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6화. 시범이라고 해 두지요
사흘째 저녁, 태녀궁 접견실.
문이 열렸고, 묵현이 들어왔다.
인사는 짧았다.
"뱀 부족 공, 묵현입니다."
그리고 소원이 앉으라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는 이미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어제 그 늑대는 앉으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앉았는데.'
검은 옷에 검은 머리. 불빛이 닿는 자리마다 머리카락에 어두운 초록빛이 돌았다.
허리춤에는 작은 약재 주머니가 매달려 있었고, 은은하게 쌉싸름한 풀 냄새가 났다.
연한 황록빛 눈동자는 소원을 보는 것도, 안 보는 것도 아닌 묘한 각도에 머물러 있었다.
"용건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인사 다음이 바로 용건이었다. 날씨 얘기도, 안부도 없었다.
묵현이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서안 위에 올려놓았다. 두루마리도 아니었다. 접힌 종이 한 장.
소원은 그것을 펼쳤다.
> **약재 전매권**
끝이었다. 소원은 종이를 뒤집어 봤다. 뒷면은 백지였다.
"이게 다예요?"
"다입니다."
"보통 이런 건 이유라든가, 근거라든가, 부족의 공적이라든가 그런 걸 쭉 쓰지 않아요?"
"필요 없는 걸 쓰면 읽는 쪽이 피곤합니다."
소원은 종이를 손가락으로 톡 튕겼다.
"근데 좀 당황스럽네요."
"무엇이 말씀입니까."
"보통 이런 자리엔 내가 뭘 해 드리겠다, 약속을 들고 오지 않나요? 첫 만남부터 요구서를 내미시니까."
묵현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약속은 지키지 못하면 빚이 됩니다. 요구는 거래고요. 저는 빚은 지지 않습니다."
"……그럼 그 거래, 대가는요? 이걸 주면 뱀 부족은 뭘 주는데요?"
"후계입니다. 확실하게."
"확실하게라는 말을 그렇게 쉽게 해요?"
"쉽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
묵현이 처음으로 소원을 똑바로 보았다.
"대면식에서 보니 마마께서는 넷을 버거워하시더군요."
"……"
"그럼 돌아가실 필요 없습니다. 직선으로 가시면 됩니다. 후계는 어차피 낳으셔야 합니다. 빨리 낳으시면, 그만큼 빨리 놓여나십니다."
묵현은 거기서 한 박자 쉬었다.
"그리고 넷 중 제가 성공률이 가장 높습니다."
접견실이 조용해졌다.
'대면식에서 한마디도 안 하더니, 그 와중에 내 얼굴을 다 읽고 있었네. 그런데 솔깃한 내 자신이 싫다.'
솔깃한 건 솔깃한 거고, 성공률은 성공률이었다. 학원가에서 십이 년을 굴렀다. 그런 숫자를 내미는 사람치고 근거를 제대로 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나씩 물어볼게요."
"그러하십시오."
"그저께 대전에서 한 달에 사흘이라고 하셨잖아요. 그거 어떻게 아셨어요?"
"설명드려도 모르실 겁니다. 겪으셔야 압니다."
"그럼 성공률이 제일 높다는 근거는요? 다른 셋은 모르는데 묵현공만 아는 게 있다, 뭐 그런 거예요?"
"그건 말로 드릴 증거가 아닙니다."
소원은 손가락으로 서안을 톡톡 두드렸다.
"그럼 마지막으로요. 다른 공들보다 묵현공이 뭐가 나은데요?"
"비교는 마마께서 하시게 될 겁니다."
'세 번을 물었는데 세 번 다 같은 답이네. 말만 바꿔서. ……잠깐, 이거 내 멘트잖아.'
상담실에서 십이 년 동안 하던 말이었다. 말로는 설명이 안 됩니다, 일단 수업 한번 들어 보세요, 들어 보면 압니다. 수업에 자신이 있을 때나 쓰는 카드였고, 자신도 없이 그 말을 하는 강사는 첫 수업에서 바로 들통났다.
그래서 판을 깔아 주기로 했다. 저 자신감이 진짜인지, 첫 수업에서 확인해 보면 될 일이었다.
