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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Author: 홍피코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09 15:31:53

재하의 팔이 천천히 내려왔다.

검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 시선이 서인의 얼굴에 닿아 잠시 머물렀다.

놀랐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고요했고, 그렇다고 예상했다고 하기에는 침묵이 조금 길었다.

그러나 그것도 고작 몇 초였다.

“그러죠.”

서인은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그게 전부였다.

왜냐고 묻지 않았다.

갑자기 무슨 소리냐며 몸을 일으키지도 않았고, 한 번 더 생각해보라는 흔해빠진 말조차 없었다.

조금 전까지 제 몸을 그토록 탐욕스럽게 탐하던 남자는 삼 년을 함께 산 아내가 이혼을 요구하자 너무도 간단하게 결혼의 끝을 받아들였다.

이상할 건 없었다.

그게 권재하였다.

“언제요.”

“가능하면 빨리요.”

“이번 달 안에?”

“법적으로 정리하는 건요. 발표는 조금 미뤘으면 해요.”

그제야 재하가 몸을 일으켰다.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넓은 등이 희미한 조명 아래 드러났다. 그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바지를 집어 들었다.

“한성 때문에?”

“네.”

역시 설명은 필요 없었다.

오늘 하루 종일 한성그룹의 이름이 경제면을 도배했다.

아침까지만 해도 악성 루머라던 유동성 위기설은 점심 무렵 계열사 차환 실패 가능성으로 구체화됐고, 장이 닫힐 즈음에는 신용등급 하향 검토와 채권단 공동관리라는 살벌한 단어까지 따라붙었다.

그제야 서인은 알았다.

아버지가 지난 몇 달 동안 숨겨온 ‘조금 어려운 상황’이 실은 한성 전체의 숨통을 죄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붙잡은 동아줄이 어디인지도.

정확히는 권재하가 아니라,

그의 뒤에 있는 우진그룹이었다.

“아버지가 연락했죠?”

바지를 입던 재하의 손이 아주 잠깐 멎었다.

“네.”

“언제요.”

“오늘 오후.”

“뭐라고 하셨어요?”

“본인이 말씀 안 하셨습니까?”

“제가 들은 얘기랑 재하 씨한테 한 얘기가 같은지 모르잖아요.”

재하가 피식 웃었다.

“도와달랍니다.”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그런데 막상 그의 입을 통해 듣자 속이 서늘하게 식었다.

서인은 침대 위에 흐트러진 시트를 가슴께까지 끌어올렸다.

조금 전까지 아무렇지 않게 서로의 맨몸을 맞대고 있던 사이에 새삼스러운 행동이었다.

그래도 이제부터는 그편이 맞을 것 같았다.

“도와주지 마요.”

재하가 눈을 들었다.

“왜요.”

“그 돈 한 번 들어가면 끝이 아닐 테니까.”

“알고 있습니다.”

“한성이 살아나든 망하든 한성에서 해결할 일이에요. 우진까지 끌어들이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이혼하자는 겁니까?”

“그것도 있고요.”

재하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서인을 바라봤다.

그 시선에는 애틋함도, 배신감도 없었다.

새로운 조건 하나를 받아든 사람이 손익을 가늠하듯 조용하고 차가웠다.

서인은 그 모습이 싫지 않았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좋습니다.”

재하가 먼저 시선을 거뒀다.

“그럼 안 돕죠.”

“……그렇게 쉽게요?”

“어렵게 해야 합니까?”

“아뇨.”

서인은 더 묻지 않았다.

이래서 그와의 결혼이 편했다.

괜찮냐는 위로도 없었다.

혼자 감당할 필요 없다는 다정한 참견도 없었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호의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밀어붙이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서로에게 필요한 만큼만.

약속한 만큼만.

선을 넘지 않을 만큼만.

지난 삼 년 동안 두 사람이 부부로서 지켜온 거의 유일한 원칙이었다.

그리고 그 원칙은,

결혼을 끝내는 순간에도 놀라울 만큼 잘 지켜지고 있었다.

결혼의 시작부터 그랬다.

한성과 우진이 서로를 필요로 했다.

그리고 마침 양가에는 결혼 적령기의 자식이 하나씩 있었다.

그게 전부였다.

두 사람은 오래전부터 서로의 얼굴 정도는 알았다.

