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시간이 지나면서 솔을 짓누르던 통증은 빠르게 줄어들었다.
대신 준경의 호흡은 처음보다 조금 무거워져 있었다. 관자놀이가 욱신거렸고, 팔은 안쪽부터 저린 듯 무거웠다. 솔은 그것을 느끼면서도 가만히 있었다. 자신이 편해지는 만큼, 이 남자가 그 대가를 받고 있었다. 이상한 감각이었다. 지금까지의 계약에서는 거의 경험하지 못했던 방식이었다. 준경은 솔의 긴장이 조금씩 풀리는 것을 느꼈다. 숨이 서서히 고르게 변했다. 준경의 손가락이 뒷목을 더 세게 눌렀다. 솔의 허리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문양의 열이 빠르게 내려가고 있었다. 몸 안을 누르던 빚도 거의 사라졌다. 입술이 떨어질 듯 말 듯 다시 깊어졌다. 준경의 엄지가 솔의 턱선을 따라 움직이며 각도를 바꿨다. 솔의 눈이 살짝 감겼다. 무릎 위에 펼쳐진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얼마 뒤, 솔은 알았다. 상환은 끝났다. 더 이상 몸 안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없었다. 준경에게 넘어가는 반동도 멈췄다. 하지만 그가 받은 통증까지 곧바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준경의 손끝에는 아직 미세하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입술도, 뒷목을 잡은 손도 떨어지지 않았다. 솔은 그 사실을 느꼈다. 상환은 끝났는데. 준경은 아직 그녀를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끝났습니다.” 입술 사이로 솔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준경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제야 입술이 떨어졌다. 하지만 뒷목을 잡고 있던 손은 바로 풀리지 않았다. 한 박자. 솔은 가만히 기다렸다. 준경의 손가락이 천천히 힘을 늦췄다. 그 순간이었다. 쿵. 솔의 오른쪽 눈 아래에서 강한 박동이 터졌다. “…….” 솔이 숨을 삼켰다. 상환은 끝났다. 몸 안을 누르던 빚도 없었다. 그런데 문양이 다시 뜨거워지고 있었다. 붉은 빛이 피부 아래에서 번졌다. 동시에 준경의 표정이 굳었다. 그가 오른손을 내려다봤다. 소매 아래에서 검은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준경은 소매를 걷었다. 손등을 뒤덮은 검은 저주 표식이 살아 있는 것처럼 뛰었다. 쿵. 솔의 문양이 다시 같은 박자로 울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공작님.” 준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의 손등과 솔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 검은 표식 가장자리에서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아주 가느다란 선 하나. 평생 한 번도 달라진 적 없는 검은 흔적이 서서히 흐려졌다. 준경의 눈이 좁아졌다. 솔도 그것을 봤다. “저주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준경이 다시 솔의 턱을 잡았다. 솔의 얼굴이 들렸다. 이번에는 상환이 아니었다. “가만있어.” 솔은 멈췄다. 준경이 가까이에서 그녀의 문양을 살폈다. 붉은 빛은 아직 남아 있었다. 빚이 남았을 때의 열과는 달랐다. 뜨거운데 아프지 않았다. 준경의 엄지가 눈 아래 가까이를 스쳤다. “원래 이런가.” “아닙니다.” “확실해?” “예.” 솔의 대답은 빨랐다. “상환은 끝났습니다.” 준경의 시선이 다시 자기 손등으로 떨어졌다. 검은 선은 아직 흐린 채였다. 우연이라 하기에는 너무 분명했다. 예언을 할 때도 아니었다. 대가가 오가는 동안도 아니었다. 상환이 끝난 뒤였다. 준경이 솔에게서 손을 뗐다. 이번에는 완전히. 접촉이 끊기자 붉은 문양의 빛이 천천히 약해졌다. 준경의 손등도 마찬가지였다. 흐려졌던 검은 선이 아주 느리게 본래의 색을 되찾기 시작했다. 