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류 요스케의 팀에서 막내 엔지니어로 살아남는 것은.
매일 아침 단두대 위에 목을 대는 것과 같았다.
사내에서 최고 실력을 인정받는 천재 엔지니어.
하지만 그는 다정함이나 온기 따위는 없었다.
지독할 정도로 말이 없었고, 먼저 입을 여는 법이 없었다.
강철 같은 그레이 톤의 책상 뒤에 앉아.
그는 늘 ‘말하는 쪽’보다 상대방의 말을 ‘듣는 쪽’을 택했다.
검은 눈동자를 가라앉힌 채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다가.
상대가 빈틈을 보이는 찰나.
그 모든 말을 혼자 분석해 허를 찔렀다.
그는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은 얼음처럼 차가운 완벽주의 전략가였다.
거기다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날 선 카리스마.
그는 주위의 공기마저 얼려버렸다.
부하직원들은 그가 지나갈 때면 숨을 죽였고.
감히 쉽게 친해지거나 다가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하지만 유진은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첫날 그 백미러 너머로.
바보같이 첫눈에 반해 버렸지만.
솔직히 저런 남자와 가까워질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으니까.
*
쨍하게 밝은 백색 형광등 조명이 내리쬐는 화장실.
세면대 앞 유진이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때 거칠게 문이 열리며 총무과 여직원들의 날것 그대로의 뒷담화가 흘러들었다.
“나 어제 마리나베이에서 제품 개발 류 팀장님이랑 약혼자 봤는데……”
순간 옆에 서 있던 유진의 손가락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어? 진짜요? 소문처럼 그렇게 미인이에요?”
“네. 싱가포르항공 승무원이라니까. 근데 여자분이 류 팀장님 몸에 착 감겨 있던데요? 완전 뜨겁게!”
“둘이 오래 만나지 않았어요? 근데도 그렇게 뜨겁다고요? 듣기로는 영국 유학 시절부터 만났다던데, 도대체 몇 년을 사귄 거야?”
“내가 알기로는 7년을 만났다고 들었어요.”
7년. 그 무거운 숫자가 유진의 가슴에 걸렸다.
“7년이요? 하기사 저런 짐승 같은 남자 밑에서 굴렀으면, 다른 남자가 눈에 들어오겠어요?”
“암튼……. 응큼해서는.”
“뭘 또 아닌척은……ㅎㅎㅎ. 맨 날 개발팀 지나가면서 침 흘리는 거 다 아는데.”
“진짜 저 거대한 몸에 익스트림 스포츠 매니아잖아요. 류 팀장님 허벅지 봤어요? 밤에…… 하아, 진짜 잘하긴 할 거야.”
“지난번에 누가 류 팀장님 서핑하는 거 발리에서 봤다는데. 진짜 몸에 근육이…… 장난 아니라던데. 그리고 수영복 위로 드러나는 거기 존재감이……!”
“아! 류 팀장님 약혼녀 진짜 부럽네요. 저런 남자랑 매일 살면 어떤 느낌일까. 내 남편은 매일 소파에서 퍼 자서 배만 뚱뚱하게 나오고 새 속옷 산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는데……”
킥킥거리는 음란한 대화가 유진의 고막을 자극했다.
지독하게 섹시하고 위험한 남자.
사내 여직원들의 성적 로망의 주인공.
회사 여직원들의 음담패설의 주인공은 언제나 그 남자였다.
그리고 첫눈에 빠져버렸던 그 한심하고 말도 안되는 자신의 감정도.
지금 저 여직원들이 느끼는 것과 하등 다를 바 없는 단순한 ‘성적 끌림’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아무 일 없이 한 달이 흘렀다.
*
남자들만 가득찬 개발부서는 들어서는 순간부터 수컷의 냄새로 진동을 했다.
유진은 이 삭막한 회색빛 공간 속에서 유일한 여자 엔지니어였다.
하지만 주눅 들지 않았다.
