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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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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후의 꽃길 제276화
이연우는 본능적으로 코를 막으며 얼굴을 찌푸렸다.“여긴 오랫동안 아무도 들어온 적이 없어요. 시간이 충분하다면 테이프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원장이 그렇게 말하곤 앞장서 안으로 들어갔다.방현준은 잠시 주변을 살폈다. 바닥은 두껍게 먼지가 쌓여 있었지만 그 위로 희미하게 남아 있는 발자국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하지만 방현준은 아무 말 없이 주위를 둘러보며 속내를 감췄다.두 시간이 흘렀다. 원장은 산더미처럼 쌓인 잡동사니와 낡은 상자 속을 뒤지며 애썼지만 원하는 테이프는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바람이 낡은 창문 틈을 파고들며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기묘한 울림은 마치 어둑한 지하실 속에서 누군가 속삭이는 것처럼 음산한 기운을 더했다.“찾았다!”피곤이 묻어난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반가움이 섞여 있었다.긴 기다림에 초조해하던 이연우는 그 말에 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주저 없이 원장이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그러나 원장이 높이 들어 올린 테이프를 본 순간 모두가 얼어붙었다.녹화 테이프는 이미 쥐에게 반쯤 갉아 먹혀 있었고 내부의 얽히고설킨 필름 조각들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이연우는 충격에 휩싸인 채 눈을 크게 뜨며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엔 실망과 허무함이 뒤섞여 있었다.“이럴 수가...”방금까지 타올랐던 희망은 잔혹한 현실 앞에 순식간에 꺼져버렸다.“대부분 테이프는 1, 2년에 한 번씩 지하실로 옮겨집니다. 아마 오랫동안 아무도 들어오지 않아서 쥐가 갉아 먹은 것 같네요.”깊은 한숨과 함께 설명하는 원장의 얼굴도 굳어 있었다.테이프를 찾으면 보육원 보수 자금을 얻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으나 눈앞의 현실은 그 희망을 무너뜨렸다.방현준은 마치 이런 결말을 예상이라도 한 듯 크게 놀라는 기색도 없이 담담히 서 있었다.미간을 살짝 찌푸린 그는 이연우를 바라보며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테이프는 소용없어.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담담한 방현준의 목소리는 마치 이연우의 가라앉은 마음을 살며시
이혼 후의 꽃길 제275화
“윤 원장님은 왜 돌아가신 겁니까?”방현준이 옆에 서서 진지한 표정으로 천천히 물었다.그는 신임 원장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그녀의 표정에서 작은 단서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한 달 전, 장을 보러 나갔다가 교통사고를 당하셨어요.”신임 원장은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방현준의 미간이 더 깊게 찌푸려졌다.한 달 전이라면 지한겸이 이미 H국을 떠났다고 생각했던 시기였다.그런데 그는 여전히 이곳에 있었다.계약을 맺던 날이 불과 한 달 반 전이었으니 계산이 맞지 않았다.윤 원장이 이연우의 출생과 관련이 있다는 점을 떠올리자 윤 원장의 죽음이 단순한 사고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뭔가 숨겨진 비밀이라도 있는 건가?’“어쩌다 그런 사고가 난 겁니까?”방현준은 놓치지 않고 다시 캐물었다.“대형 트럭 운전자가 과로 상태로 운전하다가 그만 윤 원장님을 치고 말았습니다.”신임 원장은 담담히 답했다.회피나 흔들림이 없는 그녀의 눈빛을 보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방현준은 눈을 가늘게 뜨고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이제 H국에 이연우가 어떻게 보육원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아는 유일한 사람은 세상에 없었다.우연이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석연치 않았다.‘누군가 이연우의 신분이 드러나는 게 무서워서 일부러 막고 있나? 만약 그렇다면 그 세력도 만만하지는 않겠어.’“지금이라도 20여 년 전의 CCTV 영상 같은 걸 확인할 수 있을까요?”방현준은 문득 떠올린 듯 물었다.보육원은 다른 시설과 달리 일부러 아이를 유기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기록을 남기는 경우가 있었다.오랜 시간이 흘렀다 해도 당시에 남겨진 테이프를 찾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신임 원장은 두 사람을 경계하듯 바라보며 얼굴을 굳혔다.“두 분, 도대체 정체가 뭐죠?”그녀의 시선에는 의심과 경계가 서려 있었다.“제 아내가 어릴 적 이곳에 맡겨졌습니다. 그저 누가 그녀를 여기로 데려왔는지만 확인하고 싶을 뿐입니다.”방현준은 피하지 않고 담담하면서도 단호하게
