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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어머니 곁에 있었던 향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11 18:58:00

세자빈 교육 넷째 날.

그날은 예외적으로 정전 어라하당의 특별 관람이 포함된 일정이었다.

“빈의 덕목은 궁 안의 역사와 숨을 같이 해야 하니, 앞선 왕비들의 자취를 배우는 것도 덕목 중 하나요.”

장의녀의 말은 엄숙했지만, 그 속엔 뭔가 조심스러운 여백이 있었다.

채향은 그 여백의 침묵이, 오히려 무엇보다 뚜렷한 신호처럼 느껴졌다.

어라하당은 폐비가 마지막으로 머물던 전각이었다.

지금은 문이 닫히고, 마루는 비어 있었으며, 담쟁이 넝쿨만이 오래된 기억처럼 벽을 덮고 있었다.

채향은 조심스레 그 안으로 발을 들였다.

발끝에 스친 공기. 곰팡이가 섞인 차향.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코끝을 찌른 건 낯익은 기묘한 향기였다.

그 향은… 바로 그녀가 소희의 독 정황을 쫓으며 맡았던 향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이건… 같은 계열의 향이다.’

그녀는 천천히, 전각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닳아버린 문설주. 덜컥거리는 서랍.

그리고 구석에 놓인 작은 향로 하나.

그 안엔 이미 오래 전에 타버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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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하, 오늘은 어떤 맛을 원하시옵니까?   80. 말보다 먼저 입을 적시는 국

    조정의 공기는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한낮의 바람보다 더 빠르게 방향을 틀고 있었다.사람들은 말을 아꼈다.하지만 눈빛은 이현을 향했고,빈궁 정채향의 손끝에서 나오는 국이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 사실은 더 이상 숨겨질 수 없는 진실이었다.고운령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빨리 감지했다.그녀는 방 안 깊숙한 찬장 속, 오래도록 봉인되어 있던 작은 서찰 상자를 꺼냈다.그 상자 안에는, 삼십여 년 전의 붉은 인장이 찍힌 한 장의 봉투가 들어 있었다.그 봉투는 ‘열지 말 것’이라 적혀 있었고, 누군가의 피와 함께 묻혀 있었다.“…이제야, 그 마지막 맛을 꺼내야 할 때로구나.”그녀는 서찰을 천천히 꺼냈다.그 속에는, 한 명의 이름과, 왕실의 피줄을 의심케 하는 출생 기록이 붓글씨로 또렷이 남겨져 있었다.고운령은 손끝을 떨며 그 서찰을 덮었다.“이 글씨 하나면, 이현도, 채향도, 모두 다시 땅바닥으로 떨어뜨릴 수 있어.”“…사람의 국이 아무리 따뜻하다 해도”“…피로 쓰인 글씨 앞에선 차가울 수밖에 없지.”그녀는 사가의 안마당을 걷기 시작했다.그 걸음은 조용했고, 그 얼굴에는 오랜 세월 감추어온분노와 애증이 섞인 독기가 서려 있었다.한편, 궁 안의 采香堂. 채향은 다시 국을 끓이고 있었다.오늘의 국은 미역과 두부,그리고 소금 한 줌으로만 맛을 낸 속을 달래는 국이었다.“사람은 기쁠 때보다, 슬플 때 국을 찾는다 했사옵니다.”“…오늘은 왠지, 그 말이 떠오르옵니다.”그녀의 옆에서 이현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같은 생각이오.”그는 찬합 뚜껑을 닫으며 말을 이었다.“고운령이 움직였소.”“…이번엔, 피를 쥐고.”채향은 눈을 들었다.“피…라 하시면…”“왕실의 오래된 기록을 손에 넣었소.”“…그 기록이 열리면, 누군가의 존재 자체가 무너질 수도 있어.”그 말에 채향의 손끝이 잠시 멈췄다.그녀는 오래 생각하듯 말없이 솥을 저었다.그리고 국을 작은 그릇에 담아, 이현 앞에 조용히 내밀었다.“속이 쓰릴 때는, 기