이미 공대에서 그들을 뼈도 못 추리게 발라먹고 여기까지 살아남은 그녀였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무엇이든 증명해 보일 자신감이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갈구하던 기회가 유진의 손아귀에 굴러떨어졌다.
한국 유명 자동차 회사의 GPS 모뎀 부품을 전담 제작해야 하는 대형 신규 프로젝트.
아직 실전 경험은 턱없이 부족한 막내였지만.
‘한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한다’는 유일무이한 치트키를 구실 삼아.
유진은 당당히 엔지니어로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프로젝트의 총 책임은 류 요스케 팀장.
첫 프로젝트 미팅.
길게 뻗은 화이트 톤의 회의실 테이블.
그 테이블의 가장 끝자락에 앉은 유진은 회의록을 작성하고 있었다.
그때 유진의 노트북 오른쪽 하단에 네온 블루빛 메신저 알림이 불쑥 날아들었다.
발신인: Yosuke Ryu.
ㅡ회의록과 함께 제품 보고서와 단가표를 한국어로 작성해서 저에게 직접 확인 바랍니다. 최대한 빨리.
유진의 숨이 멈췄다.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들어.
자신과 정반대편 끝. 까마득하게 멀리 떨어진 상석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때 그의 흑색 눈동자와 하필이면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심장이 순간 덜컹거렸다.
순간 화장실에서 들었던 여직원들의 노골적인 음담패설과 그의 짐승 같은 육체가 머릿속에서 오버랩되며 온몸의 혈관이 화끈거렸다.
비명처럼 밀려오는 부끄러움.
그녀는 황급히 노트북 커버 뒤로 얼굴을 푹 파묻었다.
순간 그녀의 그 작은 움직임에.
저 멀리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던.
요스케의 미간의 골이 은밀하게 구겨졌다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유진은 빠르게 노트북 화면 우측 하단의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5시. 퇴근시간이 겨우 30분 남았다.
오늘은 빼도박도 못하고 야근 각이다.
유진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왼팔 손목에 느슨하게 걸려 있던 검은색 머리끈을 빼내 들었다.
그리고 두 손으로 흩어진 머리칼을 쓸어 올려 동그랗게 말아 하나로 질끈 동여맸다.
스윽ㅡ.
머리카락이 들어 올려지는 그 찰나의 순간.
회의실의 백색 조명 아래로.
유진의 새하얗고 투명한 목덜미가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한 번도 햇빛을 보지 못한 것처럼 가냘프고 여린 순백의 살결.
쿵ㅡ.
멀리 떨어져 있던 요스케의 시선이.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 슬쩍 하지만 지독하게 꽂혔다.
그와 동시에 요스케의 단단한 가슴이 덜컥 무겁게 울렸다.
[넌…… 역시 날 못 알아보는 구나.]
요스케는 셔츠 소매 너머로 드러난 자신의 오른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한달 전.
세나이 국제공항의 자동문이 열리고.
자신의 몸집만 한 거대한 캐리어를 끌고 나오던 작고 가녀린 여자를.
그는 단번에 알아봤다.
산다칸 아일랜드의 풀문 파티 (Full Moon Party).
그리고 정글.
요스케는 손가락 끝으로 자신의 오른손바닥 한가운데에 깊게 패인 채 남아있는 은빛 흉터를 가만히 그리고 아주 느리게 쓸어내렸다.
살이 찢겨 나가던 그날의 지독했던 그 햇살과.
푸른 밤바다의 은빛 파도로 뒤덮였던 숨막히던 떨림이.
