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어젯밤 내 입술에 키스했던 남자가, 오늘은 수십 명 앞에서 내 이름을 부를 예정이었다.
나는 회의 자료를 다시 내려다봤다. ‘고객경험 개편 TF 실무 책임자 이채린.’ 새 회사에 들어온 지 2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내 이름은 신임 대표에게 보고할 사람들 명단 맨 위에 올라 있었다.
“이거 정말 제가 하는 거예요?”
옆자리의 수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입사 전에 제출하신 개선안 있죠? 그걸 바탕으로 오늘 첫 보고를 하기로 했어요. 팀장님이 같이 들어가실 거고요.”
면접 준비를 하며 밤새 정리했던 자료였다. 고객이 불편을 겪는 순서를 따라가며 상담 절차를 고치자는 제안. 분명 자신 있는 일이었는데, 보고 상대가 강태준이라는 사실 하나로 글자들이 낯설어졌다.
수아는 내가 새로 온 사람이라 부담을 느끼는 줄 알고 종이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주었다. 고맙다고 받으면서도 나는 컵을 두 손으로 감쌌다. 어제 그 사람이 잡아 주었던 손이었다. 하룻밤 동안 여러 번 웃고, 웃다가 입을 맞췄으며, 아침에 다시 만나자던 약속까지 들었다. 돌이켜 보면 내일을 함께 보내고 싶다는 말이 좋았다. 그 기억 때문에 나는 그에게 제대로 사과하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 회의에선 내 일을 잘하는 것부터 보여 주고 싶었다.
‘회사에서는 모르는 사람처럼.’
아직 그와 그런 약속을 나눈 적도 없으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다. 어제 그가 내 손을 쥐어 주던 순간까지 떠올리면,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어질 것 같았다.
회의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준이 들어왔다. 화면 속 정장보다 실물이 훨씬 가까웠다. 내 손등에 입 맞추며 내일도 보고 싶다고 하던 남자가 같은 손으로 서류를 펼쳤다.
“시작하시죠.”
그는 내 쪽을 따로 보지 않았다. 다른 직원의 설명을 듣고 메모한 다음, 자료를 넘겼다. 나는 서운해야 할지 안심해야 할지 몰랐으나, 적어도 이곳에서 그가 나를 곤란하게 만들 생각은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팀장이 나를 소개했다.
“고객경험 개편 실무를 맡을 이채린 선임입니다.”
그제야 태준이 고개를 들었다.
“이채린 선임님.”
내 이름을 부르는 입술을 보고 있자니 엘리베이터 앞에서 키스하던 밤이 불쑥 떠올랐다. 나는 준비해 온 펜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대표님. 보고드리겠습니다.”
그가 내 이름을 알게 된 첫 순간이었다. 그런데도 서로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인사를 나눠야 했다. 다행히 긴장한 기색을 보일 틈도 없이 첫 화면이 켜졌다.
“현재 고객 문의는 담당 부서에 따라 안내 내용이 달라집니다. 같은 문제로 여러 번 연락하는 일이 생기고, 답변을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집니다.”
나는 실제 문의 사례를 바탕으로 절차를 설명했고, 불필요한 단계를 줄이는 방안을 차례로 제시했다. 말이 이어질수록 호텔의 밤은 조금씩 멀어졌다. 내가 좋아하던 일에 집중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자료를 넘기다 고객이 남긴 한 문장이 화면에 나타났다. ‘어디에 물어봐야 하는지라도 알려 주세요.’ 전 직장에서 비슷한 말을 들은 날이 생각났다. 오래 기다린 사람에게 변명부터 하는 상담원이 되기 싫었고, 그래서 이 문제를 직접 고치고 싶었다. 태준의 질문은 정확히 그 지점을 짚었다. 그의 앞에 선 여자가 어젯밤의 나라는 사실을 잠시 잊고, 나는 일을 함께하는 사람에게 설명하듯 차근차근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렇게 바꾸면 처리 속도는 빨라지겠죠. 하지만 담당자가 판단하기 어려운 민원은 어디서 해결합니까?”
태준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는 대답을 대신해 주지도, 눈길로 응원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더 또렷하게 답했다.
“상담 단계에서 해결 기준을 정하고, 그 범위를 벗어난 민원만 전담팀으로 넘기겠습니다. 책임자가 모호해지는 구간도 없애겠습니다.”