이혼 후의 꽃길 제274화
“한씨 가문이요?”이연우는 순간 멍하니 굳어졌다. 그 성씨는 왠지 모르게 묵직하고 오래된 울림을 지닌 듯했다.“하지만 저는 예전 기억이 전혀 없어요.”그녀는 의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원장님은 늘 그녀가 다섯 살 무렵 큰 병을 앓고 깨어난 뒤 가족도 과거도 모든 걸 잊어버렸다고 말했었다.“내일 원장님을 찾아가 보자.”방현준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나지막이 말했다.이미 이십여 년 전의 일이기에 많은 흔적들이 흐릿해져 제대로 된 단서를 찾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나씨 가문 쪽에서도 아직 별다른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기에 지금 당장은 H국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다음 날 아침, 두 사람은 보육원으로 향했다.가는 내내 이연우의 마음은 복잡했다.그곳에는 병으로 인해 부모에게 버려진 아이들도 있었고 부모를 모두 잃고 친척마저 받아주지 않아 결국 보내질 수밖에 없었던 아이들도 있었다.그 아이들을 떠올리자 그녀의 가슴은 알 수 없는 쓰라림으로 저렸다.보육원에 도착했을 때 익숙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하지만 기억 속의 활기찬 모습과 달리 지금은 어딘가 고요하고 적막했다.마당에선 몇몇 아이들이 놀고 있었지만 그 얼굴에는 다른 아이들에게서 쉽게 볼 수 없는 무심한 빛이 감돌았다.그 모습을 본 이연우의 가슴은 또다시 시리게 아팠다.순간 가슴이 저릿해진 그녀는 미리 준비해 온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간식들을 꺼냈다.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하나하나 아이들에게 건네자 아이들은 놀란 듯 눈을 반짝이며 조심스럽게 받았다.잠시 후 이연우와 방현준은 나란히 원장실로 향했다.복도는 여전히 예전과 다를 바 없었고 벽에는 아이들이 그린 그림이 걸려 있었다.문 앞에 이르러 조심스레 노크한 이연우는 안에서 들어오라는 답이 들리자 문을 열었다.그러나 이연우는 들어서자마자 얼어붙었다. 책상 뒤에 앉아 있는 사람은 예전의 윤 원장이 아니라 낯선 얼굴의 여자였다.이연우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윤 원장님은 안 계신가요?”“두 분은...?”여자는 고개를 들어 경계
이혼 후의 꽃길 제273화
밤하늘은 무거운 검은 비단처럼 세상을 온전히 덮어버렸다.고요한 침실 안에는 이연우와 방현준의 고른 숨소리만이 잔잔히 흘렀다.하지만 그 평온은 오래 가지 못하고 이연우는 또다시 악몽에 사로잡혔다.꿈속에서 거대한 불길이 마치 괴수처럼 세상을 집어삼키며 맹렬히 타올랐다.붉은 화염이 번지는 곳엔 음산한 고성이 서 있었고 불빛 속에 비친 성의 윤곽은 기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그 불길 앞에 서 있는 무표정한 사람들, 영혼이 빠져나간 듯 텅 빈 눈빛은 오히려 불길보다 섬뜩했다.이연우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번쩍 몸을 일으켰다.거친 숨을 몰아쉬는 이연우의 온몸은 땀에 젖어 있었고 작은 땀방울들이 뺨을 타고 흘러내려 베개를 적셨다.꿈속의 광경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듯, 커다랗게 뜬 두 눈에는 아직 공포와 무력감이 가득했고 했다.방현준은 이연우의 기척에 잠에서 벌떡 깼다.이연우의 모습을 확인한 방현준은 순간 졸음이 달아나고 얼굴엔 걱정이 드리워졌다.그는 급히 다가가 두 손으로 이연우의 어깨를 감싸 쥐며 물었다.“연우야, 무슨 일이야?”“불... 너무 큰 불이었어요.”떨리는 이연우의 목소리에는 짙은 두려움이 번져있었다.마치 그 불길이 지금도 눈앞에서 타오르고 있는 듯, 이연우는 온몸을 떨고 있었다.최근 들어 이 악몽은 점점 더 자주 찾아왔고 그녀는 매번 불길 속에서 깨어났다.심장이 요동치고 숨이 가빠졌다.“무슨 불?”방현준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난감한 얼굴을 했다.“제가 다섯 살 이전의 기억이 없다고 말씀드린 적 있죠? 보육원에 들어간 뒤로는 늘 불길이 치솟는 꿈을 꿔요. 너무나도 선명해서... 마치 제가 직접 겪은 일처럼 느껴져요.”이연우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수년 동안 그녀를 괴롭혀 온 기억의 공백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처럼 남아 있었다.그 빈자리는 마치 넘을 수 없는 거대한 강처럼 그녀 삶의 한가운데 버티고 있었다.그 이야기를 들은 순간 방현준의 눈빛이 번뜩였다.마치 잃어버린 퍼즐 조각 하나가 드디어 제자리
