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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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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후의 꽃길 제280화
지한겸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감추려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의 불안은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이연우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눈앞의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두 사람의 시선이 한동안 맞물린 뒤 그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한겸 오빠, 저 다섯 살 이전의 기억은 전혀 없어요. 요즘 들어 겨우 조금씩 단편적인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는데 그 흐릿한 장면 속에서 저는 한씨였던 것 같아요.”이연우의 말투는 차분했지만 그 한마디는 마치 폭탄처럼 지한겸의 마음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지한겸은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그 움직임이 워낙 급작스러워 의자가 바닥과 마찰하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그의 얼굴엔 충격이 서려 있었고 크게 뜬 눈으로 이연우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믿기 어려운 광경을 목격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이연우는 지한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깜짝 놀라 몸을 움찔 떨었다. 그녀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한겸 오빠, 갑자기 왜 그래요?”“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기뻐서 그래. 네가 이름을 기억해 낸다면 곧 친부모님을 찾을 수도 있을 테니까.”지한겸은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그 모습은 오히려 울 것 같은 얼굴에 가까웠다.이연우는 그의 이마에 맺힌 작은 땀방울을 또렷이 볼 수 있었다.이연우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그저 조용히 지한겸을 바라보았다.하지만 그녀 마음속에선 의심의 씨앗이 다시 깊이 심겨 서서히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지한겸의 지나치게 격한 반응은 그녀가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다.그녀는 점점 지한겸이 자신의 과거와 관련된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게다가 그것을 결코 그녀가 알길 원하지 않는 듯했다.“오빠, 제가 어릴 때부터 말했잖아요. 부모님을 찾으면 꼭 오빠도 함께 데려갈 거라고. 같이 행복하게 살면서 더 이상 보육원에서 고생하지 말자고 했잖아요. 단편적인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해서 이제 부모님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오빠는 기쁘지
이혼 후의 꽃길 제279화
삼 일 뒤, 옅은 구름을 뚫고 내려온 햇살이 도심 곳곳을 물들이고 있었다.해외 일정을 마친 지한겸이 드디어 귀국했다.이연우는 업무의 편의를 생각해 지한겸을 잠시 자신의 집에 머물게 했고 자신은 방현준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밤이 찾아오고 불빛이 켜진 도시 위로 적막이 내려앉았다.저녁 식사 시간, 식당에는 따스한 조명 하나만 켜져 있었다.이연우는 국물 속에서 이리저리 흩날리는 면발을 젓가락으로 휘젓고만 있을 뿐 도통 먹을 기미가 없었다.그녀의 맞은편에 앉은 지한겸은 그렇게 멍하니 앉아 있는 그녀를 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연우야, 무슨 일이야? 방현준이 너 괴롭힌 거야?”이연우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시선을 그릇에 고정한 채 나지막이 말했다.“그저 윤 원장님이 왜 그렇게 일찍 가셔야 했을까 생각하고 있었어요.”그녀의 눈빛에는 서글픔이 어려 있었다.기억은 자연스레 처음 보육원에 발을 들였던 날로 흘러갔다.그때의 윤 원장님은 겨우 스무 살을 조금 넘긴 청춘이어서 넘치는 활력으로 모든 아이를 정성을 다해 돌봐줬다.이제 세월이 흘러 쉰을 바라볼 나이, 한창 편히 살아야 할 때에 이런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니 이연우는 마음 깊이 허망함을 느꼈다.“운전자는 이미 법의 심판을 받았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그 사람이 감옥에 가도 원장님은 돌아올 수 없잖아요.”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불쑥 고개를 들어 지한겸의 얼굴을 살폈다.이연우는 그의 얼굴이 순간 살짝 변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지한겸은 서둘러 미소를 되찾으며 태연한 얼굴을 했다.“연우야, 원장님도 우리가 슬픔에만 빠져 있길 바라진 않을 거야. 앞으로 나아가는 게 그분을 기리는 길이지.”지한겸은 부드러운 어조로 말하며 고기 한 점을 그녀의 그릇에 놓아주었다.이연우는 마치 사색에 잠긴 듯 미간을 찌푸렸다.“한겸 오빠, 어릴 때 자주 악몽 꾸던 거 기억해요? 제가 계속 불길 속에 갇혀 있던 꿈이요.”나지막한 그녀의 목소리는 오래된 기억을 더듬는 듯했다.“기억나지. 네가 그 꿈 때문에