준경은 한동안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다시 솔을 봤다. 조금 전까지와는 다른 눈이었다. 예언자를 보는 눈이 아니었다. 처음으로 변한 자신의 저주를 본 뒤, 그 원인을 바라보는 눈이었다. 솔은 그 시선을 받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준경이 낮게 물었다. “접촉을 끊으니까 돌아오는군.” 솔은 문양의 남은 열을 확인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준경의 입가가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그에게 남은 시간은 여섯 해였다. 그리고 방금. 누구도 바꾸지 못했던 저주가 처음으로 변했다. 솔에게 닿아 있는 동안. 준경은 천천히 소매를 내렸다. 팔 안쪽에는 아직 반동의 잔통이 남아 있었다. 그는 한 번 손을 쥐었다 폈다. 손가락이 평소보다 조금 둔했다. 그뿐이었다. “좋아.” 짧은 한마디였다. 그런데 솔은 이상하게 그 말이 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솔은 바닥에 놓인 은빛 칼을 집으려 했다. “두고 가.” 손이 멈췄다. 솔이 준경을 올려다봤다. “제 물건입니다.” “알아.” 준경은 칼을 내려다봤다. “그래도 두고 가.” 이유를 설명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솔은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손을 거뒀다. “예.” 준경의 시선이 다시 그녀에게 돌아왔다. 입술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조금 전 자신이 남긴 흔적이었다. 시선이 그곳에 머문 시간이 필요 이상으로 길었다. 준경이 물었다. “접촉으로 나눈 적은.” “있습니다.” 그의 눈빛이 미세하게 달라졌다. “자주?” “아닙니다.” “왜.” 솔은 잠시 생각했다. “대부분은 반동까지 나눠 받을 이유가 없다고 여기니까요” “고통이 동반되니까?“ “예.” 솔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준경의 시선이 낮아졌다. “그래서 피를 썼나.” “그게 가장 편했습니다.” 편하다. 팔을 긋는 일이. 준경의 눈이 방금 드러났던 흉터 쪽으로 향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은 말에 가까웠다. “앞으로 피부터 선택하지마.“ 솔이 눈을 들었다. “하지만 대가는 바로 치러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럼 기다려.” 짧게 잘린 말이었다. 솔은 입을 다물었다. 준경이 한 걸음 다가섰다. 조금 전보다 거리는 멀었는데도 솔의 몸이 먼저 긴장했다. 그걸 알아챈 듯 준경의 시선이 천천히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혼자 정하지 마.” “무엇을요?” “무슨 대가를 쓸지.” 준경이 말했다. “어디까지 필요한지도.” 솔은 대답하지 못했다. 계약서에는 분명 그런 권한이 있었다. 계약자는 필요할 경우 대가를 정할 수 있었다. 그러니 이상한 명령은 아니었다. 그런데 조금 전의 접촉을 떠올리는 순간, 그 문장이 전과는 다르게 들렸다. 준경이 물었다. “알겠나.” 솔은 결국 고개를 숙였다. “예.” 준경은 그 대답을 듣고서야 물러났다. 바닥에는 은빛 칼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솔은 그것을 한 번 바라봤다. 그리고 빈손으로 석실을 나섰다. 철문이 닫혔다. 솔의 발소리가 계단 위로 멀어졌다. 준경은 혼자 석실에 남았다. 오른손을 내려다봤다. 검은 표식은 이미 원래대로 돌아오고 있었다. 조금 전 흐려졌던 흔적조차 찾기 어려웠다. 팔 안쪽에는 아직 둔한 통증이 남아 있었다. 관자놀이도 욱신거렸다. 준경은 다시한번 손을 쥐었다 폈다. 착각은 아니었다. 통증도. 저주의 변화도. 스물넷이 될 때까지 한 번도 변한 적 없는 저주였다. 성직자도. 마법사도. 이전의 예언자들도. 누구도 자신의 몸에 있는 검은 선 하나 흐리게 만들지 못했다. 그런데 솔에게 닿자 변했다. 준경의 시선이 바닥으로 내려갔다. 솔이 두고 간 은빛 칼이 있었다. 그는 몸을 숙여 그것을 집어 들었다. 가느다란 칼날. 몇 번이나 저걸 자기 팔에 댔을까. 