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좋아하는 사람 이름11화. 좋아하는 사람 이름시험은 끝났다.그런데 감기는 도무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콜록, 콜록.”윤해온은 입을 가린 채 기침을 하고는 책상에 엎드렸다.처음처럼 열이 심하게 나는 건 아니었다. 문제는 시험 기간 내내 남아 있던 미열과 기침이었다.시험지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머리가 멍해졌고, 문제를 다 풀고 나면 손에 힘이 빠졌다.한국에 돌아와 처음 치른 시험인데 하필 최악의 컨디션이었다.“아, 진짜…….”해온이 작게 투덜거렸다.지난 열흘 동안 이헌이 옆에서 챙겨주지 않았더라면 더 힘들었을 것이다.아침이면 책상 위에 따뜻한 물이담긴 보온병이 놓여있었다.쉬는 시간에 문제집을 붙들고 있으면 이헌은 해온의 책을 덮어버리기도 했다.처음에는 짜증이 났다.그런데 이제는 익숙해졌다.오히려 이헌이 잠깐 자리를 비우면 책상 위가 허전하게 느껴질 정도였다.‘이것도 습관인가.’해온은 괜히 인상을 찌푸렸다.그때 교실 문이 열렸다.“시험 끝났다!”권태겸의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해온은 고개를 들지도 않았다.“시끄러워.”“와, 윤해온. 시험 끝났는데 반응이 그게 끝이야?”“그럼 춤이라도 춰?”“춤추면 재밌겠는데?”“꺼져.”태겸이 얄밉게 낄낄거렸다. 그 뒤로 이헌이 들어왔다.해온은 팔에 걸쳐두었던 커다란 교복 재킷을 들었다.추워하는 자신에게 이헌이 건네준 것이었다.그날 이후로도 아침저녁이면 계속 빌려 입었다.하지만 시험도 끝났고, 이제는 돌려줘야 할 것 같았다.“야, 이거.”이헌이 돌아봤다.“왜 벗었어?”“이제 괜찮아.”“기침하잖아.”“기침이랑 추운 거랑 무슨 상관인데.”“밖에 추워.”“너도 춥잖아.”해온이 재킷을 내밀었다.그러자 이헌이 재킷을 받아 펼치더니 다시 해온의 어깨에 걸쳐줬다.“집에 갈 때까지 입어.”“야.”“목도리는?”“가방에.”이헌이 해온의 가방을 열어 검은 목도리를 꺼냈다.“답답해서 뺐는데.”“밖에서는 하고 있어.”“나 애 아니거든?”“알아.”그러면서도 이헌은 목도리를 해온에게
Last Updated: 2026-09-28
Chapter: 너 걔 좋아해?“아이, 씨발. 권태겸 너는 네 바이크 놔두고 왜 자꾸 내 거 타려고 지랄이야?”아침부터 류세라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골목을 울렸다.권태겸은 아무렇지도 않게 세라의 바이크 뒤에 올라앉았다.“안 그래도 마음 아픈 사람한테 자꾸 상처 주지 마라.”“누가 자물쇠도 제대로 안 해놓고 세워두래?”“그날 잠깐이었거든?”“그 잠깐 사이에 없어졌잖아.”“그러니까 더 슬프다고.”태겸이 가슴을 움켜쥐는 시늉을 했다.세라의 표정이 더 구겨졌다.“내려.”“싫어.”“권태겸.”“학교 늦어.”“야!”해온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광경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지난밤 이헌의 집에서 자고 바로 학교로 가는 길이었다.다행히 밤새 말려둔 교복도 어느 정도 말라 있었고, 네 사람 모두 씻고 갈아입고 나니 어제 운동장에서 난리를 쳤던 흔적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문제는 교통편이었다.“그럼 나는?”해온이 물었다.세라가 태겸을 밀어내려다 말고 돌아봤다.“넌 차이헌 거 타.”“뭐?”“어차피 차이헌 혼자 타잖아.”태겸이 냉큼 맞장구쳤다.“그렇지. 나랑 차이헌이랑 같이 타면 그림이 너무 더러워.”“누가 너랑 같이 탄대.”이헌이 짧게 잘랐다.“봐. 본인도 싫대.”태겸이 능청스럽게 웃었다.세라가 해온을 향해 턱짓했다.“그냥 타. 학교 늦겠다.”“…….”해온은 영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다.어젯밤까지 차이헌 집에서 자놓고 바이크 뒤에 타는 게 뭐 그렇게 다르냐 싶으면서도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게다가 머리도 조금 무거웠다.