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탕후루 드셔보세요!”연미혜는 뒤를 돌아보았다.윤기 흐르는 새빨간 탕후루가 눈에 들어오자, 가슴 한쪽이 살짝 흔들렸다.생각해 보니 꽤 오랫동안 탕후루를 먹지 않은 것 같았다.문득 경다솜 쪽을 바라보니,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경다솜은 손에 탕후루 한 꼬치를 들고 행복한 얼굴로 먹고 있었다.그뿐만이 아니었다. 언제 샀는지 모를 붉은 장미 한 다발이 임지유의 손에 들려 있었다.그녀는 경민준의 곁에 바짝 붙어 그와 나긋나긋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그 사이, 경다솜은 탕후루를 한입 베어 물고는 그 조각을 임지유에게 건넸다
그때 지현승의 휴대전화가 울렸다.잠시 후 그는 전화를 끊고 말했다.“볼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 같이 갈래?”염성민이 정신을 차리며 눈빛이 살짝 깊어졌다.“아니... 난 아직 기다릴 사람이 있어서. 다음에 시간 되면 다시 보자.”“그래.”지현승은 그렇게 자리를 떴다.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염성민은 곧장 카페 쪽으로 걸어갔다.카페 문을 막 열려던 순간, 마침 경다솜을 화장실에 데려가려던 임지유와 마주쳤다. 두 사람은 동시에 걸음을 멈췄다.임지유가 그를 보며 말했다.“염 대표님? 이렇게 우연히 뵙네요.”“네
잠시 후, 임지유와 염성민이 경다솜과 함께 화장실에서 나왔다.경다솜은 호기심 많은 나이였다.가는 길마다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연신 질문을 던졌고, 임지유는 그런 다솜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로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답해주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염성민은 임지유가 경민준의 아이를 세심하게 챙기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했다.그리고 동시에, 아이를 키운다는 일이 얼마나 지난한 것인지도 다시금 떠올랐다.카페로 돌아오자, 염성민은 제일 먼저 경민준을 찾았다.그는 여전히 한쪽 구석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잡지를 넘기고 있었다.마치
경다솜은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더 이상 연미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결국 임지유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그녀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염성민은 이제 자신도 갈 때가 됐다고 생각하며 걸음을 떼려 했지만 그 순간, 시야 한쪽에 익숙한 실루엣이 들어왔다.연미혜였다. 그녀는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염성민의 걸음이 순간 멈췄다. 잠시 머뭇거린 그는 애써 무시하고 그냥 지나치려 했다.그러나 연미혜의 시선이 향한 곳을 보고는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임지유와 경다솜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런데 그 눈
경민준과 경다솜이 막 별장으로 돌아온 순간, 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경민준은 전화를 받았다.잠시 후, 그는 전화를 끊고 방금 벗었던 외투를 다시 걸쳤다. 함께 계단을 오르던 경다솜을 보며 말했다.“증조할머니께서 실수로 넘어지셔서 다치셨대. 지금 병원에 계셔서 가봐야겠다. 너는 일찍 자.”경다솜은 걱정스럽게 물었다.“나도 증조할머니 보러 가면 안 돼요?”“내일 학교 가야 하잖아. 내일 방과 후에 가자.”“알겠어요...”경민준은 그렇게 말한 뒤, 다시 밖으로 나섰다.그때, 경다솜의 휴대전화가 짧게 울렸다. 그녀는 얼른
