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실언했다는 것을 깨달은 하연은 잠시 어색해졌지만, 곧 아무 일 없었던 듯 냉정함을 되찾았다. “축하 인사가 늦었지만 동생이 생긴 걸 축하해. 곧 그 애가 널 형이라고 부를 날도 머지않았네.” 남준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초의 불빛을 응시하며 잠시 눈을 감았다. ‘내가 이렇게 유치한 생일을 마지막으로 보낸 게 언제였더라? 아마 유치원 때였던 것 같아.’ 송혜선은 아들의 생일을 챙기지 않았다. 그녀는 남자는 어릴 때부터 독립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생일 같은 사소한 일에 얽매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치원에서는 선생님이 남준의 생일을 기억하고, 반 친구들과 함께 생일 파티를 열어줬다. “소원을 빌어봐, 남준아.” 그때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는 남준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아마도 매일 아버지를 보고 싶다는 소원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일을 알게 된 송혜선은 유치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곧바로 다른 유치원으로 전학시켰다. 엄격한 교육 아래에서 자란 남준은 친구를 사귈 기회조차 거의 없었다. 이후 그는 스스로 생일을 챙기는 일을 멈췄다. “무슨 소원을 빌었어?” 눈을 뜨자 하연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소원을 말하면 안 이루어진다던데.” 남준은 촛불을 불었다. “사실 그렇게 궁금한 건 아니야.” 하연은 몇 초를 기다리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생일은 챙겨줬으니, 이제 가볼게.” 하연의 핸드폰이 계속 진동을 했다. 아마 하성이 재촉하는 연락일 것이다. “잠깐.” 남준이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불렀다. 하연은 뒤를 돌아보며 그를 쳐다봤는데, 여전히 남준은 뭔가를 바라는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생일 선물은?” 그 한마디에 하연은 웃음이 터질 뻔했다. ‘이 사람은 얼굴이 얼마나 두꺼운 걸까? 생일 선물을 대놓고 요구하다니.’ “생일도 챙겨줬으니까 작은 선물이라도 주고 가는 게 맞지 않겠어? 하연 씨?” 남준
몇 개의 테이블을 두고 있었고, 하연은 단지 정다영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람이 여성이라는 것만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볼 때는, 경매 가능성은 없을 것 같아. 이 유물은 정씨 가문의 가보가 아닌 것 같아. 그렇다면 정다연 맞은편에 있는 저 여자가 바로 유물의 주인일 가능성이 커.” 가흔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계획을 세웠다. 그녀는 가흔과 함께 방 하나를 잡고, 근처에 있던 웨이터를 불렀다. “실례지만, 옆 테이블에 있는 두 여성분이 커피를 시키셨나요?” 웨이터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나갔다면, 한 잔씩 더 리필 해준다고 하면서 다시 주시겠어요.” 하연은 말하며, 미니카메라를 웨이터의 옷깃에 몰래 고정하고 돈을 그의 주머니에 넣었다. “당신이 잘 해낼 거라 믿어요.” 웨이터는 잠시 망설였지만, 돈의 액수가 꽤 컸기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10분 뒤, 웨이터는 돌아왔고, 임무는 성공적이었다. 카메라 화면 속, 정다영 맞은편에 앉아 있던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여자의 행동 하나하나에는 우아함이 묻어났고, 기품 있는 중년 여인의 풍모를 풍기고 있었다. 그 여자도 잠시 몰래 카메라를 쳐다보았다. 하연은 화면을 멈추고 가흔에게 물었다. “이 여자 본 적 있어?” “아니, 기억에 없는데.” 하연도 낯선 얼굴이어서 바로 그 여자의 사진을 찍어 하경의 이메일로 보냈다. [오빠, 이 사람 좀 조사해 줘.] 정다영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 게다가 F국에 흔적이 없는 사람이면 결코 평범하지 않을 터였다. 하연의 모든 연락은 하경의 특별 관리 대상에 포함되어 있었기에 그는 곧 메시지를 확인하고 신원을 조회했다. [허징인. 현지인이 아니야. 원래 화교 출신인데 결혼하고 동남아로 이주해서 지금까지 거기에 정착했어.]하경이 전화로 빠르게 하연에게 필요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허징인을 왜 조사해?] 하연은 잠시 고민하다 물었다. “허징인의 남편은 누구예요?”