며칠째 찬바람을 맞아서 그런가.“괜찮겠어?”세라가 물었다.해온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응.”그 순간 머리 위로 헬멧이 푹 씌워졌다.“아.”앞이 잠깐 가려졌다.해온이 헬멧을 바로잡고 고개를 들자 이헌이 해온의 가방까지 받아 자기 앞으로 멨다.“내가 들 수 있는데.”“무겁잖아.”“안 무거워.”“어제 무겁다고 했잖아.”이헌은 대답 대신 바이크 쪽으로 향했다.멀찍이서 둘을 보고 있던 태겸이 입꼬리를 올렸다.“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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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아무도 널 건드리지 못하게“아!!!!!!!!!!!!!!”“엄살 좀 그만 부려.”“야, 윤해온. 네 눈에는 이게 엄살로 보여?”권태겸이 얼굴을 찡그리며 팔을 뒤로 뺐다.해온이 그런 태겸의 팔목을 다시 잡아당겼다.“가만있어.”“아프다고.”“이딴 생채기 가지고 제일 시끄러워.”“생채기?”태겸이 억울하다는 얼굴로 세라를 돌아봤다.“류세라. 너도 봐봐. 얘 지금 사람 팔 떨어져 나가게 생겼는데 생채기래.”세라는 소파 반대편에 앉은 채 코웃음을 쳤다.“엄살 맞아.”“와. 둘이 진짜 가족 맞네.”“닥치고 치료나 받아.”“내 편이 한 명도 없냐?”태겸이 투덜거리면서도 다시 팔을 내밀었다.싸움이 끝난 뒤 네 사람은 곧장 차이헌의 집으로 왔다.정확히는 이헌과 태겸이 이 상태로 각자 집에 돌아가기 어렵다는 이유 때문이었다.교복에는 운동장 먼지가 잔뜩 묻어 있었고 태겸의 팔과 얼굴에는 여기저기 상처가 남아 있었다.이헌은 상대적으로 멀쩡했지만 입술 한쪽이 살짝 터져 있었다.반면 세라와 해온은 옷에 먼지가 조금 묻은 것 말고는 멀쩡했다.그런데도 가장 열받은 사람은 세라였다.“백승모 그 새끼 진짜 미친 거 아니야?”소파에 앉아 있던 세라가 이를 갈았다.“지 애들 잔뜩 데리고 학교까지 찾아와놓고 지는 먼저 빠졌잖아.”태겸이 피식 웃었다.“원래 그런 새끼잖아.”“잡히기만 해봐.”“잡아서 뭐 하게?”태겸이 장난스럽게 물었다.세라가 눈을 희번덕 떴다.“경찰에 넘겨.”태겸이 잠깐 멈췄다가 웃음을 터뜨렸다.“푸하하! 웬일로 합법적이네?”“그럼 내가 뭐 쫓아가서 패기라도 할 줄 알았냐?”“조금?”“뒤질래?”“그 눈빛 보면 가능할 것도 같아서.”해온은 둘의 대화를 무시한 채 태겸의 팔에 깨끗한 거즈를 대고 붕대를 정리했다.“됐어.”“끝?”“응.”태겸이 팔을 이리저리 움직여봤다.“오.”“아프다며.”“갑자기 괜찮아졌어.”“그럼 아까는 엄살 맞네.”“…….”해온이 손을 내밀었다.“다음.”소파 끝에 앉아 있던 이헌이 해온을 바라봤다.“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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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내 옆자리 차이헌월요일 아침.교실에 들어선 윤해온은 제 자리 앞에서 그대로 멈췄다.“……뭐야.”분명 자기 자리가 맞았다.창가에서 두 번째 줄.책상 옆에는 며칠 전 자기가 붙여놓은 작은 스티커까지 그대로 있었다.문제는.그 옆자리였다.원래 해온의 짝이 앉아 있어야 할 자리에 차이헌이 떡하니 엎드려 자고 있었다.해온은 가방을 멘 채 한동안 그 뒷머리를 내려다봤다.잘못 왔나 싶어 교실까지 한번 둘러봤다.아니었다.분명 자기 반이었다.“왜 자리가…….”혼잣말을 하자 엎드려 있던 이헌이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눈이 마주쳤다.“왔네.”“…….”해온이 미간을 좁혔다.“내 짝 어디 갔어?”“저기.”이헌이 턱으로 교실 반대편을 가리켰다.해온의 원래 짝이 저 멀리 권태겸 옆에 앉아 있었다.그 애 역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태겸과 이헌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해온이 다시 이헌을 쳐다봤다.