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솔이 새 방으로 안내받은 건 해가 완전히 지기 전이었다.
시녀가 문을 열었다. “이쪽입니다.” 솔은 안으로 들어갔다. 넓었다. 침대 하나와 작은 책상만 있어도 충분했는데, 방 안에는 소파와 벽난로까지 있었다. 창문은 남쪽 정원을 향해 나 있었다. 솔은 방보다 복도를 먼저 돌아봤다. 맞은편에 문 하나가 있었다. “저 방은 누구 방입니까.” 시녀가 잠깐 망설였다. “공작님 침실입니다.” 솔의 시선이 다시 맞은편 문으로 갔다. 그제야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저주표식이 자신과 가까이 있을 때 반응했다. 관찰하려는 거겠지. 그 이상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시녀가 솔의 짐을 침대 옆에 내려놓았다. 작은 가방 하나였다. “짐은 이것뿐입니까?” “예.” 시녀가 가방을 한 번 봤다가 솔을 봤다. 묻고 싶은 말이 있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결국 입을 다물었다. 솔은 익숙하게 가방을 열었다. 옷 몇 벌. 빗. 작은 수첩. 그게 전부였다. 계약이 끝나면 다시 떠나야 했다. 많이 가지고 다닐 이유가 없었다. 솔은 빈 서랍 하나를 열어 옷을 넣었다. 밖에서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맞은편이었다. 솔의 손이 잠깐 멈췄다. 준경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옷을 정리했다. 관찰하기 좋은 거리. 딱 그 정도였다. 밤이 깊었다. 솔은 낯선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고 있었다. 좋은 방이었다. 너무 좋은 방이라 오히려 익숙하지 않았다. 이전 계약지에서는 예언자가 머무는 방이 따로 정해져 있었다. 대부분 하인 숙소와 멀지 않은 곳이었다. 여기는 달랐다. 너무 조용했다. 솔은 눈을 감았다.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그때 맞은편에서 소리가 났다. 문이 열렸다. 낮은 발소리가 복도를 가로질렀다. 몇 걸음. 잠시 멈춤. 다시 돌아가는 소리. 철컥. 문이 닫혔다. 준경이었다. 솔은 눈을 떴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공작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 선명해졌다. 이상하게도 조금 전까지 거슬리던 적막이 덜 낯설었다. 어깨에 들어가 있던 힘도 조금 풀렸다. 솔은 이유를 생각해봤다. 아마 이 저택에서 가장 안전한 사람이 가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결론 내렸다. 다시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솔의 호흡이 천천히 고르게 변했다. 맞은편 방에 준경이 있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아침이 밝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솔이 문을 열자 시녀가 서 있었다. “공작님께서 부르십니다.” “지금요?” “예.” 이유는 듣지 못했다. 솔은 잠깐 맞은편 문을 봤다. 저주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 외에는 자신을 부를 이유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솔은 곧바로 방을 나섰다. 준경의 서재는 같은 층 끝에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준경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는 솔을 보자마자 손을 들었다. “거기 서.” 솔의 발이 멈췄다. 방 한가운데였다. 준경은 그녀를 보지 않았다. 오른손 소매를 걷어 손등의 저주 표식을 확인하고 있었다. 잠시 뒤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조금 전보다 옅어졌군.” 솔의 시선도 그 손으로 향했다. 직접 닿지 않았는데도. 준경이 이번에는 그녀를 봤다. “한 걸음 와.” 솔은 움직였다. 