준경은 잠시 바라보다 칼을 주머니에 넣었다. 석실을 나서자 밖에서 기다리던 집사가 고개를 숙였다. “끝나셨습니까, 공작님.” “그래.” 준경은 그대로 지나치다가 멈췄다. “그 예언자.” “솔 말씀이십니까?” “방이 어디지.” “동관 삼 층에 준비해 두었습니다.” 준경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멀었다. 굳이 그렇게 생각할 이유는 없었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옮겨.” 집사가 고개를 들었다. “어디로 준비할까요?” 준경은 잠시도 고민하지 않았다. “내 침실 맞은편.” 집사의 표정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그곳은 손님에게 내주는 방이 아니었다. 가족조차 좀처럼 머물지 않는 공작의 사적인 구역이었다. 하지만 준경은 설명하지 않았다. 필요했다. 저주의 변화를 확인하려면 가까이 두는 편이 효율적이었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게 생각했다. “오늘 안에.” “……알겠습니다.” 준경은 다시 걸었다. 몇 걸음 뒤, 주머니 속 은빛 칼이 허벅지에 가볍게 부딪혔다. 팔 안쪽에서는 아직 솔에게서 넘어온 통증이 희미하게 뛰고 있었다. 그는 그것도, 칼도, 돌려줄 생각이 없었다. 적어도 당분간은. 그리고 오늘 처음 만난 예언자를, 자신에게 가장 가까운 방으로 옮길 생각이었다. 여섯 해를 벌기 위해 데려온 여자였다. 그런데 계약 첫날부터, 준경은 이미 필요한 것보다 조금 더 많은 것을 그녀에게서 원하고 있었다.다음 날 오전, 신탁청 실무관이 저택에 왔다. 준경은 집무실에서 그를 맞았다. 솔도 옆에 있었다. 실무관은 인사를 마치자마자 용건을 꺼냈다. "그저께 밤 가져가신 문서를 돌려받으러 왔습니다." "싫은데." 실무관은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이런 대답을 예상한 얼굴이었다. "신탁청 기록입니다. 확인하셨다면 반환해 주셔야 합니다." "확인했어. 그래도 싫어." "돌려주지 않으시면 하르젠이 신탁청 기록을 가져간 것으로 처리됩니다." "해." 준경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 "대신 그 문서에 뭐라고 적혀 있었는지도 같이 적어." 실무관이 말을 멈췄다. "하르젠 공작한테 대가를 받지 않으면 살 수 있다고 알려준 게 신탁청이잖아. 그것까지 다 적어서 올려." 실무관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다시 와도 똑같아." 실무관이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려 했다.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솔이었다. 실무관이 멈췄다. "말씀하십시오." "백 년 전에 하르젠과 라엔의 예언자가 대가를 나누기로 했던 일 말입니다. 그게 나중에 바뀌었지요." "예. 하르젠 쪽 요청으로 바뀌었습니다." 실무관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오래된 처리 기록을 읊는 것처럼. 솔이 다시 물었다. "라엔의 예언자도 그걸 알고 있었습니까?" "알렸습니다." 솔의 어깨에서 아주 조금 힘이 빠졌다. 실무관이 덧붙였다. "처리가 끝난 뒤에요." 솔이 멈췄다. 준경이 실무관을 봤다. "끝난 뒤?" "예. 바뀐 결과는 처리가 끝나면 양쪽에 알리게 되어 있습니다." 실무관은 그게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원래 그렇게 합니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실무관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럼 이만." 문이 닫혔다. 솔은 닫힌 문을 한동안 봤다. "몰랐던 겁니다." 준경이 솔을 봤다. "라엔의 예언자는요. 자기가 하르젠의