소원은 턱을 괴고 웃었다.
"그럼 지금 증명해 보세요."
묵현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지요."
대답과 거리가 동시에 사라졌다.
서안 너머에 있던 남자가 언제 일어났는지 보지도 못했다.
손 하나가 소원의 턱을 받쳤고, 다른 손이 뒷목을 감쌌다. 소원이 뭐라 말하려고 입을 연 순간, 그 입이 막혔다.
'……어? 이 다음은 내 대사였는데.'
차가울 줄 알았다. 뱀이니까. 피가 찬 짐승이니까. 그런데 닿은 입술은 따뜻했다. 생각보다 훨씬.
입술이 한 번 떨어졌다가 각도를 바꿔 다시 겹쳤다. 망설임이 없었다. 처음부터 어디로 갈지 정해 둔 사람처럼, 순서대로였다.
그리고 혀가 들어왔다.
'얇다.'
얇고 길고 정확했다. 소원의 혀를 한 번 감았다가 풀고, 입 안 어디가 어떤지 하나하나 짚어 보듯 움직였다. 서두르지 않았다. 그런데 한 번도 헤매지 않았다.
맛이 났다.
키스는 달콤하다던데, 이상하게 쓴맛이었다. 그의 허리춤에서 나던 그 풀 냄새가 혀끝으로 그대로 옮겨 온 것 같았다. 말린 약초를 씹었을 때처럼 쌉싸름하고, 목 뒤로 서늘하게 넘어가는 맛.
신기한 건, 그게 싫지 않았다는 거였다.
쓴데 자꾸 다시 확인하고 싶어지는 맛. 아메리카노 같았다. 쌉싸름하면서 한 모금 더 넘기게 되는 맛이었다.
'이 사람 키스를 무슨 서류 검토하듯이……'
그 생각이 끝나기 전이었다.
혀끝이 입천장을 천천히 훑고 지나갔다.
소원의 감상이 거기서 끊겼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졌다.
강의를 시작한 후 단 한 번도 조용해 본 적 없는 머릿속이, 그 순간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숨이 엉켰고, 뒷목을 감싼 손의 열이 그대로 느껴졌고, 혀끝에 남은 쓴맛이 전부였다.
정신을 차렸을 때, 소원의 손은 묵현의 옷자락을 양손으로 쥐고 있었다. 언제부터 쥐고 있었는지 몰랐다.
그때 묵현이 먼저 멈췄다. 입술이 떨어졌다. 아주 천천히, 계획대로라는 듯이. 뒷목의 손이 물러났고, 턱을 받치던 손도 물러났다. 묵현은 한 걸음 물러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옷자락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였다. 그리고 숨 한 번 고르지 않고 말했다.
"어떠십니까."
"……네?"
"이건 부분입니다."
묵현이 소원을 보았다. 업무 보고를 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전체도 상상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소원은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 뒤늦게 얼굴이 뜨거워졌다. 귀까지.
'……나 지금 몰입했었어? 머릿속이 한시도 안 쉬는 내가, 아주 잠깐 아무 생각을 안 했어.'
그런데 눈앞의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마치 방금 약재 견본이라도 보여준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그걸 보니까 갑자기 우스워졌다. 자기가. 저쪽은 처음부터 끝까지 계산이었는데, 혼자 빠졌다 나온 건 자기뿐이었다.
소원은 헛웃음을 삼키고 등을 곧게 폈다. 지는 건 지는 거고, 마무리는 해야 했다.
"아, 그러니까. 샘플을 보여준 거네요."
목소리가 생각보다 멀쩡하게 나왔다.
묵현이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샘플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시범이라고 해 두지요."
묵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안 위의 종이 한 장은 그대로 두었다.
"요구서는 두고 가겠습니다. 답은 천천히 주셔도 됩니다."
"……천천히요?"
"비교는 아직 안 끝나셨으니까요."
묵현은 예를 갖추고 돌아섰다. 문턱에서 걸음이 느려지는 일 따위는 없었다. 그대로 나갔다.
문이 닫혔다.
소원은 한참 그 문을 보고 있다가, 서안에 이마를 박았다.
쿵.