그날 밤, 경민준은 병원을 떠나지 않았다.다음 날 아침, 경민준의 어머니 심여정과 경민아 등이 차례로 병원에 도착했다. 경민준이 밤새 병실을 지켰다는 이야기를 들은 그들은 우선 그에게 돌아가서 휴식을 취하라고 권했다.경민준은 노현숙에게 말했다.“저녁에 다시 오겠습니다.”하지만 노현숙은 그를 무시했다.경민준은 병원을 나서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한 시간여 후, 임씨 가문과 손씨 가문 사람들은 프로젝트에서 배제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곧바로 임지유에게 연락했다.그녀는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할머니의 뜻이에요. 어젯밤
연미혜는 경다솜을 보고도 특별히 놀라지 않았다. 그녀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물었다.“학교 끝나고 바로 온 거야?”“네!”경다솜은 그녀를 보자 기뻐하며 활짝 웃었다. 그러고는 병실을 향해 소리쳤다.“외증조할머니!”그때 병실 문이 열리며 허미숙이 먼저 나왔고, 곧이어 경민준도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병실에 온 연미혜와 허미숙을 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허미숙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저 그를 스쳐보았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연미혜 역시 한 번 시선을 준 후 곧바로 관심을 거두었다.경다솜이 무언가 하고
경다솜은 한참 연미혜 품에 안겨 있다가, 문득 한쪽에 앉아 그들을 바라보던 경민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아빠, 나 여기서 밥 먹고 싶어요. 우리 포장해서 여기서 같이 먹으면 안 돼요?”경민준은 잠시 딸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기분이 좋아진 경다솜은 더욱더 연미혜에게 바짝 붙어 떨어질 줄 몰랐다.허미숙과 노현숙은 여전히 나눌 이야기가 많았다. 연미혜는 옆에서 가끔 대화에 한두 마디 정도 끼어들 뿐, 곁에서 조용히 앉아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경다솜은 점점 나른해졌는지 연미혜를 올려다보며 물었다.“엄마,
양주시에서 온 이들은 허미숙을 알아보긴 했지만, 임씨 가문과 손씨 가문 쪽 사람들이 그녀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는 걸 보고는 바로 눈치를 챘다.임씨 가문 쪽에서 예전 연씨 가문과의 일들이 이 자리에서 거론되는 걸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 말이다.그렇게 분위기를 읽은 이들은 허미숙을 분명히 알아보면서도 아무도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오히려 몇몇은 시선을 임지유와 임지후 쪽으로 돌리더니, 연미혜와 허미숙이 옆에 있는 상황에서도 이금자에게 이렇게 말했다.“어르신, 두 손주분이 정말 대단하시네요. 인물도 그렇고 기품도 그렇고, 어르신 복
“그러게 말이에요.”염성민과 정범규도 현장에 있었다.그들 역시 연미혜와 임씨 가문, 손씨 가문 사이에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알지 못했기에, 이금자가 ‘사람을 잘못 봤다’고 한 말에 별다른 반응 없이 넘겼다.임해철과 임혜민 역시 그랬다. 누구 하나 나서서 연미혜를 두둔하거나, 그녀를 향해 인사 한 번도 해주지 않았다.그 광경을 지켜보던 손아림은 속이 시원하다는 듯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반면, 강혜원은 속으로는 연미혜 편을 들어주고 싶었지만, 이처럼 많은 사람들 앞에서 쉽게 입을 뗄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고개를 숙이고 말
국제 인공지능 콘퍼런스를 마친 지 이틀, 아니 사흘쯤 지난 어느 저녁, 연미혜는 퇴근 후 외삼촌 쪽 친척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호텔을 찾았다.호텔에 도착한 후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문이 닫히려던 순간, 누군가가 외쳤다.“잠깐만요!”같은 순간, 손이 쑥 들어와 문이 닫히는 것을 막았다.고개를 돌린 연미혜는 들어오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잠시 눈빛이 흔들렸다.엘리베이터에 들어선 사람은 임지후였다.두 사람은 그동안 몇 번 얼굴을 본 적은 있었지만, 마지막으로 마주친 건 두세 달 전의 일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지후는 그녀
