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민찬이 달려들며 정규인의 품에 안겼다. 그의 목소리에는 의지와 친근함이 가득했다. ‘아빠’는 마치 천둥처럼 허징인의 귀에 울려 퍼졌다. 허징인은 순간 얼어붙었고, 손에 들고 있던 가방은 어느새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정규인은 허리를 굽혀 열 살 난 정민찬을 품에 안고는, 이미 싸매어진 짐들을 한 번 쓱 훑어보고 냉랭하게 물었다. “아들, 아빠한테 말해봐. 지금 어디 가려는 거야?” 민찬이는 아직 어렸지만, 주변의 긴장감이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듯 조심스럽게 허징인 쪽을 힐끗 보았다. 그러고는 귀엽게 눈을 굴리며 능숙하게 화제를 돌렸다. “아빠, 저번에 약속했던 변신 로봇은요?” 정규인은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대답했다. “내일 사줄게. 그런데 지금은 방에 가서 좀 쉬어. 아빠가 엄마랑 할 얘기가 있어.” 정규인은 시터에게 눈짓을 보냈고, 시터는 눈치를 챈 듯 서둘러 민찬을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잠시 후, 거대한 거실에는 허징인과 정규인 단둘만이 남았다. “이 짐들은 뭐야? 어딜 가려고?” 정규인은 허징인에게 한 걸음씩 다가가며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더불어 서늘한 칼날 같은 기운이 서려 있었다. 허징인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고, 손은 무의식적으로 꽉 쥐었다. “그저 민찬이하고 함께 잠깐 여행 가려던 것뿐이야.” “그래? 왜 나한테 말도 없이?” “당신은 맨날 바쁘잖아. 우리 일을 언제 신경 쓴 적이나 있어? 그냥 근처로 며칠 다녀올 생각이었어.” 쾅! 정규인은 갑자기 커피 테이블을 발로 차 넘어뜨렸다.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졌다. “허징인, 당신 내가 바보로 보여?” 허징인은 정규인의 눈빛을 마주하며 의연하게 대답했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야?” 다음 순간, 정규인은 성큼성큼 다가와 허징인의 목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당신!! 감히 나를 배신해?!” 허징인은 필사적으로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정규인이 허징인인에게 시신이라도 온전히 남겨주겠다고 했지만, 그 말투에 담긴 살기는 허징인의 온몸에 서늘한 전율을 몰고 왔다. 허징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정규인의 팔을 붙잡으며, 눈물이 끊어진 실처럼 주르륵 흘러내렸다. “안 돼... 당신... 우리... 우리 이렇게 오랜 세월을 함께했는데...” ‘그래, 정말 오랜 세월이었다. 무명 시절, 가난하고 초라했던 그 시절부터 지금 이 자리까지 함께 걸어온 세월이었지.' ‘그동안, 내가 허징이라는 여자에게 부족한 건 없었다고 자부한다. 맞아, 딴 여자와 바람을 피운 적은 있다. 그건 확실히 내가 잘못한 부분이고, 내가 길을 잘못 든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외의 모든 것에서는, 난 우리 가정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믿었다. 그런데 내가 얻은 대가는 대체 무엇이었나?'정규인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허징인, 그런 말을 당신이 입에 올리다니 웃기지 않냐? 내가 벌어온 돈으로 밥 먹고 살면서, 당신!! 팔꿈치는 왜 밖으로 굽는 거야? 이게 맞는 거냐?” “알다시피, 나란 사람, 배신만큼은 절대 용납 못 한다는 거 당신도 잘 알 텐데. 하필이면 당신이 내 금기를 건드렸어.” 정규인의 말투는 점점 차가워졌고, 그의 눈은 핏발이 서며 붉어졌다. 두 손은 주먹을 꽉 쥐었고, 손등의 핏줄이 불쑥불쑥 드러났다. ‘나를 배신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든 될 수 있었지만, 왜, 왜 하필 허징인 당신인 거야?’ 정규인은 무엇보다 실망했고, 분노했다. 허징인에게 화풀이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는 손을 쓰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에 한순간 슬픔이 스쳐 지나갔다. ...연말이 다가오면서 모든 업무가 바쁘게 돌아갔으니, 하연 역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막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그녀는 문 앞에서 기다리던 정태훈의 서류 더미를 보았다. “사장님, 이 문서들 싸인 부탁드립니다.” 하연은 약간 피곤한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안으로 가져와.” 태훈은 곧장 서류를 들고
