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유시진은 입을 열었다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차가운 공기만 더 들이마셨다.처음에 지나윤에게 다가간 건 바로 자신이었다.지나윤이 자신을 구해준 그때부터 자신을 좋아하게 됐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 이후로 지나윤은 유시진에게도, 자기 집안에도 아무런 요구를 하지 않았다.자신의 시야에서, 그리고 삶에서 사라졌다.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지만 유시진은 지나윤을 놓아주지 않았다.발렌타인데이 날, 999송이의 분홍 장미를 들고 지나윤의 대학 정문 앞에서 고백한 건 바로 유시진이었다.지나윤의 타오르는 듯한 시선을 견디지 못한 유시진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지금 이 감정이 죄책감인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고아라는 HF그룹을 스캔들에 빠뜨린 장본인이야. 그런데도 계속 친구로 지낼지 고민하고 있는 거야?”유시진은 먼저 화제를 바꿨다.그러나 지나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잔이 바닥을 드러낼 때까지 그저 마티니를 조용히 마셨다.“아라는 고등학교 때 학교 일진들한테 찍혔어. 어느 날 골목에서 붙잡혀 맞을 뻔했는데, 내가 우연히 지나가다가 도와줬거든.”유시진은 지나윤이 한 손으로 턱을 괴고 과거를 떠올리는 모습을 보며, 바텐더에게 마가리타 한 잔을 더 주문했다.“나 취하게 만들려고?”지나윤이 유시진을 힐끗 바라봤다.“그냥 네가 목마를까 봐.”그 대답에 지나윤은 어깨를 으쓱했다.“언제부터 그렇게 다정했어?”“나 원래 다정하지 않았어?”유시진이 되물었다.“항상 먼저 전화 끊고, 나 혼자 추운 바람 맞으면서 병원 앞에서 기다리게 했잖아. 그게 다정한 행동이라고 생각해?”지나윤의 말에 유시진은 입을 다물었는데 마치 머리 위에 먹구름이 드리운 것 같았다.지나윤도 일부러 옛일을 들추려던 건 아니었다.그저 말이 나온 김에 한마디 받아친 것뿐이었다.지나윤은 마가리타를 한 모금 마신 뒤, 다시 고아라 이야기를 이어갔다.“그때 내가 아라 도와준 뒤로 아라는 자발적으로 내 뒤를 따라다녔어. 그때 난 학교에서 예쁘다고 소문났었고 나에 대한
극심한 통증에 남자는 비명을 질렀고 동시에 술도 완전히 깼다.남자는 비틀린 손목을 움켜쥔 채 욕설을 내뱉었다.그때, 검은 정장을 입은 두 남자가 술집 안으로 들어와 욕하던 남자를 깔끔하게 끌고 나갔다.술집 안은 다시 조용해졌지만, 공기 속에는 어딘가 살벌한 기운이 감돌았다.조금 전까지 모든 시선이 지나윤에게 쏠려 있었지만, 이제는 아무도 감히 여자를 쳐다보지 못했다.“앉아.”지나윤이 다시 자리에 앉자 유시진은 그 옆에 앉았다.“나한테 도청기라도 달았어? 아니면 위치추적기라도 달았나?”지나윤이 고개를 돌려 유시진을 힐끗 바라봤다.혼자 조용히 술이나 마시려고 했는데, 또다시 유시진을 마주칠 줄은 몰랐다.“너 옷도 바꾸고 가방도 바꾸는데, 내가 추적기 달고 싶어도 기회를 줘야 하지 않겠어?”유시진의 말은 그럴듯했지만, 지나윤은 여전히 이 만남이 우연이라고 믿지 않았다.지나윤이 두 번째 술을 주문하기도 전에, 바텐더가 마티니 한 잔을 내밀었다.“전 주문 안 했어요.”“이분이 사시는 거예요.”바텐더가 옆에 앉은 유시진을 가리켰다.지나윤은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자 과일 향이 순식간에 혀끝을 감쌌다.“왜 이렇게 계속 따라다녀?”“왜 백이천은 네 옆에 없어?”유시진은 지나윤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되물었다.“여자가 혼자 술집에 오면 표적이 되기 쉬워.”유시진의 기억 속에서 지나윤은 이런 곳에 자주 오는 사람이 아니었다.“무슨 일 있어?”그 말을 들은 지나윤은 잠시 멈칫했다.눈앞에 보이는 유시진의 옆얼굴은 조각처럼 또렷했고,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입체적이었다.유시진은 지나윤을 보지 않은 채, 얼음을 넣은 데킬라를 조용히 마시고 있었다.이에 지나윤은 자신도 모르게 유시진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차갑게 말했다.“너랑 상관없어.”“고아라 씨 때문이야?”지나윤은 눈을 크게 뜨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어떻게 알았어?”그제야 유시진이 고개를 돌려 지나윤을 바라봤고,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 마주쳤다.칵테일보다도 더