사람들로 북적이는 복도. 벌써 많은 이들이 몰려들어 웅성거리고 있었다. 누군가 놀라 소리쳤다. “피가 난다!” 하연은 다급히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안으로 들어갔다. 커튼을 걷자, 화려한 귀부인 차림의 송혜선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녀의 허벅지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고, 상태는 심각해 보였다. “살인이다! 이건 살인이야!” 송혜선은 비명을 지르며 소리쳤다. “내 아이... 제발, 내 아이를 구해주세요!” 테이블 위에는 깨진 잔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실랑이가 벌어진 흔적이 역력했다. 조진숙은 침착하게 송혜선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119에 전화를 걸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태도는 단호했다.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억울한 일을 당했다면 곧 진실히 밝혀질 테니까. 내가 이렇게 만들지 않았어요... 여보세요, 여기는 XX로 카페입니다. 한 임산부가 유산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빨리 와주세요.” 전화를 끊고 나서도 조진숙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하연은 그녀 쪽으로 달려갔다. “진숙 이모, 괜찮으세요?” 조진숙은 하연을 보자 눈빛이 반짝였다. “하연아, 네가 여긴 웬일이니? 내가 이렇게 한 게 아니야. 그저 사고일 뿐이야...” 하지만 송혜선은 하연을 보더니 더 흥분하기 시작했다. “뭐야! 너희들! 이거 다 너희들이 짜고 한 짓이지! 너희들은 내 아이가 태어나면 상혁의 자리를 뺏길까 봐 두려운 거잖아! 상혁이가 혹시 너희들한테 이렇게 하라고 시켜서 이런 짓을 한 거지!” 하연은 송혜선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으려 했고, 조진숙을 한쪽으로 부축해 앉혔다. “이모,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조진숙은 두 손을 떨며 말했다. “송혜선 저 여자가 나를 초대했지만 내가 무시했다. 그런데 오늘 갑자기 찾아와서는 상혁이를 설득해서 아이를 낳게 해달라고 하잖아. 만약 내가 송혜선 저 여자가 임신한 줄 알았다면, 만나지도 않았을 거야.” 하연은 조진숙의 자존심을 알았다. 아무리 화가 나고 원망스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나요? 사고가 난 방의 CCTV가 고장 났다니요.” 상혁은 남준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남준도 질세라 맞섰다. “그 말은 제가 형님께 오히려 하고 싶은 말입니다. 형님, 그리고 진숙 이모.” 조진숙은 그 말을 듣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 했다. “부남준, 너도 잘 알잖아. 네가 여기에서 무사히 자란 건 다 내 덕분이라는 걸!” 만약에 조진숙이 정말 송혜선과 남준을 해치고 싶었다면,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지만, 그동안 한 번도 그런 수단을 쓰지 않았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여보, 여보...” 부동건이 조진숙을 진정시키며 막았다. “남준이가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야. 그냥 아직도 철이 없어서 조금 성급했을 뿐이야.” 그러나 조진숙은 부동건을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히 말했다. “이제 내가 직접 증명해야 하는 건가? 분명히 말하지만. 송혜선이 나를 어떻게 비난하든, 난 그런 짓을 한 적이 없다고.” 부동건은 조진숙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았지만, 켜진 수술실의 불빛은 눈이 부실 정도로 밝아서 부동건도 역시 마음이 조급했다. 부동건은 전화를 받고 병원에 가장 좋은 전문의를 요청해 송혜선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상혁은 카페 점장을 향해 차갑게 지시를 내렸다.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웨이터와 손님들을 조사하고, CCTV를 복원을 하던 당시의 진실을 찾아내도록 하세요. 그리고 반나절 안에는 답을 내놔야 해요.” 점장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막 떠나려는 점장을 상혁이 다시 불러 세웠다. “남준아, 네가 믿을 만한 사람 한 명을 붙여서 공정성과 투명성을 확보해.” 남준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형님이 공정하게 처리하실 텐데, 그 거면 전 충분해요. 그리고 굳이 저까지 나서서 그렇게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상혁은 단호히 덧붙였다. “아니야 꼭 필요해. 만약 어떤 실수라도 생긴다면, 그리고 그게 네 어
