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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제 남편이에요

성혜인은 반승제의 차가운 표정에 몸이 흠칫 떨리는 것만 같았다.

그의 일행은 빠르게 성혜인을 스쳐 지나갔다. 가장 선두에 있는 사람은 반승제와 얘기하느라 주변을 신경 쓸 겨를도 없어 보였다. 뒤에 있는 사람은 전부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이는 성혜인이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낯선 세상이었다.

성혜인은 잠깐 넋을 놓고 있다가 골프채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평범한 생김새의 이승주는 명품 운동복을 입고 가볍게 공을 치고 있었다. 성혜인이 걸어오는 것을 보고 그는 골프채를 캐디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드디어 만났네요, 페니 씨. 일 한 번 같이 하기 너무 힘든 거 아니에요?”

성혜인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옆에 앉았다

“아닙니다. 저는 그냥 평범한 직원일 뿐인데요.”

이때 골프장 직원들이 주변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거물이 방문하려는 모양이었다.

성혜인의 시선을 느낀 이승주는 허풍을 치기 시작했다.

“BH그룹이라고 알아요? 제 아버지가 오늘 BH그룹 대표랑 4조짜리 경기를 준비했어요.”

성혜인의 경험으로 허풍 치기를 좋아하는 고객을 상대로는 무조건적인 칭찬이 가장 옳았다.

“도련님께서 금방 산 땅만 해도 600억은 된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생각하면 4조쯤은 HD은행에게 아무것도 아니지 않나요?”

이승주는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그 정도는 아니에요. 하지만 반승제가 금방 귀국하고 나서 첫 합작 기회가 생겼으니 이쯤은 준비해야죠.”

“반승제 씨의 귀국이 확실히 중요한 포인트가 되었죠.”

성혜인은 상대가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칭찬만 했다.

이때 이승주가 캐디가 건네는 물을 받아들며 몸을 일으켰고, 성혜인도 어쩔 수 없이 따라 일어났다.

“제 아버지 말로는 반승제가 이미 결혼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요? 보기에는 전혀 결혼한 사람 같지 않던데요.”

성혜인은 골프채를 꺼내면서 말했다. 갑이 하고 싶은 얘기라면 그녀는 뭐든 맞춰줄 수 있었다.

“그러게 말이에요. 결혼을 했으면 와이프를 보여줘야 할 거 아니에요. 이쯤 되면 사람들이 비웃을 정도로 못생겨서 숨겨두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가네요.”

성혜인은 골프채를 휘둘러 보면서 대답했다.

“일리가 있네요.”

이승주는 성혜인의 휘날리는 머리카락과 밝게 빛나는 피부를 보며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만약 페니 씨 같은 미인이라면 무조건 매일 데리고 다녔을 거예요.”

“제가 어찌 감히요.”

두 사람은 몇 마디 주고받으며 골프를 치다가 이승주가 쉬고 싶다고 해서 금세 다시 골프채를 내려놓았다.

성혜인은 이참에 디자인 얘기를 꺼내고 싶었는데 그녀가 말을 꺼내기 먼저 이승주가 먼저 말했다.

“저희는 일단 옷부터 갈아입고 계속 얘기를 나눌까요?”

이런 차림으로 일 얘기를 하는 게 확실히 적합하지 않았기에 성혜인은 머리를 끄덕이고 샤워하러 갔다. 그녀가 금방 옷을 갈아입고 나왔을 때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개인 샤워실에 노크도 없이 들어올 사람은 없었기에 성혜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머리를 들었다.

성혜인은 원래 골프장 직원이 잘못 들어온 줄 알았는데 이승주가 샤워 타올 한 장만 걸친 채로 안으로 들어왔다.

이승주의 몸에는 근육 하나 없었고 한눈에 봐도 먹고 싶은 것을 생각 없이 전부 먹은 몸매였다.

이상함을 눈치챈 성혜인은 경제적인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곳은 여자 탈의실이에요. 잘못 들어오신 것 같은데요.”

이승주는 피식 웃으며 대놓고 그녀를 훑어봤다.

“페니 씨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주변 사람들이 말한 적 있나요?”

이승주는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왔다.

“제가 예전에 연락했을 때는 듣는 체도 안 하더니, 요즘은 돈이 모자랐나 봐요?”

성혜인은 뒷걸음질 치며 말했다.

“이러지 마세요.”

이승주는 성혜인의 차가운 태도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는 약간 성깔 있는 여자가 더 좋았다. 그래야 플레이할 때 더 재미있기도 하고 말이다.

“오늘 페니 씨의 선택에 따라 디자인 비용이 몇억 더 오를 수도 있어요.”

성혜인은 인상을 쓰면서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이승주가 그녀의 허리를 잡으면서 말했다.

“제가 여기까지 혼자 왔을 것 같아요? 도망은 추천하지 않을게요.”

살이 맞닿은 말랑한 촉감에 이승주는 더 가까이 다가가려고 했다.

“저는 도망가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도련님이야말로 뒷감당할 수 있겠어요?”

성혜인은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며 말했다. 그녀는 체력적으로 상대를 이길 수 없을뿐더러 문밖에 사람도 있어서 신중해야만 했다.

“BH그룹과의 만남이 아주 중요하다고 하지 않았어요? 잠깐의 충동으로 일을 망쳐도 괜찮아요?”

이승주는 그녀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그 뜻은 반승제가 페니 씨를 위해 합작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

“네.”

성혜인의 서슴없는 대답에 이승주는 약간 멈칫했다.

“둘이 무슨 사이인데요?”

“반승제 씨가 제 남편이에요.”

이승주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이때 성혜인이 이어서 말했다.

“만약 믿지 못하겠으면 반승제 씨한테 전화해서 와보라고 해요.”

이 말을 듣고 난 이승주는 표정이 완전히 굳었다. 만약 성혜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지금 유부녀의 탈의실에 들어온 것이었다.

반승제가 아무리 자신의 아내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남자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못할것이다.

확신이 서지 않았던 이승주는 아쉬운 표정으로 손을 놓고 떨어졌다. 그는 성혜인의 말을무시하고 모험할 만한 용기가 없었다.

남 모르게 한숨 돌린 성혜인은 자신의 물건을 챙기고 탈의실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그녀는 바로 나가지 못하고 제자리에 멈춰 섰다.

복도 끝에서 다가오고 있는 한 사람을 바라보며 성혜인은 등골이 싸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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