이혼 후의 꽃길 제272화
“이 녀석, 대단한데? 벌써 여자가 생기다니!”여도진의 말투에는 장난스러움과 함께 부러움이 묻어났다.그러나 곧 이연우를 바라보던 그의 얼굴에 아련한 빛이 스쳤다.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세아가 아직 살아 있었다면 너랑 결혼하는 사람은 그 애였을 텐데...”그 한마디엔 깊은 회한과 그리움이 담겨 있었다.방현준은 번뜩이는 눈빛으로 여도진을 노려봤다.“죽은 지 너무 오래돼서 모르는 모양이지? 네 여동생, 한세아. 이미 찾았어.”“뭐라고?”여도진의 얼굴이 단번에 무너졌다.늘 차분하던 표정은 완전히 뒤집히고 커다란 눈동자엔 충격이 고스란히 드러났다.그는 방현준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다시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몸을 기울였다.“분명 죽었는데... 그런데 어떻게 집으로 돌아갔다는 말이야?”떨리는 그의 목소리에 의문과 동요가 일었다.방현준은 날카롭게 받아쳤다.“너도 죽은 줄 알았는데 지금 이렇게 살아있잖아.”그의 시선엔 원망과 비꼼이 뒤섞여 있었다.“세아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어?”여도진의 눈빛은 걱정과 조급함으로 가득했다. 그는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듯 다급하게 물었다.하지만 방현준은 쉽사리 답하지 않았다.그는 잠시 이연우와 여도진을 번갈아 보며 입술을 깨물더니 나지막이 물었다.“정말 너희 집에 있는 그 여자가 네 여동생이라고 믿어?”그 의심 어린 시선에 여도진은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아직 직접 본 적이 없으니 난 모르지.”여도진은 미간을 깊게 찌푸리며 심각한 얼굴로 답했다.방현준이 그 여자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느껴지자 그 불안은 그대로 여도진의가슴에 내려앉았다.“그만 생각해. 넌 이미 죽은 사람이잖아.”방현준은 여도진의 속마음을 꿰뚫어 본 듯 단호하게 잘라냈다.그러나 죽은 자가 다시 세상에 나타난다면 분명 더 큰 소용돌이가 휘몰아칠 터였고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다시 빠져나오기도 어려울 것이었다.잠시 침묵하던 여도진은 크게 숨을 들이쉬며 감정을 누른 뒤 애써 미소 지었다.“그래서
이혼 후의 꽃길 제271화
차에 오른 후 방현준은 이연우를 곧장 집으로 데려가지 않았다.그는 묵묵히 핸들을 잡고 굽이진 도로를 따라가더니 한적한 골목 끝자락에 차를 세웠다.차 안 공기는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고 그의 얼굴엔 복잡한 기색이 어렸다.조수석에 앉은 이연우는 그의 날 선 얼굴을 바라보며 온갖 의문과 불안이 일었지만 감히 함부로 물어보지도 못했다.골목 끝에는 한 군용 차량이 가로등 불빛 아래 묵묵히 서 있었다. 차체에서 풍겨 나오는 냉철한 기운은 묘한 위압감과 신비로움을 더했다.방현준은 차를 천천히 세우더니 말없이 문을 열고 먼저 내렸다.이연우도 급히 뒤를 따랐다.그곳에는 여도진이 차 앞에 기대어 서 있었다. 팔짱을 낀 채 여유로운 모습은 마치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듯한 태도였다.각 잡힌 군복 위로 바른 몸 선이 드러났고 가로등 빛은 그의 얼굴을 스쳐 지나며 강인한 윤곽을 또렷하게 그려냈다.그를 보는 방현준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방현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이연우에게 그 자리에 서 있으라는 듯 손짓하고는 곧장 한 발 앞으로 나서서 주먹을 내질렀다.수년간 쌓인 원한과 분노가 응축된 듯한 일격이었다.그러나 여도진은 눈빛을 번뜩이며 가볍게 몸을 뒤로 빼 한순간에 피했다.이연우는 놀란 눈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봤다.‘불과 몇 시간 전까진 서로 날 선 말만 주고받더니 이제는 주먹이 오가는 싸움이라니...’이연우는 떨리는 마음으로 두 사람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잠시 뒤 여도진의 동작이 점차 느슨해지더니 힘을 조금 빼는 듯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방현준은 날카로운 일격으로 여도진을 바닥에 쓰러뜨렸다.여도진의 몸이 뒤로 나가떨어지며 땅에 거칠게 부딪쳤고 흙먼지가 허공에 흩날렸다.방현준은 재빨리 다가가 그의 옷깃을 움켜쥐고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당장이라도 다시 주먹을 휘두를 듯 몸을 기울였다.그때, 여도진이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정적에 잠긴 밤 속에 울린 웃음소리는 이질적이기까지 했다.“못 본 사이에 실력이 많이 늘었네?”그는 웃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