여전히 손끝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여기까지 유진과 요스케의 슬픈 운명의 여정을 따라와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두 사람이 여전히 횡단보도를 사이에 두고 반대편 세계에 있습니다.독자 여러분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실지 궁금하네요.이 소설의 결말은 독자 여러분이 스스로 만드시기를 바랍니다.혹시라도 기회가 되신다면, 리뷰에 독자 여러분의 결말을 올려 주셔도 재미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제 결말은…… 글쎄요.사실 이 작품을 두 사람이 재회해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더 이어 갈수도 있으나, 그렇게 하지 않고 이대로 두기로 했습니다.사실 이 작품은 제 개인 연애 이야기여서 이미 저는 저만의 결말에 도달했습니다.혹시나 작품의 분위기 때문에 걱정하실까 사족을 붙이자면.참고로 저의 결혼생활은 오늘도 해피엔딩입니다😊.그리고 유진과 요스케의 결말 이외에도.선호와 요스케 중 독자 여러분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셨을 지도 궁금합니다.여러분도 이 작품 보시면서 옛 사랑을 한자락 기억해 보셨기를 기대합니다.그리고 유진과 요스케는 여전히 다른 세계관에서 열심히 사랑하고 있으니, 저는 다른 작품에서 뵙겠습니다.그동안 제 작품을 즐겨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절대 올 것 같지 않았다.그 영원과도 같았던 12년의 기나긴 유예가 마침내 흘러갔다.바로 그 약속의 날, 디데이(D-day).하지만 서울의 한복판에 서 있는 유진의 심장 속 기대치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정확히 1 대 99.기적을 바라는 희망이 고작 1% 라면.그가 오지 않을 것이라는 냉혹한 확신이 99% 였다.그가 정말로 자신을 찾을 생각이었다면.이혼했던 4년 전, 그때 벌써 서울로 날아왔어야 마땅했다.하지만 그는 오지 않았다.완벽한 자유의 몸이 되고서도 차갑게 침묵했다.그리고 다시 잔인한 4년의 세월이 무심히 흘러 오늘에 이르렀다.그런데 이제 와서 올까.아니, 결코 안 올 것이다.유진은 제 손끝으로 차가운 책상 모서리를 쓸어내리며 냉정하게 결론을 내렸다.솔직히 말해서, 그는 이제 자신의 연락처조차 모를 터였다.물론 유진 역시 그의 연락처를 알지 못했다.이미 12년 전에 그를 흔적도 없이 싹 다 지웠다.그러지 않으면 자신의 의지가 한순간에 무너져 내려 그를 다시 찾거나.혹은 밤낮으로 액정만 들여다보며 그의 연락만을 기다리다 스스로 말라 죽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사실 효율성만 따진다면.유진이 먼저 수소문해 그에게 먼저 연락을 취할 수도 있다.그랬다면 지독한 감정 소비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그리고 단 한 번에 명확한 결론이 났을 것이다.그런데도 유진은 여전히 이 남자 앞에서는 미련하리만치 지독한 자존심을 부리고 싶었다.22년 전.산다칸의 첫날밤부터 그에게 자신의 영혼을 저당 잡혔을지언정.마지막 남은 패마저 그에게 다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그것이 얼마나 비효율적이고 멍청한 일임을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원래부터 류 요스케라는 남자는 어떤 이성적 논리도 통하지 않는 세계였으니까.게다가 이제는 자신이 여전히 그 사내를 원하고 있는지조차 스스로도 잘 분간이 가지 않았다.과연 그 남자를 온 영혼을 바쳐 기다려왔던가.그 명제조차 흐릿한 안개처럼 불분명했다.여러 남자의 체온을 소모품처럼 탐
