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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후 꽃길
이혼 후 꽃길
Author: 운축

제1화

Author: 운축
여름방학이 다가올 무렵, 타지에서 결혼 생활을 한 지도 어느덧 5년째가 된 정채윤은 엄마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네 아빠가 갈수록 몸이 안 좋아지네. 올해를 넘길 수 있을지 모르겠어.”

“곧 여름방학이잖니. 너랑 예준이 시간 되면 나율이를 데리고 한 번 올 수 있겠어? 네 아빠가 너랑 나율이를 보고 싶어 하셔.”

“물론 예준이가 시간이 안 되면 어쩔 수 없고...”

어쩔 수 없다고는 했지만, 엄마의 목소리에 묻어난 서운함과 조심스러움을 정채윤이 모를 리 없었다.

생각해 보면 결혼하고 이곳에서 살게 된 지 5년 동안, 첫해에 친정에 한 번 다녀온 것을 제외하면, 지난 4년 동안 단 한 번도 친정에 가지 못했다.

권예준은 늘 일이 바쁘다거나, 시간이 없다거나, 불편하다는 등의 이유를 대며 거절했다.

정채윤은 눈물을 삼키며 그러겠다고 대답한 뒤, 곧바로 앱을 열어 계원시로 가는 항공권 세 장을 샀다.

티켓을 예매한 뒤 잠시 망설이던 정채윤은 권예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는 한참 동안 울린 뒤에야 연결됐다.

권예준은 냉담한 어투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이른 아침부터 누구야?”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채윤은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정채윤이 기억하기로 권예준은 어젯밤 회사에 있을 거라고 했었다.

“별거 아니야.”

정채윤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권예준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당황한 정채윤은 창백해진 얼굴로 휴대폰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사실 결혼하기 전까지만 해도 권예준은 정채윤에게 굉장히 잘해주었다.

두 사람은 학창 시절부터 알고 지내다가 결혼까지 한 인연이었다.

권예준은 정채윤을 세상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겼다. 그래서 권예준이 바람을 피울 거라고는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아이를 낳은 뒤 몸매가 망가져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권예준은 냉담해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권예준에게서 문자가 왔다.

[무슨 일 있어?]

조금 전 그 여자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정채윤은 입술을 깨물며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빠가 위독한 상황이었기에 그런 일까지 따지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아빠가 아프셔. 상태가 많이 안 좋으시대. 마침 나율이도 곧 여름방학이니까 셋이 같이 계원시로 가서 한동안 지내면 안 될까?]

문자를 보냈지만 권예준에게서는 한동안 답이 오지 않았다.

못 본 건지, 아니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권예준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문자를 보내왔었다.

정채윤은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빨개졌다.

사실 지난 2년 동안 정채윤은 권예준의 냉담한 태도를 견디며 혼자 참고 버티는 것에 익숙해졌다.

다음에 다시 물어보려고 마음먹은 정채윤은 속상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딸을 찾으러 위층으로 올라갔다.

문을 살짝 열자 딸 권나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어서인지 웅얼거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하린 이모, 아빠가 외증조할머니를 위해서 의사를 모셨으니까 외증조할머니는 괜찮을 거예요. 걱정하지 말고 몸 잘 챙겨요. 그리고 꼭 아침 먹어야 해요...”

정채윤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정채윤은 권나율이 말한 외증조할머니가 자신의 어머니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권나율이 말한 외증조할머니는 누구일까?

그리고 하린 이모는 또 누구일까?

혹시 안하린인 걸까?

그러나 안하린은 권씨 가문 둘째 아들의 재혼 상대가 데려온 딸이었다.

비록 피가 섞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권예준의 사촌 여동생이었기에 권나율은 안하린을 고모라고 불러야 했다.

‘그런데 왜...’

정채윤은 의아한 표정으로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엄마, 아침밥 다 됐어요?”

문밖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을 들은 권나율이 이불 밖으로 나와 문 쪽을 바라보며 예쁜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정신을 차린 정채윤은 손가락 끝을 꾹 누르며 복잡한 생각을 애써 떨쳐 냈다.

지금은 아빠를 만나러 계원시에 가는 일이 가장 중요했다.

정채윤은 방 안으로 들어가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침밥 다 됐어. 씻고 나오면 바로 먹을 수 있어.”

“밥 먹고 아빠 오면 우리 계원시에 다녀오자. 외할아버지가 아프시대. 마침 너도 곧 여름방학이니까 한동안 계원시에서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랑 지내자.”

권나율은 잠깐 멈칫했다. 얼굴에 번져 있던 웃음도 금세 사라졌고, 예쁜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권나율은 계원시에 별로 가고 싶지 않았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권나율을 예뻐했고, 평소에도 자주 맛있는 음식을 보내 주곤 했다.