“왜 자리가 바뀌었는데?”“내가 바꿨어.”“왜?”이헌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얼굴로 다시 책상에 팔을 괴었다.“잠자기 좋아 보여서.”“……뭐?”“창가고.”“그래서?”“조용하고.”“그래서 남의 자리를 네 마음대로 바꿨어?”“어.”해온은 할 말을 잃었다.“진짜 제멋대로네.”그러거나 말거나 이헌은 다시 팔에 얼굴을 묻었다.해온은 황당한 얼굴로 그를 보다가 결국 가방을 내려놓았다.“내 짝이 싫다고 하면?”“이미 물어봤어.”“뭐라는데.”“상관없대.”멀리 있던 원래 짝과 눈이 마주쳤다.그 애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진짜 상관없는 모양이었다.“…….”해온은 결국 자리에 앉았다.“아, 그래. 마음대로 해.”“응.”“대답 진짜 얄미워.”대꾸는 없었다.이미 다시 자는 것 같았다.해온은 한심하다는 듯 이헌을 흘겨보다 문제집을 꺼냈다.어제 하루 종일 놀았으니 밀린 문제라도 풀 생각이었다.몇 문제쯤 풀었을 때였다.“공주님~”멀리서 듣기만 해도 짜증 나는 목소리가 날아왔다.해온의 샤프가 멈췄다.모른 척했다.“윤해온 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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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눈 떠보니골이 깨질 것 같았다.“Ah, shit…….”해온은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겨우 몸을 일으켰다.머릿속에서 누가 북이라도 두드리는 것 같았다.쿵. 쿵. 쿵.조금만 움직여도 금방이라도 게워낼것같이 속이 울렁거렸다.“아…… 미치겠네.”어젯밤 분위기에 휩쓸려 자기 상태도 모르고 계속 마신 게 문제였다.해온은 눈을 감은 채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었다.조금 진정된 것 같아 천천히 눈을 떴다.그리고.“……?”눈썹이 찌푸려졌다.낯설었다.벽도.커튼도.눈앞에 놓인 작은 협탁도.분명 자기 방이 아니었다.해온은 잠이 덜 깬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침대 하나.협탁 하나.벽에 걸린 검은색 후드.그게 끝이었다.“여기가 어디야…….”작게 중얼거리며 머리를 짚었다.마지막 기억을 더듬었다.어젯밤.세라한테 끌려 클럽에 갔다.권태겸과 차이헌을 만났다.웬 이상한 애들이 시비를 걸었다.차이헌 손에 풀어진 붕대를 다시 감아줬다.그리고…….“…….”그다음이 없다.해온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설마.”그때였다.사각.침대 반대편에서 무언가 움직였다.해온이 그대로 얼어붙었다.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이불 끝으로 검은 머리카락이 보였다.“……류세라?”대답이 없다.해온은 조심스럽게 이불을 조금 걷었다.그리고.“……!”짧은머리칼.. 차이헌이었다.“뭐야!”놀란 해온이 뒤로 물러나다 침대 헤드에 등을 부딪쳤다.“아!”그 소리에 이헌도 눈을 떴다.잠이 덜 깬 듯 미간을 찌푸리며 상체를 천천히 일으켰다.헝클어진 머리.구겨진 티셔츠.평소 학교에서 보던 무표정한 얼굴보다 훨씬 흐트러져 있었다.해온은 그런 이헌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갑자기 제 옷부터 확인했다.어젯밤 입고 나갔던 옷 그대로였다.가디건만 벗겨져 침대 옆 의자에 걸려 있었다.그제야 조금 안심이 됐다.“내가 왜 …….”말을 끝내기도 전이었다.“욱.”갑자기 속이 뒤집혔다.해온이 입을 틀어막았다.“잠깐.”이헌의 얼굴이 바로 굳었다.해온이 침대에서 내려
Last Updated: 2026-09-27
