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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Penulis: 도도보
지나윤은 오랜만에 아침부터 늦잠을 잤다.

어젯밤에 늦게 잔 데다가, 무엇보다 이제는 새벽마다 재래시장에 나가 가장 싱싱한 채소를 살 필요도 없었다.

싱크대 앞에서 봉지라면 하나를 끓였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스테인리스 냄비를 식탁 위에 내려놓고 젓가락으로 라면을 집어 올리자, 간단한 국물 냄새가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해 줬다.

라면 국물까지 싹 비우고 나서야 밖으로 나섰고 은행에 들러 창구에서 이체 수표 한 장을 적었다.

금액란에 숫자를 또박또박 적고 비고란에는 짧게 한 줄을 썼다.

[병원비]

계좌 이체 금액은 20억 원이었다.

창구 직원이 재확인하고 도장을 찍는 동안 지나윤은 한 번도 망설이지 않았다.

은행을 나온 뒤에는 하란카페로 향했다. 오늘은 고아라와 점심을 먹기로 해서.

결혼 이후, HF그룹 며느리로서 집안일에만 매달리며 살겠다고 마음먹은 뒤로는 동창이나 친구들과의 연락을 거의 끊다시피 했다.

그나마 남아 있던 마지막 친구가 고아라였지만,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건 3년 전이었다.

그 3년 동안 흘러가 버린 자신의 청춘을 떠올리자, 지나윤은 마음속으로 스스로에게 욕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예약해 둔 창가 자리에 먼저 앉아 고아라를 기다렸다.

고아라는 지금 A시에서 제법 이름 있는 입시 및 취미 겸용 음악 학원에서 성악 강사로 일하고 있었다.

오늘 밥을 사겠다고 먼저 연락이 온 걸 보면, 순수하게 반갑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무슨 일을 소개해 주려는 생각도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역시나, 자리에 앉자 인사만 몇 마디 나눈 뒤 곧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야, 우리 학원 이번에 피아노 선생님 추가로 뽑거든. 경력 있으면 더 좋고 없으면 차근차근 배우게 해 준대.”

“아라야, 고마워.”

지나윤은 가볍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근데 나 다시는 피아노 안 치겠다고 다짐했어. 그리고 이미 다른 일자리 구해놨어.”

“어?”

고아라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설마 주얼리 디자인 회사? 전공 살린 거야?”

지나윤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나 대학교도 중퇴했잖아. 그런 회사들은 다 학력 조건이 있지.”

“요즘 세상에 학력 안 보는 데가 어디 있다고 그래?”

고아라는 낮게 한숨을 내쉰 뒤, 이내 수위를 넘기지 않을 정도로 분노를 드러냈다.

“진짜 유시진 인간 말종이네. 결혼해서 그렇게 해 놓고, 넌 빈손으로 내보내다니. 나라면 위자료로 몇 십억은 받아냈겠다. 아니, 그걸로도 부족해.”

그 말에 지나윤의 입가에 짧은 웃음이 스쳤다.

그때 핸드폰 화면이 번쩍이며 새 알림이 떴다.

“봐봐, 분명히 유시진일 거야. 가져와 봐. 응? 내가 대신 욕 좀 해 줄게.”

고아라가 몸을 앞으로 내밀자 지나윤은 핸드폰을 들어 메시지를 열어 보았다.

그러나 보낸 사람은 유시진이 아니었다.

지나윤은 새로 온 메시지를 답장하면서도 담담하게 말했다.

“사실 진짜로 바람 피웠다는 증거는 없어.”

몸이 어디까지 갔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마음이 이미 떠났다는 것, 그리고 그 남자가 자신의 아이까지 버렸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배 속에서 겨우 두 달을 버티다가, 아버지라는 사람의 선택으로 사라진 아이를 떠올리자 얼굴에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나는 그냥 그 사람하고 빨리 완전히 끝내고 싶어. 그 집에서 살던 나도 같이 정리하고.”

“그래서?”

“그래서 여기로 이력서를 냈어.”

지나윤은 핸드폰 화면을 탭해 웹페이지 하나를 고아라에게 전송했다.