다음 날 아침.준경은 집무실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서명할 서류가 쌓여 있었다. 그는 펜을 집었다.엄지와 검지로만 쥐어졌다. 나머지 세 손가락은 여전히 굽은 채였다.이름을 쓰기 시작했다.글씨가 비뚤어졌다.준경은 종이를 옆으로 치우고 새 종이에 다시 썼다. 이번에는 펜이 손가락 사이에서 미끄러졌다. 잉크가 번졌다.준경이 종이를 구겨 바닥에 던졌다.세 번째 종이를 꺼냈다. 천천히 썼다. 이름은 겨우 알아볼 만했다. 평소 서명과는 전혀 달랐다.그는 펜을 내려놓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셔츠 소매 단추가 풀려 있었다. 아침에 혼자 채우려다 포기한 것이었다.노크 소리가 났다."들어와."솔이었다. 어제 데인 손에는 아직 천이 감겨 있었다.솔은 바닥에 구겨진 종이를 봤다. 그리고 책상 위의 비뚤어진 서명을 봤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대신 준경 옆으로 와서 풀린 소매 단추를 채웠다.준경은 가만히 있었다. 표정은 좋지 않았다.솔이 단추를 다 채우고 물러났다."오늘 일정은 어떻게 되십니까?""나가야 해.""어디로요.""어제 그 남자. 에드윈이 알아본 게 있어."솔이 잠깐 말이 없었다."에드윈 경이 이리로 와서 보고하면 되지 않습니까.""내가 가는 게 빨라.""오늘은 에드윈 경에게 맡기십시오."준경이 솔을 봤다."왜.""손이 그런데요.""손 하나 때문에 못 갈 일은 아니야."솔은 물러서지 않았다."어제 그 손 때문
말을 꺼낸 건 준경이 아니었다.골목 끝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에드윈과 함께 갔던 기사 하나가 숨을 몰아쉬며 뛰어왔다."공작님."준경이 솔에게 잡힌 손목을 뺐다. 천천히. 소매를 끝까지 내렸다."찾았어?""예. 멀지 않습니다. 에드윈 경이 문 앞을 지키고 있습니다.""들어갔고?""들어갔습니다. 아직 안 나왔습니다."준경이 솔을 봤다.조금 전의 얼굴은 이미 없었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걸을 수 있어?""예.""그럼 가자."기사가 길을 안내했다. 준경이 걸음을 옮겼고 솔이 그 뒤를 따랐다.솔은 걷는 내내 준경의 손을 봤다. 그는 그 손을 옆구리에 붙인 채였다. 걸을 때도 흔들지 않았다.모퉁이를 하나 돌았다.또 하나.솔의 걸음이 아주 잠깐 느려졌다.알고 있는 길이었다.와본 적 없는 골목이었다. 그런데 벽돌의 색도, 바닥에 고인 물웅덩이도, 모퉁이에 쌓인 빈 상자도 전부 처음이 아니었다.조금 전 미래 안에서 걸었던 길이었다.그리고 그 끝에 문이 있었다.낡은 나무문. 위에 매달린 등불 하나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미래에서 본 그대로였다.문 맞은편 그림자 속에서 에드윈이 모습을 드러냈다."공작님.""안에 몇 명인지 확인돼?""방금 그 남자와, 원래 안에 있던 사람 하나. 둘입니다.""나간 사람은.""없습니다. 뒷문도 없는 집입니다."준경이 고개를 끄덕였다.문 앞으로 갔다. 기사들이 양옆에 붙어 섰
이번에는 조용했다.수레 세 대가 차례로 뒷마당을 빠져나갔다. 바퀴가 돌길을 긁는 소리가 멀어졌다.아무도 막지 않았다.마당에는 남자 하나만 남았다.그는 수레가 모퉁이를 돌 때까지 서 있었다. 등을 든 채로. 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등을 내려놓았다.주위를 한 번 둘러봤다.그리고 뒷문으로 나갔다.좁은 골목이었다. 남자는 등도 없이 어둠 속을 걸었다. 익숙한 길인 것 같았다. 모퉁이를 두 번 돌았다.걸음을 멈췄다.품 안에 손을 넣었다.꺼낸 건 작은 꾸러미였다. 끈으로 묶은 얇은 종이 묶음. 손바닥 두 개를 겹친 크기.남자는 그걸 잠깐 내려다봤다.그리고 낡은 문 앞에 섰다. 문 위에 등불 하나가 흔들리고 있었다.손을 들어 문을 두드리려는 순간.미래가 끊겼다.솔이 눈을 떴다.이번에는 숨이 들어오지 않았다.냉기가 손끝에서 거꾸로 올라왔다. 팔꿈치. 어깨. 목. 턱이 저절로 떨렸다. 벽을 짚은 손에 감각이 없었다. 벽이 손바닥 아래 있는 건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무릎이 꺾였다.준경이 팔을 뻗었다."예언부터……."솔이 겨우 말했다.준경의 손이 솔의 몸에 닿기 직전에서 멈췄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말해."솔은 벽에 이마를 댔다. 차가운 벽돌보다 자기 몸이 더 차가웠다."상자가 아닙니다."준경이 숨을 죽였다."그 사람입니다. 등 든 사람.""그 사람이 뭐.""따로 가지고 있습니다. 품 안에."솔이 고개를 돌려 준경을 봤다.
