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강태욱 대표님이 직접 오셨습니다.”
비서의 말이 끝나자 회의실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윤아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젯밤 가족들 앞에서 이혼을 선언한 뒤, 태욱과는 저택 밖에서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분명 그때 윤아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하루도 지나지 않아 태욱이 서림유통까지 직접 찾아온 것이다.
“무슨 일로 왔다는데요?”
윤아가 차분하게 물었다.
비서는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게…… 대표님하고 직접 이야기하겠다고만 하셨습니다. 지금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윤아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약속도 없이요?”
“네.”
그 순간 맞은편에서 민혁이 낮게 웃었다.
“강태욱 대표가 원래 그렇게 예고 없이 남의 회사에 찾아오는 사람이었나?”
윤아가 곧바로 그를 바라봤다.
“신경 쓰지 마세요. 제 개인적인 일이니까.”
“그래. 개인적인 일이겠지.”
민혁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지만, 입가에는 여전히 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윤아는 그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차 전무님.”
“응.”
“괜히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생긴 것처럼 웃지 마세요.”
민혁은 잠시 윤아를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미안. 그런데 조금 궁금하긴 하네.”
“뭐가요?”
“어젯밤 이혼 통보를 받은 남편이 다음 날 아침부터 아내 회사까지 찾아온 이유.”
그 말에 윤아의 표정이 굳었다.
민혁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강태욱은 결혼한 3년 동안 단 한 번도 이런 식으로 윤아를 찾아온 적이 없었다.
윤아가 친정 회사에 나와 하루 종일 일하고 있어도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서림유통 창립기념식에 참석해 달라고 부탁했을 때조차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했던 사람이 태욱이었다.
그런 남자가 지금은 약속도 없이 직접 회사까지 찾아왔다.
이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단 가볼게요.”
윤아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민혁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윤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차 전무님은 왜 일어나세요?”
“회의가 끝났잖아.”
“그럼 비서가 안내해드릴 거예요.”
“굳이?”
민혁은 서류를 챙기며 태연하게 말했다.
“나도 내려가는 길인데 같이 가지.”
윤아는 잠시 그를 바라봤지만 굳이 말리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함께 회의실을 나왔다.
서림유통 직원들은 복도를 지나가는 윤아와 민혁을 힐끔거리며 바라봤다.
세계적인 투자회사 전무가 직접 방문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회사 안은 이미 술렁이고 있었다.
거기에 태성그룹 강태욱 대표까지 갑자기 찾아왔다는 소식이 퍼지자 직원들의 관심은 더욱 커졌다.
“강 대표가 왜 왔대?”
“모르지. 어제 대표님 이혼한다는 소문 돌았다잖아.”
“설마 그거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야?”
직원들이 작게 수군거렸다.
윤아는 들리지 않는 척 그대로 걸었다.
잠시 후 응접실 앞에 도착한 윤아가 문을 열었다.
소파에 앉아 있던 태욱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어젯밤과 똑같이 잘 정돈된 정장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와 달리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조금 남아 있었다.
태욱은 윤아를 보자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이렇게 늦었어?”
윤아는 그 말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 회사에서 회의하고 있었으니까.”
“전화도 안 받더군.”
“회의 중이었어.”
태욱은 무언가 더 말하려다가 윤아 뒤에 서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차민혁에게 향했다.
민혁 역시 아무 말 없이 태욱을 바라봤다.
두 남자의 시선이 처음으로 마주쳤다.
윤아는 순간적으로 분위기가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누구야?”
태욱이 먼저 물었다.
윤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민혁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차민혁입니다.”
민혁은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블랙우드 캐피털 전무입니다.”
태욱의 눈빛이 미세하게 변했다.
블랙우드.
어젯밤 윤아가 보여준 메일에 적혀 있던 바로 그 회사였다.
태욱은 잠시 민혁의 손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악수했다.
“강태욱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태성호텔 대표시죠.”