고아라는 ‘좋은 데 들어갔나 보다’ 하는 기대를 안고 링크를 눌렀다.

“소년원?”

고아라는 잠깐 말문이 막혔다.

반면 지나윤의 얼굴에는 화사하게 웃음이 번졌다.

점심시간은 짧았고, 레슨 시간 때문에 오래 붙들어 둘 수 없어 둘은 아쉬움을 남기고 헤어졌다.

집 앞에 도착했지만 지나윤은 바로 현관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건물 1층에 있는 무인 택배함을 열어서 도착해 있던 우편 봉투 하나를 꺼냈다.

그때 또 다른 알림음이 울려서 보니, 이번에는 유시진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글자는 한 줄도 없었고 사진 한 장만 덩그러니 올라와 있었다.

거실 바닥에 흩어진 종잇조각들 사진이었는데 바로 찢어진 이혼 서류였다.

HF그룹 본사, 대표실.

유시진은 책상 모서리를 짚으며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발치에는 유시진이 직접 갈기갈기 찢어 버린 이혼합의서 조각이 널려 있었다.

“대표님, 시중에 있는 위장약은 다 구해 봤어요.”

장우영이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시진이 탁자 위에 있던 약상자들을 손등으로 쓸어서 엎어버렸다.

“하나도 소용없어. 먹을수록 더 아파.”

유시진은 손으로 배를 감싸 쥔 채 이마에 맺힌 땀을 힘겹게 훔쳤다.

며칠째 한약을 못 마셔 속이 쓰린 상태였다.

그런데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책상 위에서 지나윤이 보낸 이혼 서류를 보게 된 것이다.

그러니 속이 더 뒤틀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장우영은 안절부절못한 채 손만 비비고 있었다.

유시진이 먹던 한약은 어느 한의사의 비법인 데다가, 약재 배합과 끓이는 시간, 불 세기까지 모두 그녀만 알고 있었다.

직접 재료를 달이고 직접 잔에 따라 내놓던 것도 항상 지나윤이었다.

“대표님, 그럼 지나윤 씨한테 한번 연락을 해볼까요?”

장우영이 조심스레 제안하자 유시진의 눈매가 날카롭게 바뀌었다.

“지금 뭐라고 했어? 뭐라고 불렀지?”

“지, 지나윤 씨요.”

장우영은 왜 그게 문제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회사 사람들 모두, 누구 할 것 없이 지나윤을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지나윤 씨.’

그 말을 다시 떠올리며 유시진은 비로소 깨달았다.

결혼한 지 3년이 지나도록 누구도 지나윤을 ‘사모님’이라고 부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핸드폰을 든 유시진은 지나윤이 갈기갈기 찢어진 이혼합의서를 보고 어떤 반응일지 궁금했으나, 그 어떤 대답도 없었다.

대신 상단에 또 다른 전화 알림이 떴다. 발신자는 채연서였다.

해가 기울어 갈 무렵, 지나윤은 혼자 A시의 화려한 바이올렛 컨벤션홀 앞에 서 있었고 옷도 갈아입었다.

결혼 전에 입던 옷 중 그래도 내놓을 만한 차림이어서 남겨 두었던, 파란색 트위드 셋업이었다.

C사풍 재킷과 치마 차림으로 거울을 한 번 더 확인하고 홀 안으로 들어가기 전 심호흡을 했다.

입구 쪽 직원이 예의 바르게 미소 지어 보였다.

지나윤도 상냥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을 열려는 순간, 뒤에서 반가울 리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윤 씨, 여기서 보니까 더 반갑네. 어떻게 이런 데까지 왔어요?”

돌아보니 채연서가 두 친구와 팔짱을 낀 채 다가오고 있었다.

오늘의 채연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기가 주인공이라는 마음가짐이 그대로 보였다.

연핑크 꽃무늬가 풍성하게 퍼지는 드레스였고 목에는 여전히 그 핑크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연서야, 저 사람 누구야? 친구야?”

송려화가 위아래로 훑어보며 물었다.

“설마 FY주얼리 행사 때문에 온 건 아니지?”

