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구호민의 얼굴이 굳어 가는 걸 보면서도 강이주는 사무적인 미소를 유지했다.조금도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구호민도 강이주를 설득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걸 알아차렸다.차갑게 강이주를 한 번 훑어본 뒤 몸을 돌려 병실을 나갔다.처음부터 끝까지 구기빈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구호민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구기빈이 강이주에게 말했다. “퇴사 처리는 할아버지 승인만 남았잖아. 구희도한테서는 아직 연락 안 왔어?”여기까지 일을 벌여 놓고도 구희도는 꽤 오래 버티고 있었다.강이주는 핸드폰을 구기빈에게 내밀었다. “K.T 쪽 실질적인 책임자가 계속 연락하고 있어.”며칠 전 구기빈과 민서호는 강이주에게 관련 자료를 한 번 건넨 적이 있었다.구희도는 오랫동안 해외에서 지냈지만 손을 놓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뒤에서 여러 사업에 꾸준히 투자해 왔다.그 투자처를 따라가면 곳곳에서 K.T라는 회사가 등장했다.K.T는 좀처럼 이름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보유 자산은 상당했다.구희도는 흔적을 최대한 감춰 뒀고, 겉으로 보기에는 K.T의 대표이사와도 별다른 연관이 없어 보였다.하지만 실제로 K.T의 뒤에서 자금을 댄 사람은 구희도였다.K.T는 금융업을 중심으로 벤처 투자와 입찰에 강점이 있는 회사였다. J시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본사는 규모가 크지 않은 지방 도시에 있었지만 그 지역에서는 제법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강이주는 RG그룹 지분을 매각하겠다는 소문을 흘린 때부터 숨어 있던 구희도가 움직이기만을 기다렸다.처음부터 구씨 집안의 방계 사람들에게 지분을 팔 생각은 없었다.구호민 역시 마찬가지였다.이렇게까지 판을 키운 이유는 줄곧 뒤에 숨어 있던 사람을 끌어내기 위해서였다.처음에는 강이주도 그 사람이 구호민일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구기빈은 아니라고 했다.그 말을 듣자 강이주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이 구희도였다.구씨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면서도 철이 들 무렵부터 해외로 보내져 방치됐고, 본가로 돌아와 핵심 사업에 관여하는
민서호가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도 지금까지 상황만 보면 양수은은 우리 편이야. 최소한 적은 아니야.”양수은까지 끼어든 만큼 예상하지 못한 수확이 생길 수도 있었다.실제로 민서호의 예상대로 소문이 퍼지자 뜻밖의 반응이 바로 나타났다.이번에는 구호민이 강이주에게 직접 연락해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다.강이주는 고민할 것도 없이 거절했다.대화를 원한다면서 태도는 여전히 위에서 내려다보듯 고압적이었다.강이주는 그런 태도까지 받아 줄 생각이 없었다.결국 구호민이 직접 강이주의 병실로 찾아왔다.구호민도 부상을 입은 상태였지만 안색은 생각보다 괜찮아 보였다.강이주와 구기빈이 같은 병실을 쓰고 있는 걸 본 구호민은 콧방귀를 뀌었다. ‘꼴 좋군.’자신이 공들여 키운 후계자가 강이주 앞에서 저렇게 풀어진 모습을 보니 속이 뒤집혔다.당장 찾아가서 몇 대 때려서라도 정신을 차리게 하고 싶은 정도였다.구기빈도 구호민의 시선을 느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침대에 여유롭게 기대 누운 채 아예 없는 사람 취급했다.강이주는 휠체어에 앉아 구기빈의 침대 곁을 지키고 있었다.구호민을 본 강이주가 바로 물었다. “지분 때문에 오신 겁니까?”굳이 설명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구호민이 오늘 자신을 찾아온 이유는 지분 말고는 없었다.구호민이 눈을 가늘게 뜨고 강이주를 훑어봤다. “얼마에 넘길 거냐?”강이주가 먼저 본론을 꺼낸 만큼 구호민도 에둘러 말하지 않았다.강이주는 담담하게 구호민을 바라봤다. “사업 이야기를 하시려면 최소한 성의는 보여 주셔야죠.”시선을 마주한 채 차분히 이어 말했다. “기빈 씨 다리를 치료할 의사들을 더는 막지 말아 주세요. 아무리 사이가 좋지 않아도 아버지와 아들이잖아요.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습니까?”강이주는 구호민 앞에서 첫 번째 조건을 분명히 밝혔다.구기빈이 크게 다쳤고 제때 치료받지 못하면 다리 회복이 더 어려워진다는 걸 알면서도 구호민은 의사들이 진료하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아무리 냉정한 사람이라도 자기