“사부인, 제 생각엔 우리 빨리 날짜를 잡고, 뒤에 할 일들도 서둘러 준비해야 할 것 같아요.” ‘사부인’이라는 한마디의 말이 두 집안의 관계를 단숨에 가까워지게 했다. 하미주는 그동안 송혜선에 대해 내심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제 부동건이 송혜선을 중요하게 여기는 모습을 보면서 그녀에 대한 시선도 달라졌다. 부씨 가문 내에서 송혜선의 위치가 자연스럽게 격상되었기에, 하미주가 품고 있던 불만도 어느새 사라져 버린 것이다.“저는 언제나 상관없습니다. 아이들만 좋다고 하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송혜선은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정말 잘됐네요. 제가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웨딩드레스 디자이너를 아는데, 며칠 내로 모셔서 다영이에게 맞춤 드레스를 준비하게 할게요.” 정다영은 부끄러운 얼굴로 부남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남준 씨랑 결혼할 수만 있다면, 저는 다른 건 아무래도 좋아요.” “그건 안 되지요. 결혼은 평생 한 번뿐인 중요한 일이니까 허투루 할 수 없죠.” 송혜선의 말은 하미주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하미주에게는 소중한 하나뿐인 딸이기에, 부씨 가문과의 혼사가 정씨 가문에 큰 이득이 되는 일이기는 했어도 딸이 억울한 일을 당하는 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처음에는 송혜선이 첩이라는 이유만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하미주였지만, 송혜선의 일 처리 방식과 단호한 태도를 보면서 하미주도 생각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고, 이제는 오히려 송혜선이 믿음직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그렇죠, 결혼은 중요한 일인 만큼 전통을 따라야죠.” 하미주는 한마디 덧붙이며 분위기를 다잡았다. 하지만 다영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표정으로 말했다. “엄마, 언제 적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요즘은 시대가 바뀌어서 괜찮아요. 젊은 사람들은 간소하고 실용적인 걸 선호해요. 우리도 결혼식을 간단하게 하면 돼요.” “사부인께서는 걱정 마세요. 다영이는 제가 친딸처럼 아낄 테니 절대 서운하게 하지 않을 겁니다.” 송혜선은 예비 시어머니
정다영은 부남준이 대답하기도 전에 먼저 그의 손을 꼭 잡으며 환하게 웃었다. “어머님, 걱정 마세요. 저희 정말 잘 지낼 거예요.”... 날씨가 점점 추워졌다. 하늘에서 가늘고 촘촘한 눈송이가 흩날리며 내렸고, 금세 땅 위에는 얇은 눈이 덮였다. “최 사장님, 눈이 오네요.” 식당 밖으로 나오자, 이 도시는 마치 새 옷을 갈아입은 듯했다. “갑작스러운 눈이라니, 올해 겨울은 예년보다 더 추워질 것 같네요.” “최 사장님, 그래도 사람 마음은 따뜻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거래처 사람의 농담 섞인 말에 하연은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든 순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상혁이 문 앞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상혁은 오늘 옅은 카멜색 코트를 입고 있었고, 손에는 하얀색 머플러를 들고 하연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가까이 다가와 조심스레 하연의 목에 머플러를 둘러주었다. 하연은 아직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말했다. “여기엔 왜 온 거예요?” “정 실장이 네가 여기서 고객을 만나서 일 얘기를 한다고 해서 왔지.” 거래처 사람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최 사장님, 업계에서 이미 최 사장님과 부 대표님의 좋은 소문이 돌던데, 이제 보니 사실인가 봐요.” 상혁은 하연을 단번에 품 안에 끌어안으며 강렬한 소유욕을 드러냈다. “결혼식 때 청첩장은 꼭 보내 드리겠습니다.” ... 차 안에서 하연은 문득 식당에서 부남준을 봤던 것이 생각이 나서 입을 열었다. “방금 식당에서 누굴 봤는지 맞춰볼래요?” 상혁은 입술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반응은 답을 말해주고 있었다. “보아하니 당신은 뭔가 알고 있는 거죠?” “방금 저 사람들이 나올 때 우연히 봤어.” 상혁은 차분하게 설명했다. 방금 차 안에서 부씨 가문과 정씨 가문의 어른들이 식당에서 나오는 모습을 목격했던 것이다. “어른들이 함께 있는 걸 보니, 결혼 얘기를 나눈 모양이네요