Chapter: 기억하고 있었네?하이볼을 두 잔째 비우고 있을 즈음이었다.“어, 류세라?”익숙한 목소리에 세라의 표정이 대번에 굳었다.“아…….”아까까지만 해도 팝콘을 집어 먹으며 기분 좋게 웃고 있던 얼굴이 순식간에 썩었다.해온도 고개를 돌렸다.“누군가 했더니.”권태겸이었다.그리고 그 뒤에는 차이헌이 서 있었다.해온의 손이 멈췄다.학교가 아닌 곳에서 보니까 느낌이 조금 달랐다.태겸은 검은 라이더 재킷을 걸친 채 여전히 사람 좋은 얼굴로 웃고 있었고, 이헌은 그 뒤에 무심하게 서 있었다.얼굴에 남아 있던 상처는 며칠 전보다 많이 옅어져 있었다.하지만 손에는 아직 붕대가 감겨 있었다.해온이 감아줬던 자리였다.“여기서 또 보네?”태겸이 아무렇지 않게 다가왔다.세라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가늘게 떴다.“또 뭐.”“또 뭐라니. 아는 사람 만나서 인사도 못 하냐?”“못 해.”“여전히 까칠하네.”“꺼져.”태겸은 그런 세라의 반응이 익숙하다는 듯 웃었다.그러다 시선을 옆으로 옮겼다.해온과 눈이 마주쳤다.“전학생이라며? 전학생도 안녕.”해온이 눈썹을 살짝 올렸다.태겸이 씩 웃었다.“학교에서는 제대로 인사도 못 했잖아.”“……안녕.”짧은 대답.그걸 들은 세라가 해온 쪽을 돌아봤다.“굳이 인사까지 해줄 필요 없어.”태겸이 황당한 듯 웃었다.“내가 뭐 전염병이냐?”“비슷하지.”“너 아직도 화났냐?”세라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내가 왜 너한테 화나?”“그럼 왜 볼 때마다 찢어 죽일 것처럼 쳐다봐.”“네가 싫으니까.”“와. 상처받네.”“안 받아 보이거든.”둘이 투닥거리는 동안에도 이헌은 한마디가 없었다.테이블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이쪽을 바라볼 뿐이었다.해온은 괜히 신경이 쓰였다.알아본 건가?학교 옥상에서도 눈이 마주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래서 정말 기억하지 못하는 줄 알았다.어젯밤 상태를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다고 여겼고.세라는 태겸 뒤쪽에 서 있는 이헌을 턱짓으로 가리켰다.“너도 니친구 데리고
Last Updated: 2026-09-27
Chapter: 오래된 불 꺼지지 않은 말들“불편하진 않아?”카일은 조심스럽게 물었다.리아는 한참을 뜸 들인 뒤, 고개를 아주 조금 끄덕였다.노쇠한 난로에 불씨가 피어오르며 방 안에 따뜻한 공기가 조금씩 감돌고 있었다.짧은 침묵.불꽃이 작게 튀는 소리.그리고 그것을 응시하는 두 사람.그 침묵은 마치 어떤 감정을 깨뜨리지 않기 위한 보호막처럼,불안정하면서도 애써 유지되는 조용함이었다.엘은 이불 속에서 조용히 자고 있었다.머리를 리아의 무릎에 기대어 잔잔히 숨 쉬고 있는 아이.그 모습이 평화로워서일까.리아는 이번만큼은 단 한 번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그녀는 아이의 머리칼을 매만지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정말… 여기 있었구나.”카일은 작게 웃었다.“나야말로.너무 늦게 알았지.네가 살아 있었다는 것조차.”그의 말에 리아는 말없이 시선을 내렸다.살아 있었다.그 단어는 늘, 숨 죽여 살아가던 그녀에게무겁고 차가운 진실로 다가왔다.“그날… 기억나?”리아의 목소리는 낮았고,불빛이 흔들릴 만큼 작았다.카일의 시선이 불꽃에서 그녀로 천천히 옮겨졌다.“…너무 생생하게.”그녀가 마지막으로 황궁을 빠져나가던 날.모두가 그녀를 외면했을 때,그저 말없이 복도 끝에 서서,한 장의 봉투와 열쇠를 건네던 사람.그 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그는그 뒤로도 줄곧 그녀의 안부를 그리워하며이 폐허에 머물러 있었다.“난 그날 이후로, 누군가 다시 돌아올 줄 알았어.너일 줄은… 몰랐지만.”카일은 손에 쥔 찻잔을 놓았다.그 작은 소리마저 방 안에 울렸다.“저 아이가…”카일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내 아이야.”리아는 그의 말을 막았다.하지만 말투엔 어떤 변명도 없었다.“황제의 피를 가졌고,그걸로 목숨을 위협받는 아이.…그 이상도 이하도 아냐.”카일은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러나 눈동자는 흔들렸다.그녀가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아왔을지,짐작조차 할 수 없는 시간들이그 말 몇 마디 속에 스며 있었다.“지킬 수 있을까.”리아가, 아니라 그녀