“좋습니다. 다만 그 기준은 현장 직원들과 먼저 확인해 주세요.”
“네. 담당자 인터뷰 일정까지 잡아두겠습니다.”
짧은 대화가 끝나자 그가 서류에 표시를 했다. 잘했다는 말 한마디쯤 듣고 싶은 마음이 생겼지만, 여기서 그가 내게 다정해진다면 오히려 내가 제일 먼저 당황할 터였다.
회의를 마치고 복도로 나오니 수아가 내 팔을 붙잡았다.
“선임님, 진짜 안 떠셨어요? 대표님 질문 엄청 꼼꼼하시던데.”
“떨었어요. 손이 아직도 좀 이상해요.”
“근데 대답 너무 잘했어요. 역시 경력직은 다르구나.”
나는 웃으며 그녀와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유리벽 너머 회의실 안에서 태준이 다른 임원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잠깐만 돌아봐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나 그가 나를 바라보지 않자 오히려 마음이 가라앉았다.
수아가 먼저 걸어가고 나서야 나는 속으로 아침의 장면을 다시 꺼냈다. 카드의 글씨를 읽은 뒤에도 사과를 끝맺지 못한 채 문을 나왔었다. 그가 내 이름을 듣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밤새 나를 기억해 준 사람이 오늘 회의에선 조금도 아는 척하지 않아서, 미안한 마음 사이로 이상한 서운함이 스며들었다. 그에게 특별한 사람이고 싶었다. 그 마음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자리로 돌아와 노트북을 켰다. 회의에서 나온 수정 사항을 적고 있는데 사내 메신저 알림이 떴다.
발신자, 강태준.
마우스를 쥔 손이 멈췄다.
‘발표가 좋았습니다, 이 선임님.’
나는 그 한 줄을 두 번 읽었다. 누가 보아도 평범한 업무 메시지였다. 그런데 조금 뒤 새 알림이 하나 더 도착했고, 이번에는 입술을 깨문 채 웃음을 참아야 했다.
‘그리고 이제야 이름을 알았네요. 채린 씨.’
“선임님, 방금 웃으셨어요. 무슨 좋은 일 있어요?”수아의 질문에 나는 책갈피를 황급히 책장 사이로 밀어 넣었다. 웃고 있었다는 걸 들킨 순간에도 입가에는 태준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 사람이 내 이름을 부르지도 않았는데, 손글씨 여덟 글자만으로 이렇게 기뻐하다니.“책이 재미있어서. 어제 읽다가 웃긴 부분이 있었거든.”“무슨 책인데요? 저도 읽어 볼래요.”“다 읽으면 빌려줄게. 결말은 아직 나도 몰라.”수아는 금세 관심을 돌려 오후 회의 자료를 물었다. 나는 파일을 열어 필요한 표를 찾아줬고, 그녀가 자리로 돌아간 뒤에야 가방 지퍼를 닫았다. 책갈피는 버리지 못했고, 내 웃음은 아무 일도 없던 표정 뒤에 감춰졌다.점심시간, 수아가 사내 카페에서 딸기 음료를 주문했다. 그 이름을 듣자 태준이 떠올랐다. 시럽은 반만 넣고 얼음도 조금. 내가 말한 걸 한 번에 외운 사람. 혹시라도 내 얼굴에 생각이 드러날까 봐 메뉴판을 오래 내려다보다 따뜻한 차를 골랐다.“선임님은 딸기 안 좋아하세요?”“좋아하지. 오늘은 따뜻한 게 당겨서.”그렇게 말한 뒤 컵을 받았는데, 손바닥이 따뜻해질수록 이상하게 허전했다. 태준과 함께였다면 내 잔을 기웃거리며 ‘한 입만 마셔도 될까요?’라고 물었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아까부터 자기 잔은 왜 안 마시느냐고 타박하면서도 기어코 컵을 건네줬겠지.오후에는 TF 실무 자료를 정리했다. 수아가 빠뜨린 첨부 파일을 찾아줬고, 팀장의 요청에 맞춰 표의 순서를 바꿨다. 누가 나를 특별히 쳐다보지도 않았고, 태준이 지나가는 복도에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회의 일정과 수정 지시가 오가는 동안 사무실은 늘 그렇듯 분주했다.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늦은 오후 회의실에서 출력물을 정리하다 태준의 서명이 있는 검토표를 발견했다. 몇 줄의 수정 의견이 적혀 있었고, 내가 처음 제안한 방식대로 진행하라는 표시도 있었다. 업무에 필요한 표시일 뿐이었다. 나는 서류를 정해진 순서대로 묶으면서도, 그의 필체를