검은 선 하나가 아주 조금 흐려졌다. 준경의 시선이 손등에 박혔다. “멈춰.” 솔이 그대로 섰다. 짧은 침묵. 준경이 말했다. “한 걸음 더.” 솔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준경의 손등을 뒤덮은 검은 선 가장자리가 천천히 흐려졌다. 이번에는 솔도 변화를 확인했다. “거리에도 반응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모양이군.” 준경이 말했다. “뒤로.” 솔이 한 걸음 물러났다. 흐려졌던 검은 선이 다시 짙어졌다. 그걸로 충분했다. 가까워지면 약해지고, 멀어지면 돌아온다. 준경은 잠시 손등을 내려다봤다. 한 번으로 단정할 일은 아니었다. “다시.” 솔이 움직였다. 이번에는 망설임도 없었다. 준경이 부른 만큼 다가와 그의 앞에 멈췄다. 솔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의 손등으로 내려갔다. “고개 들어.” 솔이 얼굴을 들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나 봐.” “예.” 솔은 그대로 준경을 바라봤다. 준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손등을 확인하지도 않았다. 침묵이 길어졌다. 솔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잘못한 게 있나. 하지만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준경 역시 다음 말을 하지 않았다. 한 박자. 조금 더. 솔은 그대로 기다렸다. 그제야 준경이 손을 내밀었다. “손.”다음 날 오전, 신탁청 실무관이 저택에 왔다. 준경은 집무실에서 그를 맞았다. 솔도 옆에 있었다. 실무관은 인사를 마치자마자 용건을 꺼냈다. "그저께 밤 가져가신 문서를 돌려받으러 왔습니다." "싫은데." 실무관은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이런 대답을 예상한 얼굴이었다. "신탁청 기록입니다. 확인하셨다면 반환해 주셔야 합니다." "확인했어. 그래도 싫어." "돌려주지 않으시면 하르젠이 신탁청 기록을 가져간 것으로 처리됩니다." "해." 준경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 "대신 그 문서에 뭐라고 적혀 있었는지도 같이 적어." 실무관이 말을 멈췄다. "하르젠 공작한테 대가를 받지 않으면 살 수 있다고 알려준 게 신탁청이잖아. 그것까지 다 적어서 올려." 실무관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다시 와도 똑같아." 실무관이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려 했다.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솔이었다. 실무관이 멈췄다. "말씀하십시오." "백 년 전에 하르젠과 라엔의 예언자가 대가를 나누기로 했던 일 말입니다. 그게 나중에 바뀌었지요." "예. 하르젠 쪽 요청으로 바뀌었습니다." 실무관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오래된 처리 기록을 읊는 것처럼. 솔이 다시 물었다. "라엔의 예언자도 그걸 알고 있었습니까?" "알렸습니다." 솔의 어깨에서 아주 조금 힘이 빠졌다. 실무관이 덧붙였다. "처리가 끝난 뒤에요." 솔이 멈췄다. 준경이 실무관을 봤다. "끝난 뒤?" "예. 바뀐 결과는 처리가 끝나면 양쪽에 알리게 되어 있습니다." 실무관은 그게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원래 그렇게 합니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실무관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럼 이만." 문이 닫혔다. 솔은 닫힌 문을 한동안 봤다. "몰랐던 겁니다." 준경이 솔을 봤다. "라엔의 예언자는요. 자기가 하르젠의
