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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화. 매운 사랑

Author: 루니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1-09 02:23:40

“그럼 내일도 서운해할 핑계 하나만 만들어줄래요?”

태준은 내 손을 잡은 채 잠깐 생각하더니 진지하게 고개를 저었다. 여자친구의 투정을 거절하는 표정이 어찌나 반듯한지 나는 일부러 입을 삐죽였다.

“어머, 벌써 연애 서비스 종료예요?”

“서운하게 만들 자신은 없는데, 달래 줄 준비는 언제든 할게요.”

“그건 반칙이지. 내가 삐질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거잖아.”

“그럼 내일은 웃을 이유를 만들어 볼까요?”

나는 그가 펼친 손바닥에 내 손을 다시 올렸다. 우리는 작은 방의 불을 끄고 각자 돌아갈 준비를 했다. 현관에서 그는 내 목도리 끝을 정리해 주었고, 나는 그의 코트 단추가 비뚤어진 걸 바로 채웠다. 둘이 나란히 출근하는 내일은 없겠지만, 오늘 받은 다정함까지 문밖에 놓고 가고 싶지는 않았다. 문을 나서기 전 그가 내 머리카락에 붙은 먼지를 떼어 주자 나는 일부러 정수리를 더 내밀었다.

“한 번 만져 주는 서비스는 없어요?”

그가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수리까지 간지러운 기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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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잤으면 책임지세요 대표님   89화. 작은 편

    “아뇨. 옆에 앉아주는 게 제일 커요.”태준의 말에 나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현미차에서 올라오는 구수한 향이 코끝에 닿았고, 창밖에는 퇴근길 차량의 불빛이 느리게 흘렀다. 그가 내 옆에 앉는 것만으로 좋다니, 세상에서 가장 쉬우면서도 지키기 어려운 부탁이었다.“강태준 씨, 큰일 났어요. 앞으로 제 취미가 뭐냐고 물으면 ‘남자친구 옆에 붙어 있기’라고 해야겠네.”“저도 같은 취미로 적어 둘게요.”“그럼 동호회 만들자. 회원은 딱 2명. 회장은 나야.”“회장님, 회비는 뭡니까?”“일주일에 한 번씩 나 예쁘다고 하기. 연체하면 두 배.”그가 웃으며 내 손등을 한 번 쓸었다. 나는 그 손을 놓기 싫었지만 벽시계가 정해 둔 귀가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아내와 함께하는 집으로, 나는 내 방으로 돌아가야 했다. 나는 찻잔을 씻어 엎어 놓고 신발을 신었다. 현관에서 태준이 내 머리에 삐져나온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회장님, 오늘도 예뻐요.”“어머, 선납까지 하시네. 우수 회원으로 임명합니다.”다음 날 회사에서는 프로젝트 성과를 공유하는 발표가 있었다. 수아와 나는 아침부터 발표 자료의 화면 순서를 확인했다. 내가 설명할 부분은 개선 전후의 흐름이었고, 수아는 현장 적용 결과를 맡았다. 함께 밤늦게까지 고친 자료라서 우리 둘 다 긴장한 얼굴로 회의실에 들어갔다.발표는 예정대로 끝났다. 몇몇 참석자가 변경된 안내 문구를 긍정적으로 평가했고, 다른 부서에서 추가 적용 가능성을 물었다. 수아는 준비한 근거를 찾아 답했고, 나는 남은 검증 항목을 설명했다. 회의실을 나오자 수아가 내 팔을 붙들었다.“선임님, 우리 해냈어요. 저 지금 다리에 힘이 풀려요.”“일단 앉아. 넘어지면 성과 발표 대신 사고 보고서 써야 해.”그런데 자리에 돌아와 배포용 자료를 다시 살피던 수아의 표정이 굳었다. 결과표의 한 항목이 이전 집계 기준으로 들어가 있었다. 발표에서 설명한 전체 흐름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해당 수치를 그대로 두면 후속 검토에 영향을 줄 수 있었다.