'그건 약속 못 지키겠습니다.’나를 생각하지 말라는 부탁 앞에서만, 태준은 끝내 말을 듣지 않았다.나는 그 문장을 밤새 열어 보았다. 읽을 때마다 속이 아렸고, 아파하면서도 그가 나를 아직 생각한다는 사실이 좋아졌다. 휴대전화 화면에 손가락을 올린 채 한참 망설였으나 답장은 보내지 않았다. 그렇게 다정한 사람이 어떻게 내게 가장 아픈 비밀을 숨겼을까. 미워하다가도 보고 싶어지는 마음이 너무 우스웠다.‘그럼 실컷 생각해요.’입력창에 적었다가 지웠다. 내가 원하는 말은 그게 아니었다.‘내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기나 해요?’이것도 지웠다. 이미 알고 있을 사람이었다. 손을 잡을 때마다 웃음부터 터지던 나를, 전화를 끊기 싫어 5분만 더 달라던 나를, 그가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면서 왜 그렇게 늦게 말했을까.다음 날 아침, 나는 달력부터 열었다. 토요일 칸에는 ‘같이 책 읽고 맛있는 거 먹기 ♡’라고 적혀 있었다. 카페에서 그와 정한 약속이었다. 하트를 하나 더 그려 넣을까 고민하던 날에는 토요일이 오기만을 기다렸는데, 이제는 그 날짜를 바라보는 것도 힘들었다.나는 일정을 눌러 삭제했다. 확인 창이 나타나자 잠깐 멈췄다가 다시 눌렀다. 약속 하나가 사라진 빈칸을 보며 이렇게까지 쉽게 지울 수 있는 거였냐고,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투덜거렸다.가방에서는 호텔 라운지 영수증이 나왔다. 첫날 혼자 마셨던 음료값이 적힌 종이였다. 버릴 생각으로 펼쳤는데 날짜가 눈에 들어왔다. 그날 나는 낯선 남자에게 재미없는 얘기는 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고, 그는 나를 웃기기 위해 애쓰겠다고 했다. 딸기 디저트를 내 앞으로 밀어 주면서도 뭘 강요하지 않았던 손, 내 손바닥 위에 먼저 펼쳐졌던 그의 손.“그날로 돌아가면, 나 안 앉혔을까.”혼잣말을 하고도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가 처음 다가왔을 때 거절했을까. 어쩌면 똑같이 웃고 똑같이 반했을 것이다. 아무것도 몰랐던 그 밤의 나는 무척 행복했으니까.사진첩도 열었다. 함께 찍은 얼굴은 없었다. 대신
‘전송 완료.’하필 그 사람에게 보내지 않기로 한 말을, 손가락 하나가 먼저 건네 버렸다.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휴대전화를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밥 먹었어요?’ 겨우 다섯 글자와 물음표 하나. 지우기 버튼을 찾아보았으나 이미 상대에게 도착했다는 표시가 떠 있었다. 회사 보고서를 세 번씩 검토하는 내가 왜 하필 이런 순간에는 손끝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할까.‘잘못 보냈어요.’그 말을 쓰고도 보내지 못했다. 태준이 정말 밥을 먹었는지 궁금했으니까. 이제 연락하지 말라고 한 건 나였고, 마지막으로 그를 돌아보지 않은 것도 나였다. 그런데 그의 저녁을 걱정하는 마음만은 끝내 집으로 데려와 버렸다.화면이 밝아졌다.‘네, 먹었습니다.’짧은 답장이었다. 좋아하는 메뉴도, 늦게까지 일했는지도 묻지 않았다. 그토록 기다렸던 말이 고작 한 줄이었는데 눈물이 먼저 떨어졌다. 베개에 휴대전화를 내려놓아도 글자가 눈앞에 남았다. 예전 같으면 그 뒤에 꼭 한마디가 더 왔을 것이다. ‘오늘 제일 맛있었던 건 뭐예요?’ 하고 물은 다음, 내가 달콤한 음식을 골랐다고 하면 ‘그럼 저는 채린 씨가 웃는 얼굴이 제일 맛있었어요’ 같은 말로 나를 놀렸겠지. 그 유치한 농담에 또 넘어가면서도 모르는 척 웃었을 텐데, 오늘은 더 이어질 말이 없었다.