Last Updated: 2026-09-27
Chapter: 다시 길위에서밤은 깊어졌다.숲 아래 작은 오두막엔 이제 더 이상 불빛이 남아있지 않았다.리아는 아이의 손을 꼭 쥔 채, 조심스럽게 문을 나섰다.달빛이 희미하게 땅을 비추고 있었다.그 빛 아래, 리아의 그림자가 조용히 흔들렸다.걸음을 내딛는 발끝에, 마른 낙엽이 바삭 소리를 냈다.그 사소한 소음마저 그녀는 신경을 곤두세워 삼켰다.아이 엘은 그녀의 등 뒤에 조용히 업혀 있었다.고요한 숨결. 따스한 체온.그것은 리아에게 있어, 세상 모든 소리보다 뚜렷한 실감이었다.그녀는 숲 깊은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이미 머릿속엔 수십 번 되뇌었던 루트.황궁에서 얻은 오래된 지도를 수없이 복기하며 기억해낸 ‘그 길’이었다.바위를 돌아, 낙엽 아래 덮인 작은 징검다리.그리고 한 번도 사용한 적 없는 지하 경로의 입구.모든 것은 리아가 이 날을 위해 준비해온 결과였다.‘지금부터는, 누구도 믿지 않는다.’그녀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다.이제부터는 도피가 아닌 ‘이동’이었다.단순히 쫓기지 않기 위함이 아니라,아이와 살아남기 위한 ‘주체적인 선택’이었다.반면, 황궁.에레본은 단정하게 정장을 갈아입고 있었다.황제가 새벽에 궁을 나서는 일은 드물었다.그것도, 호위병조차 없이 단독으로 움직이는 경우는 더더욱.카시안이 조심스레 물었다.“폐하, 정말 직접 나가시겠습니까?”“그래야겠다.”그의 대답은 간결했다.하지만 목소리는 낮고 무거웠다.“그 아이의 눈을, 내가 직접 확인해야 하니.”황제는 말을 타고, 어두운 궁의 뒷문을 빠져나갔다.달빛이 검은 망토 자락을 스쳤고,그의 붉은 눈동자는 밤 속에서 고요히 빛났다.그는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감정에 휩싸여 있었다.3년 전.그녀를 놓고도, 찾지 않았던 이유.정확히는그녀를 떠올리는 일이 두려웠던 것이다.그녀의 존재는 언제나 그에게 ‘사소하지 않은’ 감정이었다.처음으로 잊고 싶지 않았던 여자.하지만 동시에… 기억하면 할수록, 더 많은 후회를 불러오는 사람이었다.말굽 소리가 어둠 속을 내달렸다.황제는
Last Updated: 2026-09-27
Chapter: 침묵의 밤, 가슴속 결의문이 천천히 닫히고,그 조용한 ‘찰칵’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을 때리아는 잠시 눈을 감았다.숨을 내쉬었다.천천히, 그리고 아주 조용히.하지만 그 숨은 목 끝에서 막힌 것처럼,쉽게 빠져나오지 않았다.세르반.그는 돌아가지 않았다.문 너머 어딘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그의 존재는 마치 밤공기처럼 느껴졌다.눈에 보이지 않아도, 온몸으로 체감되는.리아는 등 뒤 벽에 기대어 주저앉았다.단검을 쥔 손이 떨렸다.쥐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녀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하얀 손등엔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고,그 안에서 심장이 미세하게 요동치고 있었다.“…엘.”리아는 고개를 돌려 침상 쪽을 바라보았다.작은 이불 속에 잠든 아이.깊은 숨결.세상 물정 모른 채 평온히 잠든 얼굴.그 얼굴을 보는 순간,그녀의 눈동자에 다시금 파문이 일었다.그동안 숨어 살며 수없이 준비했던 도망 계획들.만약 들키게 된다면 어떻게 할지,만약 쫓기게 된다면 어디로 갈지.하지만… 이상했다.막상 그 상황이 눈앞에 닥치고 나니,몸이 움직이지 않았다.도망치지 않았다.움직이지 않았다.대신, 문을 닫고 아이를 바라보았다.그 이유가 뭘까.리아는 천천히, 스스로에게 물었다.‘왜… 나는 아직 이 안에 있는 거지?’