민혁의 목소리는 정중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두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흐르고 있었다.
태욱이 악수한 손을 놓으며 윤아를 바라봤다.
“어제 말한 5천억 투자 담당자가 이 사람이야?”
“응.”
“그렇군.”
태욱은 다시 민혁을 바라봤다.
“블랙우드 전무가 직접 한국까지 와서 계약을 챙기는 걸 보니 서림유통을 꽤 중요하게 보는 모양이네요.”
민혁이 미소를 지었다.
“좋은 회사에는 직접 움직일 가치가 있으니까요.”
“좋은 회사라.”
태욱은 짧게 되뇌었다.
“우리 쪽에서는 조금 다르게 평가하고 있었는데.”
윤아의 얼굴이 바로 차가워졌다.
“강태욱.”
“왜?”
“여기서 태성그룹 입장을 말하러 온 거면 돌아가.”
태욱이 윤아를 바라봤다.
“난 태성그룹 대표 자격으로 온 게 아니야.”
“그럼?”
“남편으로 온 거야.”
순간 방 안이 조용해졌다.
윤아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어제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아직 서류에 도장 찍은 거 없어.”
태욱은 단호하게 말했다.
“법적으로는 아직 네 남편이야.”
그 말을 듣던 민혁의 눈빛이 아주 조금 차가워졌다.
하지만 윤아는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는 태욱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회사까지 찾아온 이유가 뭔데?”
태욱은 잠시 민혁을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윤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둘이 이야기 좀 해.”
“여기서 하면 돼.”
“서윤아.”
“나 지금 손님 있어.”
태욱의 시선이 다시 민혁에게 향했다.
“손님?”
그가 낮게 되물었다.
묘하게 불쾌한 목소리였다.
그 순간 민혁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 때문에 불편하시면 제가 먼저 자리를 비켜드리죠.”
윤아가 민혁을 바라봤다.
“괜찮아요.”
하지만 민혁은 이미 서류를 챙기고 있었다.
그는 윤아 옆을 지나가다 잠시 멈췄다.
“오늘 얘기는 다음 미팅에서 계속하자.”
“네.”
“그리고 윤아야.”
순간 태욱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민혁은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말했다.
“그때 이야기, 나중에 꼭 해줄게.”
윤아의 표정이 굳었다.
태욱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리고 민혁이 응접실을 나간 뒤, 낮게 물었다.
“너 저 남자랑 원래 아는 사이야?”
윤아는 잠시 침묵했다.
태욱의 표정은 어느새 완전히 굳어 있었다.
윤아가 천천히 대답했다.
“응.”
“무슨 사이였는데?”
윤아는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내 첫사랑.”
저녁 7시.윤아는 태성호텔 최상층에 있는 한식당 별실 앞에 서 있었다.평소라면 굳이 이곳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최미란이 직접 만나자고 한 이상, 피할 생각도 없었다.어차피 이혼을 진행하려면 언젠가는 태성그룹 사람들과 다시 마주쳐야 했다.직원이 문을 열어주자 넓은 별실 안에 혼자 앉아 있던 최미란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왔니?”“네.”윤아는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테이블 위에는 이미 여러 가지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지만, 최미란은 젓가락조차 들지 않은 상태였다.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먼저 입을 연 것은 최미란이었다.“어제 일 때문에 너도 정신이 없었겠지.”윤아는 별다른 표정 없이 대답했다.“괜찮습니다.”“괜찮긴 뭐가 괜찮아. 가족들 앞에서 이혼하겠다고 선언했는데.”최미란의 목소리에는 못마땅함이 묻어 있었다.윤아는 예상했다는 듯 차분하게 물었다.“그래서 저를 보자고 하신 건가요?”최미란은 찻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윤아야. 나도 네가 태욱이 때문에 많이 속상했다는 건 알아.”그 말에 윤아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결혼한 3년 동안 최미란이 자신의 마음을 먼저 물어본 적은 거의 없었다.최미란에게 윤아는 좋은 며느리였다.말대꾸하지 않고, 집안 행사에 빠지지 않고, 태욱이 늦게 들어와도 문제를 만들지 않는 며느리.그것이면 충분했다.“태욱이가 표현이 없는 애야. 어릴 때부터 그랬어. 여자한테 다정하게 말하고, 기념일 챙기고 그런 거 잘 못해.”윤아는 조용히 듣고 있었다.최미란은 계속 말했다.“그렇다고 널 싫어해서 그런 건 아니야. 결혼생활이라는 게 원래 서로 조금씩 참으면서 사는 거잖니.”그 말을 듣는 순간 윤아는 알았다.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부른 자리가 아니었다.“어머니.”“왜?”“저를 설득하시려고 부르신 거죠?”최미란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윤아는 더 이상 돌려 말하지 않았다.“이혼하지 말라고 하시려고요.”잠시 침묵이 이어졌다.결국 최미란이 한숨을 내쉬었다.“그래. 솔직히 말하면 그렇다.