  • 잤으면 책임지세요 대표님   88화. 구수한 남자

    “대표님 생각 안 나게 하려고요.”내가 고추 조각을 입에 넣자 태준은 물컵을 내려놓고 나를 바라봤다. 매운 양념 때문에 붉어진 입술보다 내 말이 더 신경 쓰이는 얼굴이었다.“효과는 있었어요?”“없어요. 맵다고 물 마시다가도 태준 씨 생각이 나는데 어떡해요. 지금은 아예 눈앞에 있잖아.”“그럼 덜 매운 걸 먹어야겠네요.”“그쪽으로 결론 내면 안 되지. 남자친구가 하루에 한 번씩 보고 싶다고 해 줘야 한다는 결론이 나와야지.”태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바람에 아직 목에 남아 있던 매운 기운이 올라왔는지 급히 물을 마셨다. 나는 휴지를 한 장 뽑아 그의 앞에 놓았다. 빨갛게 물든 귓바퀴를 보니 놀리고 싶은 마음과 안쓰러운 마음이 번갈아 들었다.“앞으로 내 음식 따라 먹지 마요. 태준 씨는 태준 씨가 좋아하는 걸 먹어. 대신 내가 한 입 뺏어 먹을 수 있게 해 줘.”“한 입이면 되겠어요?”“음, 두 입. 사랑은 양보라잖아.”“제 몫을 뺏는 것도 양보인가요?”“기꺼이 뺏겨 주는 게 사랑이지. 연애 초보라서 아직 모르네.”그는 고개를 끄덕이는 시늉을 했다. 우리는 휴대전화에 적어 놓은 음식 목록을 다시 펼쳐 서로 못 먹는 것과 좋아하는 것을 하나씩 표시했다. 태준은 향이 강한 음식보다 재료 맛이 남는 요리를 좋아했고, 나는 그가 음식의 온도에도 까다롭다는 걸 처음 알았다. 너무 뜨거운 국은 조금 식혀 먹는다고 했다. 반면 나는 김이 모락모락 오를 때부터 숟가락을 들이댔다.“우리 같이 밥 먹으면 온도계가 필요하겠다.”“채린 씨는 혀 안 데어요?”“데지. 그러고 다음 날 또 똑같이 먹어. 학습 능력 부족이야.”태준은 내 그릇을 멀찍이 밀어 놓고 덜 매운 반찬을 가까이 옮겨 주었다. 나는 그가 뭘 해 줄 때마다 기뻐하기만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좋아하는 음식을 제대로 고른 적이 있었나. 별장에선 나를 위해 케이크를 준비했고, 지친 밤에도 내 눈물부터 닦아 줬다.“태준 씨, 밥 말고 제일 좋아하는 건 뭐예요? 마시는 거.”“차요. 구수한

  • 잤으면 책임지세요 대표님   87화. 매운 사랑

    “그럼 내일도 서운해할 핑계 하나만 만들어줄래요?”태준은 내 손을 잡은 채 잠깐 생각하더니 진지하게 고개를 저었다. 여자친구의 투정을 거절하는 표정이 어찌나 반듯한지 나는 일부러 입을 삐죽였다.“어머, 벌써 연애 서비스 종료예요?”“서운하게 만들 자신은 없는데, 달래 줄 준비는 언제든 할게요.”“그건 반칙이지. 내가 삐질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거잖아.”“그럼 내일은 웃을 이유를 만들어 볼까요?”나는 그가 펼친 손바닥에 내 손을 다시 올렸다. 우리는 작은 방의 불을 끄고 각자 돌아갈 준비를 했다. 현관에서 그는 내 목도리 끝을 정리해 주었고, 나는 그의 코트 단추가 비뚤어진 걸 바로 채웠다. 둘이 나란히 출근하는 내일은 없겠지만, 오늘 받은 다정함까지 문밖에 놓고 가고 싶지는 않았다. 문을 나서기 전 그가 내 머리카락에 붙은 먼지를 떼어 주자 나는 일부러 정수리를 더 내밀었다.“한 번 만져 주는 서비스는 없어요?”그가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수리까지 간지러운 기분이었다.다음 날 오전,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수아가 내 자리로 뛰어왔다. 새 안내문 검토 일정이 앞당겨졌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운영팀에서는 아직 기존 일정으로 알고 있다는 이야기였다.“선임님, 운영팀은 오후 4시까지라는데 검토 요청서엔 오전 11시로 적혀 있어요.”나는 받은 메일과 공용 일정표를 나란히 열었다. 전달 과정에서 확정 전 초안의 시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누군가 실수했다고 소리부터 내면 남은 시간이 더 줄어들 뿐이었다.“수아야, 현재 버전부터 잠깐 묶어 두자. 내가 담당자에게 확인할게.”운영팀 담당자에게 전화해 변경된 시간을 확인하고, 검토 의견을 받을 수 있는 현실적인 기한을 물었다. 상대는 오전 안에 모든 내용을 확인하기 어렵다고 했다. 나는 이미 끝난 항목과 아직 확인하지 못한 항목을 분리해 보내겠다고 설명했다. 최종 배포 여부는 부서 책임자들이 판단하도록 정식 결재 경로에 수정 일정을 올렸다.점심 무렵에는 초안에 있던 숫자 하나가 잘못 옮겨진 것도 발견했