“친해졌냐니?” 하연은 얼버무리려 하며 코끝을 만졌다. “이야기 몇 번 나눈 적 있는 사이죠. 그냥 아는 사람 정도?” “그래? 그럼 난 남인가 보네. 그런 사실도 모르고 있고.” 상혁의 목소리는 냉랭해졌고, 기분이 상한 게 분명했다. 하연은 그 말에 피식 웃으며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부상혁 대표님, 질투하시나 봐요.” “나 같은 남하고 친하게 굴지 마.” 상혁은 그녀를 밀어냈지만, 하연은 더 강하게 안겼다. “당신이 남이라면, 내겐 ‘내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죠.” 예전의 하연이라면 한 번 밀치면 더 다가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행동은 상혁의 기분을 한껏 들뜨게 했다. 상혁은 흥미로운 듯 하연의 긴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쓸어올렸다. “어떻게 오늘 커피숍에 있었던 거야?” 하연은 숨길 생각 없이 빠르게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정규인의 아내 허징인이 지금 여기에 있더라구요. 그런데 참 묘하죠. 고경수의 딸이 죽자마자 허징인이 나타났고, 게다가 정다영에게 도움을 요청하다니. 둘이 그렇게 친한 사이였을까요?” 상혁은 여전히 말없이 하연의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살며시 만지고 있었다. 하연에게 머리카락은 가장 소중한 것이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비단처럼 부드럽고 매끄러워 눈길을 사로잡았다.“왜 아무 말도 안 해요?” 하연은 그의 품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때, 상혁은 누구의 시선을 느끼며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마침 남준이 병원에서 나오고 있었고, 상혁이 타고 있는 차를 노려보고 있었다. “우리 안 만난 지 얼마나 됐더라?” 상혁이 갑작스레 물었다. 하연은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삼사일쯤 됐나요?” 사실 그렇게 오래된 건 아니었다. 상혁은 갑자기 하연의 머리를 손으로 고정시키며 입술을 맞추었다. 혀끝이 그녀의 입술을 열며 들어왔다. 상혁의 키스는 뜨겁고 부드러웠다. 하연은 얕은 신음을 내며 그의 셔츠를 움켜쥐었다. 상혁은 깊은 몰입 속에서 창문이 살
밤늦게 상혁은 조진숙의 호출을 받고 그곳으로 향했다. “상혁아, 그 여자... 임신한 거 넌 이미 알고 있었지?” “네.”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 조진숙이 분노로 목소리를 높였지만, 상혁은 여전히 차분했다. “말씀드렸다 한들, 어머니가 뒤에서 무슨 일이라도 꾸미셨겠어요? 게다가 어머니가 뒤에서 손을 쓰실 분도 아니시잖아요. 정작 마주하고도 아무런 행동을 안 하셨잖아요.”“예전에 내가 남준이를 건드리지 않은 건, 송혜선이 철벽처럼 남준이를 지켜주고 있었기 때문이야. 부씨 가문의 혈육이라는 든든한 배경을 등에 업고 있었으니 내가 함부로 나설 수 없었지. 하지만 지금은 고작 형체도 보이않는 뱃속에 있는 아이일 뿐이야. 내가 손을 쓰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렵겠니?”조진숙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거실을 오가며 발을 구르듯 걸었다. “미쳤나 봐. 네가 이사회 자리를 되찾은 것도 송혜선의 임신과 무관하지 않을 텐데.” 상혁은 대답하지 않았고,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가로등 아래, 차가 조용히 서 있었다. 하연은 뒷좌석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 원래 하연이도 상혁과 함께 들어가겠다고 했지만, 일이 복잡해질 것을 우려한 상혁이 그녀를 말렸다. 하루 종일 피곤했는지 깊이 잠든 하연의 모습을 바라보는 상혁의 마음은 괜히 짠했다.“반백의 나이에 늦둥이를 보겠다니, 네 아버지가 기뻐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야. 다만 송혜선 뱃속의 아이가 누구 아이인지나 확실히 알았으면 좋겠어.” 조진숙의 독설에 상혁은 눈길을 들었다. “어머니도 아시나요?” “뭘 안다는 거니? 그 여자가 얼마나 방탕한지를? 네 표정만 봐도 내 추측이 맞나 보네.” 조진숙은 비웃으며 몸을 돌렸다. “너희 아버지는 벌써 그 나이에 온갖 병을 달고 살잖니. 그런 상황에서 여자를 임신시킨다는 게 쉬운 일이겠니? 게다가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건, 송혜선이 외부에 다른 남자를 두고 있다는 말이잖아.” 그녀는 다시 묻듯 말했다. “상혁아, 이 일 어떻게 처리할
예전 같았으면 하연은 뭔가 이유를 붙여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말문이 막혀 주제를 돌렸다. “오빠, 주씨 가문 쪽에도 허락을 받았어요?” 이런 가문에서 자연스럽게 연애를 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인데, 가족들의 동의를 얻는 건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특히, 예전처럼 주씨 가문이 관대하지 않은 지금의 상황에서는 더욱 그랬다. “될 거야.” 하경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애초에 첫 만남부터 선 자리였잖아.” 하연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덧붙였다. “그런데 오빠, 진지하게 생각해봐요. 주슬기 씨가 상혁 오빠에게 호감을 보이는 것 같고, 오빠는 내 친오빠잖아요...” 하경은 하연의 말을 도중에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걱정 마. 