이혼 후의 꽃길 제278화
의도적으로 말을 피하는 듯한 지한겸의 태도에 이연우의 마음속 의심은 더욱 짙어졌다.“오빠, 돌아오면 같이 윤 원장님께 가서 인사드려요.”이연우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최대한 자연스러운 말투를 유지하려 애썼지만 마음속은 마치 파도치듯 요동쳤다.조금 전 지한겸의 순간적으로 굳었다가 금세 평정을 되찾은 표정은 그녀가 품고 있던 불안한 추측을 오히려 확신으로 바꾸는 듯했다.그녀는 지한겸이 윤 원장님의 죽음과 자신의 출생에 얽힌 미스터리와 깊은 연관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좋아.”지한겸은 짧게 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화면에 떠오른 통화 종료라는 글자가 이연우의 가슴을 날카롭게 찔렀다.그녀는 천천히 핸드폰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공허한 눈빛으로 조금 전 지한겸과의 대화를 곱씹었다.그 곁에서 방현준은 묵묵히 이연우의 모든 움직임을 관찰하며 그녀의 미묘한 감정 변화 하나까지 놓치지 않았다.그의 눈빛엔 안쓰러움과 더불어 진실을 파헤치려는 단단한 의지가 스쳤다.방현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나지막이 물었다.“연우야, 너는 지한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어?”방현준은 이전부터 지한겸에 대해 조사해왔다.지한겸은 입양된 이후로 줄곧 지씨 가문의 도움을 받으며 순조로운 생활을 이어왔지만 지한겸이 해외로 떠난 뒤 부모님은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이 연속된 사건들은 단순한 우연으로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너무 많았다.오히려 누군가의 치밀한 계획일 확률이 더 높았다.“제가 정말 한씨 가문의 딸이라면 그 사람들은 왜 저를 보육원에 버린 걸까요?”이연우는 고개를 들며 혼란과 당혹감이 뒤섞인 눈빛으로 물었다.‘이토록 낯선 나라, 낯선 보육원에서 홀로 자라게 하다니... 가족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한 번도 내가 어떻게 지낼지 생각해 보지 않았구나.’그 사실을 떠올리자 서러움이 파도처럼 밀려왔다.“연우야, 한씨 가문 일은 매우 복잡해. 확실히 밝혀내기 전까진 절대 입 밖에 내선 안 돼.”방현준은 단호한 어조로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이혼 후의 꽃길 제277화
방현준은 차를 도로 옆에 바짝 세우더니 몸을 살짝 틀어 이연우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단단했고 목소리에는 묘한 압박감이 묻어 있었다.“연우야, 너도 한 사람이 수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그 말에 이연우는 본능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머릿속으로 몇몇 얼굴을 떠올리던 이연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혹시 한겸 오빠 얘기하는 거예요?”사실 이연우는 방현준이 말을 꺼내자마자 그 이름을 떠올리고 있었지만 마음이 거세게 저항했다.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오며 늘 다정하게 자신의 곁을 지켜준 지한겸이 자신의 과거를 막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차마 믿고 싶지 않았다.방현준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최근 프로젝트 때문에 접촉이 잦아. 두 사람만의 디자인팀을 따로 만들어 줄게.”방현준은 이연우가 지한겸과 함께하는 시간을 늘려야만 그사이에 감춰진 진실이 드러날 거로 생각했다.이연우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침묵에 잠겼다.믿고 싶지 않은 마음과 의심을 거둘 수 없는 상황 사이에서 그녀의 가슴은 끝없이 흔들렸다.이연우는 늘 자신을 보살펴주고 함께 자라온 지한겸이 자기 부모를 찾는 일을 방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지금까지 드러난 수많은 정황이 그녀의 마음속에 의심의 불씨를 피워 올리고 있었고 그 모순된 감정은 그녀를 끊임없이 괴롭혔다.사무실로 돌아온 뒤 이연우는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핸드폰을 집어 들어 지한겸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그 시각, 지한겸은 해외의 한 화려한 행사장에 있었다.찬란한 조명과 인파 속에서 그는 이연우의 통화 요청을 보자 눈빛을 반짝이며 곧장 비교적 조용한 구석으로 몸을 옮겨 전화를 받았다.“연우야, 무슨 일이야?”“방 대표님이 우리 둘만의 디자인팀을 만들어 준대요. 오빠, 언제쯤 바쁜 일 마칠 수 있어요?”이연우는 애써 감정을 추스르며 평소처럼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일주일 정도면 정리될 거야. 너랑 함께 일할 수 있다니 정말 영광이네.”지한겸의 얼굴에는 진심