지나윤이 이채영이였을 때, 진심으로 자신을 지켜준 사람이 있었다면 그건 오직 할머니뿐이었다.하지만 하늘은 공평하지 않았고, 하필이면 할머니가 가장 먼저 세상을 떠났다.지나윤은 자신과 할머니의 사진을 바라봤는데, 보다 보니 눈가가 저절로 젖어 들었다.그때, 고요한 사무실 안에 카톡 알림음이 울렸다.이에 지나윤은 아무 생각 없이 휴대폰을 집어 들고 카톡을 열어봤다.그러나 문자를 읽은 순간 손끝이 허공에 멈췄다.[우리 아직 친구로 지낼 수 있을까?]이 메시지는 고아라가 보낸 것이었다.그다지 평온하지 않았던 마음이 다시 한번 흔들렸다.지나윤은 휴대폰을 책상 위에 뒤집어 놓고는 답하지 않았다.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밤이 조용히 내려앉은 그때였다.“나윤아, 일 끝났어? 맛있는 양식 레스토랑 하나 아는데 같이 가서 먹자.”백이천이 지나윤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아니, 입맛이 없어서. 집에 가서 그냥 면이나 끓여 먹으려고.”지나윤은 말을 마친 뒤, 백이천을 향해 다소 억지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러나 백이천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지나윤이 무슨 일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하지만 지나윤은 백이천에게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그저 혼자 조용히 있고 싶었던 것이다.백이천의 입술이 몇 번이고 움직였고 말하려다 멈췄다.“그럼 다음에 나랑 같이 가자. 집에 갈 때 운전 조심하고. 도착하면 문자 보내.”백이천의 당부에 지나윤은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내가 어린아이도 아닌데.’하지만 이것이 백이천이 자신을 걱정하는 방식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백이천은 유시진과는 정말 다정하고 세심했다.해가 완전히 지평선 아래로 가라앉았을 때, 지나윤은 HF그룹을 떠났다.하지만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차를 몰아 한 술집으로 향했다.사실 지나윤은 술집에 자주 오는 편이 아니었다.술집도 익숙하지 않았고 그 안의 복잡한 분위기도 좋아하지 않았다.또한 괜히 문제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먼저 우원재에게 전화를 걸었다.우원재는 곧바로
백이천은 지나윤이 이렇게까지 마음이 약해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예전에 둘은 분명 고아라랑 친구였지만 사랑 때문에 먼저 우정을 배신한 사람은 고아라였다.지나윤이 그렇게 쉽게 고아라를 용서한다면 앞으로도 몇 번이고 배신할지 몰랐다.백이천은 지나윤이 다시 상처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그래서 결국 지나윤은 뒤돌아보지 않고 고아라를 위로하지도 않았다.고아라의 마음이 힘들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마음 역시 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됐어, 더 생각하지 마. 내가 회사까지 같이 가 줄게.”백이천의 부드러운 눈빛을 마주한 지나윤은 고개를 끄덕였다.“넌 뭔가 마법 같은 게 있는 것 같아.”“응? 무슨 말이야?”백이천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그러니까 네가 위로해 주면 항상 효과가 있어. 