같은 식탁에 앉은 적도 있었고, 같은 파티에서 각자 다른 사람의 팔짱을 낀 채 스쳐 지나간 적도 있었다.

그뿐이었다.

서인은 재하가 누구와 연애하는지 궁금하지 않았고, 재하 역시 서인의 연애사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러다 결혼 이야기가 나왔다.

그날 두 사람은 호텔 라운지에서 마주 앉아 서로의 얼굴보다 테이블 위 계약서를 더 오래 바라봤다.

먼저 입을 연 건 재하였다.

“결혼, 할 겁니까?”

서인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네. 재하 씨는요?”

“저도 상관없습니다.”

그게 프러포즈였다.

낭만이라고는 지독하게도 없었다.

대신 거짓말도 없었다.

서인은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두 사람 모두 이 결혼에 사랑 같은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양가가 원하는 자리에 함께 서고, 필요한 순간 배우자의 역할을 하고, 서로의 사생활에는 필요 이상으로 관여하지 않는 것.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명확했다.

그래서 편했다.

결혼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필요한 공식 석상에는 함께 나타났다.

카메라가 가까워지면 자연스럽게 팔짱을 꼈고, 기자가 금슬을 묻기라도 하면 적당히 눈을 맞추며 웃었다.

결혼기념일이면 선물이 오갔다.

물론 대부분 서로의 비서가 골라준 것이었다.

서인은 첫 번째 결혼기념일에 재하가 보내온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받고 곧바로 비서에게 전화했다.

“이거 재하 씨가 골랐어요?”

잠깐의 침묵 끝에 난처한 대답이 돌아왔다.

대표님께서 최종 확인은 하셨다는.

서인은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자신도 별반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해 재하에게 보낸 시계 역시 서인의 비서가 후보를 세 개쯤 추려온 것 중 하나였다.

그런 식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이상한 결혼일지 몰랐지만 두 사람에게는 아니었다.

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상대의 귀가 시간을 묻는 대신 먼저 침실 불을 껐다.

주말 일정도 각자였다.

서인은 친구를 만났고 재하는 골프를 치거나 일을 했다.

저녁 시간이 겹치면 함께 식사했고, 아니면 각자 먹었다.

어디에 있는지 묻지 않았다.

누구와 있는지도.

굳이 알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사랑하지 않았기에 서운할 일도 없었다.

기대하지 않았기에 실망할 일은 더더욱 없었다.

그렇게 삼 년.

두 사람은 꽤 훌륭한 부부였다.

단 하나.

계약서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았던 일이 예상 밖으로 훌륭했다.

잠자리였다.

첫날부터 그랬다.

취향도.

호흡도.

서로가 원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속도까지.

몸에 관한 한 두 사람은 기묘할 정도로 잘 맞았다.

처음에는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두 번째쯤에는 운이 좋다고 생각했고,

그 이후로는 굳이 이유를 생각하지 않았다.

좋으면 된 일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어디를 만져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숨이 흐트러지는지.

어디까지 몰아붙여야 상대가 견디지 못하는지.

삼 년이면 서로의 몸을 외우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사랑은 없어도 욕망은 있었다.

그것도 꽤 많이.

그래서 각자의 생활을 하다가도 침대에서는 종종 마주쳤다.

서인이 먼저 재하의 침실을 찾는 날도 있었고, 재하가 아무렇지 않게 서인의 방문을 여는 날도 있었다.

그날따라 상대가 필요하면 잤다.

아니면 자지 않았다.

다음 날에는 다시 평소대로 돌아갔다.

누가 먼저였는지 따지는 일도,

어젯밤에 특별한 의미를 붙이는 일도 없었다.

그것 역시 두 사람에게는 꽤 이상적인 방식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이 결혼이 생각보다 오래 편안했는지도 몰랐다.

사랑이 없어도 불편하지 않았고, 사랑이 없어서 오히려 편한 것들도 있었다.