'……정정까지 사무적이야, 이 새끼. 말로 진 건 처음인데, 그것도 내 멘트에 졌어.'
혀끝에 아직 그 쓴맛이 남아 있었다. 손바닥에는 옷자락의 감촉이. 소원은 그 손을 쥐었다 폈다.
'근데 내가 왜 안 밀었지.'
그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기로 했다.
---
회랑은 어둡고 조용했다.
묵현은 걸었다. 걸음은 고르고 숨도 고왔다. 모든 것이 계산대로였다.
부족이 원하는 것은 약재 전매권이었고, 그 대가는 후계였다. 후계를 얻으려면 순번이 필요했고, 순번을 얻으려면 태녀가 그를 원해야 했다. 원하게 만드는 가장 빠른 길은 말이 아니라 맛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보여줬다. 딱 거기까지만.
멈출 때를 정해 둔 것도 그였고, 실제로 멈춘 것도 그였다.
'……문제없다.'
회랑 모퉁이에 물항아리가 하나 놓여 있었다. 궁녀들이 마당에 물을 뿌릴 때 쓰는 것이었다. 지나치려던 묵현의 걸음이 거기서 멈췄다.
등롱 불빛 아래, 수면에 얼굴 하나가 비쳐 있었다.
자기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얼굴의 눈동자가, 세로로 가늘게 갈라져 있었다.
묵현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발현이었다. 의식 때나 싸울 때나, 몸이 격해질 때 드러나는 뱀의 눈.
그런데 지금은 의식도 아니었고, 싸움도 아니었다.
셈을 해 보았다. 입술이 닿았을 때인가. 그 여자가 옷자락을 쥐었을 때인가. 아니면 그보다 더 앞, 증명해 보라며 턱을 괴고 웃었을 때인가.
답이 나오지 않았다.
묵현은 숫자가 맞지 않는 것을 싫어했다.
'계산에 없던 일이다. 서두르지 않는다. 지켜본다.'
그는 물항아리에 손을 넣어 수면을 흩뜨렸다. 물결이 가라앉자, 비친 눈은 다시 사람의 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묵현은 젖은 손을 털고 다시 걸었다.
시범이라고 했다.
누구에게 보인 시범이었는지는, 셈하지 않기로 했다.
6화. 시범이라고 해 두지요사흘째 저녁, 태녀궁 접견실.문이 열렸고, 묵현이 들어왔다.인사는 짧았다."뱀 부족 공, 묵현입니다."그리고 소원이 앉으라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는 이미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어제 그 늑대는 앉으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앉았는데.'검은 옷에 검은 머리. 불빛이 닿는 자리마다 머리카락에 어두운 초록빛이 돌았다.허리춤에는 작은 약재 주머니가 매달려 있었고, 은은하게 쌉싸름한 풀 냄새가 났다.연한 황록빛 눈동자는 소원을 보는 것도, 안 보는 것도 아닌 묘한 각도에 머물러 있었다."용건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인사 다음이 바로 용건이었다. 날씨 얘기도, 안부도 없었다.묵현이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서안 위에 올려놓았다. 두루마리도 아니었다. 접힌 종이 한 장.소원은 그것을 펼쳤다.> **약재 전매권**끝이었다. 소원은 종이를 뒤집어 봤다. 뒷면은 백지였다."이게 다예요?""다입니다.""보통 이런 건 이유라든가, 근거라든가, 부족의 공적이라든가 그런 걸 쭉 쓰지 않아요?""필요 없는 걸 쓰면 읽는 쪽이 피곤합니다."소원은 종이를 손가락으로 톡 튕겼다."근데 좀 당황스럽네요.""무엇이 말씀입니까.""보통 이런 자리엔 내가 뭘 해 드리겠다, 약속을 들고 오지 않나요? 첫 만남부터 요구서를 내미시니까."묵현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약속은 지키지 못하면 빚이 됩니다. 요구는 거래고요. 저는 빚은 지지 않습니다.""……그럼 그 거래, 대가는요? 이걸 주면 뱀 부족은 뭘 주는데요?""후계입니다. 확실하게.""확실하게라는 말을 그렇게 쉽게 해요?""쉽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묵현이 처음으로 소원을 똑바로 보았다."대면식에서 보니 마마께서는 넷을 버거워하시더군요.""……""그럼 돌아가실 필요 없습니다. 직선으로 가시면 됩니다. 후계는 어차피 낳으셔야 합니다. 빨리 낳으시면, 그만큼 빨리 놓여나십니다."묵현은 거기서 한 박자 쉬었다."그리고 넷 중 제가 성공률이 가장 높습니다."접
