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점심시간, 바리는 식판도 안 들고 곧장 재무팀으로 향했다. 아까부터 손등이 자꾸 신경 쓰여서 밥이 넘어갈 것 같지 않았다.
"오해영 대리님, 저 아까 그거요."
오해영 대리는 모니터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손사래를 쳤다.
"아, 그 문양 얘기시죠? 별거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근데 아까 표정이 별거 아닌 표정이 아니셨는데요. 저도 눈치 있거든요."
"제가요? 아닌데요, 저 원래 표정이 좀 그래요. 놀라면 다 저래요."
오해영 대리는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게 너무 티가 났다. 손가락이 마우스를 클릭하는 척하면서 실은 계속 같은 자리만 클릭하고 있었다. 바리는 책상에 손을 짚고 몸을 살짝 기울였다.
"대리님, 저 지금 진짜 궁금해서 그래요. 제 손등에서 빛난 거, 그거 뭐예요? 저 그거 보고 나서부터 계속 신경 쓰여서 아무것도 손에 안 잡혀요."
"...그건 제 담당 구역이 아니라서요. 죄송한데 저 지금 마감이라."
"마감이요? 아까는 여유 있어 보이셨는데."
"갑자기 바빠졌어요. 재무팀이 원래 이래요, 바리 씨. 죄송해요."
오해영 대리는 서둘러 모니터 뒤로 몸을 숨기듯 앉았다. 심지어 의자까지 살짝 돌려서 시선을 아예 차단해버렸다. 바리는 더 캐물으려다가, 어차피 여기서는 답이 안 나올 거란 걸 직감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담당 구역이 아니다? 그럼 대체 누구 담당인데. 이렇게까지 피할 일이야?'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 마침 탕비실에서 커피를 타고 있던 덕순을 발견하고 바리가 다가갔다. 덕순이라면 뭐든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사내 정보통이라고 자기 입으로 그랬으니까.
"덕순 씨, 저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네네, 뭐든지요! 저 모르는 거 없어요, 여기서 5년 넘게 굴렀거든요."
"제 손등에 떴던 그 문양 있잖아요. 그게 뭔지 알아요?"
덕순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 커피 스틱을 뜯다 말고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반응이 오해영 대리보다 더 컸다.
"어, 그, 그게..."
"덕순 씨도 뭔가 알고 있는 눈치인데요? 표정이 딱 그래요."
"아니 그게, 저도 정확힌 몰라요! 진짜예요! 근데 그런 문양은 보통... 흔한 게 아니라서."
덕순은 목소리를 낮추며 주위를 살폈다. 탕비실 문 쪽을 한 번 쳐다보고 나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거요, 팀장님 담당 구역이에요. 아니, 정확히는 팀장님만 아시는 거예요. 저도 예전에 신입 때 살짝 물어봤다가 엄청 정색하시길래 그 뒤로 안 물어봐요. 팀장님이 그렇게 정색하시는 거 그때 처음 봤어요."
"팀장님이요? 왜요? 그냥 문양 하나 물어본 건데 왜 그렇게까지 정색을 해요?"
"그건 저도... 진짜 몰라요. 근데 확실한 건, 그거 보통 사람들한테는 안 뜨는 거예요. 저도 여기서 몇 년 일하면서 문양 뜨는 거 처음 봤어요."
"...처음이요?"
"네. 관문 통과할 때 도장 찍히는 거야 다들 겪는 절차인데, 손등에 빛나는 문양까지 뜨는 건 저도 처음 봐요. 원래 그런 거 없거든요, 절차상."
바리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그럼 이게 원래 있어야 할 절차가 아니라는 뜻인가. 그럼 왜 자기한테만 이런 일이 생긴 걸까.
"아무튼 바리 씨, 이건 그냥 팀장님한테 직접 물어보는 게 나을 거예요. 제가 괜히 얘기했다가 저 잘리면 안 되잖아요. 여기 규정 위반하면 진짜 무섭거든요."
덕순은 커피를 손에 든 채 도망치듯 탕비실을 빠져나갔다. 바리는 혼자 남아 손등을 내려다봤다. 아무것도 없는, 평범한 손등이었다. 손가락으로 몇 번이나 문질러 봐도 아무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런데 왜 다들 이렇게 말을 아끼는 걸까. 마치 뭔가 큰 비밀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거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닌 거 같은데. 팀장님한테 직접 물어봐야겠어.'