  • 저하, 오늘은 어떤 맛을 원하시옵니까?   79. 采香堂의 창문 사이로 해가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그 빛은 불처럼 타오르지 않고, 솥 안의 온기처럼 천천히 고였으며,창호지를 타고 두 사람의 어깨에 나란히 내려앉았다.채향은 눈을 떴다. 곁엔 이현이 있었다.그는 의자에 기대어 잠든 채였고, 그 손엔 아직도 채향이 밤새 덮어준 홑이불 끝자락이 쥐어 있었다.그 모습은 마치 한밤중 내내 자신의 자리를 놓치지 않겠다는 조용한 맹세 같았다.채향은 그의 손끝을 조심스레 쓸었다.“…이현.”그 이름은 처음으로,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이현은 눈을 떴다.“벌써 새벽이오?”“아니옵니다. 이제 아침이 옵니다.”“…하지만 이 아침은 처음으로 그대 곁에서 맞이한 아침이옵니다.”이현은 조용히 웃었다.그리고 손을 뻗어, 그녀의 손등을 덮었다.“이제는 내 아침이 그대의 국으로 시작되기를 바라오.”그 짧은 대화는 어떤 서약보다 고요하고 강했다.그러나 그 순간, 采香堂 문 앞에 급한 발걸음 소리가 닿았다.소윤 상궁이 다급히 안으로 들어섰다.“세자저하… 아닙니다, 폐하. 궁 밖 외궁에서 사가의 정계와 일부 대신들이‘책봉 무효’를 주장하는 상소를 준비 중이라 하옵니다.”이현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외궁… 고운령이 드디어 마지막 칼을 빼들었군.”채향은 문득 멈칫했다.“…폐하의 자리를, 다시 뒤흔들려는 것이옵니까?”“그렇소.”“…이번엔 그대가 아닌, 나를 무너뜨려 궁의 기반 자체를 흔들 생각이겠지.”이현은 조용히 일어섰다.“하지만, 이번엔 국도 정무도, 그대와 함께 감당하겠소.”그날 오후, 운령의 사가와 관련된 외궁 대신들의 모임이 비밀리에 열린다는 소식이 입수됐다.이현은 채향에게 조용히 말했다.“采香堂에서 국을 차리시오.”“…허나 이번엔, 궁 안이 아닌 밖에서 먹일 국이오.”채향은 눈을 크게 떴다.“밖이라니… 사가의 문을 열고 나간다는 말씀이시옵니까?”“조선의 국이, 조선 궁 안에만 머물 수는 없소.”“…그대의 국이 사람을 살린다면, 이번엔—조선을 살릴 수 있지 않겠소?”채향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그리하겠

  • 저하, 오늘은 어떤 맛을 원하시옵니까?   78. 너라는 맛, 그 하나면 족하오

    기름지지 않은데 고소하고, 향이 없는 듯 깊은 이 국이 어디선가 본인도 모르게 입 안 가득 퍼져 있었다.그는 찬합을 내려다보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입이 거절하지 않았소.”“…그것은 이국의 음식이 아니라, 몸이 기억한 맛이었소.”채향은 고개를 숙였다.“이 국은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고”“…누구의 몸에든 스미기를 바란 국이옵니다.”그 순간, 연회의 공기는 달라졌다.사신은 찬합을 비우고 난 후, 정중히 이현에게 고개를 숙였다.“이 빈궁은 조선의 입만이 아니라, 사람의 몸을 이해하는 솥을 가졌소이다.”그 말은 연회장을 채운 모든 대신에게 하나의 외교적 선언과도 같았다.이현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사람의 국은 국경을 넘을 수 있소.”그날 오후, 운령은 자신이 준비한 상소를 찢었다.그 속엔 ‘빈궁의 무능’이라는 글귀가 사라지지 않는 붓으로 씌어 있었지만이제는 아무도 그것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采香堂엔 저녁 볕이 들었다.채향은 다시 찬방 앞에 앉아 천천히 들깨를 볶았다.그 고소한 향은 오늘만큼은, 조선을 넘어 사람의 마음 속까지 퍼지고 있었다.采香堂엔 깊은 밤이 깃들고 있었다.궁 전체가 조용히 숨을 죽이고,이제는 어느 곳에서도 북만국의 사신 이야기가 들려오지 않았다.찬방 앞, 채향은 망설이다가 남은 들깻국을 다시 데우고 있었다.그 국은 더 이상 조정을 움직일 일도 없고, 누군가의 검증을 받을 필요도 없었다.다만, 오늘 하루 자신이 살아 있음에 작은 위안을 삼기 위한 국일 뿐.그때, 문이 열렸다. 이현이었다.하지만 오늘의 이현은 세자의 품계도, 왕세자전의 위엄도 없었다.그는 연회 때 입었던 흰 옷 그대로,손에는 아무것도 들지 않은 채 조용히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오늘은… 무엇을 데우고 계시오?”채향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조용히 대답했다.“식은 국이옵니다.”“…하지만 식었어도, 속을 데울 수 있는 밤이 있사오니”“…그 밤을 위하여, 다시 데우고 있었사옵니다.”이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 곁에