이튿날 저녁, 태녀궁 접견실.소원은 상석에 단정하게 앉아 김이 올라오는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은은한 차 향이 접견실을 채우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이미 실전 모드로 팽팽하게 돌아가고 있었다.상담이나 면담은 한이경, 아니 소원의 본업이자 가장 자신 있는 분야였다. 십이 년 동안 학원가를 누비며 학부모 상담만 천 번도 넘게 해온 짬밥이 어디 가겠는가.'똑같아. 상대 말을 경청하고, 원하는바를 빠르게 파악하고, 약속은 함부로 남발하지 않는다. 상대가 학부모가 아니라 거대한 수인족 남편이라는 것만 다르지. ……뭐, 생각해 보니 그게 세상에서 제일 큰 차이점이긴 하다만.'정각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접견실 문이 열렸다.태율은 문턱에서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했다. 궁의 문이 결코 낮은 편이 아닌데도, 그 어깨가 문틀에 걸릴 것만 같은 체구였다. 그가 들어서자 넓던 접견실이 한 칸쯤 줄어든 것 같았다.'못해도 190은 넘겠네, 저거.'"늑대 부족 공, 태율이 마마를 뵙습니다.""어서 오세요. 거기 서 있지 말고 편하게 앉으세요.""서서 고하겠습니다."'아, 완벽하게 외워왔네, 외워왔어.'어깨는 각을 잡아 꼿꼿이 펴고, 시선은 정면 한 점에 고정, 두 손은 옷솔기에 딱 붙이고. 소원의 눈에는 까다로운 입학사정관 앞에서 잔뜩 굳은 고삼 면접생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소신 태율은 늑대 부족을 대표하여 이 자리에 섰습니다. 화친의 의무를 다하겠습니다.""……의무요.""그렇습니다.""의무니까 하겠다는 거예요?""그렇습니다.""그게 뭐예요. 너무 기계적이잖아요. 듣기에 영 별로인데요."태율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기계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나, 그리 느끼시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진지하게 저러니까 더 이상하네. AI한테 너 AI냐고 물어보면 아니라고 하는 꼴이잖아.'소원은 터져 나오려는 입꼬리를 겨우 눌렀다. 어제는 꼬리를 살랑거리던 여우 앞에서 웃음을 터뜨렸다가 본의 아니게 상처를 입혔으니, 오늘은 표정 관리라는 걸 좀 해야
"……달마다 정해진 날을 나누어 각 공의 처소에 납시어 화친의 의를 몸소 행하시되, 한 이레는 비워 심신을 보하시라 하셨나이다."예관이 두루마리를 또르륵 말았다. 반 시진짜리 고문 낭독이 드디어 끝났다. 소원은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겉으로만.'한 이레를 비운다는 건 한 달에 일주일만 쉰다는 거고…… 그럼 나머지 스무사흘은 매일……? 그 정도면 노동 아닌가? 스테이크도 매일 먹으면 질리는데, 아무리 남신이랑 자는 것도 과유불급이다 정말.'머릿속으로 출근 일수와 체력 계산기를 두드리던 소원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혼잣말이 툭 튀어나갔다."……그러니까, 돌아가면서 자라는 거지?"순간 대전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예관의 손에서 두루마리가 미끄러질 뻔했고, 단 아래 늘어선 네 공의 눈빛이 일제히 굳었다. 