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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사위의 흔적

Author: ikkuyot
last update Petsa ng paglalathala: 2026-09-04 14:01:35

망설이던 손끝이 결국 문고리를 감쌌다. 그는 조용히, 아주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

“장모님…?”

​

대답은 없었다. 대신 문 너머에서 들려온 건 잠꼬대 같기도 한 얇은 한숨뿐이었다.

​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술기운이 어딘가에서 작은 용기를 부풀리고 있는 듯했다.

​

“장모님, 괜찮으세요…?”

​

다시 한 번 묻는다. 하지만 수면제의 기운에 잠식된 방 안에서는 그 어떤 변화도 느껴지지 않았다.

​

준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문을 열었다.

​

찰카닥—

​

작은 마찰음과 함께 어두운 방이 눈앞에 펼쳐졌다. 익숙한 구조. 아이의 놀이방으로 쓰려 했던 그 방. 책장 대신 들어온 수납장, 그리고 비워진 컴퓨터 책상의 자리를 채운 그녀의 침대.

​

창문은 조금 열려 있었다. 밤공기가 살짝 들이쳤고, 그 틈으로 바람이 들락거렸다.

​

“아…”

​

준호는 문득 아내 다희가 하던 말을 떠올렸다.

​

‘두통은 엄마한테서 물려받은 거야… 약 먹고 잘 때는 꼭 창문을 좀 열어줘.’

​

그 말이 지금 이 공간을 설명하는 듯했다.

​

그리고, 이불 아래서 몸이 뒤척였다.

​

“흐으음…”

​

혜정의 낮은 신음. 고통이라기보다는 무언가에 쫓기듯 찡그려졌다가 다시 풀어지는 얼굴이었다. 몸은 잔잔히 움직였고, 그에 따라 허리춤에 걸린 이불이 들썩였다.

​

그녀의 잠옷은 배까지 말려 올라가 있었다.

​

하얀 피부 위로, 밤공기에 곤두선 솜털이 어슴푸레 돋아 있었다.

​

준호는 한 걸음 다가섰다. 이불을 덮어줘야 했다. 셔츠를 내려줘야 했다. 그랬다. 분명 그것이 옳았다.

​

하지만, 그 앞에서 그는 멈췄다.

​

손이 닿기 직전, 머릿속을 스친 욕실 앞에 섰던 이 몸의 속살. 그리고 모니터 속에서 봤던 이 몸과 겹쳐지던 장면. 이불과 셔츠 아래 비치는 살결의 곡선, 육덕진 실루엣은 준호의 환상과 같은 자리에 있었다.

​

손끝이, 망설였다.

​

​

​

​

​

—

​

​

​

​

​

“뭔 생각을 그렇게 해.”

​

툭—

​

조제실에서 나온 지환이 팔뚝을 툭 치는 바람에 준호는 손에 들고 있던 비타민 드링크를 쏟을 뻔했다.

​

“아, 쏟을 뻔했잖아. 형.”

“그러니까, 뭔 생각을 그렇게 하냐고. 어젯밤엔 누구랑 그렇게 마신 거야? …설마, 장모님?”

​

지환의 눈빛은 늘 준호의 머릿속을 훑는 것 같았다. 아무 말 없이 웃고 있어도 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눈이었다. 그것은 이런 상황일 때 더 놀라운 촉을 발휘하는 것 같아서 준호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

준호는 말없이 고개를 돌려 드링크를 끝까지 털어 넣고는, 지환이 마시고 내려놓은 빈병을 탁 하고 낚아챘다.

​

“아직 장모님하고 새벽까지 술 마실 정도로 친하진 않아.”

​

지환은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저었다.

​

“뭐, 그러긴 하지. 사위랑 장모가 새벽까지 마시는 것도 이상하긴 해. 근데 너네 장모님, 너 되게 좋아하는 거 같던데?”

​

준호는 피식 웃었다. ‘그렇겠지… 요즘 누가 처갓집 빚 갚아주고 장모까지 모시고 살겠어.’

​

그리고는 되묻듯 말했다.

​

“형처럼만 안 하면 사랑받지. 근데, 우리 장모 이야기는 왜 자꾸 해? 관심 있어?”

​

질문 같았지만, 눈빛은 거의 경계였다. 지환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

“…장모님 되게 젊어 보이시더라. 그 나이 안 같던데?”

​

그 말에, 준호의 손끝이 얼어붙었다. 눈 안으로 불쾌함이 번지며 목덜미가 따갑게 열을 올렸다.

​

“씨발 진짜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선 넘지 마, 형.”