답은 간단했다.단순히 ‘두려워서’가 아니었다.지금 이 상황에서 도망치는 건그녀에겐 또 다른 버림이었다.한 번은 자신이 버림받았다.황제로부터, 황궁으로부터, 황제의 아이를 품은 여인으로서.그리고 이번엔,자신이 아이를 다시 ‘도망’이라는 이름으로 외롭게 만든다면,그건 리아 스스로 또 한 번 ‘이 아이를 버리는 것’이었다.그 생각이 목을 죄었다.단검보다 더 날카롭게.리아는 천천히 일어섰다.어깨 위에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조용히 책상 앞에 앉았다.책상 위엔 오래된 장부 하나와지도, 봉투, 그리고 글이 적힌 작은 메모들이 놓여 있었다.그녀는 그 중에서 가장 오래된 봉투를 꺼냈다
Last Updated: 2026-09-27
Chapter: 그날 밤, 황제의 눈동자달빛이 유난히 밝던 밤이었다.리아는 손에 든 쟁반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그녀는 황궁 내 작은 도서각에서 일하는 궁녀였고,그날 밤은 그저 평범한 심부름 중 하나였다.“폐하께 술을 올리라 하셨습니다.”그녀는 머리를 숙인 채 입을 열었다.방 안에선 말없이 불이 타오르고 있었고,가장 깊숙한 의자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에레본. 제국의 황제.그리고, 냉혈한이라 불리던 존재.그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말했다.“…목소리가 마음에 드는군. 이름이 뭐지?”리아는 당황한 듯 고개를 들었다.황제는 천천히, 심지어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그렇게 긴장하지 마라. 오늘은… 혼자이고 싶지 않을 뿐이다.”그 말은, 리아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그저… 술을 따르러 갔을 뿐이었어요.”리아는 조용히 중얼이며, 어깨 위에서 자고 있는 엘을 내려다봤다.아이의 숨결은 고르고 평온했다.하지만 리아의 눈동자는 고요한 밤과는 달리, 흔들리고 있었다.그날 밤 이후, 그녀는 황제의 침실로 불려갔다.그리고 단 한 번, 단 하나의 밤.그날이 지나자, 그녀는 황제의 여인이자, 반역자의 죄인이 되었다.“소문은 다 들었어. 리아는 황제를 홀렸다고.”“아니, 리아가 폐하께 반역을 꾀했다던데?”궁녀들의 속삭임은 그녀를 점점 벼랑 끝으로 몰아넣었다.황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를 지키지 않았고, 변호하지도 않았다.그리고 그녀가 아이를 가졌다는 걸 알았을 때그는 조용히, 아무 감정도 없이 명령을 내렸다.『그 여자를… 궁에서 내보내라.』“그날 이후, 폐하는 날 단 한 번도 찾지 않았어요.내가 아이를 품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요.”리아는 침묵 속에서 눈을 감았다.돌이켜보면, 사랑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그저 이용당했을 뿐이라는 생각도 들었다.그러나 단 하나, 확실한 건 있었다.그날 밤 이후로 리아는 혼자가 아니었다.그녀는 아이를 품었고, 그 아이는 살아 있었다.그녀가 도망쳐야만 했던 이유이자,지금까지 살아야 했던 이유.리아는 다시 몸을 일으켰
Last Updated: 2026-09-27
Chapter: 세상에선 모르는 아이“엘, 조용히. 오늘은 목소리를 낮춰야 해.”리아는 다시 한 번 아이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하지만 붉은 눈동자의 아이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그치만, 아까 봤어요! 숲속에서 누가… 우릴 보고 있었어요!”심장이 순간 철렁 내려앉았다.리아는 곧장 아이를 품에 안고 주변을 살폈다.숲은 고요했고, 새소리조차 잦아들어 있었다.‘설마… 벌써?’그녀는 얼어붙은 채 한참을 서 있었다.작은 오두막, 숲 너머에 자리한 그들의 은신처는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공간이었다.