시선이 아래로 내려가자, 층층이 쌓인 예물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붉은 보자기로 곱게 포장된 예물 상자에는 정성껏 준비한 혼수 품목들이 담겨 있었다. 예단 비단부터 예복, 신부의 웨딩 슈즈까지, 모든 것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그 안에는 전통적인 결혼 떡과 한과, 그리고 혼례식에 쓰일 용과 봉황 모양의 화려한 촛대까지도 빠짐없이 준비되어 있었다. 하나하나 세심하게 준비된 예물은 이번 약혼의 중요성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붉은 보자기에 둘러싸인 예물들은 저마다 고급스러운 자태를 뽐내며 정성스러운 마음을 담고 있었다. 약혼식을 위해 엄선된 물품들은 그 자체로 부씨 가문이 이번 혼사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함 속의 장신구들은 각기 다른 빛을 발하며 고귀하고 섬세한 느낌을 자아냈고, 붉은 보자기와 청홍색 장식들이 마당을 화려하게 물들이고 있었다.보자기를 든 사람들이 한 줄로 서서 저택의 뜰을 가득 메웠고, 그 모습은 마치 축복의 행렬과도 같았다. 최씨 가문의 저택 뜰을 가득 채운 예물들은 부씨 가문이 신부를 향한 진심을 담아 준비한 것이었으며, 그 정성과 재력은 이번 약혼에 대한 기대와 존중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조진숙은 혹시라도 부족한 게 있을까 염려하는 듯 정중하게 물었다.“사돈 어르신, 혹시 더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바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최동신은 이 압도적인 광경에 기분이 한껏 좋아졌다. 조진숙은 늘 세심하고 빈틈없이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라, 불만족스러울 만한 부분이 없었다. “너무 과한 거 아닌가? 부씨 가문은 이미 충분히 성의를 보여줬으니, 더 이상 번거롭게 할 필요 없습니다.” “번거롭다니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조진숙은 진심 어린 미소로 말했다. “우리 두 집안은 오랜 세월을 함께해 온 사이고, 하연이는 제가 직접 키우다시피 한 아이입니다. 하연이는 비록 제 양딸이지만, 저는 친딸과 다를 바 없이 하연이를 소중히 여기며 키웠습니다. 이제 하연과 상혁
“저도 그날이 좋다고 생각합니다.”조진숙이 빠르게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이 날짜라면 준비할 시간도 충분하니, 두 아이를 위해 더 세심하게 준비할 수 있을 것 같아요.”“그럼 약혼식은 그날로 정합시다.”최동신이 마지막으로 결정을 내렸다.두 집안 어른들이 뜻을 모아 약혼 날짜를 확정 지었다. 이어 두 집안은 초대할 손님 명단과 연회 준비 사항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대화는 화기애애했고, 온 집안에 기쁨이 가득했다. 하연은 핸드폰을 꺼내 ‘미녀4총사’ 단톡방에 간단한 메시지를 보냈다. [설이 지난 후 다섯 번째 날 약혼식! 친구들, 모두 참석 필수야!]가장 먼저 정예나가 답장을 보냈다. [드디어 날짜가 정해졌구나! 축하해! 꼭 시간 맞춰 갈게!] 서여은도 바쁜 인터뷰를 마친 뒤 메시지를 확인하고 빠르게 응답했다. [마침 휴가라 시간 여유 있어.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이어 여은이도 농담조로 덧붙였다. [축하해, 우리 하연이 좋은 사람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되다니! 이제 리틀 하연이 빨리 태어나면 더 좋겠네.] [리틀 상혁도 괜찮지 않을까? 친구야, 힘내!] 모두들 장난스럽게 대화를 이어갔고 분위기는 점점 뜨거워졌다. 하연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핸드폰에서 고개를 들었는데, 무심코 먼발치에 앉아 있는 상혁을 슬쩍 보았다. 오늘 상혁은 맞춤 제작한 수트를 입고 있었는데, 단정하고 우아한 분위기가 흘러넘쳤다.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그의 모습에서는 한껏 품위가 느껴졌다. 하연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배 위에 얹었다. ‘우리 둘... 피임한 적이 없었는데, 혹시... 이미 임신한 건 아니겠지?’ 하연은 조심스레 상상해 보았다. ‘나와 부상혁의 유전자를 이어받은 아이... 생각해 보니, 나쁘진 않아...’ ‘미녀4총사’ 단톡방에서는 대화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런데도 신가흔은 여전히 답장이 없었다. 예나가 참지 못하고 가흔을 태그했다. [우리 가흔 디자이너님, 언제 시간이 되십니까
조봉규는 보양식을 내려놓고 다정하게 송혜선의 어깨를 주물렀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달래며 말했다. “그깟 것들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야. 진짜 중요한 건 바로 DL그룹이지 안 그래?” 그 말에 송혜선의 눈빛이 흔들렸다. 조봉규는 그녀의 반응을 살피며 말을 이어갔다. “남준이가 요즘 아주 잘하고 있어. 성과도 눈에 띄고, 그룹 내에서도 꽤 인정받고 있어. 그리고 연말 이사회 때까지 결과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라고.” 송혜선은 눈을 들어 조봉규와 시선을 맞췄다. ‘만약 남준이가 DL그룹 이사회 집행이사 자리를 차지한다면, 그깟 예물이 무슨 대수겠어? 나도 좀 더 멀리 내다보는 눈을 가져야 해.’ 송혜선의 화는 조금씩 누그러졌고, 얼굴빛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조봉규는 그 모습을 보고는 재빨리 보양식을 들고 직접 그녀의 입에 가져다주며 말했다. “남준이는 지금 정씨 가문의 지지를 받고 있고, 또 다른 이사들도 차근차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있어. 현재로서는 승산이 아주 크다는 걸 알고 있잖아.” 송혜선은 마침내 보양식을 몇 모금 들이켰고, 금세 한 그릇을 비웠다. “이제야 제대로 먹네. 