마음이 따뜻해지고, 안정되는 느낌이야. 그런데 가끔은 내가 너한테 너무 의지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지나윤의 말을 들은 백이천의 눈빛이 점점 밝아졌다.“그렇게 말해 주니까 정말 영광인데!”지나윤의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나윤아, 난 네가 계속 나한테 의지했으면 좋겠어.”그러나 평생 의지해 줬으면 좋겠다는 말은, 백이천이 마음속에만 담아 두었다.지나윤을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자신의 마음을 지나윤은 이미 알고 있었다.그리고 지금 지나윤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곁에 있는 시간을 천천히 받아들이고 자신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이었다.백이천은 지나윤의 아름다운 옆모습을 바라봤는데 휘어진 눈매에 부드러운 감정이 스며 있었다.비록 백이천은 HF그룹 직원은 아니었지만, 회사 사람들 모두 두 사람이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것과, 백이천이 지나윤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게다가 회사에 문제가 생긴 이후, 백이천은 줄곧 지나윤 곁에서 도우며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미 백이천을 지나윤의 남자친구로 여기고 있었다.그랬기에 함께 회사로 돌아오는 것도 이제는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회사로 돌아온 뒤, 지
유시진의 입장에서 보면, 본인의 사생활 특히 감정 문제에 대해 끼어들어 말할 처지는 아니었다.하지만 장우영은 정말 유시진에게 한마디 해주고 싶었다.이럴 줄 알았으면 애초에 왜 그랬냐고.WWYS컴퍼니의 보안은 상당히 철저했다.이번 M국 방문은 지나윤과 백이천에게 있어 아무런 성과도 없는 헛걸음이었다.두 사람은 비행기를 타고 A시로 돌아왔고, 막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고아라를 보게 됐다.고아라는 상태가 좋지 않았다.두 눈은 줄곧 울어서 부은 듯했고, 얼굴빛도 칙칙해 마치 먼지가 내려앉은 것 같았다.지나윤은 고아라가 회사를 그만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일에 집중할 수 없어서 결국 일을 그만두고 집에서 한동안 쉬고 있었다.지나윤은 사실 고아라가 회사를 관두는 것에 찬성하지 않았다.일을 하고 있는 편이 집에 있으면서 쓸데없는 생각에 잠기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예전에 고아라가 고진수를 믿으려 했을 때도 막을 수 없었던 것처럼 고아라의 선택을 대신 결정해 줄 수는 없었다.이번 비행편도 고아라가 고진수를 찾을 수 있었는지 물어봤기에 지나윤이 메시지로 알려준 것이었다.고아라는 분명 끝을 내고 싶어 했지만 공항에 직접 나타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사람들 사이에서 지나윤을 발견한 고아라는 곧장 빠른 걸음으로 달려왔다.하지만 거의 다가왔을 때, 지나윤 곁에 있던 백이천이 갑자기 한 발 앞으로 나서며 고아라를 가로막았다.그러자 고아라는 곧바로 걸음을 멈추고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백이천의 그 행동은 자신이 다시 지나윤을 해칠까 봐 막은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백이천의 눈에 지금의 자신은 이미 나쁜 사람이나 다름없었고 믿을 수 없는 존재였다.또한 고아라의 생각은 백이천의 마음과 정확히 같았다.지나윤이 어떻게 생각하든 백이천은 고아라를 용서할 수 없었다.“백이천, 나, 나 이제 안 그래. 나윤이를 해치지 않을 거야.”고아라는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이미 해쳤잖아.”백이천의 목소리는 단호했다.“됐어, 백이천...”