어떤 상황에서도 나는 네 편이야.” 하연은 순간 할 말을 잃었고, 대신 억지로 웃음만 지어 보였다....며칠 후, 송혜선은 병원에서 퇴원했다. [회장님, 저 이 상태로는 보름, 아니 열흘도 혼자 있는 건 불안해서 안되겠어요. 집에 의사 선생님 한 분이 계속 대기하게 하면 안 될까요?] “알고 있어. 이미 연락해뒀으니 집에 가서 푹 쉬기만 하면 돼.” 부동건은 전화를 받으며 바쁜 목소리로 답했다. 송혜선은 옆에서 사과를 깎던 부남준과 눈이 마주쳤다. 그 말은 곧 상혁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상혁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일을 보고받고 있었다. “진행 상황은 순조롭습니다. 이미 부씨 가문 본가로 성공적으로 들어갔습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상혁은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금융위원회에서 오늘 임시 회의가 열렸는데요. 명단을 보니 왕씨 가문의... 아, 한명준 씨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상혁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 사람이 왜 거기에 포함 되 있는 건데?” “지금 양국 간 신재생에너지 프로젝트를 맡고 있어서입니다. 한명준 씨는 이제 왕씨 가문으로 돌아가 신분 상승을 했으니, 명단에 들어가 있는 것이 이상하지는 않습니다.” 원신민은 자세히 설명을
공장은 대부분 외곽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고, 수백 묘에 달하는 광활한 땅이 한눈에 들어와 장관을 이루었다. “부 대표님, 주 대표님, 보시다시피 이 공장은 이미 규모를 갖추었고, 지난 몇 년간의 성과는 누구나 인정할 만합니다. 올해 우리 시의 GDP에 기여한 비중도 상당할 겁니다.” 한 사장은 환하게 웃으며 자랑스러운 어조로 설명을 이어갔다. 참관하는 동안 눈여겨볼 점이 많았고, 하연은 뒤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꼼꼼히 메모를 남겼다. “조 사장님의 말씀, 제가 금융위원회 위원장님께 꼭 전하겠습니다.” 부 대표의 말에 한 사장은 얼굴이 환해지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부 대표님, 과찬이십니다. 저희는 부 대표님의 인정을 받는 것만으로도 이미 큰 영광입니다.” 너무 노골적인 아부에 하연은 차오르는 웃음을 억누르느라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옆에 있던 손이현이 하연을 흘끗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HD그룹의 프로젝트는 남산에 있습니다. 공장은 이미 기본적인 규모와 초석은 잘 갖춰졌으니, 나중에 하연 씨가 한 번 방문해서 조언을 주시면 좋겠습니다.” 하연은 입술을 살짝 다물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건 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네요. HD그룹은 업계 선배이고, 저희 회사는 이 분야에서는 아직 신입이라 드릴 조언이 없을 것 같아요.” 이현이 미소를 머금으며 덧붙였다. “이번 프로젝트는 제가 전적으로 맡은 것이고, HD그룹 본사는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이 말에 하연은 약간 놀라 눈길을 돌렸다. 이현이 독립적으로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한참을 망설이던 하연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축하드려요.”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는 지나치게 눈길을 끌었다. 마침 이 장면을 스치듯 목격한 상혁이 시선을 돌려 말했다. “최 사장님.” “네!” 하연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상혁은 차분한 표정으로 이어갔다. “조 사장님이 방금 설명한 이 기계의 개념에
상혁은 말없이 부동건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지나간 모든 일들이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머릿속으로 한 파래임 한 파래임 스쳐 지나갔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마음을 다잡은 상혁은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 “네, 알겠습니다.” 부남준 사건은 예정대로 재판이 열렸다. 부씨 가문은 변호사를 통해 대응했지만, 형사 사건인 만큼 얽히고설킨 진실을 밝히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DL 그룹, 최상층 대표실.상혁은 혼자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거대한 도시가 한눈에 들어왔다. ‘결국 이 순간이 오는구나.’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곧 원신민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대표님, 재판 끝났습니다.” 상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끼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판결 나왔어?” “예상대로입니다. 다시는 못 일어날 겁니다.” 