  • 잤으면 책임지세요 대표님   86화. 삐짐 사용법

    “네. 그런데 화내지는 마요. 제가 달래는 걸 너무 좋아하게 될 테니까요.”태준이 그렇게 말하자 나는 맞잡은 손을 슬쩍 빼냈다. 방금까지 남의 질투를 귀엽다며 놀린 사람이 누구였더라. 정작 내 차례가 오자 서운했던 일이 줄을 서서 떠올랐다. 이 남자, 달래는 데 자신 있다 이거지?“좋아요. 그럼 오늘은 실기시험이에요.”“시험 범위부터 알려 주시죠.”“제 여자친구 마음이 왜 삐졌는지 알아맞히기. 힌트는 없어요.”그가 웃더니 내 앞에 앉은 자세를 바로잡았다. 아까 열어 놓은 과자 상자에 손을 뻗으려다 멈췄다. 나는 그 손을 눈으로 좇으며 괜히 입술을 삐죽였다.“과자로 입막음하면 실격이야.”“그럼 아무것도 안 하고 들을게요.”그 말 때문에 오히려 농담이 멎었다. 나는 무릎 위에 두 손을 모았다. 회사에서 함께 웃지 못하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알고 지키는 일에도 매번 작은 아쉬움은 생겼다.“오늘 점심에 수아랑 식당 갔거든요. 창가에 두 사람 앉는 자리가 하나 비어 있었어요. 그거 보면서 생각했어요. 태준 씨랑 점심 한 끼 먹는 일이 왜 이렇게 어려울까.”그는 고개만 끄덕였다. 나는 그의 반응을 살피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수아가 제 반찬 뺏어 먹는 건 괜찮아요. 근데 태준 씨가 제 앞에 앉아서 ‘그거 맛있어요?’ 한 번 묻는 건 상상으로만 해야 하잖아요.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수아가 눈치챌까 봐 얼른 밥을 먹어요.”벽시계 초침이 움직였다. 태준은 내가 말을 고르는 동안 컵도 만지지 않았다. 그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은 건지, 같이 밥을 먹자는 약속을 받고 싶은 건지 나조차 분간하기 어려웠다.“복도에서도 그래요. 나란히 걷다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쓸데없는 얘기 하나 해 보고 싶은데, 우리는 서로 다른 쪽을 보고 걷죠. 다른 직원이랑은 걸으면서 날씨 얘기도 하는데.”“그랬구나.”그날 점심 식당에서 창밖을 보다가 태준의 넥타이 색까지 떠올렸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메뉴판을 펼쳐 놓고 그가 매운 음식을 먹으면 물을 몇 잔이나