  • 저하, 오늘은 어떤 맛을 원하시옵니까?   77. 낯선 입에 머문 국, 조선을 살리다

    연회가 끝난 다음 날 아침, 采香堂의 마루 끝엔 낯선 기척이 있었다.채향은 고개를 들었고, 그 문 앞에는 뜻밖에도 이현이 서 있었다.그는 군복도 아니고, 의관도 아니며, 그저 백의(白衣) 차림의 사내였다.“…오늘은 궁의 주인이 아닌 사내로 왔소.”채향은 무릎을 꿇고 인사했지만, 그는 조용히 손을 뻗어 그녀를 일으켰다.“나는… 그 연회를 봤소이다.”“…그 상에 올라온 국, 그 국을 앞에 두고 울던 궁녀…”그의 목소리는 낮고 조심스러웠다.“그 국 하나로, 사람이 제 이름을 찾고, 제 손을 쓸 수 있다는 걸…”“…내 생애 처음 본 일이었소.”그 말에, 채향은 잠시 고개를 숙였다.“허나… 죄송하옵니다.”“…그 상은 높은 이께 올리기엔 너무 작고 초라한 국이었사옵니다.”이현은 고개를 저었다.“그대가 빈궁에서 지은 국은 조선 어느 국보다 크고 깊었소이다.”“…내 비록 국정을 논하고, 전장을 살피는 사내라 하나”“…입 하나에 담긴 그리움의 무게를 감히 넘보진 못하겠소.”그 말은 처음이었다.이현이 스스로 빈궁의 국 앞에 자신을 낮춘 순간이었다.그날의 대화는 길지 않았지만, 그 속엔 이전과는 다른 숨결이 흐르고 있었다.그러나, 그 저녁의 평온은 오래가지 않았다.정무각에 고운령이 직접 올린 비밀 상소가 도착한 것이다.‘세자빈 정채향은 내명부를 어지럽힐 뿐 아니라,그 아비 정윤백이 지난날 외척의 죄로 유배되었음을 숨기고 왕실의 혈통에 흠을 남기려 하였사옵니다.’그 상소는 명확했다.채향의 아비는 조선 선왕 시절, 금군의 식량을 착복했다는 죄로 유배된 자였고, 그 죄는 한 번도 공적으로 용서받은 적 없는 죄목이었다.조정은 흔들렸고, 내명부는 술렁였으며, 민심도 조용히 돌아서기 시작했다.采香堂에 도착한 이 소식을 들은 순간, 채향은 더는 피하지 않았다.그녀는 조용히 찬방으로 걸어 들어갔다.그곳에서 쌀과 된장, 무, 그리고 묵은지를 꺼냈다.“오늘은 ‘속풀이국’을 지을 것이옵니다.”“…속을 앓는 자들이 많사오니, 이 국이 그들을