하지만 계원시는 너무 멀어서 비행기를 타고 한참을 가야 했다. 생각만 해도 힘들었다.

그리고 외할아버지가 아프다는 것도 권나율을 계원시로 데려가기 위해 지어낸 거짓말일지도 몰랐다.

‘짜증 나.’

권나율은 잠시 뒤 안하린과 만나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요 며칠 안하린은 가족이 아픈 탓에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고, 권나율은 안하린이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정채윤의 단호한 표정을 보니 차마 싫다고 할 수도 없어 그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권나율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침대 위에 엎드렸다.

그 모습을 본 정채윤은 몸을 숙여 달래듯 말했다.

“나율아, 얼른 일어나야지.”

권나율은 마지못해 몸을 뒤척이며 침대에 얼굴을 비비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옷 좀 가져다줘요. 물도 받아 주고, 치약도 짜 줘요...”

정채윤은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딸이 시킨 일을 하러 갔다.

지난 몇 년 동안 정채윤은 늘 이렇게 권나율과 권예준을 뒷바라지해 왔다.

권나율은 정채윤이 등을 돌린 채 옷장에서 옷을 고르는 틈을 타 몰래 휴대폰을 집어 들어 안하린에게 문자를 보냈다.

[하린 이모, 저 조금 있다가 일이 있어서 계원시에 가야 해요. 이모랑 같이 못 있어 줘서 미안해요. 꼭 빨리 돌아올게요! 돌아오자마자 제일 먼저 이모 만나러 갈게요. 그리고 틈틈이 계속 메시지 보낼게요!]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답장이 오지 않았다.

권나율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안하린이 서운해할까 봐 걱정됐다.

“나율아, 이거 입을까?”

정채윤이 원피스 한 벌을 들고 딸에게 보여 주었다.

권나율은 미간을 찌푸리며 휴대폰을 내려놓더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정채윤에게 말했다.

“엄마, 왜 이렇게 잔소리를 많이 해요? 저는 이제 원피스 안 좋아해요. 그것도 몰라요?”

권나율은 얼마 전 안하린이 거래처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입었던 세련되고 카리스마 넘치는 옷차림을 본 뒤로 원피스를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권나율은 앞으로 안하린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엄마처럼 가정주부가 되어 요리하고, 빨래하고, 잔소리나 하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았다.

정채윤은 잠시 멈칫했다.

“그럼 나율이는 뭐가 좋아? 엄마가 새 걸로 사다 줄게...”

“싫어요!”

권나율은 엄마와 자신의 취향이 다르다는 생각에 안하린에게 옷을 골라 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엄마는 일단 나가 있어요!”

권나율은 침대에서 뛰어내리더니 맨발로 정채윤을 밖으로 밀어냈다. 그리고 문을 닫은 뒤 휴대폰을 들고 다시 안하린에게 문자를 보냈다.

[하린 이모, 약속할게요. 저 내일 바로 돌아올게요!]

안하린에게서 답장이 왔다.

[미안해, 나율아. 이모 방금 아침을 먹고 있어서 문자를 못 봤어.]

[이모 화 안 났어. 그러니까 외할아버지 뵈러 가. 괜찮아. 이모도 나중에 계원시에 갈 거야. 그때 이모랑 만나자.]

권나율은 조금 당황했다.

[이모, 혹시 계원시에 외증조할머니 보러 가는 거예요? 아빠도 알고 있어요?]

안하린이 답장을 보냈다.

[응. 알고 있어.]

권나율은 순간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난 듯 다시 문자를 보내려 했다.

한편, 문밖에서 정채윤은 문이 쾅 닫히는 소리를 듣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마음속에서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씁쓸함이 밀려왔다.

권나율은 정채윤이 온 마음을 다해 키운 아이였다. 그래서 언젠가 딸에게 이렇게 냉정하게 문전박대를 당하는 날이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정채윤은 서운한 마음에 입술을 깨물다가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너 저혈당 있잖아. 옷 다 갈아입으면 아래층에 내려가서 밥 꼭 먹어.”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때 주머니 속 휴대폰이 진동했다.

정신을 차린 정채윤은 숨을 들이마신 뒤 휴대폰을 꺼내 확인했다.

권예준에게서 답장이 와 있었다.

[아까 볼일이 좀 있었어. 알겠어. 이따가 조금 늦게 들어갈게.]

여전히 아무런 설명도 없었다. 의사를 알아보겠다는 말도, 그녀의 가족을 걱정하는 말도 없었다.

