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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Author: 도도보
유시진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꽃다발과 한약 봉투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천천히 핸드폰을 꺼내 지나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유시진은 아내가 집에 없는 날이 있을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늘 하던 대로 먼저 LP를 올리고, 가장 좋아하는 쇼팽 야상곡을 틀었다.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세 시간이 지나자, 유시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장을 열어 보았다.

옷장 안에는 지나윤의 옷이 대부분 그대로 걸려 있었는데, 전부 자신이 사 준 옷들이었고 전부 핑크색 계열이었다.

그런데 결혼 전에 입던 파란색 정장 두 벌만 감쪽같이 사라진 상태였다.

그때, 초인종 대신 택배 기사가 인터폰을 눌렀다.

수취인은 유시진이지만, 자신은 아무것도 주문한 기억이 없었다.

택배 상자는 꽤 큰 종이상자였다.

포장을 뜯자 안에서 쏟아져 나온 건 온통 화려한 물건들이었다.

핑크 장미 모양의 영구 보존 꽃, 핑크 다이아몬드 목걸이, 핑크색 H사 가방, 반짝이는 핫핑크 하이힐, 체리 블로썸 색 드레스가 있었다.

또한 핑크 다이아 시계, 금장식 오브제, 복숭앗빛 실크 스카프, 하이엔드 향수, 핑크 다이아 브로치, 차 키, 핑크 다이아 반지까지.

유시진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면서, 눈동자 깊은 곳에서 폭풍이 서서히 일어나는 것 같았다.

이것들은 전부 예전에 지나윤을 쫓아다니며 선물했던 것들이었다.

그리고 핑크 다이아 반지는 프러포즈했을 때의 반지였다.

대충 집어 들어 확인해 보니, 그 많은 선물들은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태그조차 떼어지지 않은 채였다.

박스 안에서 유일하게 선물이 아닌 것은 서류 봉투 하나였다.

유시진은 아무 생각 없이 봉투를 열어 안에 든 서류를 꺼냈다.

A시의 밤 풍경은 여전히 화려했다.

불빛이 가득했고 금빛으로 물든 도시였다.

삼호거리에 있는 낡은 집은 몇 년째 불이 켜진 적이 없었지만 오늘은 예외였다.

해 질 무렵 켜진 불이 밤늦도록 꺼지지 않았다.

지나윤은 반나절 넘게 걸려 방 안을 말끔히 치웠다.

집은 오래되고 좁았지만, 깨끗하게 정리해 놓으니 생각보다 아늑해 보였다.

예전에는 엄마와 둘이 살던 집이었지만, 이제 이 집에는 지나윤 혼자뿐이었다.

외롭지 않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녀는 핸드폰을 쥔 손가락에 힘을 줬다.

고등학교 때부터 절친이었던 고아라에게 전화를 걸까 말까 망설였다.

그러나 통화 버튼을 누르기도 전에 초인종 소리가 먼저 울렸다.

전화를 끊고 문을 열자 문 앞에는 유시진이 서 있었다.

큰 키에 떡 벌어진 어깨에 문을 가득 채운 모습을 보자, 순간 숨이 막히는 느낌이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유시진이 서류 다발을 휙 뿌리자, 서류가 지나윤의 얼굴을 스치며 떨어졌다.

종이가 볼을 때리며 떨어지면서 피부가 화끈하게 붉어졌다.

지나윤은 결혼하고 나서 처음으로 유시진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화를 내는 모습을 봤다.

그래서 무서워서 반사적으로 고개를 떨궜다.

“왜 아무 말도 안 해? 멀쩡히 잘 살다가 갑자기 가출 놀이야? 너 애야?”

유시진이 팔을 뻗어 팔목을 붙잡으려 하자, 지나윤은 반사적으로 한발 물러났다.

“난 이혼하고 싶어요.”

“왜?”

“그건...”

“채연서 때문이지?”

그 말에 지나윤은 고개를 들었다.

팔짱을 낀 유시진이 벽에 기대서 있었고, 그림 같은 얼굴에는 비웃음이 걸려 있었다.

그 표정이 눈에 박히는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이자 유시진은 더 비웃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 와서 밀당하는 거야? 맞아, 채연서는 내 첫사랑이야. 애초에 너에게 프러포즈한 것도 걔 자극해 보려고 시작한 일이었어.”

유시진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결혼하고 3년 동안 너한테 잘못한 건 한 번도 없어.”

그 한마디에 지나윤의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

아이 이야기를 꺼내고 싶은 말이 목까지 차올랐다.

‘그럼 아이는? 그 아이는 누가 없앤 거야?’

그러나 결국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가슴 속이 돌덩이처럼 무거워서 숨을 깊이 들이마셔야만 겨우 진정했다.

이 지점까지 와 버린 이상, 이혼은 자신과 유시진 모두에게 가장 나은 결말일지도 몰랐다.