강태욱은 서림유통 본사를 나와 차에 올라탄 뒤에도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운전석에 앉은 비서는 룸미러로 태욱의 표정을 힐끔 살폈다.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하지만 오랫동안 태욱을 보좌해온 비서는 알고 있었다.지금 대표의 기분이 상당히 좋지 않다는 것을.“대표님, 바로 태성호텔 본사로 가면 될까요?”“그래.”짧은 대답이 돌아왔다.차가 천천히 출발했다.창밖으로 서림유통 건물이 멀어지고 있었지만, 태욱은 아직도 조금 전 응접실에서 들었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내 첫사랑.’별것 아닌 말이었다.누구에게나 과거는 있었다.윤아가 자신과 결혼하기 전에 다른 남자를 만났다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그런데도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특히 차민혁이 윤아를 부르던 말투가 그랬다.너무 자연스러웠다.오랫동안 만나지 않았던 사람이라기보다는, 여전히 가까운 사이처럼 느껴질 정도였다.태욱은 눈살을 찌푸렸다.그때 비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대표님, 오늘 오전 일정 하나가 밀렸습니다. 열두 시에 기획본부 보고가 있고, 오후 두 시에는 호텔 신규 사업 관련 회의가 있습니다.”“알아.”태욱은 무심하게 대답했다.그러다 잠시 후 갑자기 물었다.“차민혁이라는 사람 알아?”비서는 순간 당황했다.“차민혁이요?”“블랙우드 캐피털 전무.”“아, 네. 이름은 알고 있습니다. 국내 기업 투자 쪽에서는 꽤 유명한 인물입니다.”태욱의 시선이 천천히 비서에게 향했다.“어떤 사람인데?”비서는 머릿속으로 아는 정보를 정리했다.“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미국으로 건너갔고, 블랙우드에 들어간 이후 대형 인수합병과 투자 건을 여러 개 맡았다고 들었습니다. 나이에 비해서 승진도 굉장히 빠른 편이고요.”“나이가?”“대표님과 비슷한 또래로 알고 있습니다.”태욱의 눈빛이 조금 어두워졌다.“결혼했어?”비서가 순간 말을 멈췄다.이번 질문은 업무와 전혀 상관없었다.“그건…… 제가 확인해보지 않아서 모르겠습니다.”“그래?”“확인해볼까요?