​

준호는 조용히, 그러나 분명한 말투로 말했다. 그리고 버리려던 빈병들을 지환에게 도로 들이밀었다.

​

​

​

​

​

—

​

​

​

​

​

지환을 처음 만난 건 대학교 1학년 때였다. 고등학교 동문회라는 게 뭔지도 모른 채 누군가의 손에 끌려 처음 나간 그 자리.

​

“나는 2학년 김지환이다. 너희들보다 1년 선배야.”

​

지환은 그렇게 자신을 소개하더니 그 자리에서 소주 한 병을 그대로 들이켰다.

​

모두가 얼어붙은 그 시범 이후 신입생들은 하나둘 따라 마시기 시작했다. 물론 마시다 죄다 토해냈지만, 끝까지 버틴 건 준호뿐이었다.

​

그는 왜 소주를 원샷해야 하는지, 왜 1년밖에 더 살지 않은 선배의 협박에 따라야 하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눈을 질끈 감았다. 혀뿌리로 되돌아 나오려는 술을 끝까지 꾹꾹 눌러담았다.

​

그 이후의 기억은 흐릿했다. 누군가의 등에 업혀 낯선 자취방에 들어갔고, 그의 등에 토해냈던 단편적인 기억만 희미하게 남았다.

​

그날 이후, 두 사람은 자주 붙어 다녔다. 고민을 털어놓고 술을 마시고 크고 작은 일들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사이가 되었다.

​

그리고 일 년 뒤, 준호가 신입생들에게 시범을 보일 차례가 되었을 때 지환은 준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그를 소개했다. 그리고는 단호한 눈빛으로 소주 한 병을 들이밀었다.

​

순간, 신입생들의 눈이 일제히 커졌다.

​

“워… 저 형 죽겠다.”

​

준호는 목이 바싹 타올랐다.

​

‘젠장, 이게 뭔 전통이야… 그때 나 죽을 뻔했는데…’

​

주위의 시선이 무겁게 내려앉았고 이제 더는 도망칠 구석이 없었다. 그는 결국 병을 입에 댔다.

​

— 꿀꺽.

​

첫 한 모금이 목구멍을 넘어가는 순간, 준호의 눈이 번쩍 커졌다.

​

‘…이거, 물이잖아?!’

​

옆에서 지환이 살짝 윙크를 날렸다. 엄지를 세우며 ‘나만 믿어’라는 듯한 표정.

​

준호는 얼떨결에 벌컥벌컥 들이켰다. 순식간에 빈 병이 그의 손에 덩그러니 남았다.

​

쓰러진 그날의 기억을 되살려보았다.

​

‘이 ㅅㅂ놈이 나한테만 소주를 먹인 거였어!?’

​

​

​

​

​

—

​

​

​

​

​

세월이 흘러, 각자의 이유로 고향으로 돌아온 후에 둘은 약국을 함께 열었다.

​

안정적인 가정에서 자란 지환은 자신의 기행과 변덕을 ‘자기다움’이라 여겼고, 준호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 집안일까지 떠안는 성실하지만 소극적인 남편이었다.

​

두 사람의 차이는 결혼생활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지환은 늘 순종적인 여성상을 입에 올렸다. 말없이 따라주고 불평 없는 아내를 이상적인 그림처럼 그리지만, 정작 본인은 밖에서 남성성을 과시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말 그대로 옛날 가장의 껍질을 벗지 못한 사람이었다.

​

결국 그의 결혼은 얼마 가지 않아 무너졌다. 혼자서 잘할 수 있다고 늘 자신 있게 말하던 그의 생활도 함께 무너졌다.

​

그들의 약국은 그 둘을 닮았는지 크게 잘되지도, 망하지도 않았지만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균형 위에 간신히 놓여 있었다.

​

그럼에도 다희의 미국 발령이 결정되었을 때 준호는 망설였다. 지환을 혼자 두고 떠나는 것이 어딘가 찝찝했다.

​

조심스레 말을 꺼냈을 때 지환은 그 특유의 무심한 말투로 웃었다.

​

“괜찮아. 걱정 말고 가. 나도 가게 내놓고… 이참에 좀 쉬고 싶었어.”

​

1년이면 약국도 팔리겠지. 그리고 지환에게도 미래를 다시 고민할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

​

​

​

​

—

​

​

​

​

​

아이의 재롱은 늘 무언가를 잊게 만든다.

​

혜정은 꺄르르 웃는 아이의 소리에 홀려 수면제를 먹을 타이밍을 놓쳤다는 걸 아이를 재우러 방에 들어가서야 알아챘다.