정체불명의 시선은 결코 우연일 리 없었다.리아는 아이를 품에 안고 재빨리 집 안으로 들어갔다.벽장 안에서 낡은 검은 가방을 꺼냈다.그 안엔 가짜 신분증, 돈, 도피용 경로 지도가 들어 있었다.“엘, 이제 우리가 이 집을 떠나야 할 수도 있어.”“또요…?”작은 아이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리아는 잠시 말없이 그를 안고, 부드럽게 등을 두드렸다.“무서운 사람들한테 들키면… 엄마랑 엘, 같이 있을 수 없게 되니까.”“그럼, 도망가요. 엄마랑 같이 있을래요.”작고 여린 목소리.리아는 아이의 머리칼에 입을 맞췄다.그 순간, 눈동자 한쪽 구석에 고인 눈물을 그가 모르게 훔쳤다.반면, 황궁.에레본은 깊은 침묵 속에 보고서를 다시 펼쳐 들었다.그림 한 장.불길하게 붉은 눈동자를 가진 어린아이.그 그림 속 존재는 그의 피를 지닌 자였다.“그 아이를… 찾을 수 있는가?”황궁 정보국의 수장 ‘카시안’이 무릎을 꿇었다.“조사 중입니다. 유력한 정보가 곧 도착할 것입니다.”“정보가 아니라 아이를 데려와라.”황제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그 아이가 살아 있다면—그 여자가 살아 있다는 뜻이니까.”그날 밤.리아는 엘을 재운 후, 홀로 바깥 계단에 앉아 달을 올려다봤다.붉은 달이, 피처럼 둥글게 떠 있었다.그녀는 조용히, 혼잣말처럼 중얼였다.“에레본… 넌 날 잊었겠지.하지만, 난… 널 매일 잊고 싶었어.”눈을 감은 순간, 기억이 스며들었다.그날 밤.황제의 침실에서 그녀는 그
Last Updated: 2026-09-27
Chapter: 피와 함께 태어난 아이세찬 바람이 불어왔다.창문 틈새로 스며든 바람이 방 안의 촛불을 흔들었고, 희미한 불빛 아래 여인은 식은땀에 젖은 이마를 짚었다.배 아래에서 터질 듯한 통증이 물결처럼 밀려왔다.“부인, 이제 곧이에요! 조금만 더 힘을 주세요!”산파의 다급한 외침에도 그녀는 입을 악물 뿐이었다.바스락, 땀에 젖은 은발이 뺨에 붙었고, 이불 위로 새빨간 피가 흘러내렸다.‘안 돼. 여기서 죽을 순 없어… 이 아이까지…’그녀는 이를 악물고 몸을 움켜쥐었다.눈앞이 까마득해질 정도의 고통 속에서도 단 하나, 배 속의 아이만은 살려야 했다.그 아이는 황제의 아이였다.그리고, 지금 이 순간—황제가 가장 죽이길 바라는 존재이기도 했다.“으아아…!”피를 토하듯 울부짖은 끝에, 드디어 방 안에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붉은 천 위로, 작고 여린 생명이 태어났다.“아아… 눈이… 저 눈이…”산파가 중얼였다.아이의 두 눈은 불길한 붉은빛을 품고 있었다.아버지인 황제, 에레본과 같은 눈동자였다.그 순간, 리아는 힘없이 눈을 감았다.하지만 곧 다시 떴다.그녀는 죽을 수 없었다. 아직… 도망쳐야 했다.3일 후.밤이 깊었다.“폐하께선 아직 모르십니다. 부디 이대로 조용히 떠나십시오.”산파가 작은 꾸러미를 내밀었다.아이의 옷, 젖병, 그리고 가짜 신분증.그녀는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품에 안았다.리아는 마지막으로 황궁을 돌아봤다.3년 전, 이곳에 발을 들였을 때만 해도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었다.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그가 원한 건 단지 ‘하룻밤의 흥미’였고,그 밤 이후 그녀는 계략에 말려든 희생양이었다.‘아이를 안고 있단 걸 들키면… 나뿐 아니라 이 아이도 죽는다.’리아는 입술을 깨물며 말을 몰았다.허리에 칼을 찬 경비병들이 바람을 가르며 지나갔고, 그녀는 밤의 틈을 뚫고 황궁을 빠져나왔다.3년 후.“엄마, 저기 별이 보여요!”눈처럼 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아이가 들판 위에서 손을 흔들었다.그 눈동자엔 여전히 선명한 붉은 빛이 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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