지금은 몸을 보살피는 게 가장 중요해...” 송혜선은 눈을 흘기며 조봉규를 타박했다. “당신도 참, 정말 나를 걱정하는 게 맞아? 아니면 그저 뱃속에 있는 이 아이만 걱정하고 있는 거야?” “그럴 리가... 당신 지금 오해하고 있는 거야. 내 마음속에서 가장 중요한 건 당신이야.” 송혜선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도 입에서는 날카로운 말이 튀어나왔다. “솔직히 말해서, 그 최하연이라는 여자는 겨우 이혼녀 아니야? 그저 조진숙의 아들이 눈여겨봤으니 최씨 가문에 기를 쓰고 붙으려 하는 거겠지. 뒤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비웃고 있을지 모르잖아.”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쾅!그 소리와 함께 침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침실 안에 있는 둘은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고, 송혜선은 비명을 질렀다. 조봉규의 손이
남준은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다가가며, 마침내 자신의 어머니 송혜선 바로 앞에 멈춰 섰다. “어머니, 정말 대단한 용기를 가지셨군요!” 그 말에 송혜선은 순간적으로 발을 헛디뎌 거의 바닥에 넘어질 뻔했다. ‘설마 남준이가 다 들은 걸까?!’ 그녀는 거의 반사적으로 남준의 팔을 붙잡으며 간신히 버텼다. 마치 가라앉는 물속에서 마지막으로 붙잡은 부표처럼, 간절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남준아, 이 일은 너무 중대한 문제야. 절대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 만약 이 사실이 부동건의 귀에 들어간다면, 모든 것이 끝장날 것이었다. 송혜선뿐만 아니라, 남준 역시 부씨 가문에서 완전히 발붙일 곳이 없어질 게 분명했다. “남준아, 방금 있었던 일은 그냥 모르는 척해 줘. 너는 부씨 가문의 둘째 아들이다. 이 사실은 누구도 바꿀 수 없어. 내가 너의 미래를 망치게 해선 안 되잖니.” 이 순간, 송혜선의 태도는 평소의 당당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는 오직 현재의 지위와 부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그녀는 오랜 세월 동안 부동건과 함께하며 온갖 굴욕을 참아내며 오늘에 이르렀다. 이 모든 노력이 이렇게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 수는 없었다. “하! 미래요?” 남준은 비웃음 섞인 한숨을 내쉬며 마치 우스운 농담이라도 들은 듯 조롱했다. ‘내가 과연 이런 것에 신경이나 쓸까?’ 송혜선은 지금 남준의 마음을 읽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남준아, 나는 너의 엄마야. 절대 너에게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을 거야. 지금 네가 가장 중요한 건 다영이와 잘 지내면서 정씨 가문을 안정적으로 잡는 거야. 그리고 연말 이사회에서 상혁이의 손에서 권력을 빼앗아 DL그룹을 확실히 장악해야 해...” 남준의 이마에 혈관이 불거졌고, 마침내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녀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그만하세요!” 송혜선은 순간 당황했다. 눈동자는 불안감으로 흔들렸고, 모든 것이 그녀의 통제 범위를 벗어
상혁은 말없이 부동건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지나간 모든 일들이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머릿속으로 한 파래임 한 파래임 스쳐 지나갔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마음을 다잡은 상혁은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 “네, 알겠습니다.” 부남준 사건은 예정대로 재판이 열렸다. 부씨 가문은 변호사를 통해 대응했지만, 형사 사건인 만큼 얽히고설킨 진실을 밝히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DL 그룹, 최상층 대표실.상혁은 혼자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거대한 도시가 한눈에 들어왔다. ‘결국 이 순간이 오는구나.’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곧 원신민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대표님, 재판 끝났습니다.” 상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끼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판결 나왔어?” “예상대로입니다. 다시는 못 일어날 겁니다.” 원신민의 말은 고요했던 상혁의 마음에 작은 돌을 던진 것처럼 퍼져나갔다. 두 사람의 목숨과 확실한 증거. 이미 알고 있던 결말이었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다가오니 상혁도 묘한 허탈함이 밀려왔다. “부 회장님도 알고 계시나?” “예,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기절하셨지만, 다행히 지금은 안정을 되찾으셨고요.” 