밤공기가 차가웠다.말에 올라탄 뒤에야 솔은 머리를 묶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리본은 아직 집무실 바닥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다시 가지러 갈 시간은 없었다.준경이 앞에서 말을 몰았다. 셔츠는 제대로 여몄지만 겉옷은 걸치기만 한 채였다. 에드윈과 기사 넷이 그 뒤를 따랐다.아무도 말하지 않았다.말발굽 소리만 돌길 위로 울렸다.신탁청의 옛 보관소는 성 동쪽 끝에 있었다. 낮에도 사람이 잘 오가지 않는 곳이었다.골목 하나를 남겨두고 준경이 손을 들었다.모두 멈췄다.말에서 내려 벽을 따라 걸었다. 모퉁이 너머로 불빛이 보였다.뒷마당이었다.수레 세 대가 서 있었다. 그 위로 상자들이 실리고 있었다. 하나같이 단단히 봉해져 있었고, 옆면에는 신탁청 문장이 찍혀 있었다.사람은 여섯쯤 됐다.다섯은 상자를 날랐다.나머지 한 사람은 등을 들고 수레 사이를 오가며 손에 든 종이와 상자를 하나씩 맞춰보고 있었다. 마르고 키가 큰 남자였다. 움직임이 빨랐다. 서두르는 티는 내지 않았지만, 상자 하나를 확인할 때마다 고개를 들어 골목 쪽을 살폈다.솔은 그 남자를 봤다.준경은 상자를 봤다."저거야."준경의 목소리가 낮았다."백 년 전 거면 저 안에 있겠지."에드윈이 고개를 끄덕였다."마지막 수레에 거의 다 실었습니다. 곧 떠날 겁니다."준경이 뒤에 선 기사들을 돌아봤다."다 세워."기사들이 칼자루에 손을 올렸다.그 순간 솔이 준경의 소매를 잡았다."잠시만요."준경이 돌아봤다."왜."
준경이 움직였다.한 걸음에 거리가 사라졌다. 허리를 감아 끌어당기는 팔에 망설임이 없었다. 솔의 맨가슴이 그의 셔츠에 짓눌렸다. 입술이 부딪쳤다. 키스가 아니라 삼키는 것에 가까웠다.솔이 숨을 쉬려고 고개를 틀자 그가 목덜미를 물었다."너."목소리가 낮게 갈라져 있었다."오늘 끝까지 이럴 거야?""……규칙 안 지켰다고 혼내실 겁니까?"준경이 숨을 들이켰다.대답 대신 솔을 들어 올렸다. 그대로 책상 위에 앉혔다. 서류가 밀려 바닥으로 쏟아졌다.그가 솔의 무릎 사이에 섰다.마지막 남은 속옷을 손가락으로 걸었다.아주 천천히 끌어내렸다. 허벅지를 지나 무릎을 지나 발끝까지. 솔이 하라고 한 일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오래 걸렸다.솔은 그동안 한 번도 눈을 피하지 않았다.준경이 몸을 숙였다.입술이 솔의 무릎 안쪽에 닿았다. 허벅지를 따라 올라갔다. 솔이 숨을 삼키며 책상 모서리를 움켜쥐었다. 그가 가장 안쪽에 닿기 직전 멈췄다.솔이 내려다봤다.준경이 올려다봤다."벌은 이따가."그리고 입을 묻었다.솔의 허리가 책상 위에서 튀었다. 혀가 젖은 곳을 가르고, 위로 쓸어 올리고, 가장 예민한 곳을 감쌌다. 솔의 손이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밀어내려는 손인지 끌어당기는 손인지 솔 자신도 몰랐다.준경은 알았다.끌어당기는 쪽이었다.그는 거기서 떨어지지 않았다. 솔의 다리가 떨리기 시작해도, 숨이 끊어지는 소리가 나와도. 솔이 한계에 닿는 순간까지 정확히 같은 리듬을 지켰다.솔이 무너졌다.허벅지가 그의 어깨를 조이고, 목에서 끊어진 소리가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