다음 날 아침.준경은 집무실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서명할 서류가 쌓여 있었다. 그는 펜을 집었다.엄지와 검지로만 쥐어졌다. 나머지 세 손가락은 여전히 굽은 채였다.이름을 쓰기 시작했다.글씨가 비뚤어졌다.준경은 종이를 옆으로 치우고 새 종이에 다시 썼다. 이번에는 펜이 손가락 사이에서 미끄러졌다. 잉크가 번졌다.준경이 종이를 구겨 바닥에 던졌다.세 번째 종이를 꺼냈다. 천천히 썼다. 이름은 겨우 알아볼 만했다. 평소 서명과는 전혀 달랐다.그는 펜을 내려놓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셔츠 소매 단추가 풀려 있었다. 아침에 혼자 채우려다 포기한 것이었다.노크 소리가 났다."들어와."솔이었다. 어제 데인 손에는 아직 천이 감겨 있었다.솔은 바닥에 구겨진 종이를 봤다. 그리고 책상 위의 비뚤어진 서명을 봤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대신 준경 옆으로 와서 풀린 소매 단추를 채웠다.준경은 가만히 있었다. 표정은 좋지 않았다.솔이 단추를 다 채우고 물러났다."오늘 일정은 어떻게 되십니까?""나가야 해.""어디로요.""어제 그 남자. 에드윈이 알아본 게 있어."솔이 잠깐 말이 없었다."에드윈 경이 이리로 와서 보고하면 되지 않습니까.""내가 가는 게 빨라.""오늘은 에드윈 경에게 맡기십시오."준경이 솔을 봤다."왜.""손이 그런데요.""손 하나 때문에 못 갈 일은 아니야."솔은 물러서지 않았다."어제 그 손 때문
말을 꺼낸 건 준경이 아니었다.골목 끝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에드윈과 함께 갔던 기사 하나가 숨을 몰아쉬며 뛰어왔다."공작님."준경이 솔에게 잡힌 손목을 뺐다. 천천히. 소매를 끝까지 내렸다."찾았어?""예. 멀지 않습니다. 에드윈 경이 문 앞을 지키고 있습니다.""들어갔고?""들어갔습니다. 아직 안 나왔습니다."준경이 솔을 봤다.조금 전의 얼굴은 이미 없었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걸을 수 있어?""예.""그럼 가자."기사가 길을 안내했다. 준경이 걸음을 옮겼고 솔이 그 뒤를 따랐다.솔은 걷는 내내 준경의 손을 봤다. 그는 그 손을 옆구리에 붙인 채였다. 걸을 때도 흔들지 않았다.모퉁이를 하나 돌았다.또 하나.솔의 걸음이 아주 잠깐 느려졌다.알고 있는 길이었다.와본 적 없는 골목이었다. 그런데 벽돌의 색도, 바닥에 고인 물웅덩이도, 모퉁이에 쌓인 빈 상자도 전부 처음이 아니었다.조금 전 미래 안에서 걸었던 길이었다.그리고 그 끝에 문이 있었다.낡은 나무문. 위에 매달린 등불 하나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미래에서 본 그대로였다.문 맞은편 그림자 속에서 에드윈이 모습을 드러냈다."공작님.""안에 몇 명인지 확인돼?""방금 그 남자와, 원래 안에 있던 사람 하나. 둘입니다.""나간 사람은.""없습니다. 뒷문도 없는 집입니다."준경이 고개를 끄덕였다.문 앞으로 갔다. 기사들이 양옆에 붙어 섰
이번에는 조용했다.수레 세 대가 차례로 뒷마당을 빠져나갔다. 바퀴가 돌길을 긁는 소리가 멀어졌다.아무도 막지 않았다.마당에는 남자 하나만 남았다.그는 수레가 모퉁이를 돌 때까지 서 있었다. 등을 든 채로. 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등을 내려놓았다.주위를 한 번 둘러봤다.그리고 뒷문으로 나갔다.좁은 골목이었다. 남자는 등도 없이 어둠 속을 걸었다. 익숙한 길인 것 같았다. 모퉁이를 두 번 돌았다.걸음을 멈췄다.품 안에 손을 넣었다.꺼낸 건 작은 꾸러미였다. 끈으로 묶은 얇은 종이 묶음. 손바닥 두 개를 겹친 크기.남자는 그걸 잠깐 내려다봤다.그리고 낡은 문 앞에 섰다. 문 위에 등불 하나가 흔들리고 있었다.손을 들어 문을 두드리려는 순간.미래가 끊겼다.솔이 눈을 떴다.이번에는 숨이 들어오지 않았다.냉기가 손끝에서 거꾸로 올라왔다. 팔꿈치. 어깨. 목. 턱이 저절로 떨렸다. 벽을 짚은 손에 감각이 없었다. 벽이 손바닥 아래 있는 건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무릎이 꺾였다.준경이 팔을 뻗었다."예언부터……."솔이 겨우 말했다.준경의 손이 솔의 몸에 닿기 직전에서 멈췄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말해."솔은 벽에 이마를 댔다. 차가운 벽돌보다 자기 몸이 더 차가웠다."상자가 아닙니다."준경이 숨을 죽였다."그 사람입니다. 등 든 사람.""그 사람이 뭐.""따로 가지고 있습니다. 품 안에."솔이 고개를 돌려 준경을 봤다.