원신민은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송 여사는 재판하는 그 자리에 있었는데, 판결 듣자마자 바로 떠났어요.”부동건에게 쫓겨난 후, 송혜선은 과거의 화려함을 모두 잃었다. 부동건은 그녀에게 줬던 모든 부동산을 회수했고, 카드 계좌까지 정지시켰다. 이제 송혜선에게는 남은 보석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고 있을 뿐. 상혁은 가늘게 눈을 좁혔다. ‘재판에 온 건 놀랍지 않지만... 반응이 이 정도로 끝났다는 게 아무래도 수상해.’ 경계를 늦추지 않고 바로 상혁은 차갑게 말했다. “송혜선 감시 붙여. 또 무슨 일 일으키기 전에.” 원신민은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어둡고 습
비틀거리던 부동건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정신 차려... 이 순간만은 피하지 말자.’ 그는 느릿한 걸음으로 상혁 쪽으로 다가갔다. 서서히 가까워지는 거리. 마침내 눈앞에 다다라 멈춰 섰을 때, 두 사람의 시선이 정확히 맞닿았다. 부동건은 말하고 싶은 게 많았지만, 막상 눈을 마주하니,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부동건은 깊은숨을 들이쉬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상혁아. 그동안, 너랑 너희 어머니한테 내가 너무 못했다.”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들었다. 그날, 그 선택이 결국 우리 가족을 무너뜨린 거야.’ 사실, 부동건은 이혼하던 날부터 이미 후회하고 있었다. 그 후로의 모든 시간은, 그저 체면과 자존심을 위한 연기였을 뿐이다. 지금 이 꼴이 된 건... 결국 하늘이 내린 벌이었다. ‘자업자득이야. 이 모든 건 내가 자초한 거니까.’ 상혁은 조용히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엔 적당한 거리감과 냉정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게 이제 와서 중요하진 않아요. 저도, 어머니도... 이미 오래전에 마음 정리했어요.” 그 말에 부동건은 눈을 감았다. 눈가에 뜨거운 기운이 차오르는 걸 애써 참았다. “그래. 마음 내려놨다니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잠시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던 부동건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한 서류봉투를 꺼냈다. 그리고 곧장 상혁에게 건넸다. “이제 나도... 나이가 들었고, 더는 회사를 끌고 나갈 힘이 없다. DL그룹은 내가 처음부터 세운 회사다.”“내 모든 시간과 인생이 들어간 곳이지. 하지만 이제는 놓아야 할 때가 왔다.” 상혁은 망설이듯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런 상혁의 손에 부동건은 서류를 억지로 쥐여주며 아들의 손등을 두드렸다. “앞으로는... 네가 이끌어가야 한다.” 그 손길엔 조용한 무게와 책임, 그리고 사죄가 담겨 있었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입꼬리를 살짝 움직이던 부동
상혁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살짝 웃음을 지었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검진을 마친 뒤, 하연은 선명한 초음파 사진을 손에 들고 있었다. 사진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손끝으로 사진 속 동그란 그림을 가리켰다. “여기 봐봐요. 이게 우리 아기래요.” 목소리엔 설렘과 떨림이 그대로 묻어났다. 상혁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하연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눈엔 이미 감동이 차올라 있었다. 상혁은 조심스레 하연의 아랫배에 손을 얹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이 순간... 난 정말 너무 행복해.” ‘네가 내 옆에 있고, 우리 아이가 이렇게 자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야.’ 하연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남자아기일까요, 여자아기일까요?” 그녀의 눈빛에는 이미 사랑스러운 미래가 그려지고 있었다. 상혁은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어.” 하연은 고개를 살짝 돌려 상혁을 바라봤다. 그 눈동자엔 별빛이 머물러 있는 듯 반짝였다. “그래요... 건강하게만 태어나면... 그걸로 충분해요.”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았고, 서로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따뜻함을 느꼈다. 그 순간, 상혁의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진동했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하곤 순간 눈빛이 깊어졌다. 화면엔 낯익은 이름이 선명히 떠 있었다. [부동건.]‘이 타이밍에...?’ ‘설마 무슨 일 생긴 건가?’ 지난 연회 이후, 부동건과는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의 파장이 얼마나 컸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송혜선과 조봉규. 그 두 사람 때문에 무너진 자존심. 그리고 결국, 부동건은 송혜선을 아이와 함께 본가에서 내쫓았다는 소문까지 들려왔다. 하연이 조용히 말했다. “받아봐요. 무슨 일일 수도 있으니까.” 상혁은 하연의 손등을 가볍게 토닥이고, 그녀를 옆에 있는 의자에 앉힌 후
