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로맨스 / 저하, 오늘은 어떤 맛을 원하시옵니까? / 29. 맛과 향, 그리고 기억의 진실

Share

29. 맛과 향, 그리고 기억의 진실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11 19:02:15

채향의 말은 조용했다. 그러나 그 속엔 목숨을 담보로 한 선택의 무게가 분명히 담겨 있었다.

이현은 그런 그녀를 오래 바라보았다.

그가 처음으로 마음을 주고 싶었던 사람,

그리고 지금, 세자라는 무게와 함께 감당하게 된 인연.

그날 밤, 궁 안에 감찰이 시작되었다.

누구도 크고 소리 내지 않았고, 누구도 먼저 웃지 않았다.

칼날은 아직 빼들지 않았으나,

누구보다 먼저 기척과 향으로 서로를 겨누는 전장이 열리고 있었다.

감찰이 시작된 지 사흘째. 세자빈 교육은 일시 중단되었고,

수라간도 ‘비상 정비’라는 명목 하에 외부와의 접촉이 차단되었다.

채향은 세자전에서 머무르고 있었고, 그녀의 이름은 이제 궁중 어디서나

은밀히, 그러나 뚜렷이 언급되는 정치적 단어가 되었다.

“그 아이… 원래 중전 마마 쪽이 아니라, 의정부 판서의 첩 딸이었다지요?”

“첩 딸이라니…!”

“그것도 정식 족보에조차 들지 못한, 기록 없는 여인이라 합니다.”

조정 내 사대부 가문들 사이에서 ‘정채향’이라는 이름은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ocked Chapter

Latest chapter

  • 저하, 오늘은 어떤 맛을 원하시옵니까?   95. 사랑이라는 국, 같은 상 위의 온기

    그날의 식탁은 정갈했다.금도 은도 없었고, 붉은빛 수라반도 아니었다.오직 나무로 짠 조촐한 상,상 위엔 하얀 사기 사발 두 개,그리고 국 하나가 놓여 있었다.채향과 이현은 그 상 앞에 마주 앉았다.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공기는 마치 모두가 지켜보는 듯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채향은 먼저 고개를 숙였다.그리고 국자 하나로 국을 퍼 이현의 사발에 담았다.맑고 잔잔한 국물 위로 얇게 저민 유자 껍질이 하나, 천천히 떠올랐다.이현은 말없이 그 사발을 들어 숟가락 하나로 국을 떴다.국물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그 떨림은

  • 저하, 오늘은 어떤 맛을 원하시옵니까?   94. 이제 제가 옆에 있어도 되겠사옵니까

    수라간은 오랜만에 아침보다 먼저 불이 들어왔다.그 불은 누군가의 지시가 아닌, 누군가의 발걸음으로 인해 지펴진 것이었다.정채향이 돌아왔다.그녀는 익숙한 발걸음으로 솥 앞에 섰고, 과거의 국자와는 다른 새로운 손의 무게로 국을 짓기 시작했다.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수라간의 공기마저 달라져 있었다.화로는 예전보다 낮은 불로 타올랐고,솥은 마치 그 주인을 기억하듯 조용히 숨을 죽이고 끓기 시작했다.그녀가 처음 손에 든 재료는 멥쌀이었다.쌀은 그녀와 함께 여행을 다녀온 것처럼 조용히 불을 받아들였고, 그 위에 채향은

  • 저하, 오늘은 어떤 맛을 원하시옵니까?   93. 나를 위한 국, 아무도 모르게 끓는 향

    바람은 그날도들꽃 냄새를 안고 마당을 건넜고, 햇살은 초가지붕 위에서 오래 머물렀다.채향은 작은 초가의 뒷간 뒤편, 외양간과 연결된 작은 부엌에서 국을 짓기 시작했다.이곳엔 아무도 없었다.기록도 없고, 명령도 없고,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조차 없었다.그러나 오히려 그래서 그녀는 지금까지 한 번도 끓여본 적 없는 국을 끓이려 했다.그녀 자신을 위한 국. 그 국엔 다른 이의 기호도, 타인의 체질도, 나라의 운명도 담기지 않았다.다만 그녀가 살아온 나날, 잊지 못했던 순간들,울음 삼키던 새벽의 찬물 같은 기억,그 모든 것이 쌀 한 줌에 스며 있었다.쌀은 전날 밤 미리 씻어 밤새도록 맑은 물에 불려

