 후원자들과 인사를 나눴다. 재하는 중간에 재단 이사장에게 붙잡혔다. 서인이 샴페인 잔을 바꾸려던 때, 태림그룹 부회장의 아내인 정혜원이 옆으로 다가왔다. 몇 년 전부터 우진문화재단 후원 행사에서 종종 마주치던 사람이었다. “두 분은 여전히 보기 좋네요.” 서인이 웃었다. “감사합니다.” “결혼한 지 이제 삼 년 됐죠?” “네.” “아직도 신혼 같아.” 마침 돌아온 재하가 그 말을 들었다. “제가 좀 잘합니다.” 서인이 그를 돌아봤다. “뭘요?” 재하가 옆에 서며 태연하게 말했다. “결혼 생활.” 혜원이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감 좀 봐.” 서인도 잔을 들며 웃었다. “본인 평가가 좀 후해요.” 재하의 손이 다시 서인의 허리에 가볍게 얹혔다. “여보가 별말 없었으면 잘한
금요일 오후. 서인은 사무실에서 마지막 메일을 보내고 노트북을 덮었다. 시계는 5시를 조금 넘기고 있었다. 책상 한쪽에는 비서가 가져다 놓은 검은색 드레스 커버가 걸려 있었다. 오늘 저녁 일정은 우진문화재단 후원 행사였다. 한성의 자구안 협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뒤로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를 만큼 바빴지만, 오래전부터 잡혀 있던 공식 일정까지 바꿀 수는 없었다. 서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행사장은 청담동의 작은 갤러리였다. 정식 만찬보다는 후원자와 재단 관계자들이 가볍게 인사를 나누는 자리라 규모는 크지 않았다. 서인이 도착했을 때 이미 사람들이 제법 모여 있었다. 검은 드레스 위로 얇은 숄을 걸친 채 몇 사람과 인사를 나눴다. “한 전무님.” 재단 이사가 반갑게 다가왔다. “오랜만이에요.” “그러게요. 잘 지내셨어요?” “나는 똑같죠. 그런데 권 대표는?” “회사에서 바로 온다고 했어요.” “웬일이래. 오늘은 따로 오나 봐요?” 서인이 웃었다. “오늘 타이밍이 좀 안 맞았네요.” “그래도 금방 오겠죠?” “네. 거의 다 왔다고 했어요.” 그때 입구 쪽이 조금 소란스러워졌다. 서인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돌렸다. 권재하였다. 짙은 네이비 슈트에 넥타이는 없었다. 셔츠 단추를 하나 풀어놓은 탓에 평소보다 목선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조명 아래로 걸어 들어오는 얼굴은 멀리서도 선이 또렷했다. 이마에서 곧게 떨어지는 높은 콧대와 그 아래 단정하게 다물린 입술, 사람을 볼 때마다 느슨하게 휘어지는 긴 눈매까지. 반듯한 차림을 하고 있으면 차가워 보이는 얼굴인데, 오늘은 셔츠 깃이 조금 풀어진 것만으로 인상이 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아침마다 현관에서 보던 단정한 모습보다 한결 느슨했다. 재하는 입구에서 재단 관계자와 악수하고, 다가오는 사람에게 짧게 인사를 건넸다. 지나가던 여자 둘의 시선이 동시에 그쪽으로 향했다. 한 명은 걸음을 늦추며 한 번 더 돌아보기까지 했다. 서인은 다시 잔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