WWYS컴퍼니.이 컴퍼니는 기업, 특히 등록지에 실제 사무실이 없는 회사에 법정 등록 주소, 행정 지원, 문서 처리, 통신 관리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전문 서비스 기관이었다.다르게 말하면, 지나윤과 백이천이 찾아온 이 레이즈그룹 역시 껍데기뿐인 회사라는 뜻이었다.회사에 등록된 모든 정보는 이 WWYS컴퍼니에서 제공한 것이고 실제 정보가 아니라는 것이었다.즉, 이곳에서 가짜 고진수를 찾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지나윤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실망한 모습을 보이자, 백이천이 여자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여기까지 왔으니까 일단 들어가 보자. 어쩌면 뭔가 정보를 얻을 수도 있잖아.”“응, 그래.”백이천의 격려에 힘입어 지나윤은 WWYS컴퍼니 사무실 안으로 들어간다.이와 동시에, 건물 맞은편에는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서 있다.운전석에 앉아 있던 장우영이 고개를 돌려 뒷좌석의 유시진에게 말한다.“대표님, 경찰 쪽 조사는 큰 성과가 없지만, 진짜 고진수는 용안파 손에 죽은 것으로 확인했어요.”“용안파...”유시진은 시선을 살짝 내린다.이런 조직이 M국에 존재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곰곰이 떠올려 봐도 HF그룹이나 자신이 용안파와 어떤 연관이나 갈등이 있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하지만 채연서는 용안파 사람이었다.자발적이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분명 용안파에 의해 통제되었었다.그리고 진짜 고진수 역시 용안파 사람의 손에 죽었다.다르게 말하면, 가짜 고진수는 용안파에서 보냈을 가능성이 높았다.어쨌든 용안파와는 분명히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장 비서, 용안파를 조사해.”유시진은 단호하게 지시를 내렸고 장우영은 무엇을 조사해야 하는지 묻지 않는다.유시진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용안파에 관한 모든 것일 테니까.다만 용안파는 M국에서 일정한 세력을 가진 조직이었다.게다가 이곳은 용안파의 본거지가 아니기 때문에 조사에는 적지 않은 어려움이 따랐다.“대표님, 최대한 해볼게요.”장우영은 끝까지 확답하지 않고, 유시진도 이에 대해
“이분은 우리 부서의 새로운 동료예요. 앞으로 PO 부서의 제품 라인을 함께 맡게 될 테니 모두 잘 지내보죠.”문혜윤 팀장이 간단히 인사를 건네고는 신입에게 자기소개를 요청했다.“안녕하세요. 지나윤이라고 해요. 앞으로 함께 일하게 될 텐데 잘 부탁드려요.”사무실 안에서 모두 박수를 쳤지만 채연서는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연서 씨, 혹시 아는 사람이에요?”장연지가 눈치 빠르게 묻자, 채연서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애매하게 웃었다.대답을 피하는 그 모습은 확신을 감추려는 듯했다.설마 새로운 직원이 지나윤일 줄은 상
“넌 그냥 택시 타고 가.”유시진의 시선은 차갑고 아무 감정도 없어 보였다.채연서를 바라보던 눈빛과는 완전히 다른 눈빛이었다.그 말투는 냉정하다기보다 아예 아무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아서 더 아팠다.머리로는 예상했던 반응이지만 가슴 한가운데가 순간적으로 찌릿 울렸다.지나윤이 돌아서려는데, 뒤에서 갑자기 팔을 잡아당겼다.아플 만큼 세게 당겼다가, 유시진도 그제서야 알아차린 듯 손에 들어갔던 힘을 조금 풀었다.“질투 난다고 연서한테 그렇게 날을 세워서 대할 필요 없어. 네가 뭐라고 해도, 연서는 네 자리를 절대 못 빼앗아.”
예를 들면, 지나윤은 고아라를 데리고 왔다.고아라는 전에 ZM에서 샀던 은색 스팽글 드레스를 입고, 지나윤의 조언에 따라 은색 하이힐을 매치했으며, 일부러 미용실에 들러 메이크업과 헤어도 받았다.“고작 이렇게 꾸민다고? 정말 백마 탄 왕자님을 만날 수 있는 거야?”고아라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었고 지나윤은 고개를 연달아 끄덕였다.“당연하지. 내가 지금 열심히 찾아보고 있잖아.”“네가 골라 주는 거면 더더욱 사양이야.”고아라는 일부러 손을 내저으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왜? 내 눈이 그렇게 나쁜 편은 아니라고 생각하
회장 안은 무려 3초 동안 정적에 잠겼다가 곧 폭풍우가 치듯 술렁이기 시작했다.심소희는 피터가 여전히 태연한 표정인 것을 보고서야 뒤늦게 깨달은 듯 말했다.“아, 설마 피터는 이미 지나윤이 BYC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피터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피터야 당연히 알고 있었다.대학 시절, 지나윤이라는 원석을 처음 알아본 사람이 바로 피터였다.백이천 역시 거의 유일하게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은 사람 중 하나였다.이에 백이천은 스스로 짐작해 냈다.피아노 시리즈의 디자인 스타일을 처음 봤을 때부터, 디자이너가 지나윤일 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