자리로 돌아와 앉으니 마침 무장승이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펜을 굴리며 서류에 뭔가를 적고 있었다. 바리는 잠깐 그 옆얼굴을 쳐다봤다. 코끝이 오뚝하고, 눈매는 날카로운데 이상하게 자꾸 보게 되는 얼굴이었다. 뭔가 물어볼까 말까 망설이는 사이,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또각또각, 힐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사무실 바닥이 대리석도 아닌데 그 소리만큼은 유난히 선명하게 퍼졌다.
들어선 사람은 딱 떨어지는 정장 차림에 흐트러짐 하나 없는 머리를 한 여자였다. 걸음걸이부터가 남달랐다. 어깨는 곧고, 시선은 정면을 향한 채 흔들림이 없었다. 딱 봐도 이 사무실의 누구보다도 위에 있는 사람이라는 게 느껴지는 태도였다. 사무실 안 모든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어, 인사팀장님?"
누군가 낮게 속삭였고, 그 한마디에 사무실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몇몇 직원은 자리에서 슬쩍 일어나 목례를 했고, 몇몇은 아예 숨을 죽였다. 방금 전까지 왁자지껄하던 사무실이 마치 정전이라도 된 것처럼 조용해졌다.
바리는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며 옆을 힐끔 봤다. 무장승의 손이, 서류를 넘기다 말고 딱 멈춰 있었다.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어깨에 미세한 긴장이 실려 있는 게 보였다. 마치 뭔가를 각오하는 사람처럼.
여자는 사무실을 가로질러 곧장 무장승의 책상 앞으로 걸어왔다. 걸음마다 향수 냄새가 은은하게 퍼졌다. 그리고 입가에 옅은 미소를 걸며 말했다.
"오랜만이네요, 장승 씨."
그 순간, 바리는 이상하게 목이 마른 느낌이 들었다. 별것도 아닌데, 그냥 이름 부른 것뿐인데. 그런데 저 호칭이, '팀장님'도 아니고 '무장승 씨'도 아니고 '장승 씨'라는 저 짧은 두 글자가 묘하게 신경을 긁었다.
'뭐지, 이 사람은. 그리고 나 왜 지금 기분이 이상하지.'
바리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서류로 시선을 돌렸지만, 귀는 자연스레 그쪽으로 쫑긋 서 있었다.
"이 상자는 뭐예요? 라벨에 '바리 씨 열람 금지'라고 적혀 있는데요."바리가 상자 뚜껑에 손을 얹은 채 물었다. 무장승의 어깨가 눈에 띄게 굳었다. 분실물 보관소는 관리국 지하 삼 층, 형광등이 절반만 켜진 긴 창고였다. 선반마다 우산, 안경, 한 짝뿐인 장갑, 열쇠 꾸러미, 이름 모를 편지가 번호표를 달고 줄지어 있었다. 15관문의 제목은 '분실물 주인 찾기'. 이승에서 떠나온 영혼들이 흘리고 간 물건 백 개를 하루 안에 주인에게 돌려줄 것. 바리는 서류를 받자마자 한숨부터 쉬었다. 백 개를 하루에, 라고 적혀 있었다."...분류 작업을 미리 해 두었소.""저한테 보여 주면 안 되는 걸요?""기억을 건드릴 위험이 있는 물품이오. 안전 조치요.""준비가 금지된 건 14관문이었잖아요. 오늘은 괜찮은 거죠?""...그렇소.""그럼 열어 봐도 되겠네요.""바리 씨, 그것은 위험..."바리는 이미 뚜껑을 열고 있었다. 안에서 나온 것은 양은냄비였다. 그 밑에 국자, 밥주걱, 놋숟가락 세 개, 사기 국그릇 두 개, 작은 전기밥솥, 그리고 컵라면 한 박스가 깔려 있었다. 바리는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무장승은 천장 형광등을 올려다보았다."...이게 다 뭐예요.""국과 관련된 물품은 전부 넣었소.""컵라면은요?""국물이 있었소.""전기밥솥은요?""...국을 데울 수도 있지 않소.""그건 안 데워져요, 팀장님."바리의 어깨가 떨리기 시작했다. 