12월 31일의 도쿄.잿빛 하늘 위로 차가운 겨울바람이 빌딩 숲을 매섭게 할퀴고 지나가는 밤이었다.그의 거대하고 견고한 집무실 창가에 선 요스케의 나이는 마흔아홉.사내의 거대했던 40대의 마지막 단 한 해만이 서글프게 남겨졌다.그리고 이제 정확히 1년 남았다.산다칸의 뜨거운 보름달 아래에서.유진이 자신의 목줄을 죄며 안겨주었던 그 잔인한 이별의 유예.동시에 목숨보다 소중하게 지킨 자신의 아들, 이치다가 마침내 성년(18세)이 되는 날.요스케는 케이크의 촛불을 끄는 아들의 멀대같이 큰 어깨를 손으로 짚으며 나직하게 운을 뗐다.“아들, 생일 축하한다.”이제는 어엿한 청년의 골격을 갖춘 이치다가 미소를 지으며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올해는 선물을 돈으로 주시죠.”요스케는 기가 찬다는 듯 빳빳한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며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뭐? 돈 맡겨놨냐? 아주 당당하다.”“제 여친과의 데이트 비용이 상당히 부족합니다. 이대로 가다간, 저 차인다고요. 부탁 드리겠습니다.”아들의 너스레에 요스케의 굵은 입술 가장자리에 부드러운 호선이 그려졌다.그는 지갑을 열어 두툼한 지폐 뭉치를 아이의 손바닥 위에 툭 얹어주었다.“그 친구랑은 벌써 2년째인데, 아직 널 봐주고 있는게 거의 기적이라고 본다. 옛다. 너 때문이 아니라 네 여친 예뻐서 돈으로 준다.”“감사합니다!”순간 아이가 진지하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아버지를 똑바로 응시했다.“근데...... 아버지는 왜 그 분 안 찾으십니까?”요스케는 대답 대신 가만히 창밖의 도쿄 야경을 바라보며 깊은 미소만을 지을 뿐이었다. 이치다가 답답하다는 듯 다그쳤다.“혹시 벌써 포기하신 겁니까?”“내가 포기한 것 같아 보여?”그의 눈빛이 번뜩였다.그의 뼈 마디가 사정없이 뻐근해졌다.이치다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혀. 근데 뭘 기다리시는 거예요?”요스케는 자신의 왼손 약지의 빛바랜 반지를 손가락으로 어루만졌다.“약속을 했으니까. 네가 성년이 될 때까지. 그 전에 내가 찾아가면,
마흔한 살.새해 첫날의 태양은 잔인하리만치 투명한 금빛을 띠고 있었지만.유진의 세계는 여전히 흐릿한 잿빛 안개 속에 갇혀 있었다.아침부터 유진은 거실 소파에 꼼짝없이 붙들린 채.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엄마의 잔소리에 모질게 시달리는 중이었다.따스한 떡국 김이 피어오르는 식탁 너머로 엄마의 날카로운 시선이 유진의 하얀 얼굴에 꽂혔다.“넌...... 아직도 결혼할 생각은 없는 거야?”유진은 한 치의 동요도 없는 메마른 눈동자로 물잔을 들어 올리며 나직하게 대꾸했다.“몇 번을 말해. 나 일이랑 결혼했다니까.”유진의 심드렁한 대답.엄마는 땅이 꺼질 듯 묵직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수년째, 늙어가는 부모의 속은 타들어 갈 뿐이었다.“너...... 벌써 40대야. 진짜로 생각 없는 거야?”“응. 지금이 좋아.”단호하다 못해 서늘함이 감도는 유진의 음성.하지만 엄마는 미련을 버리지 못한 듯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이름을 조심스럽게 꺼내 들었다.“선호는......... 잘 지내니?”선호. 유진은 차갑게 선을 그었다.“글쎄. 남의 남자 된 사람이랑 이 나이 먹고도 계속 연락하면, 그거 죄 받는 짓이야.”“그때......... 선호와는 왜 깨져서......”엄마의 집요한 추궁.유진은 가슴 밑바닥에서 고여 있던 씁쓸한 자조가 밖으로 흘러나왔다.“내가 얘기했잖아. 내가 결혼할 팔자는 아닌가 보다고...... 결혼 두번 엎어졌음... 이젠 포기하는 게 맞아. 그러니까 욕심 그만 내세요. 엄마!”유진이 방어벽을 치자, 엄마는 답답함에 가슴을 쾅쾅 쳤다.과거의 남자들 전부를 끄집어 낼 생각이었다.그리고 기어이 류 요스케라는 유령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비행기 안은 지독하리만치 고요했다.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는 길. 비즈니스석의 아늑한 노란색 조명 아래. 유진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몸의 곡선을 그대로 드러내는 니트 롱 드레스를 입고 좌석 깊숙이 앉아 협상 전 제품 기획서를 체크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웰컴 드링크를 체크하며 비즈니스 클래스 캐빈을 쓱 훑어보던 사무장 제복을 입은 한 여자와 유진의 시선이 공중에서 정면으로 충돌했다. 