서인은 그게 꽤 괜찮은 결혼이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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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혼 전 금욕주의   2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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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혼 전 금욕주의   19화

    말이 먼저 나갔다. 서인의 시선이 아주 느리게 재하에게 돌아갔다. 재하도 보고 있었다. 몇 초.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다 재하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그럴 수도 있죠.” 낮은 목소리였다. 서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재하가 태연하게 덧붙였다. “운동.” “…….” “요즘 못 했잖아요.” 서인은 그를 잠시 바라봤다. “그 얘기였어요.” “나도.” 입꼬리가 여전히 올라가 있었다. 뻔뻔한 얼굴이었다. 서인은 혀를 한번 찼다. “누가 뭐래요.” 재하가 낮게 웃었다. 서인은 그대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유리 위에 희미하게 비친 재하의 얼굴에 아직 웃음기가 남아 있었다. 차가 완만한 커브를 돌았다. 이번에는 무릎이 닿지 않았다. *** 주말이 지나자 법원에 갈 날이 가까워졌다. 월요일 오후, 서인은 차도윤의 사무실에 들렀다. 제출할 서류와 이후 절차를 마지막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도윤은 서류를 한 장씩 넘기며 필요한 부분만 짚었다. “이건 당일에 두 분 다 서명하시면 되고요.” “네.” “신분증은 꼭 챙겨 오세요.” “알겠어요.” “확인기일은 신청하고 바로 잡히는 건 아니니까 일정 나오면 다시 말씀드릴게요.” 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윤이 다음 서류를 집으려다 손을 멈췄다. 시선이 서인의 손으로 향했다. “손 베였어요?” “네?” 서인이 손을 내려다봤다. 검지 옆에 가느다란 상처가 나 있었다. 아침에 서류를 넘기다 종이에 베인 모양이었다. “아.” 도윤이 서랍을 열어 작은 밴드 하나를 꺼냈다. 서인 앞에 내려놓았다. “붙여요.” “이 정도 가지고.” “물 닿으면 따가워요.” 그 말만 하고 다시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서인은 잠시 밴드를 내려다보다 포장을 뜯었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도윤은 이미 다음 페이지를 읽고 있었다. 서인은 밴드를 붙인 뒤 펜을 들었다. “다음은요?” 도윤이 서류 한 장을 앞으로 밀었다. “이거요.” 서인은

  • 이혼 전 금욕주의   1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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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혼 전 금욕주의   17화

    금요일 오후. 서인은 사무실에서 마지막 메일을 보내고 노트북을 덮었다. 시계는 5시를 조금 넘기고 있었다. 책상 한쪽에는 비서가 가져다 놓은 검은색 드레스 커버가 걸려 있었다. 오늘 저녁 일정은 우진문화재단 후원 행사였다. 한성의 자구안 협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뒤로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를 만큼 바빴지만, 오래전부터 잡혀 있던 공식 일정까지 바꿀 수는 없었다. 서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행사장은 청담동의 작은 갤러리였다. 정식 만찬보다는 후원자와 재단 관계자들이 가볍게 인사를 나누는 자리라 규모는 크지 않았다. 서인이 도착했을 때 이미 사람들이 제법 모여 있었다. 검은 드레스 위로 얇은 숄을 걸친 채 몇 사람과 인사를 나눴다. “한 전무님.” 재단 이사가 반갑게 다가왔다. “오랜만이에요.” “그러게요. 잘 지내셨어요?” “나는 똑같죠. 그런데 권 대표는?” “회사에서 바로 온다고 했어요.” “웬일이래. 오늘은 따로 오나 봐요?” 서인이 웃었다. “오늘 타이밍이 좀 안 맞았네요.” “그래도 금방 오겠죠?” “네. 거의 다 왔다고 했어요.” 그때 입구 쪽이 조금 소란스러워졌다. 서인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돌렸다. 권재하였다. 짙은 네이비 슈트에 넥타이는 없었다. 셔츠 단추를 하나 풀어놓은 탓에 평소보다 목선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조명 아래로 걸어 들어오는 얼굴은 멀리서도 선이 또렷했다. 이마에서 곧게 떨어지는 높은 콧대와 그 아래 단정하게 다물린 입술, 사람을 볼 때마다 느슨하게 휘어지는 긴 눈매까지. 반듯한 차림을 하고 있으면 차가워 보이는 얼굴인데, 오늘은 셔츠 깃이 조금 풀어진 것만으로 인상이 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아침마다 현관에서 보던 단정한 모습보다 한결 느슨했다. 재하는 입구에서 재단 관계자와 악수하고, 다가오는 사람에게 짧게 인사를 건넸다. 지나가던 여자 둘의 시선이 동시에 그쪽으로 향했다. 한 명은 걸음을 늦추며 한 번 더 돌아보기까지 했다. 서인은 다시 잔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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