정채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러다 문득 우연히 들었던, 권나율이 누군가와 통화하면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권예준은 안하린의 가족을 위해 의사를 구해 주었으면서 정채윤의 가족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조금 전 권예준과 통화했을 때 들려왔던 여자의 목소리도 떠올랐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아마 안하린이었을 것이다.

‘두 사람...’

휴대폰을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마음 같아서는 그들에게 대체 어떻게 된 건지 묻고 싶었다.

예전이었다면 정채윤은 분명 끝까지 캐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상하게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지친 것일지도, 또는 무감각해진 것일지도 몰랐다.

정채윤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멍한 얼굴로 안방에 들어가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짐은 대부분 권예준의 것이었다. 결벽증이 있는 권예준은 옷이나 침구류에 매우 까다로웠다.

반면 정채윤의 물건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정채윤은 권예준에게 맞춰 주고, 그냥 참고 사는 데 익숙했다. 마치 딸을 위해 이미 세월에 빛바랜 이 결혼 생활을 지금까지 억지로 이어 온 것처럼 말이다.

정채윤은 권예준이 더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한때 뜨겁게 불타올랐던 사랑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져 버렸다.

옷을 모두 챙긴 뒤, 정채윤은 혹시라도 권예준이 필요할지 몰라 서재에 들어가 그의 노트북도 챙겼다.

결혼 후 첫해를 제외하면 정채윤은 몇 년 동안 서재에 거의 들어가지 않았다. 권예준이 정채윤의 출입을 막았기 때문이다. 마치 부부가 아니라 남남이라도 되는 듯이 말이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들어오지 말라고 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태도가 점점 차가워져 마지막에는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모든 남자가 다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원래 다들 결혼하고 나면 사람이 변하고, 상대에게 싫증 나서 처음 했던 약속과 애정을 전부 잊는 걸까?

정채윤은 무감각한 얼굴로 노트북을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막 서재를 나서려던 순간, 살짝 열려 있는 서랍이 시야에 들어왔다.

서랍 안에는 서류가 가득했고 꽤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다.

정채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무심코 서랍을 열어 서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맨 위에 놓여 있던 서류에 적힌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정채윤은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이혼 합의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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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혼 후 꽃길   제3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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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혼 후 꽃길   제2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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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혼 후 꽃길   제2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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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혼 후 꽃길   제27화