그녀였다. 그 남자의 전처 그리고 그의 아들의 생모. 유진은 단 한 순간도 눈길을 피하지 않은 채, 서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아래위로 천천히 훑어내렸다. 마흔여섯의 그녀. 세월을 제대로 맞은 여자. 예전 20대의 화려하고 글래머러스했던 그녀의 몸매는 노화의 궤적을 따라 딱 동남아 시아 아줌마 특유의 허리가 짧고 동글동글한 체형으로 무너져 있었다. 짙은 화장 틈새로 비치는 피부의 탄력 역시 나이가 들어 보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순간, 유진의 아랫입술 사이로 픽 하는 유치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아...... 이렇게 돈 값을 하는구나. 아무리 봐도 나보다 20살 이상은 많아 보이네.] 지난 수년간 주말마다 피부과와 몸매 관리에 쏟아부었던 보람이 확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유진은 피부과 도움으로 잡티 하나 없이 투명한 자신의 얼굴과 필라테스와 발레로 빳빳하게 관리된 자신의 늘씬한 몸매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확실히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동안의 가치는 빛을 발했다. 비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저녁 식사 서비스가 완전히 끝난 늦은 밤. 기내의 조명이 취침 모드로 어둡게 가라앉았을 때. 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캐빈 뒤쪽에 위치한 화장실로 향했다. 좁고 서늘한 기내 복도. 메탈릭한 도어 앞의 희미한 주홍빛 조명 아래에서. 유진은 결국 그녀와 마주치고 말았다. 유진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그대로 그녀를 유령처럼 무시했다. 바로 그 찰나. 차가운 공기를 찢고 여자의 입술 사이
동종 업계의 좁은 바닥에 몸을 담고 있다 보니.요스케는 의도하지 않아도 아주 가끔 그녀의 소식을 전해 듣곤 했다.서유진이라는 이름 석 자가 스치듯 들릴 때마다.그의 거대하고 단단한 심장은 예외 없이 멈춰 서서 피를 흘렸다.그러던 어느 날.도쿄 본사 HQ 최고층에 위치한 요스케의 사장실로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일본 본사로 정기 교육을 받으러 온 예전 부하직원이자, 과거 유진과 동료였던 왓슨.“류 사쵸 (사장님). 여전히 멋있으십니다.”왓슨은 예의 그 변죽 좋고 싹싹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향해 변함없이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어댔다.사장의 자리에 올라 한층 더 냉혹하고 단단한 아우라를 뿜어내는 옛 상사.왓슨은 특유의 처세술로 집무실의 무거운 정적을 가볍게 깨부수었다.“오랜만이네. 자네는 이번에 싱가폴 아시아 본부에서 부장으로 승진했던데. 축하해.”“다 훌륭한 사수 덕이십니다. 류 사쵸가 제 사수여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요스케는 손에 쥐고 있던 커피잔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웃었다.“나 밑에 있을 때는 힘들다고 불평했던 걸로 기억하는데.”그는 농담을 건네듯 왓슨을 놀렸다.“솔직히 사쵸가 편한 스타일은 아니었죠. 그래도 사쵸 밑에 있던 직원들은 다 잘 됐습니다. 자부심 가지셔도 됩니다.”“그래?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린데…….”“아…… 혹시 기억하세요? 서유진? 우리 개발실 유일한 여자 엔지니어. 왜 예전에 샤쵸가 공장 사고때 구해줬던……”순간 가슴속 밑바닥에서부터 사정없이 솟구치는 갈증을 감추기 위해.그는 커피를 급하게 들이켰다.“그 친구는…… 잘 지내나?”그리고 아주 넌지시, 마치 지나가는 바람의 안부를 묻듯 나직한 저음으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