입술을 깨물었지만 소용없었다. 웃음이 먼저 터져 나왔다. 창고 구석에서 선반을 닦던 덕순이 소리를 듣고 달려왔다. 상자 안을 들여다보더니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팀장님 이거 어젯밤에 만드셨어요? 새벽 두 시 반에 총무팀 문 두드리시길래 뭐 하시나 했더니!""...사전 분류를 하였소.""저는 분류를 도와 달라는 줄 알고 다용도실에서 냄비를 찾아 드렸다고요! 이게 이런 용도인 줄은...""덕순 씨.""네, 입 닫겠습니다.""이미 늦었소."바리는 눈가를 훔치며 상자를 도로 덮었다. 무장승의 귀
"거래 조건이라니요."바리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멀쩡하게 나왔다. 그게 이상했다. 손가락 끝은 이미 감각이 없었다. 철문 안 책상 앞에 서서 서류철의 마지막 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글자는 몇 번을 읽어도 같은 말을 했다. 연이는 바리와 같은 영혼이다."이 서류, 누가 썼어요? 서명이 없잖아요."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위원들은 문밖에 선 채 서로 눈치만 보았다. 길례가 입회인 자격으로 한 발 들어왔다. 해온이 휠체어를 밀어 철문 문턱에 걸쳤다. 하령이 뒤에서 잡아 주었다."엄마. 이거 엄마도 몰랐어요? 엄마는 관측자였잖아요.""관측자는 보기만 해. 서류는 쓰는 사람이 따로 있고.""몰랐어."해온의 대답은 짧았다. 서류철을 집으려던 손이 중간에 멎었다. 그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20년 전 내가 4장을 열려고 했을 때, 이 장은 봉인되어 있었어. 그냥 비어 있다고 했어. 그날 눈 속에서 같이 지켜본 사람도 4장은 내용을 모른다고 했고. 그런데 먹 번진 이 글씨는 보여.""이 글씨체, 어젯밤 공지문 아래 적혀 있던 거랑 같죠.""같아. 같은 먹이야. 번지는 모양까지."한 본부장이 문밖에서 찻잔을 들고 서 있었다. 잔 위로 김이 오르지 않았다. 식은 찻물이 잔 가장자리에서 찰랑였다. 바리는 그의 손가락을 보았다. 첫 번째 마디에 먹물 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 보았다가 시선을 돌렸다. 확신이 없었다. 확신 없는 의심은 쓸모가 없었다. 한 본부장이 시선을 느낀 듯 먼저 입을 열었다."기록 보관은 제 소관이 아닙니다. 저는 차 담당이라서요.""본부장님은 본부장이시잖아요.""본부장은 차 담당 겸직입니다."아무도 웃지 않았다. 한 본부장은 찻잔을 입에 가져가려다가 식은 줄 알고 내려놓았다. 그 손이 아주 조금 오래 허공에 머물렀다."일단 다음 장을 넘겨 보겠소."무장승이 말했다. 목소리가 낮았다. 서류철 위에 손을 얹었다가 바리를 돌아보았다."함께 읽으시겠소?""네."둘이 같이 장을 넘겼다. 종이가 눅눅하게 손가락에 붙었다. 다음 장 가운
"여섯 시 정각입니다. 입회인 길례, 봉인을 해제합니다."접견실 로비는 새벽빛으로 푸르스름했다. 진열장 유리 안에는 놋쇠 숟가락 하나와 낡은 사기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릇 가장자리가 이가 빠져 있었다. 맞은편 의자 열두 개에는 관측 본부 위원들이 앉았다. 얼굴을 가린 사람도, 맨얼굴인 사람도 있었다. 한 본부장은 맨 끝자리에서 찻잔을 든 채였는데 손이 아주 조금 떨렸다. 해온과 하령은 휠체어 옆에 나란히 서 있었다. 강휘는 보이지 않았다.길례가 봉투의 밀랍을 엄지로 눌러 깼다. 안에서 꺼낸 종이를 접은 채 가슴에 안았다."피검사자 무장승 팀장, 앞으로."무장승이 진열장 앞으로 걸어 나갔다. 정장 단추를 끝까지 채웠고 넥타이도 반듯했다. 바리는 한 걸음 뒤에 섰다. 손바닥이 서늘하게 젖어 있었다. 로비 끝 기둥 뒤에서는 덕순이 사탕 봉지를 가슴에 안고 서 있었다. 