부동건은 갑작스레 거칠게 기침을 터뜨렸다. “컥”‘피 맛...?’ 목 안에서 치밀어 오르는 피비린내를 억지로 삼켰다. 손등에 핏줄이 선명히 드러나고, 이성의 끈은 이미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부동건의 시선이 천천히 송혜선과 조봉규를 향했다. ‘죽여버리고 싶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너희들... 너희들...” 부동건의 입술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송혜선은 극도의 공포에 휩싸였다. ‘이건 아니야... 이렇게 끝나면 안 돼...’ 그녀는 급히 앞으로 다가가 부동건의 팔을 붙잡았다. “회장님... 우리, 조 선생님이랑 그냥 산후 회복 얘기하던 중이었어요. 진짜예요, 저희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부동건의 손이 송혜선의 뺨을 후려쳤다. 짝! 순간 정적. 강하게 내리친 손바닥 소리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숨을 멈춘 듯 조용해졌다. 송혜선의 얼굴 한쪽이 순식간에 붉게 부어올랐다. 눈가가 덜덜 떨리며, 눈물도 같이 맺혔다. “이 천하의... 배은망덕 같은 것. 내가 너를 어떻게 믿었는데... 감히 날 기만해?” 뒤에 서 있던 하객들 사이에서도 탄식이 흘러나왔다. “저 정도였어?” “저게 진짜였네... 소문이 아니고...” “...”송혜선은 뺨의 통증을 애써 무시한 채, 다시 붙잡았다. “회장님, 제발... 오해예요. 저희 그런 사이 아니에요. 저는... 당신뿐이었어요.” 그러나 부동건은 그 손마저 거칠게 뿌리쳤다. 그리고는 힘껏 송혜선의 복부를 발로 찼다. 퍽!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송혜선은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그녀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조봉규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아니야... 지금 나섰다간 나도 끝장이야.’ 한 걸음 다가가려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회... 회장님... 저희...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하지만 그 한마디가 기름을 붓는 꼴이 됐다. 부동건은 그대로 조
일 순간 충격의 정점이었다.부동건은 들고 있던 와인잔을 그대로 바닥에 내던졌다. 쨍그랑! 깨지는 소리와 동시에 모든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저... 저런 미친...!” 그는 화면을 가리키며, 얼굴을 붉힌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숨이 거칠게 턱 끝까지 차올랐다. ‘송혜선... 네가 감히!’ 주변 하객들도 이미 술렁이기 시작했다. “저게 진짜야?” “부 회장님 딸이... 아니라고?” “와... 이건 완전히 생각지도 못한 미친 패륜이야, 상상도 못 했어.” 오늘의 연회는 더없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지만, 이제 와선 최악의 스캔들 파티가 되어버렸다. ‘이 연회가... 전부 거짓된 일 때문에 생긴 일이란 말이야?’ ‘우리, 사기당한 거네. 다 같이.’ 그때 스크린이 멈췄고, 연회장 전체의 조명이 다시 환히 켜졌다. 하객들은 본능적으로 두리번거리며 부동건을 찾았다.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하지만 부동건은 아무런 대답 없이 어금니를 꽉 물고, 몸을 떨며 계단 쪽으로 향했다. 하객들은 그 뒤를 따라붙었다. ‘뭔가 일어나겠군...’ ‘이번엔 진짜 끝장이다.’ ...같은 시각, 2층 방 안. 송혜선은 조봉규의 손등을 다독이며 조용히 말했다. “조금만 참아. 며칠만 지나면 내가 다시 올게.” 조봉규는 싱긋 웃으며, 그녀의 허벅지를 장난스럽게 움켜쥐었다. “응. 기다릴게, 자기.”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문이 거칠게 흔들렸고,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쾅!! “송혜선! 당장 안 나와?!” 송혜선의 온몸이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조봉규의 팔을 꽉 잡았다. ‘망했다.’ “어떡해, 부동건이 올라왔어.” 두 사람은 당황하며 방 안을 둘러봤지만, 창문 하나 없는 좁은 방엔 도망칠 곳조차 없었다. ‘안 돼... 이렇게 들키면, 끝장이야. 정말 끝이야.’ 송혜선은 급하게 숨을 고르며 애써 이성을 붙잡으려 했다. ‘진정해. 침착해야 돼.