어리석고도 실패한 사랑과 결혼에 마침표를 찍는 일이었으니까.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인 뒤, 유시진은 좁은 거실 소파에 앉아서 연기를 내뿜으며 말을 이어 갔다.

“채연서는 나랑 같은 고등학교 출신이야. 대학은 해외에서 다녔고, 지금은 귀국한 엘리트고.”

“주얼리 디자인계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루키 취급을 받는 애지. 손만 다치지 않았어도 이미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됐을지도 몰라.”

잠깐 말을 멈추더니 유시진은 담담하게 결론을 내렸다.

“그런 여자는 너무 뛰어나. 우리 집에 들어오면 우리 엄마가 못 견딜 게 뻔하고, 집안일 하면서 살라고 할 수도 없어. 재능을 묻어 버리는 거니까.”

“그래서 우리 집 며느릿감으로는 안 맞아.”

지나윤의 얼굴이 점점 더 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너는 다르잖아.”

유시진은 마치 사실을 읊듯 말을 이었다.

“원래부터 특별한 재능도 없고 욕심도 없잖아. 대학도 중퇴해서 학력도 없고, 따로 자격증도 없고 집안 형편도 별로고.”

“몇 년 동안 전업주부로 살았으니 사회랑도 완전히 단절됐잖아. 네가 나를 벗어나서 도대체 뭘 할 건데?”

“밥은 먹고 살 수 있겠어? 그런 사람이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이혼을 요구하지?”

작은 방 안은 숨소리 하나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해졌다.

지나윤은 입을 열었다가 유시진이 내뿜은 연기를 그대로 들이마셨다.

이내 연기가 목 안을 타고 들어오면서 기침이 났다.

“생각 좀 하고 짐 챙겨서 나랑 같이 집으로 돌아가. 이번 한 번은 넘어가 줄게.”

담배를 끝까지 피운 유시진은 재를 털 곳을 찾지 못해 잠깐 손을 멈췄다.

그 순간, 지나윤이 다가와 고개를 숙이고 남자의 손에서 담배꽁초를 조심스레 받아 쓰레기통에 버렸다.

이에 유시진의 입가에 다시 특유의 미소가 떠올랐는데 그 미소는 보는 사람을 홀리는 듯한 웃음이었다.

입으로는 이혼을 말해도 몸은 솔직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곧 유시진은 다리를 꼬고 더 편한 자세로 소파에 기대 앉았다.

지나윤은 돈도 능력도 없었기에, 남편에게 의지해서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무엇이 자신에게 유리한지 금방 알 거라고 확신하는 눈빛이었다.

“이 정도면 됐어. 나도 바빠. 더는 이런 연극에 시간 많이 못 써. 예전처럼 집 잘 지키고 살면 계속 책임은 질게.”

차갑게 말하고 나서야 유시진은 바닥에 흩어진 서류들을 보았다.

지나윤이 허리를 깊이 숙이고 이혼 서류를 한 장씩 주워 담고 있었다.

“안 돌아가면 내일 이 서류 전부 회사로 보낼 거예요. 아니면 어머님한테 보낼 수도 있고요.”

그 말에 유시진이 벌떡 일어섰다.

“지나윤, 사람 봐 가면서 버텨.”

10년 동안 사랑해 온 사람이 이토록 낯설게 느껴진 순간은 처음이었다.

지나윤은 문을 열어젖혔다.

“돌아가요. 다시는 여기 오지 말고요.”

잠시 말을 못하던 유시진이 곧바로 코웃음을 치며 어깨를 으쓱였다.

“좋아. 그렇게 버티다가 나중에 후회해서 울면서 매달리지는 마.”

문이 쾅 하고 닫히면서 발소리가 멀어졌다.

테이블 위에는 이혼 서류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자정 무렵, 지나윤은 결국 서랍 깊숙한 곳에서 자신의 예전 통장을 찾아냈다.

결혼 전부터 쓰던 통장으로 이 집에 놔 둔 채 결혼 후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당연히 유시진이 넣어 준 돈은 한 푼도 없었다.

핸드폰에 계좌를 연동하자마자 잠시 로딩이 뜨더니 곧 잔액이 화면에 나타났다.

[29억 5660만 원]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더 많았다.

그 숫자를 바라보는 동안 가슴속 어디선가 천천히 뭔가 올라왔다.

서러움, 안도감 그리고 아주 작은 희망 같은 감정이 뒤섞여 조용히 가슴 위에 내려앉았다.

결혼 생활 내내 잊고 살았던 자신이라는 사람이 문득 또렷해지는 기분이었다.

오래된 집 안, 전구 불빛은 약했지만 그 빛이 의외로 따듯하게 느껴졌다.

내일부터는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스스로 벌어 살아야 했다.

통장을 천천히 집어넣고, 오랜만에 스스로에게 말하듯 작게 중얼거렸다.

“괜찮아. 이제부터는 내가 벌어서 먹고 살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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