밤공기가 차가웠다.말에 올라탄 뒤에야 솔은 머리를 묶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리본은 아직 집무실 바닥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다시 가지러 갈 시간은 없었다.준경이 앞에서 말을 몰았다. 셔츠는 제대로 여몄지만 겉옷은 걸치기만 한 채였다. 에드윈과 기사 넷이 그 뒤를 따랐다.아무도 말하지 않았다.말발굽 소리만 돌길 위로 울렸다.신탁청의 옛 보관소는 성 동쪽 끝에 있었다. 낮에도 사람이 잘 오가지 않는 곳이었다.골목 하나를 남겨두고 준경이 손을 들었다.모두 멈췄다.말에서 내려 벽을 따라 걸었다. 모퉁이 너머로 불빛이 보였다.뒷마당이었다.수레 세 대가 서 있었다. 그 위로 상자들이 실리고 있었다. 하나같이 단단히 봉해져 있었고, 옆면에는 신탁청 문장이 찍혀 있었다.사람은 여섯쯤 됐다.다섯은 상자를 날랐다.나머지 한 사람은 등을 들고 수레 사이를 오가며 손에 든 종이와 상자를 하나씩 맞춰보고 있었다. 마르고 키가 큰 남자였다. 움직임이 빨랐다. 서두르는 티는 내지 않았지만, 상자 하나를 확인할 때마다 고개를 들어 골목 쪽을 살폈다.솔은 그 남자를 봤다.준경은 상자를 봤다."저거야."준경의 목소리가 낮았다."백 년 전 거면 저 안에 있겠지."에드윈이 고개를 끄덕였다."마지막 수레에 거의 다 실었습니다. 곧 떠날 겁니다."준경이 뒤에 선 기사들을 돌아봤다."다 세워."기사들이 칼자루에 손을 올렸다.그 순간 솔이 준경의 소매를 잡았다."잠시만요."준경이 돌아봤다."왜."
준경이 움직였다.한 걸음에 거리가 사라졌다. 허리를 감아 끌어당기는 팔에 망설임이 없었다. 솔의 맨가슴이 그의 셔츠에 짓눌렸다. 입술이 부딪쳤다. 키스가 아니라 삼키는 것에 가까웠다.솔이 숨을 쉬려고 고개를 틀자 그가 목덜미를 물었다."너."목소리가 낮게 갈라져 있었다."오늘 끝까지 이럴 거야?""……규칙 안 지켰다고 혼내실 겁니까?"준경이 숨을 들이켰다.대답 대신 솔을 들어 올렸다. 그대로 책상 위에 앉혔다. 서류가 밀려 바닥으로 쏟아졌다.그가 솔의 무릎 사이에 섰다.마지막 남은 속옷을 손가락으로 걸었다.아주 천천히 끌어내렸다. 허벅지를 지나 무릎을 지나 발끝까지. 솔이 하라고 한 일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오래 걸렸다.솔은 그동안 한 번도 눈을 피하지 않았다.준경이 몸을 숙였다.입술이 솔의 무릎 안쪽에 닿았다. 허벅지를 따라 올라갔다. 솔이 숨을 삼키며 책상 모서리를 움켜쥐었다. 그가 가장 안쪽에 닿기 직전 멈췄다.솔이 내려다봤다.준경이 올려다봤다."벌은 이따가."그리고 입을 묻었다.솔의 허리가 책상 위에서 튀었다. 혀가 젖은 곳을 가르고, 위로 쓸어 올리고, 가장 예민한 곳을 감쌌다. 솔의 손이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밀어내려는 손인지 끌어당기는 손인지 솔 자신도 몰랐다.준경은 알았다.끌어당기는 쪽이었다.그는 거기서 떨어지지 않았다. 솔의 다리가 떨리기 시작해도, 숨이 끊어지는 소리가 나와도. 솔이 한계에 닿는 순간까지 정확히 같은 리듬을 지켰다.솔이 무너졌다.허벅지가 그의 어깨를 조이고, 목에서 끊어진 소리가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