대전 뒤편에 늘어선 각 부족 사신들 사이에서는 작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까지 났다.소원은 순간 분위기가 얼음장처럼 싸해진 것을 느끼고 아차 싶었다.'아니, 원래 몸 주인은 수줍음이 많아서 모후 앞에서는 고개도 제대로 못 들던 셋째 딸이라 하지 않았나? 궁중 대전 한복판에서 던지기엔 지나치게 솔직한 표현이었네.'순간 당황해서 눈동자를 살짝 굴렸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소원은 속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아니, 근데 내가 틀린 말 했나? 말을 괜히 빙빙 돌려봤자 서로 간만 보고 기싸움만 길어지지. 핵심은 이거잖아.'소원은 슬그머니 마음을 가다듬고 표정을 뻔뻔하게 바꿨다."아니…… 제가 표현이 좀 거칠었을진 몰라도, 결론적으로 돌아가면서 뭘 하라는 건 맞잖아요? 돌려 말하면 전달만 안 되니까 요점만 짚자는 겁니다."뻔뻔하지만 정확한 정곡. 예관은 입만 뻐끔거렸고, 단 위에 앉은 모후는 말없이 소원을 내려다보았다. 화를 내는 것도, 제지하는 것도 아닌—마치 '네가 어디까지 하나 보자'는 듯한 무거운 침묵. 그 침묵이 오히려 소원에게 판을 깔아준 꼴이 되었다.소원은 십이 년 동안 학원가에서 단련된 '질문 정리' 버릇을 발동했다."그럼 다음 질문입
검은 머리카락이 은빛으로 변했다.'염색?''아니, 저건 그런 수준이 아닌데.'뿌리에서 번진 은빛이 순식간에 머리 전체를 집어삼켰다.그리고 쿵, 하고 바닥이 울렸다.남자의 뒤편에서 희미한 빛이 피어올랐다.처음엔 연기인 줄 알았다.아니었다.빛이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거대한 늑대였다.늑대는 대전 안에서 다 자라지 못했다. 몸이 커지는 속도가 천장보다 빨라서, 그대로 지붕을 통과해 바깥으로 솟아올랐다.열린 문 너머로 보였다.궁 서쪽 하늘에 늑대가 섰다.그게 신호였던 것처럼, 나머지 셋에게서도 동시에 빛이 터졌다.금발 남자의 손톱이 길게 뻗어 나왔다."어, 어."본인이 제일 놀랐다.그 뒤로 독수리가 솟아 동쪽 하늘에 날개를 폈다. 날갯짓을 하지 않는데 떠 있었다.검은 옷을 입은 남자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눈동자만 세로로 가늘어졌다.그 뒤에서 뱀이 흘러나와 북쪽 담을 따라 길게 누웠다. 비늘에 어두운 초록빛이 돌았고, 어디까지가 몸인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그리고 마지막.적갈색 머리 남자의 옷자락 아래로 꼬리가 빠져나왔다.그 뒤에서 여우가 일어나 남쪽 하늘에 앉았다. 꼬리를 몸에 감고 앉은 자세가 어딘가 한가로웠다.네 마리가 궁의 사방에 섰다.빛으로 되어 있는데 털이 한 올씩 다 보였고, 그 너머로 하늘도 같이 보였다.소리는 나지 않았다.그런데도 거기 있다는 게 몸으로 느껴졌다. 아까부터 발바닥을 타고 올라오던 떨림이 저것들의 숨이었다.그리고 그림자가 없었다.하늘을 반이나 가리고 있는데 마당에 그림자가 한 점도 지지 않았다.소원은 입을 반쯤 벌린 채 서 있었다.'……이거 입장료 받아도 되겠는데.'무서운데 아름다웠다.아름다운데 무서웠다.그 와중에도 머리는 딴 데로 굴러갔다.'동서남북에 하나씩. 정확히 넷.''짐승 문양이 넷이었고, 저기 선 남자가 넷이고, 지금 뜬 게 넷. 저걸 뭐라고 하나? 신수? 저 신수가 남자들 거구나.'거기까지 세고 나서야 숨을 참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넷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