그 옆에서 도윤이 입모양으로 '파이팅'을 만들었다가 위원 하나와 눈이 마주쳐 기둥 속으로 사라졌다. 국장은 낚시 조끼 대신 정장을 입고 와서 오히려 더 눈에 띄었다. 은숙이 그의 소매를 잡아당겨 조용히 시켰다. 바리는 그 광경에 입꼬리가 잠깐 올라갔다가 도로 내려갔다. 웃을 자리가 아니었다."문제를 읽겠습니다. 이 그릇의 주인이 이름을 말하십시오. 시간은 십 분. 그릇은 만져도 됩니다."위원 한 명이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로비에 초침 소리가 퍼졌다. 무장승이 유리 문을 열었다. 사기그릇을 두 손으로 들어 올렸다. 그의 손가락이 이 빠진 가장자리를 천천히 훑었다.일 분. 이 분. 삼 분.그는 말이 없었다. 눈을 감고 그릇을 코끝에 가져다 댔다. 식은 국 냄새가 아직 남아 있는 듯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바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소리를 낼 수 없었다. 도와줄 수도 없었다. 규정이 그랬다.오 분. 육 분."...그릇이 차갑소."무장승이 눈을 감은 채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눈 속을 걸어왔소. 그 사람은 국이 식을까 봐 품에 안고 걸었소. 그런데도 식었소. 식어 버렸소. 내가 늦
"준비하지 말라는데, 어떻게 안 해요."바리는 이불 위에 앉아 무릎을 끌어안은 채 중얼거렸다. 관사의 불은 반쯤 꺼져 있었다. 책상 스탠드만 노란 원을 만들어 방 한가운데를 비추고 있었다. 그 빛 속에 무장승이 앉아 있었다. 정장 윗도리를 벗어 의자에 걸어 놓고, 소매를 걷은 채로. 손에는 놋쇠 숟가락이 쥐여 있었다. 세 시간째 같은 자세였다."...금한 것은 사전 준비 일체요. 규정을 어길 수 없소.""그럼 지금 하시는 건 뭐예요.""...그저 쥐고 있을 뿐이오.""쥐고 있는 게 준비가 아니면 뭐예요.""...."무장승이 입을 다물었다. 숟가락을 쥔 손에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 바리는 그 손등을 한참 쳐다보다가 이불 속에서 곰 인형을 끌어다 안았다. 인형의 가슴팍에 수놓인 '규정 준수' 글씨가 오늘따라 우스꽝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모르겠소."한참 만에 무장승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낮고 갈라져 있었다."얼굴도 이름도 떠오르지 않소. 눈 속에서 달려오던 뒷모습, 그릇의 무게, 손이 얼어 있던 것. 그것만 있소. 이름이 있어야 할 자리는 하얗소. 손을 넣어 더듬어도 닿는 것이 없소.""팀장님.""틀리면 소멸 위험 등급이 상이라 하였소.""알아요.""내일 내가 틀리면 당신은 나가시오. 문 쪽으로 곧장. 나머지는 내가 감당하겠소.""안 나가요.""바리 씨.""못 나가요. 저는 팀장님 옆에 서 있을 거예요."무장승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붉었다. 며칠 사이에 얼굴이 조금 야위어 있었다. 앞머리 한 가닥만이 하얗게 빛났다. 그 하얀 머리카락이 오늘따라 바리의 가슴을 찔렀다."...당신은 왜 이렇게 고집이 센 것이오.""팀장님한테 배웠어요.""나는 그런 것을 가르친 적이 없소.""서른 장짜리 인사말 쓰는 법에서 배웠어요. 안 되는 것도 끝까지 서류로 쓰면 되는 거 아니에요?"무장승이 짧게 웃었다. 입가가 흔들렸다. 바리는 웃음을 한 박자 늦게 따라 웃으며 이불에서 일어났다. 분필선 앞에서 잠깐 멈췄다. 이십 센티미터. 규정