연회장 안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부동건은 손에 잔을 들고, 연신 들어오는 축하 인사에 밝은 표정으로 답하고 있었다. “회장님, 따님이 너무 예뻐요. 축하드립니다!” “아이고, 이런 경사는 자주 있어야죠!” ‘그래, 이 정도면 완벽하지. 오늘은 그 누구도 나를 흔들 수 없어.’ 그렇게 술이 한 잔, 두 잔 더해지며 연회장의 분위기도 점점 무르익고 있었다. 그때, 갑작스레 모든 조명이 꺼졌다. 탁! “어, 뭐야?” “불 꺼졌어! 왜 이래?” “아야, 누가 내 발 밟았어!” “...”순식간에 어둠이 덮친 연회장. 사람들의 놀란 목소리와 웅성거림이 퍼졌다. 잔을 들고 있던 부동건은 순간 정지된 듯 멈췄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당장 가서 확인해봐!” “네, 회장님!” 직원들이 급히 움직였고, 부동건은 진정시키려는 듯 손을 들고 말했다. “여러분, 당황하지 마시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전기 쪽 문제인 것 같습니다. 금방 복구됩니다.” 사람들은 잠시 멈춰 서서 어둠 속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그 순간, 연회장 한쪽 벽면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이 조용히 켜졌다. “위이잉...” 어둠 속에서 갑작스레 터진 화면의 빛에 모두가 눈을 찌푸리며 반사적으로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 빛이 익숙해질 무렵, 누군가가 터트린 외마디 감탄에, 시선이 일제히 스크린으로 향했다. “어... 저거 뭐야? 헉, 저게... 말이 돼?” 그리고, 그 스크린 안에 있는 건... 분명 두 남녀의 은밀한 장면이었다. 화면 속, 분명히 누군가를 알아본 듯한 목소리가 터졌다. “저 여자... 그분 아니야?” “옆에 있는 남자는...?” “헐, 이건 진짜 레전드다.” “아, 눈 버렸어. 이게 뭐야, 이게...” “...”사람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순식간에 연회장은 도저히 되돌릴 수 없는 혼돈의 도가니로 빠져들고 있었다.사람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송혜선이 복도 입구에 막 다다랐을 때였다. 갑작스레 어디선가 튀어나온 그림자가 그녀를 뒤에서 껴안았다. “꺄악!” 놀란 송혜선은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고, 누군가 재빨리 그녀의 입을 막았다. “나야! 나야, 혜선아.” 익숙한 목소리에 송혜선은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남자의 손을 떼어내며 차갑게 말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이 사람, 지금 제정신인 거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어서 급히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송혜선은 그제야 숨을 돌리며, 낮은 목소리로 흘기듯 말했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미쳤어, 사람들 눈에 띄면 어쩌려고!!” 그 말엔 명백한 불만과 경계심이 섞여 있었다. 조봉규는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되는데...’ 그 순간의 긴장, 그리고 복잡한 감정이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다.조봉규의 시선이 송혜선의 얼굴에서 천천히 내려앉았다. 송혜선은 산후라 그런가, 몸매는 훨씬 더 부드럽고 풍성해져 있었다. ‘이러니까, 잊으려고 해도... 더 생각이 나잖아.’ 그는 순간 충동적으로 송혜선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만.” 당황한 송혜선이 눈을 부릅떴다. “뭐 하는 거야!! 지금...” 그러나 조봉규는 말없이 송혜선을 옆방으로 이끌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작게 ‘탁’ 하고 울렸다. 좁은 공간, 차오르는 침묵. 송혜선은 남자를 노려보며 벽에 등을 댔다. “정신 차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조봉규는 그녀를 바라보며 낮게 숨을 내쉬었다. “다들 홀에 있잖아. 아무도 몰라.” 남자의 말투엔 간절함과 조급함이 섞여 있었다. 이건 단순한 욕망이 아니었다. 그리움, 억눌림, 그리고 못다 한 말들. 그는 조심스럽게 송혜선의 턱선을 손끝으로 만지며 말했다. “혜선아... 나, 정말 많이 참았어.” ‘이 사람 또 이러네...’ 송혜선의 심장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분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정문 쪽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부동건이 고개를 돌리자, 최하연이 부상혁의 팔을 자연스럽게 끼고 등장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많은 이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잘생긴 남자와 우아한 여자의 조합. 