얼마 지나지 않아 G시의 두 유력 가문이 동시에 강이주가 가진 지분에 관심을 보인다는 소식이 다시 퍼졌다.강이주는 그 소식을 보고 또 한 번 어리둥절해졌다.옆에 있던 구기빈을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이 흘린 소문이야?”상식적으로는 그럴 리가 없었다.구기빈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한 거 아니야.”이번 일은 정말 구기빈이 꾸민 게 아니었다.구기빈이 사람을 시켜 소식을 흘린 곳은 구호민 쪽뿐이었다.자신의 부상 상태에 관한 내용도 함께였다.구기빈은 척추를 심하게 다쳐 아직 수술 방법조차 확정하지 못한 상태였다.치료가 늦어질수록 회복 가능성도 낮아진다는 이야기가 함께 퍼졌다.지난 며칠 동안 구호민 쪽에서도 구기빈의 상태를 알아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구기빈은 이왕 시작한 연기를 끝까지 밀어붙이기로 했다.‘기빈 씨가 아니라면 대체 누가 그런 소문을 낸 거지?’강이주가 의아해하던 그때였다.옆에 있던 민서호가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양씨 집안 쪽.”민서호는 핸드폰을 내밀었다.화면에는 양수은이 보낸 메시지가 떠 있었다.내용은 단순하고 직설적이었다. RG그룹 지분을 원하니 민서호가 지분을 손에 넣는다면 두 집안의 인연을 생각해서라도 강이주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해 돕겠다는 말이었다.구기빈은 메시지를 읽는 내내 속이 묘하게 불편했다.자꾸만 민서호가 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양수은이 아들 양인재의 짝을 적극적으로 찾고 있다는 이야기였다.‘설마... 진짜 이주를 며느릿감으로 마음에 들어 하는 건가?’그 가능성을 떠올리자 구기빈의 표정이 단번에 굳었다.강이주는 구기빈의 못마땅한 시선을 알아차리고 물었다. “왜 그래?”말이 끝나기도 전에 구기빈이 핸드폰을 강이주에게 내밀었다.내용을 확인한 강이주도 다시 한번 놀랐다.이제야 구기빈이 왜 기분이 상했는지 알 것 같았다.‘양수은은 대체 왜 이렇게까지 나를 도우려는 건가?’강이주는 핸드폰을 민서호에게 돌려주며 농담처럼 말했다. “이쯤 되면 집에 가서 부모님께 제가 진짜
민서호의 아버지 민태산도 생전에 양인재 이야기를 자주 입에 올렸다.막내아들도 양인재처럼 속 썩이지 않고 반듯하게 컸으면 좋겠다고 한두 번 말한 게 아니었다.민서호가 진지한 표정으로 구기빈을 바라봤다. “나 진짜 농담 아니야. 제수씨 같은 스타일이 딱 양수은 취향이야. 제수씨를 꽤 마음에 들어 하는 건 확실해.”“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을 왜 저렇게까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겠어? 결국 제수씨가 마음에 들었다는 얘기 아니겠냐?”말하면 할수록 민서호는 제 추측이 꽤 그럴듯하다고 느꼈다.민서호는 제법 논리적인 척 설명을 이어 가며 혼자 고개까지 끄덕였다.결국 참다못한 구기빈의 팔꿈치가 민서호의 옆구리를 제대로 가격했다.민서호는 두 걸음 뒤로 물러나 배를 움켜쥐었다. “야, 친구를 죽이려고 하냐? 넌 양심도 없냐?”“입 닥쳐.” 구기빈이 싸늘하게 민서호를 훑어봤다.한마디만 더 마음에 안 드는 소리를 하면 정말 가만두지 않겠다는 경고가 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민서호는 그 살벌한 시선을 알아차리고 바로 진지한 표정을 되찾았다.강이주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양인재는 왜 ‘양’ 씨 성을 쓰는 거야?”전에 양수은을 조사했을 때 데릴사위를 들였다는 이야기는 없었던 것 같았다.민서호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양수은이 결혼할 때 데릴사위라고 공식적으로 정한 건 아니었는데, 결혼 뒤에는 부부가 계속 처가에서 살았대.”“그때 첫째 아이는 남편의 성을 따르고, 둘째는 양수은의 성을 따르기로 미리 합의했다더라.”G시 쪽에서는 제법 알려진 이야기였다.양수은은 남녀 쌍둥이를 낳았고 딸이 먼저 태어났다.딸은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해 곧바로 신생아 집중치료실로 옮겨졌다고 했다.퇴원한 뒤에도 병원을 제집 드나들 듯 자주 오갔다고 들었다.첫째 딸은 남편의 성을 따랐고, 아들 양인재는 양수은의 성을 따랐다.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큰딸 양희연은 세 살 때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양수은은 이후 양인재의 성을 아버지 쪽으