    메시지를 보냈지만 아무런 답장도 돌아오지 않았다.정채윤은 입술을 살짝 깨물고 저도 모르게 휴대전화를 꽉 움켜쥐었다.잠시 후 프로젝트팀 회의가 곧 시작될 예정이라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 없었다.몇 분을 기다려도 여전히 답장이 없자 정채윤은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고 위층으로 올라가 회의에 참석했다.이번 회의는 주로 건설 단지에 대해 의논하는 자리였다.윤세형이 회의를 진행하다가 무언가 떠올랐는지 정채윤에게 말했다.“다른 사람들은 전에 한 번씩 다녀왔어요. 내일 아침에는 제가 정채윤 씨를 기존 단지로 안내할게요.”정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부탁드릴게요. 윤 팀장님.”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안도했다.정채윤 때문에 일정이 늦어지는 건 누구도 원하지 않았다.비록 그들은 상급의 결정을 받아들였지만, 여전히 정채윤의 실력을 의심하고 있었다.회의는 두 시간 동안 이어졌고 끝났을 때는 점심시간이 되었다.사람들은 물건을 정리하며 하나둘 자리를 떠날 준비를 했다.정채윤 옆에 앉아 있던 문도연은 그녀가 혼자 있는 게 마음에 걸렸는지 말을 걸었다.“정채윤 씨, 같이 식당 가서 밥 먹을래요?”정채윤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문도연의 요청에 마음이 조금 따뜻해졌으나 잠시 뒤 따로 할 일이 있었다.“고마워요. 다음에 같이 먹어요. 이따가 딸아이 데리러 가야 해서요. 아이와 함께 밥 먹기로 했거든요.”‘딸이라니?’문도연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결혼하셨어요?”정채윤의 미소가 조금 굳어졌다.그녀는 짧게 그렇다고 대답했을 뿐, 곧 이혼할 예정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문도연은 짐짓 놀랐지만 그래도 웃으며 말했다.“그럼 아이 데리러 가세요. 다음에는 꼭 같이 먹어요.”“네.”문도연이 떠난 뒤, 정채윤도 가방을 들고나왔다.그녀는 계단을 내려가면서 휴대전화를 열어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권예준은 여전히 답이 없었다.못 본 건지, 아니면 그녀에게 대답할 시간조차 아까운 건지 알 수 없었다.지금 상황을 보면 아마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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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층에 도착했을 때, SUV 한 대가 이쪽으로 다가왔다.정채윤은 무심코 운전석에 앉아 있는 남자를 흘끗 바라봤다.햇빛이 내려앉은 가운데 남자는 역광 속에 앉아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그는 위에 심플한 검은색 티셔츠 한 장만 걸쳤지만, 단단하고 남성적인 분위기는 전혀 가려지지 않았다.햇빛과 그림자가 어우러져 그의 날카로운 얼굴 윤곽을 흐릿하게 만들었지만, 곧게 뻗은 옆모습과 깔끔한 짧은 머리만으로도 얼마나 잘생겼는지 알 수 있었다.순간 스쳐 지나갔을 뿐인데 정채윤은 왠지 이 남자가 낯익다는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그녀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저 운전기사인 줄로 착각하고는 조정섭에게 말했다.“조심해서 가세요.”“그래. 들어가 봐. 이따 회의도 있잖아.”조정섭은 손을 흔들고 조수석에 올라탔다.안전벨트를 매던 그는 고개를 돌려 운전석을 바라봤다.남자는 한 손으로 운전대를 꽉 쥐고 있었고, 팔뚝에는 힘줄까지 선명하게 솟아 있었다.조정섭이 웃으며 말했다.“내려서 채윤이한테 제대로 인사를 하든가, 아니면 출발하든가 해. 여기서 남들 길 막고 있지 말고.”그제야 남자가 반응했다.그는 고개를 돌려 조정섭을 흘겨본 뒤, 사람 자체처럼 차갑고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누구한테 인사를 하라는 거예요?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조정섭은 잠시 말문이 막혔지만 내심 한마디 묻고 싶었다.그럴 거면 오늘 나랑 여기까지 왜 따라온 거냐고 말이다.그는 피식 웃었다.“그래. 내가 괜한 소리를 했네. 그럼 이제 출발해도 되겠습니까, 엄 소령님?”엄준후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는 시선을 살짝 옆으로 돌려 조수석 쪽 사이드미러를 바라봤다.거울 속에는 여전히 건물 아래에 서 있는 여자가 비쳤다.흰색 쉬폰 블라우스에 검은색 머메이드 스커트를 입은 모습은 평소와 달리 성숙한 여성미를 풍겼다.9년 전, 풋풋했던 그때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9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변한 게 어찌 외모뿐이겠는가. 그 마음도 변했을 텐데.무언가를 떠올렸는지 엄

  • 이혼 후 꽃길   제25화

    “정채윤 씨의 경력은 특별한 사정이 있어서 여러분께 자세히 설명해 드릴 수 없지만, 이 자리를 맡기에 충분한 실력을 갖췄어요. 제가 보증합니다.”회의실이 순간 조용해졌다.모두가 문 쪽을 바라봤다.정채윤은 그가 엄석현의 오른팔인 조정섭이라는 걸 알아보고 감사한 미소를 지었다.그녀가 프로젝트를 해 본 적이 없는 게 아니었다.다만 지금까지 맡았던 프로젝트들이 모두 정부나 군부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고, 전부 보안이 걸려 있어 외부에 밝힐 수 없었을 뿐이었다.김현중은 구세주라도 만난 듯 서둘러 앞으로 나갔다.“조 부사관님.”조정섭은 예의 바르게 인사를 나눈 후 멀찍이 있는 정채윤에게도 가볍게 눈인사를 건넸다.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저분은 엄 사령관님의 부사관이잖아.”“그, 그럼 저분 말이 거짓말일 리는 없겠네. 직접 여기까지 왔는데.”“그러게. 우리가 정채윤 씨를 오해했나 봐. 정말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었던 걸 수도 있겠어.”“그럴 수도 있지. 그래도 난 직접 실력을 보기 전까진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할래.”그 말을 듣던 안하린은 의심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렸다.하지만 곧 정채윤의 할아버지와 엄 사령관이 전우였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긴장을 풀었다.정채윤의 실력이 어떤지는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졸업하자마자 집에서 가정주부로 살던 사람이 무슨 대단한 비밀 프로젝트를 했겠는가?결국 인맥을 썼다는 걸 감추기 위한 핑계일 뿐이었다.권예준도 정채윤을 한 번 바라봤다.그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한 게 분명했다.권예준이 안하린을 보며 물었다.“이 프로젝트, 계속하고 싶어?”안하린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자신을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는 모습에 가슴이 따뜻해졌다.권예준의 능력이라면 이 프로젝트를 통째로 자신에게 가져다주고 정채윤을 내쫓는 것쯤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하지만 안하린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인맥으로 들어온 데다 실력도 없는 사람과 함께 일하고 싶지 않았다.안하린은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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