캐벳 스미스가 말한 ‘깊이 있는 대화’라는 건 결국 김태훈에게서 Infinite-CM의 핵심 기술을 조금이라도 캐내 보겠다는 속내였다.그러나 김태훈은 그와 악수하며 한 치의 빈틈도 허락하지 않는 말투로 받아넘겼다.“스미스 교수님, 과찬이십니다. 교수님께서 쓰신 순환신경망과 어텐션 메커니즘 관련 논문, 열 번도 넘게 읽었습니다. 저한텐 정말 큰 자극이 됐어요. 이렇게 직접 뵙고 말씀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오히려 제게 큰 영광입니다.”캐벳 스미스는 당연히 더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었지만, 개막식이 임박한 터라 두 사람은 주최
캐벳 스미스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내 박사 과정 학생, 임지유입니다.”그는 임지유 외에도 네댓 명의 학생들을 데려왔는데, 그중 임지유만이 유일한 동양인이었다.임지유가 캐벳 스미스의 제자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현장에선 감탄과 부러움이 쏟아졌다.“세상에, 스미스 교수님 박사 과정 학생이라니 완전 대단한데?”“그런데 저렇게 예쁘기까지 해? 신이 모든 걸 다 줬네. 너무 불공평해!”“더 기가 막힌 건... 저 여자가 경민준의 여자 친구라는 거잖아.”“헐... 진짜 비교할 게 못 되네. 나 같은 인생은 어떡하라고...”순식간
이틀 뒤, 김태훈은 서원시에서 열리는 국제 인공지능 대회에 참석했다.지난해의 기술 박람회와 마찬가지로 이번 행사 역시 업계 관계자들이 AI 관련 최신 동향을 파악하고 기술을 교류할 수 있는 중요한 자리였다.이번에 그와 함께한 일행은 연미혜, 그리고 최근 넥스 그룹에 새로 합류한 구진원을 포함한 몇몇 엔지니어들이었다.구진원을 비롯한 신입 직원들을 함께 데려온 이유는 아직 이들이 회사의 핵심 기밀에 접근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기술 유출에 대한 걱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서원시에 도착한 뒤, 행사장에 들어서자 이미 내부
구진원은 결국 연미혜와 함께 래프팅을 타볼 기회를 잡지 못했다.하지만 저녁 무렵, 그는 또 한 번 ‘우연히’ 연미혜와 연씨 가문 사람들을 마주쳤다.그녀의 외삼촌 연창훈과 외숙모 하여진은 반갑게 인사하며, 그와 그의 친구에게 같이 식사하자고 흔쾌히 자리를 권했다.이야기를 나누다 그가 구씨 가문의 도련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연창훈이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근데 어쩐 일이에요? 갑자기 도원시로 내려올 생각을 다 하고...”구진원은 젓가락을 잠시 멈췄다.도원으로 돌아오게 된 이유가 순간 머릿속을 스쳤던 그는 짧게 숨을 고르고
‘경민준 씨는 바쁘다며 다솜인 못 챙긴다더니, 정작 임지유랑은 같이 있고?’그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연미혜는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그보다 먼저, 경다솜이 해맑게 말했다.“엄마, 조금만 더 일찍 전화했으면 좋았을 텐데요! 헬기 타고 있을 때 영상 통화했으면 진짜 멋지게 보여드릴 수 있었을 거예요!”그 말에 연미혜는 조심스럽게 웃었지만, 경다솜이 이번 여행에 얼마나 만족하고 있는지가 고스란히 느껴져 더는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그럼에도 마음 한쪽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가슴안에 찜찜함이 또 하나 차곡히 쌓였다.경다솜은
연미혜도 같은 생각이었다.그녀는 짧고 단호하게 메시지를 보냈다.[바빠. 그리고 약속 지켜. 다솜이 외할머니댁엔 절대 못 가게 해.]잠시 뒤, 경민준에게서 짧은 답장이 도착했다.[알겠어.]이후로 그는 더 이상 아무 연락도 해 오지 않았다.어린이날 연휴 다음 주말은 마침 주말이었다.그날 오후, 연미혜는 가족들과 함께 관광지에서 래프팅을 준비하고 있었다.그때 차예련에게서 사진 한 장이 도착했는데, 사진 속 인물은 임지유였다.차예련은 지금 쿠바나에 머무르며 패션쇼 준비로 한창이었다.사진을 본 연미혜는 메시지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