누가 봐도 완벽한 한 쌍이었다. ‘딱 봐도 좋은 그림이야. 저 둘은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눈길을 끌어...’ “회장님, 부상혁 대표님은 정말 복도 많으십니다. 최씨 가문의 따님과 이렇게 잘 어울리는 커플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누군가의 말에 부동건의 표정이 확 풀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묘하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부동건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피어났다. 부동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젊은 사람들이 서로 마음이 맞아 좋아하는 걸, 우리 어른들은 그저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줘야 하는 일일 뿐이지요.” “게다가 상대가 최씨 가문의 따님이라니, 정말 금상첨화가 아닙니까.” 부동건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역시 상혁이다. 내 아들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상혁은 오늘 이 자리에서 당당히 아버지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었다. 한편, 송혜선도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전까지 얼굴에 띄웠던 미소는 점점 사라져 갔고,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하연에게 향했다. 오늘의 하연은, 나무나 예쁘고... 아니, 그냥 눈이 부실 만큼 찬란했다. 그리고 또렷한 이목구비에 윤기 흐르는 머릿결, 화사하게 피어난 얼굴빛까지. 하연의 행복함이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송혜선의 눈빛이 서서히 차가워졌다. ‘정다영... 그년, 나를 속였어.’ 그동안 하연 쪽에서 뭔가 반응이 있을 줄 알고 기다려 왔다. 하지만 소식은커녕, 정다영조차 자취를 감췄다. ‘다영이 걔가 하연이에게 약 먹이는 계획이 분명 실패한 거야. 그렇지 않고 선 지금 저렇게 멀쩡한 얼굴로 서 있을 수는 없어.’ 이대로 배가 불러오면, 섣불리 손도 쓸 수 없게 된다. ‘
이 질문에 송혜선은 눈을 반짝이며 부동건을 바라봤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젠 나를 당당히 소개해 줄 때가 됐겠지.’ 오늘 이 자리에서, 그녀는 부동건의 정식 아내로서 인정받기를 바라고 있었다. “회장님, 말씀 좀 해보세요?” 조금은 성급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자, 주변의 시선도 하나둘 송혜선과 부동건을 향했다. 모두 속으로는 뻔히 알고 있었다. 부동건이 과연 예전 애인을 진짜로 정실로 앉혔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다. 부동건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숨기거나 피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담백하게 말했다. “오 회장님, 이 사람은 제 딸의 어머니입니다.” 순간, 송혜선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딸의... 어머니?’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이 살짝 흔들렸다. 금세 넘칠 듯한 와인, 애써 잡고 있는 감정. ‘지금... 이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억울함이 툭 하고 솟구쳤다. 심지어 손에 힘이 들어가며 하얗게 질린 손등이 떨렸다. 오병지는 단번에 눈치챘고, 싱긋 웃으며 더는 묻지 않았고, 대신 가볍게 말을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부 회장님, 여전히 복이 많으시네요.” 부동건은 공손하게 웃으며 송혜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손길엔 무언의 위로가 담겨 있었다. “아닙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중에 저와 이 사람의 결혼식엔 꼭 오셔서 축배 들어주세요.” 그 말에 송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결혼식...?’ 순간, 가슴이 쿵 하고 울렸다. 이어서 고개를 들며 수줍게 웃었다. “회장님...” 부동건은 말없이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더 이상의 말은 없었지만, 그 행동으로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 시선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송혜선을 무시하거나 조롱하던 눈빛이, 지금은 선망과 부러움으로 가득했다. 결국, ‘부동건의 아내’라는 타이틀은 그 자체로 막대한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송혜선은 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