원신민의 말은 고요했던 상혁의 마음에 작은 돌을 던진 것처럼 퍼져나갔다. 두 사람의 목숨과 확실한 증거. 이미 알고 있던 결말이었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다가오니 상혁도 묘한 허탈함이 밀려왔다. “부 회장님도 알고 계시나?” “예,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기절하셨지만, 다행히 지금은 안정을 되찾으셨고요.” 원신민은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송 여사는 재판하는 그 자리에 있었는데, 판결 듣자마자 바로 떠났어요.”부동건에게 쫓겨난 후, 송혜선은 과거의 화려함을 모두 잃었다. 부동건은 그녀에게 줬던 모든 부동산을 회수했고, 카드 계좌까지 정지시켰다. 이제 송혜선에게는 남은 보석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고 있을 뿐. 상혁은 가늘게 눈을 좁혔다. ‘재판에 온 건 놀랍지 않지만... 반응이 이 정도로 끝났다는 게 아무래도 수상해.’ 경계를 늦추지 않고 바로 상혁은 차갑게 말했다. “송혜선 감시 붙여. 또 무슨 일 일으키기 전에.” 원신민은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어둡고 습
비틀거리던 부동건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정신 차려... 이 순간만은 피하지 말자.’ 그는 느릿한 걸음으로 상혁 쪽으로 다가갔다. 서서히 가까워지는 거리. 마침내 눈앞에 다다라 멈춰 섰을 때, 두 사람의 시선이 정확히 맞닿았다. 부동건은 말하고 싶은 게 많았지만, 막상 눈을 마주하니,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부동건은 깊은숨을 들이쉬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상혁아. 그동안, 너랑 너희 어머니한테 내가 너무 못했다.”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들었다. 그날, 그 선택이 결국 우리 가족을 무너뜨린 거야.’ 사실, 부동건은 이혼하던 날부터 이미 후회하고 있었다. 그 후로의 모든 시간은, 그저 체면과 자존심을 위한 연기였을 뿐이다. 지금 이 꼴이 된 건... 결국 하늘이 내린 벌이었다. ‘자업자득이야. 이 모든 건 내가 자초한 거니까.’ 상혁은 조용히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엔 적당한 거리감과 냉정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게 이제 와서 중요하진 않아요. 저도, 어머니도... 이미 오래전에 마음 정리했어요.” 그 말에 부동건은 눈을 감았다. 눈가에 뜨거운 기운이 차오르는 걸 애써 참았다. “그래. 마음 내려놨다니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잠시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던 부동건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한 서류봉투를 꺼냈다. 그리고 곧장 상혁에게 건넸다. “이제 나도... 나이가 들었고, 더는 회사를 끌고 나갈 힘이 없다. DL그룹은 내가 처음부터 세운 회사다.”“내 모든 시간과 인생이 들어간 곳이지. 하지만 이제는 놓아야 할 때가 왔다.” 상혁은 망설이듯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런 상혁의 손에 부동건은 서류를 억지로 쥐여주며 아들의 손등을 두드렸다. “앞으로는... 네가 이끌어가야 한다.” 그 손길엔 조용한 무게와 책임, 그리고 사죄가 담겨 있었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입꼬리를 살짝 움직이던 부동
상혁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살짝 웃음을 지었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검진을 마친 뒤, 하연은 선명한 초음파 사진을 손에 들고 있었다. 사진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손끝으로 사진 속 동그란 그림을 가리켰다. “여기 봐봐요. 이게 우리 아기래요.” 목소리엔 설렘과 떨림이 그대로 묻어났다. 상혁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하연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눈엔 이미 감동이 차올라 있었다. 상혁은 조심스레 하연의 아랫배에 손을 얹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이 순간... 난 정말 너무 행복해.” ‘네가 내 옆에 있고, 우리 아이가 이렇게 자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야.’ 하연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남자아기일까요, 여자아기일까요?” 그녀의 눈빛에는 이미 사랑스러운 미래가 그려지고 있었다. 상혁은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어.” 하연은 고개를 살짝 돌려 상혁을 바라봤다. 그 눈동자엔 별빛이 머물러 있는 듯 반짝였다. “그래요... 건강하게만 태어나면... 그걸로 충분해요.”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았고, 서로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따뜻함을 느꼈다. 