  • 잤으면 책임지세요 대표님   85화. 질투하는 대표님

    “그럼 오늘은 제가 조금 더 사랑받아도 될까요?”태준이 내 손등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공원 벤치 아래로 마른 잎 하나가 굴러왔고, 나는 어깨에 남아 있는 그의 온기를 느끼며 웃었다. 기운이 없어서 찾아온 사람이 사랑까지 더 달라고 한다니, 이렇게 뻔뻔한 남자친구는 처음이었다.“허락해 줄게요. 오늘은 특별히 이채린 사랑 이용권 무제한.”“정말요?”“대신 본인도 하나 약속해요. 힘든 날에는 괜찮은 척하지 말기.”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의 양손을 잡아 손바닥 사이에 끼워 넣었다. 추운 밤인데도 손끝이 따뜻했다. 머리칼을 한 번 더 쓰다듬어 주자 그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그리고 오늘 칭찬도 받아요. 아주 잘했어, 강태준.”“그 말 들으려고 온 것 같네.”“아유, 우리 애기. 칭찬이 그렇게 좋아요?”그가 웃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나까지 어깨가 들썩였다. 나는 보온병을 가방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밤이 더 깊어지기 전에 헤어져야 했다. 내 손을 끝까지 놓기 싫어하는 그의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 내면서도 자꾸 웃음이 났다.다음 날, 회사에서는 프로젝트 후속 점검 결과가 공유됐다. 우리가 여러 번 고친 안내 문구가 현장에 적용됐고, 운영팀과 함께 확인한 결과를 정리하는 자리였다. 나는 수아가 정리한 비교 자료를 다시 검토해 빠진 설명을 보탰다. 회의가 끝나자 운영팀 동료가 내게 다가왔다.“이채린 선임님, 이번 수정안 정말 좋았어요. 현장에서 헷갈린다는 의견이 많았는데 설명 순서 바꾸니까 훨씬 낫더라고요.”“운영팀에서 구체적으로 알려 주셔서 가능했죠. 저희끼리 봤으면 못 찾았을 거예요.”“그래도 선임님이 끝까지 확인하셨잖아요. 다음 검토에도 같이 부탁드려요.”그가 웃으며 엄지를 세웠다. 나도 따라 웃고 수아에게 공을 돌렸다. 수아는 옆에서 우리 팀의 야근 시간이 드디어 보상을 받았다며 두 손을 들어 올렸다. 한동안 수정 표시로 가득했던 문서가 떠올랐다. 누가 알아주길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지만, 함께 고생한 동료에게 결과를 인정받으니 기분

  • 잤으면 책임지세요 대표님   84화. 사랑받을 차례

    “오늘은 제가 안아줄 차례예요.”내가 두 팔을 벌리자 태준은 앉은 자세로 나를 올려다봤다. 조금 전까지 내 어깨에 기대 있던 사람이 이번에는 어디에 손을 둬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세온그룹 대표가 여자친구 품에 안기는 일에는 결재 절차라도 필요한 모양이었다.“왜요? 안아 주는 것도 대표님 승인이 있어야 해요?”“제가 좀 무거울 텐데.”“어머. 지금 저를 약골 취급해요? 이래 봬도 장바구니에 수박 두 통까지 들어 봤거든요.”“수박이랑 제가 같은 급인가요?”“당연히 다르죠. 수박은 사 오면 먹기라도 하지, 태준 씨는 자꾸 보고 싶게 하잖아요.”그제야 그가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나는 그의 등 뒤로 팔을 둘렀다. 코트가 손바닥 아래에서 구겨졌고, 밤공기에 식은 어깨가 조금씩 따뜻해졌다. 키가 큰 남자를 품에 넣으려니 모양새는 어설펐다. 그래도 그가 고개를 내 목 가까이 기댔을 때, 이 자세가 오늘 우리에게 필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공원 입구에서 자전거 한 대가 지나갔다. 우리는 잠깐 떨어져 앉았다가 사람이 멀어진 뒤 다시 손을 잡았다. 태준은 벤치 아래 놓인 보온병 뚜껑을 닫았다. 뚜껑을 세 번이나 돌리는 손끝을 보니 아직 머릿속에서 끝나지 않은 일이 있는 듯했다.“내일 아침에도 그 일 생각할 거죠?”“응. 제가 확인해야 할 게 남았어.”“그럼 내일 회사에서는 강태준 대표님이 알아서 해결하세요. 여기 있는 강태준 남자친구는 잠깐 쉬고.”“둘이 따로 움직일 수 있으면 좋겠다.”“가능해요. 제가 남자친구 쪽 전담이잖아요. 회사 쪽은 사내 규정대로 움직이시면 되고요.”그는 손가락으로 보온병의 손잡이를 매만졌다. 한동안 말을 고르더니, 오늘 낮에 자꾸 같은 장면이 떠올랐다고 했다. 잘못된 판단을 발견하고도 처음에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부터 생각했단다. 자기 판단을 믿고 일한 사람들 앞에서 실수를 인정하는 게 두려웠다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구체적인 업무 내용을 물을 필요는 없었다. 나도 회의에서 내 자료의 오류를 인정하기까지 여러 번 입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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