잘 먹었구나. 아프지 않고, 굶지도 않았구나.안도하고 있는 나 자신이 싫어서 이불을 끌어당겼다. 결혼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 뒤에도 나는 그가 끼니를 거르지 않았다는 사실에 이렇게 기뻐했다. 그가 내 앞에서 딸기 라테를 한 모금 마시고 '채린 씨가 마시는 게 더 맛있어 보여요'라던 날까지 떠올랐다.그날 나는 일부러 빨대를 내 쪽으로 돌려 놓았다. 그가 웃으면 나도 웃었고, 한 번 더 만나기 위해 메뉴 맞히기 내기에서 일부러 졌다. 그에게는 아내가 있었는데, 나는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비밀을 가진 여자처럼 굴었다. 그 사실을 몰랐을 때의 나는 아무것도 부끄럽지 않았다. 오늘 내가 예쁘게 웃으면 내일 그가 또 만나자고 해 줄까,
“기다리란 말도 못 하겠어요. 그래도 사랑은 이미 시작됐습니다.”카페 문을 닫고 나온 뒤에도 그 말이 따라왔다. 나는 걸음을 빨리했다. 골목이 끝나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자꾸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붙잡지 않겠다던 사람은 정말로 나를 붙잡지 않았고, 그래서 더 울고 싶었다.길모퉁이 꽃집에는 분홍 장미가 놓여 있었다. 비가 내리던 날, 그는 내가 꽃을 오래 바라보는 걸 기억하겠다고 했다. 그때는 꽃을 받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혼자 연습하기까지 했는데, 이제 그 약속을 떠올리는 것마저 부끄러웠다.‘사랑은 이미 시작됐다니.’그럼 내 사랑은 어디에 내려놓아야 하는데.집에 들어오자마자 신발을 벗고 침대에 앉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태준의 전화를 기다리느라 씻는 시간까지 아까웠다. 거울 앞에 서면 그가 예쁘다고 했던 얼굴을 한 번 더 들여다봤고, 별것 아닌 일에도 ‘오늘은 이 얘기부터 해줘야지’ 하고 웃었다. 그런데 오늘은 휴대전화가 조용했다. 내가 연락하지 말라고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불과 어제만 해도 나는 다음 아침에 보낼 문자를 고르고 있었다. ‘남자친구님, 잘 잤어요?’ 그렇게 보내면 태준이 웃으면서 ‘여자친구님 덕분에요’라고 답할 것 같았다. 실제로 듣지도 못한 대답이 너무 또렷해서, 나는 끝내 베개를 끌어안았다. 가장 아픈 건 아직도 그와 나누지 못한 다정한 말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었다.달력을 열었다. 어제 표시한 작은 별 아래에는 ‘1일’이라는 글자가 있었다. 지우려고 손가락을 댔지만 화면만 몇 번 껐다 켰다. 고작 하루짜리 연애였다는 생각이 들자 눈물이 터졌다. 나는 그와 보낸 날들을 셀 수 있는데, 누군가에겐 처음부터 허락되지 않은 시간이었을지 모른다.“진짜 나쁜 사람.”말해 놓고도 그가 걱정됐다. 저녁은 먹었을까. 내가 손잡지 말라고 했을 때 어떤 표정이었을까. 아직도 그런 걸 궁금해하는 내가 더 싫었다.다음 날 사무실은 평소와 같았다. 수아는 내 자리 위에 수정된 회의 일정을 올려놓
“네.”겨우 한 글자였다. 그런데 그 한 글자에 조금 전까지 남자친구라 부르던 사람이 낯선 남자가 되었다. 나는 태준의 왼손을 바라보다가, 서둘러 웃어 보였다. 아무래도 잘못 들은 것 같았다. 그의 달력에 막 생긴 하트 하나가 떠올랐다. 하트는 하나만 넣자고 했던 나, 나중에 더 붙이자며 웃던 그 사람. 겨우 몇 분이 지났는데 그때로 돌아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농담이죠? 오늘부터 1일인데, 첫날부터 이러는 거 너무 심한데요.”“농담 아니에요, 채린 씨.”“그럼 예전에 결혼했다는 거예요? 지금은 끝난 거고요?”그가 입술을 다물었다. 그 짧은 망설임에 대답이 먼저 도착했다. 나는 손끝으로 테이블 모서리를 짚었다. 