“그럴 리가 있겠어? FY는 최고급 하이엔드 브랜드야. 오늘 축하 파티 초청된 사람들 거의 다 업계 유명인 아니면 재계 인사인데.”

오희나는 일부러 들릴 만큼의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저런 옷차림으로 온 거 보면 배달하러 온 거 아니야?”

두 사람의 대사가 딱 맞게 이어지는 걸 보면, 이미 지나윤이 누구인지 충분히 알고 있다는 태도였다.

“려화야, 희나야, 너무 그러지 마. 지나연 씨 입장도 좀 생각해야지.”

채연서는 오히려 말리는 척 한숨을 섞어 설명을 덧붙였다.

“내가 듣기로는, 지나연 씨는 대학교도 졸업하지 못 하고 바로 결혼했다고 하더라고. 몇 년 동안 집에서 살림만 하느라 제일 많이 입은 옷이 앞치마래.”

“시장 말고는 나갈 데도 없었을 테니까. 이런 자리는 익숙하지 않을 수밖에 없지. 우리처럼 FY주얼리에서 일하는 디자이너들이랑은 아무래도 보는 세계가 다르잖아.”

“FY주얼리에서 일해요?”

지나윤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되묻자, 채연서는 기다렸다는 듯 명함을 한 장 꺼내 건넸다.

“연서 지금 완전 잘 나가요. 주얼리 디자인계에서 새롭게 등장한 루키라니까요. FY주얼리 인사팀에서도 엄청 관심이 많대요.”

“하긴 지나윤 씨 같이 집안일만 하는 사람은 그게 뭔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죠.”

송려화와 오희나는 옆에서 입을 맞춰서 빈정거렸다.

지나윤은 그런 소리에 굳이 표정을 바꾸지 않고 명함 위를 한 번 훑어보았다.

[FY주얼리 디자인부 인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단출한 직함이 적혀 있었다.

“음. 열심히 했나 보네요.”

담담한 목소리에 송려화가 눈을 치켜떴다.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 마요. 속으론 질투로 타 들어 가겠죠. 연서처럼 잘나가는 남자친구에 직장까지 있는데 누가 안 부러워하겠어요?”

지나윤이 다시 안쪽으로 발을 떼려 하자 오희나가 일부러 큰소리로 외쳤다.

“저기요, 배달은 저쪽으로 가셔야 해요. 여긴 VIP 입구고요.”

이에 채연서는 입가를 가볍게 막고 웃음을 참는 척했다.

그러고는 힐끔 눈짓을 보내자, 두 친구가 양옆으로 몸을 비틀어 지나윤의 길을 막았다.

“보이죠? 초청장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어요.”

송려화가 손에 든 초청장을 흔들며 자랑하듯 말했고, 안내 직원에게 먼저 내밀었다.

“연서야 먼저 들어가.”

이에 채연서는 핑크 드레스 자락을 손에 쥐고, 마치 동화 속 공주처럼 턱을 살짝 들고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죄송합니다, 손님. 초청장에 직원 표기가 되어 있어서요. 직원 전용 출입구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안내 직원이 채연서 앞으로 나와 동선을 막았다.

순간 채연서의 얼굴이 굳어지자, 송려화와 오희나가 황급히 말을 보탰다.

“원래 FY 직원이잖아. 직원 통로로 들어가도 되는 거지.”

“그럼. 직원 통로라도 어떤데? 적어도 누구처럼 문 앞에서 막히는 일은 없잖아?”

세 사람이 잠시 길을 비켜섰다.

다시 비어 있는 VIP 출입구 앞에 선 지나윤이 조용히 가방을 열고는, 하얀 봉투 하나를 꺼내 안내 직원에게 건넸다.

곧 직원의 눈빛이 순간 또렷하게 달라지더니 입가에 머금은 미소가 한층 더 공손해졌다.

“지나윤 님,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채연서와 두 친구의 놀란 시선이 뒤통수에 꽂히는 것을 느끼면서도, 지나윤은 VIP 통로를 따라 바이올렛 컨벤션홀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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