그 순간, 상혁의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진동했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하곤 순간 눈빛이 깊어졌다. 화면엔 낯익은 이름이 선명히 떠 있었다. [부동건.]‘이 타이밍에...?’ ‘설마 무슨 일 생긴 건가?’ 지난 연회 이후, 부동건과는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의 파장이 얼마나 컸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송혜선과 조봉규. 그 두 사람 때문에 무너진 자존심. 그리고 결국, 부동건은 송혜선을 아이와 함께 본가에서 내쫓았다는 소문까지 들려왔다. 하연이 조용히 말했다. “받아봐요. 무슨 일일 수도 있으니까.” 상혁은 하연의 손등을 가볍게 토닥이고, 그녀를 옆에 있는 의자에 앉힌 후
부동건은 갑작스레 거칠게 기침을 터뜨렸다. “컥”‘피 맛...?’ 목 안에서 치밀어 오르는 피비린내를 억지로 삼켰다. 손등에 핏줄이 선명히 드러나고, 이성의 끈은 이미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부동건의 시선이 천천히 송혜선과 조봉규를 향했다. ‘죽여버리고 싶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너희들... 너희들...” 부동건의 입술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송혜선은 극도의 공포에 휩싸였다. ‘이건 아니야... 이렇게 끝나면 안 돼...’ 그녀는 급히 앞으로 다가가 부동건의 팔을 붙잡았다. “회장님... 우리, 조 선생님이랑 그냥 산후 회복 얘기하던 중이었어요. 진짜예요, 저희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부동건의 손이 송혜선의 뺨을 후려쳤다. 짝! 순간 정적. 강하게 내리친 손바닥 소리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숨을 멈춘 듯 조용해졌다. 송혜선의 얼굴 한쪽이 순식간에 붉게 부어올랐다. 눈가가 덜덜 떨리며, 눈물도 같이 맺혔다. “이 천하의... 배은망덕 같은 것. 내가 너를 어떻게 믿었는데... 감히 날 기만해?” 뒤에 서 있던 하객들 사이에서도 탄식이 흘러나왔다. “저 정도였어?” “저게 진짜였네... 소문이 아니고...” “...”송혜선은 뺨의 통증을 애써 무시한 채, 다시 붙잡았다. “회장님, 제발... 오해예요. 저희 그런 사이 아니에요. 저는... 당신뿐이었어요.” 그러나 부동건은 그 손마저 거칠게 뿌리쳤다. 그리고는 힘껏 송혜선의 복부를 발로 찼다. 퍽!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송혜선은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그녀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조봉규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아니야... 지금 나섰다간 나도 끝장이야.’ 한 걸음 다가가려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회... 회장님... 저희...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하지만 그 한마디가 기름을 붓는 꼴이 됐다. 부동건은 그대로 조
일 순간 충격의 정점이었다.부동건은 들고 있던 와인잔을 그대로 바닥에 내던졌다. 쨍그랑! 깨지는 소리와 동시에 모든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저... 저런 미친...!” 그는 화면을 가리키며, 얼굴을 붉힌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숨이 거칠게 턱 끝까지 차올랐다. ‘송혜선... 네가 감히!’ 주변 하객들도 이미 술렁이기 시작했다. “저게 진짜야?” “부 회장님 딸이... 아니라고?” “와... 이건 완전히 생각지도 못한 미친 패륜이야, 상상도 못 했어.” 오늘의 연회는 더없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지만, 이제 와선 최악의 스캔들 파티가 되어버렸다. ‘이 연회가... 전부 거짓된 일 때문에 생긴 일이란 말이야?’ ‘우리, 사기당한 거네. 다 같이.’ 그때 스크린이 멈췄고, 연회장 전체의 조명이 다시 환히 켜졌다. 하객들은 본능적으로 두리번거리며 부동건을 찾았다.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하지만 부동건은 아무런 대답 없이 어금니를 꽉 물고, 몸을 떨며 계단 쪽으로 향했다. 하객들은 그 뒤를 따라붙었다. ‘뭔가 일어나겠군...’ ‘이번엔 진짜 끝장이다.’ ...같은 시각, 2층 방 안. 송혜선은 조봉규의 손등을 다독이며 조용히 말했다. “조금만 참아. 며칠만 지나면 내가 다시 올게.” 조봉규는 싱긋 웃으며, 그녀의 허벅지를 장난스럽게 움켜쥐었다. “응. 기다릴게, 자기.”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문이 거칠게 흔들렸고,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쾅!! “송혜선! 당장 안 나와?!” 송혜선의 온몸이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조봉규의 팔을 꽉 잡았다. ‘망했다.’ “어떡해, 부동건이 올라왔어.” 두 사람은 당황하며 방 안을 둘러봤지만, 창문 하나 없는 좁은 방엔 도망칠 곳조차 없었다. ‘안 돼... 이렇게 들키면, 끝장이야. 정말 끝이야.’ 송혜선은 급하게 숨을 고르며 애써 이성을 붙잡으려 했다. ‘진정해. 침착해야 돼.