병실로 돌아가는 길에 강이주는 유만정의 상태를 물었다.임설은 그 말을 듣자 곧바로 대답했다. “크게 다친 건 없어요. 연세가 있으셔서 넘어지면 여기저기 아프실 수밖에 없죠. 집에 가서 파스 붙이고 쉬시면 될 것 같아요.”유만정이 부린 소란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임설은 진이 빠졌다.강이주에게 또 찾아가 시비를 걸까 봐 참은 것이지, 아니었다면 진작 인내심이 바닥났을 것이다.조금만 더 참았다가는 몸에서 사리가 나올 것 같았다.불평이 가득한 임설의 말에 강이주는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설이 고생했네. 이번 달 월급 올려 줄게. 두 배로.”제 비서를 얼마나 들볶았으면 임설이 저 지경인가 싶었다.지금 임설의 급여는 구기빈 쪽에서 지급하고 있었지만, 급여를 더 챙겨 주는 정도는 강이주에게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민서호가 직접 내려온 것도 유만정이 강이주를 찾아갔다는 사실을 구기빈이 알게 됐기 때문이었다.구기빈이 직접 나서려 했지만 민서호가 말렸다.결국 민서호가 대신 내려왔다.막상 와 보니 강이주는 이미 일을 깔끔하게 정리한 뒤였다.민서호는 임설과 함께 카페로 와서 강이주를 데리고 병실로 돌아갔다.병실에 도착한 뒤 강이주는 굳이 숨기지 않았다.양수은이 자신을 찾아왔던 일도 구기빈에게 그대로 이야기했다.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돕겠다고 했던 말까지 빠짐없이 전했다.민서호는 그 말이 양수은에게서 나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낮게 물었다. “진짜 그렇게 말했다고?”양수은답지 않은 행동이었다.G시에서 양수은의 수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괜히 ‘여장부’라는 소리를 듣는 게 아니었다.양수은은 무슨 일을 하든 철저히 이해득실부터 따지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그런 사람이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강이주를 돕겠다고 나선 건 아무래도 이상했다.강이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구기빈이 민서호를 바라봤다. “너 양은별이랑 약혼 얘기 있잖아. 양씨 집안 좀 알 거 아니야. 양수은이 왜 이러는 것 같아?”질문받은 민서호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다행히 강이주는 오늘 검은색 롱 원피스를 입고 있어 커피 얼룩이 크게 티 나지는 않았다.다만 쏟아진 음료가 아이스커피인 데다 매장 안 냉방까지 강해서 조금 추웠다. 팔에는 어느새 소름이 돋아 있었다.강이주는 자신에게 커피를 쏟은 사람이 앳되고 귀여운 여자라는 걸 알아차렸다.어깨까지 내려오는 잔잔한 곱슬머리를 반묶음으로 올리고 검은색 크리스털 머리핀을 꽂고 있었다.옷은 무릎까지 내려오는 흰색 원피스였다.여자는 당황한 얼굴로 가방에서 급히 티슈를 꺼내더니 울상이 된 채 강이주의 옷에 묻은 커피를 닦기 시작했다.눈가까지 붉어진 여자가 다급하게 말했다. “정말 죄송해요. 혹시 이 옷 얼마인지 알려주시겠어요? 제가 변상할게요.”여자는 어쩔 줄 몰라 하며 강이주의 옷을 계속 닦았다.강이주는 그 손길에 오히려 당황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제가 할게요.”강이주는 여자가 건넨 티슈를 받아 들며 부드럽게 웃었다.고개를 숙여 옷을 닦던 강이주가 조용히 말했다. “검은색이라 크게 티도 안 나요. 집에 가서 세탁하면 돼요. 정말 괜찮아요.”강이주는 고개를 들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여자를 바라보며 차분히 덧붙였다. “별일 아니에요.”그제야 여자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다행이에요. 그래도 정말 죄송해요. 다시 한번 사과드릴게요.”말을 마친 여자는 강이주를 향해 허리를 깊이 숙였다.예상치 못한 행동에 강이주는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려 했다.그제야 강이주는 자신의 휠체어가 통로 쪽으로 조금 나와 있어 여자가 걸려 넘어진 거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강이주는 오히려 미안해졌다. “다 그쪽 잘못은 아닌 것 같아요. 제 휠체어가 너무 나와 있었네요. 다친 데는 없어요?”강이주의 걱정에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네, 괜찮아요.”여자는 강이주의 휠체어를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리를 많이 다치셨어요? 아까 제가 부딪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에요.”“저는 양... ‘양한별’이에요. 반가워요.” 여자가 밝은 얼굴로 강이주에게 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