그가 내 손을 놓을 때마다 아쉽다고 투정을 부렸던 일이 떠올랐다. 비 오는 골목에서 우산 손잡이를 함께 쥐었고, 맑은 날에도 만나자며 그를 놀렸다. 이제는 뭘 잘못 알고 있었는지조차 차례대로 세어야 할 것 같았다. 조금 전 이 손으로 그의 뺨을 감싸고 입을 맞췄다. 내일도 더 좋아하겠다며 웃던 내 손이었다.“제 아내는 백서진이에요. 아직 결혼한 상태예요. 이혼하지 않았고, 따로 살기로 정한 것도 아니에요.”우리가 함께 있던 정원에서는 누군가 찻잔을 내려놓고 있었다. 문밖으로 지나가는 사람의 웃음소리까지 들리는데, 나는 그 모든 것이 다른 세상의 일처럼 느껴졌다.“아내가 있다는 거네요.”“네.”“그럼 어제도, 오늘도, 내가 남자친구라고 부르는 동안에도요?”“맞아요.”나는 웃었다. 웃어야 울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호텔에서 처음 만난 밤, 남자가 내 손등에 입을 맞췄을 때 나는 세상에서 가장 운 좋은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가 다음 날에도 보고 싶다고 했을 때는 정말로 사랑이 시작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모든 시간 동안 누군가는 그의 아내였다. 나는 그 사실을 모른 채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혼자 기뻐했다. 자기 전에 전화로 열 번씩 보고 싶다고 말해 달라던 내가, 오늘은 그가 무슨 말을 더 할까 두려워하고 있었다.“나한테
“채린 씨, 제게 꼭 먼저 알려야 할 사실이 하나 있어요.”방금 남자친구가 생긴 여자에게 그런 표정으로 할 말이라니. 나는 그가 숨겨둔 선물이라도 꺼낼 줄 알고 두 손을 모았다. 내 달력에는 오늘이 1일째로 적혀 있었고, 조금 전까지 태준은 그 날짜 옆에 하트를 하나 더 붙이자며 웃고 있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일 아침엔 어떤 문자를 보낼지 고민했다. ‘남자친구님, 잘 잤어요?’라고 쓰면 그가 얼마나 웃을까. 오글거리는 문장을 몇 개나 떠올려 놓고 혼자 신이 났는데, 정작 그는 내일 이야기를 꺼내지도 못하고 있었다.“설마 벌써 100일 기념일 예약했어요?”“채린 씨.”“아니면 제가 좋아하는 딸기 농장을 샀다거나? 그건 조금 부담스러운데.”나 혼자 웃었으나 태준의 입가에는 웃음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잡고 있던 내 손을 천천히 놓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따뜻하던 손바닥이 허전해졌다. 나는 별일 아닌 듯 그의 소매를 건드렸다.“왜 그래요? 저 또 놀리려고 그러죠?”“저 기다리는 거 잘하는 거 알죠?” 일부러 씩 웃어 보였다. “아까 1일째라고 했으니까, 오늘 안에만 말하면 봐줄게요.” 농담이 통하지 않자 내가 세운 입꼬리도 조금씩 내려갔다.그는 대답 대신 내가 앉았던 의자를 바라봤다. 카페 문 앞까지 나왔던 우리는 다시 정원 쪽 테이블로 돌아갔다. 저녁바람에 작은 꽃잎이 흔들렸고, 태준은 내 의자를 당겨 주었다. 언제나처럼 사려 깊은 손길이었다. 그래서 더욱 불안했다. 이렇게 다정한 사람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한참을 망설이는 걸까.“우선 앉아서 이야기해요.”“우리 이제 연인이잖아요. 무서운 이야기 할 거면 먼저 안아 주고 해요.”나는 팔을 조금 벌렸다. 평소 같으면 웃으며 다가왔을 그가 이번에는 제자리에 선 채 나를 바라봤다. 그 순간 가슴에서 작게 무언가가 가라앉았다.“채린 씨가 들으면 많이 속상할 이야기예요.”내가 벌렸던 팔을 내렸다. 그래도 선뜻 겁을 내고 싶지는 않았다. 오늘 처음으로 그를 남자친구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고,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