  • 저하, 오늘은 어떤 맛을 원하시옵니까?   92. 국을 담지 않아야 완성되는 사발

    정채향이 궁을 떠난 날, 수라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불도 울지 않았고, 솥도 삐걱이지 않았으며, 하늘도 맑기만 했다.그녀가 떠났다는 사실은 ‘그녀가 머물던 자리에 아무도 오르지 않는 것’으로 천천히 사람들의 가슴에 새겨졌다.수라간을 다시 돌보던 상궁들은 예전보다 국을 천천히 끓였다.하나같이 맛은 좋았지만, 그 맛은 사람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다들 알고 있었다.‘이건… 채향의 국이 아니다.’그녀는 다만 국을 잘 짓는 자가 아니었다.그녀는 국으로 사람의 마음을 짓던 자였고,

  • 저하, 오늘은 어떤 맛을 원하시옵니까?   91. 국이 식고 난 뒤, 조선은 어디로 흐르는가

    백국연이 끝난 다음 날 아침,정전 앞마당의 국 솥들은 모두 비워져 있었다.그 큰 솥에서 퍼지던 향은 사라졌고,솥의 벽엔 국물의 흔적만이 엷은 물결처럼 남아 말라가고 있었다.그리고 조선의 공기는, 그 하루 아침을 맞이하며 마치 아주 조용한 눈처럼 느리게 내렸다.채향은 혼자 수라간으로 돌아왔다.그녀가 떠난 빈 솥을 아무도 치우지 않았고,그녀가 두고 간 국자도 여전히 같은 자리에 놓여 있었다.그녀는 천천히 다가가 그 국자를 손에 쥐었다.“…이제 이 국자는 다시 쓰이지 않겠지요.”“…이제 더는 누군가를 위해 국을 지어야 할 이유가…”“…없사옵니다.”그녀의 말은 비어 있었으나,그 안엔 지난 계절들이 한 줌씩 담겨 있었다.이현은 그 순간, 왕과 단둘이 정전 안에 있었다.왕은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며 말하였다.“나는 이제 국을 받는 자로 남고 싶지 않다.”“…그동안 나는 국을 받기만 했지…”“…단 한 번도 국을 끓이는 자의 손을 잡아준 적이 없었도다.”이현은 침묵했다.왕은 그의 침묵을 이해하듯 웃었다.“이제 조선은 국을 짓는 사람의 나라가 되어야 하느니라.”“…그대는 그 향이 퍼지게 하고, 그 손이 지치지 않게 해야 할 것이야.”“…이 나라가 진정으로 따뜻하려면, 그 따뜻함의 중심에 사람이 있어야 하느니라.”왕은 천천히 옥좌에서 몸을 일으켰다.그의 걸음은 무거웠지만, 어쩐지 가벼워 보였다.그날 저녁, 이현은 채향이 있는 수라간을 찾았다.그녀는 아직 떠나지 않았다.그녀는 여전히 국자 하나를 손에 들고, 마치 마지막 국을 끓이듯 가마솥 안에 물을 붓고 있었다.“…떠나려 하오?”이현의 물음에, 채향은 국자를 잠시 내려두며 말했다.“네, 저하.”“…국이 남지 않았사옵니다.”“…조선은 이제 사람들이 스스로 국을 짓는 나라가 되었사옵니다.”“…저는 그 처음을 보여주었을 뿐이옵니다.”이현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그 눈빛은 결코 놓지 않는 이의 것이었다.“허나 나는 아직 당신이 끓인 국을 먹지 못했소.”그 말

  • 저하, 오늘은 어떤 맛을 원하시옵니까?   90. 이 국은 조선이라 하옵니다

    밤은 길었고, 그 길이 끝나기 전의 시간은 항상 가장 조용하고, 가장 위태로웠다.고운령은 궁 밖 별궁에 연금된 채, 하인 하나, 첩자 하나만을 남기고 단 둘이 남아 있었다.그러나 그녀는 결코 침묵하지 않았다.“조선이 여자의 손끝에서 끓는 국 하나로 움직이는 나라라면—”“…그 국이 식었을 때, 그 나라도 식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하지 않겠느냐.”그녀는 은밀히, 기존의 구대감, 남창부원군, 대사헌 등정적과 불만 세력을 향해‘채향의 국은 조선의 혈통이 아닌 자의 손에서 끓었다’는 소문을 은밀히 퍼뜨렸다.‘그녀는 궁녀였고, 궁녀 중에서도 가장 천한 주방 수련생이었다.’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