“내 첫사랑.”윤아의 말이 떨어지자 응접실 안이 조용해졌다.강태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조금 전 차민혁이 나간 문을 바라보다가 다시 윤아에게 시선을 돌렸다.첫사랑.그 단어가 이상하게 귀에 걸렸다.태욱은 지금까지 윤아의 과거 연애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정략결혼으로 만난 사이였다.결혼 전 누구를 만났는지, 어떤 사람을 좋아했는지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런데 막상 그 상대가 눈앞에 나타나자 기분이 묘하게 불쾌했다.“첫사랑이라고?”태욱이 다시 물었다.윤아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응. 대학 때 만났어.”“얼마나 만났는데?”윤아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그건 왜 물어?”“궁금하니까.”“당신이 내 과거를 궁금해한 적도 있었어?”그 말에 태욱의 입이 다물렸다.윤아는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결혼한 지 3년 동안 내가 대학을 어디 나왔는지도 제대로 기억 못 하던 사람이, 갑자기 첫사랑이랑 몇 년 만났는지가 궁금해?”“그거랑 지금은 다르지.”“뭐가 다른데?”태욱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자신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그저 조금 전 민혁이 윤아를 너무 자연스럽게 이름으로 부른 것이 마음에 걸렸다.‘윤아야.’그 한마디가 계속 머릿속에 남았다.둘 사이에 자신이 모르는 시간이 있다는 사실도 거슬렸다.태욱은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물었다.“그럼 저 남자 때문에 이혼하려는 건 아니고?”윤아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확인하는 거야.”“오늘 7년 만에 처음 봤어.”윤아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그리고 내가 당신한테 이혼 서류를 준 건 어젯밤이고. 시간 순서 정도는 생각하고 말해.”태욱의 얼굴도 굳었다.“그럼 왜 하필 지금 나타났는데?”“블랙우드 담당 전무니까.”“우연이라고?”“그럼 내가 불렀겠어?”윤아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태욱을 바라봤다.“당신 정말 이상하다. 내가 한지수 씨 때문에 아무 말이라도 하면 예민하게 굴지 말라고 하더니, 당신은 내 첫
5화. 남편과 첫사랑“강태욱 대표님이 직접 오셨습니다.”비서의 말이 끝나자 회의실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졌다.윤아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어젯밤 가족들 앞에서 이혼을 선언한 뒤, 태욱과는 저택 밖에서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나눴다.분명 그때 윤아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 했다.그런데 하루도 지나지 않아 태욱이 서림유통까지 직접 찾아온 것이다.“무슨 일로 왔다는데요?”윤아가 차분하게 물었다.비서는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그게…… 대표님하고 직접 이야기하겠다고만 하셨습니다. 지금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세요.”윤아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약속도 없이요?”“네.”그 순간 맞은편에서 민혁이 낮게 웃었다.“강태욱 대표가 원래 그렇게 예고 없이 남의 회사에 찾아오는 사람이었나?”윤아가 곧바로 그를 바라봤다.“신경 쓰지 마세요. 제 개인적인 일이니까.”“그래. 개인적인 일이겠지.”민혁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지만, 입가에는 여전히 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윤아는 그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차 전무님.”“응.”“괜히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생긴 것처럼 웃지 마세요.”민혁은 잠시 윤아를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미안. 그런데 조금 궁금하긴 하네.”“뭐가요?”“어젯밤 이혼 통보를 받은 남편이 다음 날 아침부터 아내 회사까지 찾아온 이유.”그 말에 윤아의 표정이 굳었다.민혁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강태욱은 결혼한 3년 동안 단 한 번도 이런 식으로 윤아를 찾아온 적이 없었다.윤아가 친정 회사에 나와 하루 종일 일하고 있어도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심지어 서림유통 창립기념식에 참석해 달라고 부탁했을 때조차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했던 사람이 태욱이었다.그런 남자가 지금은 약속도 없이 직접 회사까지 찾아왔다.이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일단 가볼게요.”윤아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민혁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윤아가 눈살을 찌푸렸다.“차 전무님은 왜 일어나세요?”“회의가 끝났잖아.”“그럼 비서가