연회장 안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부동건은 손에 잔을 들고, 연신 들어오는 축하 인사에 밝은 표정으로 답하고 있었다. “회장님, 따님이 너무 예뻐요. 축하드립니다!” “아이고, 이런 경사는 자주 있어야죠!” ‘그래, 이 정도면 완벽하지. 오늘은 그 누구도 나를 흔들 수 없어.’ 그렇게 술이 한 잔, 두 잔 더해지며 연회장의 분위기도 점점 무르익고 있었다. 그때, 갑작스레 모든 조명이 꺼졌다. 탁! “어, 뭐야?” “불 꺼졌어! 왜 이래?” “아야, 누가 내 발 밟았어!” “...”순식간에 어둠이 덮친 연회장. 사람들의 놀란 목소리와 웅성거림이 퍼졌다. 잔을 들고 있던 부동건은 순간 정지된 듯 멈췄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당장 가서 확인해봐!” “네, 회장님!” 직원들이 급히 움직였고, 부동건은 진정시키려는 듯 손을 들고 말했다. “여러분, 당황하지 마시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전기 쪽 문제인 것 같습니다. 금방 복구됩니다.” 사람들은 잠시 멈춰 서서 어둠 속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그 순간, 연회장 한쪽 벽면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이 조용히 켜졌다. “위이잉...” 어둠 속에서 갑작스레 터진 화면의 빛에 모두가 눈을 찌푸리며 반사적으로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 빛이 익숙해질 무렵, 누군가가 터트린 외마디 감탄에, 시선이 일제히 스크린으로 향했다. “어... 저거 뭐야? 헉, 저게... 말이 돼?” 그리고, 그 스크린 안에 있는 건... 분명 두 남녀의 은밀한 장면이었다. 화면 속, 분명히 누군가를 알아본 듯한 목소리가 터졌다. “저 여자... 그분 아니야?” “옆에 있는 남자는...?” “헐, 이건 진짜 레전드다.” “아, 눈 버렸어. 이게 뭐야, 이게...” “...”사람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순식간에 연회장은 도저히 되돌릴 수 없는 혼돈의 도가니로 빠져들고 있었다.사람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송혜선이 복도 입구에 막 다다랐을 때였다. 갑작스레 어디선가 튀어나온 그림자가 그녀를 뒤에서 껴안았다. “꺄악!” 놀란 송혜선은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고, 누군가 재빨리 그녀의 입을 막았다. “나야! 나야, 혜선아.” 익숙한 목소리에 송혜선은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남자의 손을 떼어내며 차갑게 말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이 사람, 지금 제정신인 거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어서 급히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송혜선은 그제야 숨을 돌리며, 낮은 목소리로 흘기듯 말했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미쳤어, 사람들 눈에 띄면 어쩌려고!!” 그 말엔 명백한 불만과 경계심이 섞여 있었다. 조봉규는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되는데...’ 그 순간의 긴장, 그리고 복잡한 감정이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다.조봉규의 시선이 송혜선의 얼굴에서 천천히 내려앉았다. 송혜선은 산후라 그런가, 몸매는 훨씬 더 부드럽고 풍성해져 있었다. ‘이러니까, 잊으려고 해도... 더 생각이 나잖아.’ 그는 순간 충동적으로 송혜선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만.” 당황한 송혜선이 눈을 부릅떴다. “뭐 하는 거야!! 지금...” 그러나 조봉규는 말없이 송혜선을 옆방으로 이끌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작게 ‘탁’ 하고 울렸다. 좁은 공간, 차오르는 침묵. 송혜선은 남자를 노려보며 벽에 등을 댔다. “정신 차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조봉규는 그녀를 바라보며 낮게 숨을 내쉬었다. “다들 홀에 있잖아. 아무도 몰라.” 남자의 말투엔 간절함과 조급함이 섞여 있었다. 이건 단순한 욕망이 아니었다. 그리움, 억눌림, 그리고 못다 한 말들. 그는 조심스럽게 송혜선의 턱선을 손끝으로 만지며 말했다. “혜선아... 나, 정말 많이 참았어.” ‘이 사람 또 이러네...’ 송혜선의 심장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분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정문 쪽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부동건이 고개를 돌리자, 최하연이 부상혁의 팔을 자연스럽게 끼고 등장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많은 이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잘생긴 남자와 우아한 여자의 조합. 