"오늘 마마께서 하실 일은 셋뿐이옵니다."회랑을 앞서 걸으며 상궁이 손가락 세 개를 폈다."폐하 앞에 나아가 절을 올리시고, 서약문을 낭독하시고, 책봉을 받으십니다. 그게 답니다."'그게 다라니.''그 셋 다 처음인데.'"절은 어떻게 하는데요.""……예?"상궁의 걸음이 반 박자 늦어졌다."아니, 그러니까. 오늘 같은 날은 평소랑 다른 게 있을 거 아니에요. 뭐, 각도라든가.""……무릎을 먼저 놓으시고, 손은 이마 높이로 모으신 다음, 상체를 세 번에 나누어 낮추시면 되옵니다. 세 번째에서 잠깐 멈추셔야 하고요."'세 번에 나눠서. 세 번째에 멈춤.''각도는 끝까지 안 알려주네.'소원은 걸으면서 손을 어정쩡하게 이마 근처로 들어 올려봤다."마마. 지금 하시면 아니 되옵니다.""아, 네."손을 내렸다.상궁이 다시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소원은 그 등을 보며 속으로 셌다.'아니 되옵니다.''오늘 아침부터 벌써 네 번째.'거대한 문 앞에서 상궁이 멈춰 섰다."여기서부터는 혼자 드셔야 합니다.""네?""단까지는 아무도 따라 들지 못하옵니다."소원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대전은 사람으로 가득했다.그리고 정면 단 위에, 앉아 있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저 사람이구나.'설명은 필요 없었다.대전 전체가 그 한 사람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으니까.모후였다.아직 물러나지 않은, 지금 이 나라의 황제.'그러니까 나는 오늘 왕이 되는 게 아니구나.''저 사람 밑에서 후계자 자리에 앉는 거구나.'그걸 알아챈 순간 오히려 숨이 트였다.오늘 하루는 뭘 결정해야 하는 사람이 자기가 아니라는 뜻이었으니까.붉은 융단이 단까지 곧게 깔려 있었다.소원은 그 위를 걸었다.단 아래 왼편, 대신들 앞줄에 여자 하나가 서 있었다.소원과 이목구비가 비슷했다.나이가 조금 더 들었고, 훨씬
책봉식을 하루 앞둔 밤, 태녀궁의 대전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 그러나 정작 태녀의 침소만은 예외였다.침소 밖 회랑에서는 어린 궁녀 둘이 등을 맞대고 서서 소곤거리고 있었다."낮부터 지금까지 한 번을 안 깨셨다며?""의녀님 말로는 맥은 멀쩡하시다는데, 그게 더 이상하지 않아? 책봉식 전날 그렇게 곯아떨어지시는 게.""난 또 무슨 큰일 난 줄 알고. 하긴 내일부터는 진짜 하루도 못 쉬시겠지. 그 네 분 공들도 정식으로 다 뵈어야 하고.""그러게. 난 그중에 독수리 부족 공이 제일 걱정이더라. 아직 애 티가 안 벗겨지셨던데.""그래도 이번엔 넷이니 낫지. 모후 마마 때는 다섯이었다며. 그중 하나는 본토 큰 부족도 아니고 군소 부족 출신이었다던데.""그러니까 다들 저렇게 눈에 불을 켜고 있는 거 아니겠어. 세가 기울면 다음엔 그 자리, 자기네 차례가 아니게 될 수도 있으니까.""쉿, 목소리 낮춰. 의녀님 나오신다."궁녀들이 황급히 흩어졌다.서령이 등롱을 들고 안으로 들어섰다."마마, 내일이 책봉식이옵니다."궁 의녀 서령이 나직하게 말을 건넸다. 침상에 누운 태녀는 대답이 없었다. 눈은 뜨고 있었는데 초점이 이상했다. 방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서령의 얼굴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쳐다보고 있었다.사실 그건 정확한 관찰이었다. 지금 이 몸 안에 들어와 있는 정신은,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이 세계에 존재하지도 않았으니까.--------------------------------------------------------------------------------------------------------------몇 시간 전, 다른 세계의 서울 어느 학원 건물.자정을 넘긴 강의실에 불빛 하나가 켜져 있었다. 국어 강사 한이경은 다음 날 라이브 특강에 쓸 자료를 다듬느라 아직 퇴근을 못 하고 있었다."자, 여러분. 이번 9월 모평 독서 8번 보면요."한이경은 혼잣말로 강의를 연습했다. 늦게까지 남아 있으면 종종 생기는 버릇이었다. 듣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