​

오늘따라

“할머니랑 잘래…”

하고 투정을 부리는 아이. 그 모습에 혜정은 조금 당황했다.

​

‘엄마의 품이 그리운 걸까. 엄마와 비슷한 살냄새 같은 걸 기억하는 걸까.’

​

사위가 아이를 참 잘 돌봐주고 있기에 눈에 띄는 결핍은 없어 보였지만, 아이의 마음속 허전함까지는 어른도 짚을 수 없다. 혜정은 어쩐지 미안한 마음에 괜찮다는 준호를 물리치고는 아무 말 없이 아이 옆에 누웠다.

​

한참 동안 책을 읽고 난 뒤, 작게 깔린 수면등의 불빛 아래로 아이의 숨소리가 고르게 이어졌다. 그 새근거림이 어쩐지 자장가처럼 느껴졌다.

​

‘자장… 자장…’

​

그 생각이 곧장 선잠이 되어 아이뿐만 아니라 혜정도 끌고 갔다.

​

얼마나 지났을까. 부드러운 무언가가 셔츠 안쪽, 배를 스윽 문질러왔다. 아마도 잠결에 뻗은 아이의 손일 테다.

​

하지만 그것이 살갗을 비비는 느낌으로 다가오는 순간, 혜정은 깜짝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숨을 고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

아이 곁에 누웠다가 그대로 깜빡 잠들었던 것 같았다. 혜정은 하품을 삼키며 방을 나왔다.

​

‘이제는… 잠자기는 틀렸네.’

​

거실로 나오는 발끝이 조용했다. 안방 문은 닫혀 있었다. 사위는 이미 자러 들어간 모양이었다. 거실 벽에 걸린 시계는 밤 열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

​

​

​

​

—

​

​

​

​

​

부드러운 가을 아침 햇살이 잠든 혜정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

눈꺼풀 사이로 스며든 빛에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

‘먹을까 말까...’

​

전날 밤, 수면제를 앞에 두고 망설이다 너무 늦은 시간에 삼켜버린 결과였다.

​

“아휴… 먹지 말 걸…”

​

몸을 뒤척이며 혜정은 이불 안에서 한숨을 흘렸다. 밤사이 깊이 잤다는 느낌은 없었고, 오히려 몸은 더 무거워진 것 같았다. 잘못된 선택이었을까. 그 생각을 곱씹으며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

거실로 나와보았지만, 손자와 사위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식탁엔 치워지지 않은 그릇이 두 개. 거실 바닥을 뒹구는 아이의 잠옷. 사위도 분명 내가 늦은 바람에 당황한 흔적이 역력했다.

​

창문 사이로 가을빛이 쏟아졌다. 혜정은 머리를 한 번 툭툭 긁었다.

​

‘얹혀사는 주제에… 에휴… 청소나 하자.’

​

그녀는 잠이 덜 깬 몸을 일으켜 천천히 청소기를 집어 들었다.

​

​

​

​

​

—

​

​

​

​

​

남자들의 방은 티가 난다. 특히, 아내가 없는 남자 혼자의 방은 더더욱 그렇다.

​

준호는 괜찮다고 했지만, 혜정의 손은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기방은 알아서 치우겠다고 했지만,

​

“안 해도 되지만, 해주면 더 좋다”

​

는 눈빛이 남아 있었다. 적어도 혜정의 생각에는 그래 보였다.

​

그녀는 책상 위에 소복이 앉은 먼지를 닦고, 쓰레기처럼 흩어진 작은 조각들을 휴지통에 하나씩 넣었다. 그 방 한쪽 구석에 새로 놓인 작은 휴지통. 전에는 없던 것이었다.

​

‘그래… 그냥은 못 살지, 불편해서.’

​

피식 작게 웃으며,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묵직한 쓰레기통의 뚜껑을 열었다. 물기가 없는 티슈 정도야 그냥 집어들고 속만 빼서 버리면 될 것 같았다.

​

그 순간, 손끝에 닿은 무언가의 감촉.

​

티슈. 한두 장, 아니, 여러 뭉치.

​

평범한 걸레짓의 흔적일지도 모른다. 그냥 먼지 닦은 걸지도. 처음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

그런데 손끝에 딱딱하게 굳은 어떤 자국. 미지근하게 굳은 엷은 껍질. 마른 액체의 끈적임이 그대로 굳은, 익숙한 감촉.

​

그녀는 움켜쥔 손을 조금 늦게 펴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 속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

며칠 전에 자신을 놀라게 만들었던 그 남자의 흔적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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