누가 봐도 완벽한 한 쌍이었다. ‘딱 봐도 좋은 그림이야. 저 둘은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눈길을 끌어...’ “회장님, 부상혁 대표님은 정말 복도 많으십니다. 최씨 가문의 따님과 이렇게 잘 어울리는 커플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누군가의 말에 부동건의 표정이 확 풀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묘하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부동건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피어났다. 부동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젊은 사람들이 서로 마음이 맞아 좋아하는 걸, 우리 어른들은 그저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줘야 하는 일일 뿐이지요.” “게다가 상대가 최씨 가문의 따님이라니, 정말 금상첨화가 아닙니까.” 부동건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역시 상혁이다. 내 아들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상혁은 오늘 이 자리에서 당당히 아버지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었다. 한편, 송혜선도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전까지 얼굴에 띄웠던 미소는 점점 사라져 갔고,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하연에게 향했다. 오늘의 하연은, 나무나 예쁘고... 아니, 그냥 눈이 부실 만큼 찬란했다. 그리고 또렷한 이목구비에 윤기 흐르는 머릿결, 화사하게 피어난 얼굴빛까지. 하연의 행복함이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송혜선의 눈빛이 서서히 차가워졌다. ‘정다영... 그년, 나를 속였어.’ 그동안 하연 쪽에서 뭔가 반응이 있을 줄 알고 기다려 왔다. 하지만 소식은커녕, 정다영조차 자취를 감췄다. ‘다영이 걔가 하연이에게 약 먹이는 계획이 분명 실패한 거야. 그렇지 않고 선 지금 저렇게 멀쩡한 얼굴로 서 있을 수는 없어.’ 이대로 배가 불러오면, 섣불리 손도 쓸 수 없게 된다. ‘
이 질문에 송혜선은 눈을 반짝이며 부동건을 바라봤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젠 나를 당당히 소개해 줄 때가 됐겠지.’ 오늘 이 자리에서, 그녀는 부동건의 정식 아내로서 인정받기를 바라고 있었다. “회장님, 말씀 좀 해보세요?” 조금은 성급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자, 주변의 시선도 하나둘 송혜선과 부동건을 향했다. 모두 속으로는 뻔히 알고 있었다. 부동건이 과연 예전 애인을 진짜로 정실로 앉혔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다. 부동건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숨기거나 피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담백하게 말했다. “오 회장님, 이 사람은 제 딸의 어머니입니다.” 순간, 송혜선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딸의... 어머니?’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이 살짝 흔들렸다. 금세 넘칠 듯한 와인, 애써 잡고 있는 감정. ‘지금... 이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억울함이 툭 하고 솟구쳤다. 심지어 손에 힘이 들어가며 하얗게 질린 손등이 떨렸다. 오병지는 단번에 눈치챘고, 싱긋 웃으며 더는 묻지 않았고, 대신 가볍게 말을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부 회장님, 여전히 복이 많으시네요.” 부동건은 공손하게 웃으며 송혜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손길엔 무언의 위로가 담겨 있었다. “아닙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중에 저와 이 사람의 결혼식엔 꼭 오셔서 축배 들어주세요.” 그 말에 송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결혼식...?’ 순간, 가슴이 쿵 하고 울렸다. 이어서 고개를 들며 수줍게 웃었다. “회장님...” 부동건은 말없이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더 이상의 말은 없었지만, 그 행동으로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 시선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송혜선을 무시하거나 조롱하던 눈빛이, 지금은 선망과 부러움으로 가득했다. 결국, ‘부동건의 아내’라는 타이틀은 그 자체로 막대한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송혜선은 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