  • 저하, 오늘은 어떤 맛을 원하시옵니까?   76. 국은 죄를 덮지 않사오나, 마음은 덮을 수 있사옵니다

    그녀는 이름도 자리를 묻지 않았고, 그저 손을 덜덜 떨며 음식을 입에 넣었다.채향은 웃지 않았다.다만 깊이,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때, 그 상 옆자리에 앉은 또 다른 궁녀, 단이는 미묘하게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그녀는 고운령 측에서 密命을 받은 자였다.“빈궁에서 무슨 음식이 오르며, 누구를 곁에 들이는지 그 모든 걸 말하라.”단이는 처음엔 두려웠고, 그 후엔 혼란스러웠고, 지금은… 마음이 흔들렸다.그녀가 이곳에서 본 것은 권력이 아니라, 손으로 국을 짓는 여인의 뒷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그날 밤, 연회가 끝나고 모두 물러간 뒤,단이는 조심스레 채향의 방 앞에 섰다. 그 손엔 운령이 건넨 봉투가 쥐어져 있었고, 심장은 뚝뚝 떨리고 있었다.그때, 문이 열렸다.채향은 등불 하나만 켜둔 채 조용히 앉아 있었다.그녀는 단이를 보자 말없이 찻잔을 내밀었다.“오늘, 다들 입을 통해 마음을 나누었으니…”“…그대도 그 잔으로 자신의 마음을 덜어내보시옵소서.”단이는 봉투를 내려두었다.“…마마. 저… 폐하께서 아시면 안 되는…”그녀는 더 말하지 못했다.그저 울었고, 채향은 다가가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사람은 죄를 짓기도, 마음을 돌리기도 하옵니다.”“…헌데 국이란, 죄의 입에도 따뜻할 수 있어야 하옵니다.”그 말에, 단이는 봉투를 찢었다.그리고,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이 국의 곁에서 살고 싶사옵니다.”채향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부터 단이의 손엔 국자 하나가 들려 있었다.그녀는 이제, 채향의 곁에서 하루에 한 그릇씩 국을 배워가기 시작했다.背叛이 아니라, 국으로 맺은 충심의 시작이었다.연회가 끝난 다음 날 아침, 采香堂의 마루 끝엔 낯선 기척이 있었다.채향은 고개를 들었고, 그 문 앞에는 뜻밖에도 이현이 서 있었다.그는 군복도 아니고, 의관도 아니며, 그저 백의(白衣) 차림의 사내였다.“…오늘은, 궁의 주인이 아닌 사내로 왔소.”채향은 무릎을 꿇고 인사했지만, 그는 조용히 손을 뻗어 그녀를 일으켰다.

  • 저하, 오늘은 어떤 맛을 원하시옵니까?   75. 변명보다 나은 해명의 국

    이른 새벽, 경복궁의 내전에는 상소문이 들이닥쳤다.그 봉투들은 하나같이 진한 붉은 인장을 찍은 채 내명부의 명예를 지킨다는 제목 아래 놓여 있었다.“세자빈의 독단이 도를 넘었사옵니다.”“빈궁의 살림을 자신의 사사로움으로 바꾸고, 궁중 질서를 흔들며 상궁을 좌지우지하였사옵니다.”서명된 이름 사이엔 익숙한 이름도, 낯선 얼굴도 섞여 있었지만 그 중심엔 고운령이 있었다.그는 궁의 전통을 이유로 삼았지만,그 전통은 결국 빈궁의 손을 다시 묶고자 하는 시도에 불과했다.소식을 전해 들은 채향은 采香堂의 마루 끝에 앉아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의 앞엔, 막 지어낸 콩비지국이 놓여 있었고, 솥뚜껑을 열자 하얗고 고소한 향이 천천히 퍼져 나갔다.그 국은 부드럽고 따스했으나, 그날의 바람은 유난히 싸늘했다.“빈마마… 이대로 계시겠사옵니까?”“…해명이라도 하셔야…”소윤 상궁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하지만 채향은 국을 그릇에 뜬 뒤 작은 찬합에 나누어 담기 시작했다.“사람은 밥상을 보고 마음을 돌리기도 하옵니다.”“…하지만 그 마음이 어디로 향할지는 그 밥을 짓는 손이 무엇을 품었는가에 따라 달라지옵니다.”“전 제 손으로 지은 이 국이 변명보다 나은 해명이 되기를 바랄 뿐이옵니다.”그녀는 그 국을 담은 찬합을 내전과 외전, 그리고 중궁전까지 궁중의 높고 낮은 처소마다 돌렸다.같은 국, 같은 온도, 같은 마음.그 국이 놓인 자리마다 조용한 입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빈궁에서 보낸 국이라 하더이다.”“그저 된장에 콩비지를 풀었을 뿐인데, 왜 이리 속이 따뜻하냐더이다.”이현은 그 국이 놓인 그릇을 내려다보며 화령에게 조용히 말했다.“이제 국이 궁의 논쟁을 막는 날이 오다니.”화령은 웃었다.“맛은 위로를 주고, 그 위로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요.”“…채향이 정한 질서는 말보다 오래가겠지요.”그날 저녁, 조정엔 새로운 어명이 내려졌다.‘세자빈 정채향이 구성한 내명부의 살림과 인사 구성이 왕실 내전의 질서를 다스리는 기준이 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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