"나 안 가. 못 가. 진짜 못 가."국장은 사무실 기둥 뒤에 몸을 반쯤 숨기고 있었다. 낚시 조끼를 입은 덩치 큰 몸이 기둥 폭보다 두 배는 넓어서 숨었다기보다 기둥에 매달린 모양새였다. 바리와 덕순이 한쪽 팔씩 잡았지만 국장은 발끝을 바닥에 붙이고 버텼다."국장님, 13관문이잖아요.""13관문이 하필 이거라는 게 문제야.""내용을 한 번 더 읽어 드릴까요?"덕순이 서류를 펼쳤다. 13관문의 제목은 '인연 성사 1건'. 내용은 서로 마음이 있으나 말하지 못하는 한 쌍을 이어 줄 것. 담당 심사위원란에는 정자체로 '은숙'이라고 적혀 있었다. 바리는 이 서류를 처음 받았을 때 한참 웃었다. 마지막 칸에는 그녀가 직접 쓴 메모가 붙어 있었다.대상자는 제가 지정합니다. 이미 정해 두었습니다. 낚시터에서 기다리겠습니다."이게 사실상 청첩장이잖아요.""청첩장이 아니라 경고장이야. 내가 이 나이에, 명부 관리국장이 낚시터에서 고백이라니.""국장님이 염라대왕 모델이시라고 들었는데요.""그러니까 더더욱! 위신이 있지!""위신이 있어서 오십 년 동안 말씀을 못 하셨다는 거예요?""오십 년이라니, 사십구 년이야.""정확하게 세고 계셨네요.""세고 싶어서 센 게 아니야. 매년 사탕 포장지에 줄을 하나씩 그었더니 어느새 사십구 줄이 됐어.""그 포장지 지금 어디 있어요?""...서랍에.""가져오세요. 증거물로 제출할 거예요.""증거는 무슨 증거야!"국장이 입을 다물었다. 귀 끝이 붉어졌다. 덕순이 수첩을 꺼내 무언가를 적었다. 바리는 한숨을 쉬고 기둥에서 국장을 떼어내는 일을 포기했다. 대신 방 한구석을 돌아봤다. 무장승이 서류 뭉치를 들고 서 있었다."팀장님도 한마디 해 주세요.""...작성해 왔소.""뭘요?""고백 대사 초안이오. 서른 장.""서른 장이요?""압축하여 한 줄로 만들었소."무장승이 맨 위 종이를 국장에게 내밀었다. 국장은 안경을 올리고 받아 읽었다. 거기엔 단 한 줄이 적혀 있었다.좋아하오."...""...""
"감지덕지."문을 연 사자팀장이 바리를 보자마자 한 말이었다. 검은 갓에 검은 도포, 얼굴의 반을 가리는 선글라스까지 갖춘 중년 남자였다. 책상 위에는 명패가 놓여 있었다. '저승사자팀 팀장 흑태수'. 바리는 인사를 하려다 말고 옆을 돌아보았다. 무장승도 같은 표정이었다."...무슨 뜻이오?""분에 넘치는 대접에 감사한다는 뜻이에요, 팀장님."덕순이 뒤에서 속삭였다. 오늘은 해설사 역할이라며 따라붙은 터였다. 손에는 사자성어 사전이 들려 있었다. 흑태수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책상 위 서류를 가리켰다."일사천리.""빨리 진행하자는 말이래요.""다다익선.""많을수록 좋다는 말이고요. 도시락은 많을수록 좋다는 뜻일 거예요.""동고동락.""같이 고생하고 같이 즐거워하자고요?"흑태수가 엄지를 척 세웠다. 바리는 한숨을 쉬고 서류를 집어 들었다. 12관문의 제목은 '야간 근무자 위로 방문'. 내용은 단순했다. 밤새 일하는 저승사자 열두 곳에 도시락을 전달할 것. 단, 전달할 때 '고맙다'는 말을 쓰지 말 것. 사자에게 감사 인사를 하면 불길하다는 오래된 금기였다."왜 고맙다는 말이 불길해요?""결자해지.""...덕순 씨?""스스로 시작한 일은 스스로 끝내야 한다는 뜻인데, 이 경우엔 '우리 일은 우리가 끝낸다, 남이 고마워할 일 아니다'라는 뜻으로 읽혀요.""해석이 되게 자유롭네요.""사자성어 사전이 해석을 다 안 알려 줘요."무장승이 도시락 열두 개가 담긴 보냉 가방을 어깨에 멨다. 오늘은 입에 테이프도 사탕도 없었다. 대신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이틀 전 실을 내준 이후로 그의 앞머리 한 가닥이 하얗게 센 채였다. 아침에 덕순이 그걸 발견하고 비명을 질렀을 때 그는 짧게 대답했다."...햇빛 탓이오.""저승에 햇빛이 어디 있어요!""...관사 창문으로 들어오는 형광등이오."아무도 믿지 않았다. 해온은 더 묻지 않고 그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한 번 쓰다듬어 주었다. 무장승은 그날 아침 내내 말을 하지 않았다.첫 번째 방문지는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