이혼 후의 꽃길 제276화
이연우는 본능적으로 코를 막으며 얼굴을 찌푸렸다.“여긴 오랫동안 아무도 들어온 적이 없어요. 시간이 충분하다면 테이프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원장이 그렇게 말하곤 앞장서 안으로 들어갔다.방현준은 잠시 주변을 살폈다. 바닥은 두껍게 먼지가 쌓여 있었지만 그 위로 희미하게 남아 있는 발자국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하지만 방현준은 아무 말 없이 주위를 둘러보며 속내를 감췄다.두 시간이 흘렀다. 원장은 산더미처럼 쌓인 잡동사니와 낡은 상자 속을 뒤지며 애썼지만 원하는 테이프는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바람이 낡은 창문 틈을 파고들며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기묘한 울림은 마치 어둑한 지하실 속에서 누군가 속삭이는 것처럼 음산한 기운을 더했다.“찾았다!”피곤이 묻어난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반가움이 섞여 있었다.긴 기다림에 초조해하던 이연우는 그 말에 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주저 없이 원장이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그러나 원장이 높이 들어 올린 테이프를 본 순간 모두가 얼어붙었다.녹화 테이프는 이미 쥐에게 반쯤 갉아 먹혀 있었고 내부의 얽히고설킨 필름 조각들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이연우는 충격에 휩싸인 채 눈을 크게 뜨며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엔 실망과 허무함이 뒤섞여 있었다.“이럴 수가...”방금까지 타올랐던 희망은 잔혹한 현실 앞에 순식간에 꺼져버렸다.“대부분 테이프는 1, 2년에 한 번씩 지하실로 옮겨집니다. 아마 오랫동안 아무도 들어오지 않아서 쥐가 갉아 먹은 것 같네요.”깊은 한숨과 함께 설명하는 원장의 얼굴도 굳어 있었다.테이프를 찾으면 보육원 보수 자금을 얻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으나 눈앞의 현실은 그 희망을 무너뜨렸다.방현준은 마치 이런 결말을 예상이라도 한 듯 크게 놀라는 기색도 없이 담담히 서 있었다.미간을 살짝 찌푸린 그는 이연우를 바라보며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테이프는 소용없어.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담담한 방현준의 목소리는 마치 이연우의 가라앉은 마음을 살며시
이혼 후의 꽃길 제275화
“윤 원장님은 왜 돌아가신 겁니까?”방현준이 옆에 서서 진지한 표정으로 천천히 물었다.그는 신임 원장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그녀의 표정에서 작은 단서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한 달 전, 장을 보러 나갔다가 교통사고를 당하셨어요.”신임 원장은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방현준의 미간이 더 깊게 찌푸려졌다.한 달 전이라면 지한겸이 이미 H국을 떠났다고 생각했던 시기였다.그런데 그는 여전히 이곳에 있었다.계약을 맺던 날이 불과 한 달 반 전이었으니 계산이 맞지 않았다.윤 원장이 이연우의 출생과 관련이 있다는 점을 떠올리자 윤 원장의 죽음이 단순한 사고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뭔가 숨겨진 비밀이라도 있는 건가?’“어쩌다 그런 사고가 난 겁니까?”방현준은 놓치지 않고 다시 캐물었다.“대형 트럭 운전자가 과로 상태로 운전하다가 그만 윤 원장님을 치고 말았습니다.”신임 원장은 담담히 답했다.회피나 흔들림이 없는 그녀의 눈빛을 보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방현준은 눈을 가늘게 뜨고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이제 H국에 이연우가 어떻게 보육원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아는 유일한 사람은 세상에 없었다.우연이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석연치 않았다.‘누군가 이연우의 신분이 드러나는 게 무서워서 일부러 막고 있나? 만약 그렇다면 그 세력도 만만하지는 않겠어.’“지금이라도 20여 년 전의 CCTV 영상 같은 걸 확인할 수 있을까요?”방현준은 문득 떠올린 듯 물었다.보육원은 다른 시설과 달리 일부러 아이를 유기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기록을 남기는 경우가 있었다.오랜 시간이 흘렀다 해도 당시에 남겨진 테이프를 찾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신임 원장은 두 사람을 경계하듯 바라보며 얼굴을 굳혔다.“두 분, 도대체 정체가 뭐죠?”그녀의 시선에는 의심과 경계가 서려 있었다.“제 아내가 어릴 적 이곳에 맡겨졌습니다. 그저 누가 그녀를 여기로 데려왔는지만 확인하고 싶을 뿐입니다.”방현준은 피하지 않고 담담하면서도 단호하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