서림유통 본사 회의실 안에는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차민혁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윤아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7년 전 아무 말도 없이 떠났던 남자.그리고 지금은 세계적인 투자회사 블랙우드 캐피털의 전무가 되어 그녀 앞에 다시 나타났다.윤아는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더 차분한 표정을 지었다.“제 이혼 소식까지 알고 계신 줄은 몰랐네요.”민혁은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를 천천히 넘기며 말했다.“알아보려고 한 건 아니야. 어젯밤 태성그룹 쪽에서 꽤 시끄러운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업계에 벌써 돌고 있더군. 태성그룹 둘째 손자가 가족 연회에서 이혼 통보를 받았다는 소문까지 말이야.”윤아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아직 정식으로 이혼 절차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벌써 소문이 퍼졌다는 사실이 달갑지는 않았다.하지만 재벌가의 일은 원래 그랬다.누가 누구와 식사를 했는지, 어느 집안이 어느 회사와 손을 잡았는지까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기사보다 먼저 업계에 퍼졌다.특히 태성그룹 정도 되는 대기업이라면 작은 소문 하나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윤아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개인적인 일은 투자하고 상관없으니까, 회사 이야기부터 하죠. 블랙우드가 제시한 조건을 듣고 싶어요.”민혁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여전하네.”“뭐가요?”“불편한 이야기가 나오면 바로 일부터 하는 거.”윤아의 눈빛이 차가워졌다.“7년이나 지났는데 예전 사람인 척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민혁의 손이 잠시 멈췄다.회의실 안에 있던 서림유통 임직원들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누가 봐도 이상한 분위기였다.블랙우드 전무와 서림유통 대표가 단순히 오늘 처음 만난 사이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민혁은 잠시 윤아를 바라보다가 다시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좋아. 그럼 일 얘기만 하지.”그는 두꺼운 계약서를 윤아 앞으로 밀었다.“블랙우드는 서림유통에 총 5천억 원을 투자할 생각이야. 그중 3천억은 물류센터 확장과 온라인 플랫폼 고도
서윤아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휴대전화 너머에서는 블랙우드 캐피털 직원이 계속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었지만,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차민혁.그 이름을 다시 듣는 순간, 오래전에 묻어두었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한꺼번에 떠올랐다.대학 시절 윤아의 첫사랑이었던 남자.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던 시절, 서로의 미래를 가장 가까이에서 응원했던 사람.그리고 7년 전 어느 날.아무런 설명도 없이 미국으로 떠나버린 남자였다.“대표님? 듣고 계십니까?”윤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네, 듣고 있어요.”“차민혁 전무님께서 이번 계약을 직접 맡겠다고 하셨습니다. 본사에서도 서림유통 투자 건을 중요하게 보고 있어서요. 전무님께서 내일 오전 중으로 직접 뵙고 싶다고 하시는데 괜찮으실까요?”윤아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왜 하필 차민혁일까.블랙우드에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그동안 한 번도 그의 소식을 찾아보지 않았다.정확히는 찾아보고 싶지 않았다.7년 전 윤아에게 남은 건 이별의 이유조차 모른다는 사실뿐이었다.“내일 몇 시죠?”“오전 열한 시입니다. 장소는 대표님께서 편하신 곳으로 정하셔도 됩니다.”윤아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서림유통 본사로 오시라고 해주세요.”“알겠습니다. 그렇게 전달드리겠습니다.”통화가 끝났다.윤아는 휴대전화를 내려다봤다.참 이상했다.오늘 하루에만 과거의 사람들이 두 명이나 자신 앞에 나타났다.강태욱의 첫사랑 한지수.그리고 자신의 첫사랑 차민혁.윤아는 작게 웃었다.“무슨 드라마도 아니고.”하지만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그때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서윤아.”윤아의 표정이 바로 굳었다.돌아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강태욱이었다.그는 연회장을 나와 빠른 걸음으로 윤아에게 다가왔다.“내가 분명 기다리라고 했지.”윤아가 천천히 돌아봤다.“그래서?”“그래서가 아니라, 아직 우리 얘기 안 끝났어.”“나는 끝났다고 했는데.”태욱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그는 평소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