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시간이 흐르고 여전히 걱정스레 민지훈을 바라보던 오민은 뭔가 결심한 듯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그래. 욕 먹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할 얘기는 해야 해.’“저기... 대표님. 지금 총알을 빼내지 않으면 심각한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습니다. 연아 씨가 깨어나고 나서 대표님 이런 모습 보면 얼마나 속상해하겠어요. 아니, 어쩌면 화를 낼지도 모르겠네요. 그리고 행여나 앞으로 팔을 제대로 쓸 수 없게 되면 큰 결함을 가지게 되는 거잖아요. 다른 라이벌들 이길 수 있으시겠어요?”민지훈이 가장 끔찍하게 생각하는 건 조연아뿐이라는 걸 알고 있는 오민은 자극 요법을 사용했다.“대표님. 제발 연아 씨 입장에서도 생각해 보세요!”그제서야 살짝 흔들리던 민지훈이 결국 일어섰다.“그래요. 치료하죠.”“네, 네.”잠시 후, 역시 수술실로 옮겨진 민지훈은 바로 총알 제거 수술을 받은 뒤 마취가 풀리기도 전에 바로 조연아가 있는 응급실로 달려갔다.그리고 조연아가 이런 저런 검사를 받고 큰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한 뒤에야 그녀와 함께 VIP 병동으로 입원까지 할 수 있었다.한편 이 모든 걸 지켜보는 오민은 걱정되는 마음에 그저 발만 동동 구를뿐이었다.누구보다 냉철하고 이성적인 민지훈이 사랑 때문에 이 정도로 충동적으로 움직이다니. 이게 사랑의 힘인가 싶었다.‘연아 씨,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연아 씨가 깨어나야 저희 대표님 좀 쉬실 거 같으니까...’...조용한 병실, 차가운 달빛이 커튼을 넘어 침대를 비춰주었다.민지훈은 아직도 깨어나지 않은 조연아의 손을 꼭 잡았다.‘연아야... 제발... 제발 정신 좀 차려봐. 널 지키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힘든 건 다 내가 감당할 테니까 넌 그냥 행복만 해줘.’...한편 조연아는 깊은 꿈속을 걷고 있었다.오로라를 기다리던 그날 밤, 그토록 그리워했던 남자가 나타나 그녀를 꼭 끌어안고 귓가에 다정한 사랑의 말을 건네는 꿈이었다.하지만 다음 순간, 남자는 잔인한 얼굴로 그녀를 불바다 속으러 밀어버리고
“환자분, 어디 불편한 데는 없으십니까?”검사를 마친 의사가 물었다.말없이 고개를 저은 조연아는 또다시 공허한 눈빛으로 민지훈을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대표님, 환자분 뒤통수에 생긴 상처는 아마 며칠 동안 통증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외상이고 뇌출혈 증상도 없으니 안심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네.”의사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민지훈의 시선은 여전히 조연아를 향해 꽂혀있었다.“그럼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민지훈을 향해 꾸벅 인사를 남긴 의사가 병실을 나서려던 그때, 조연아의 목소리가 조용한 병실의 정적을 깨트렸다.“저... 어떻게 다친 거죠?”그 질문을 들은 순간, 의사는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환자분, 어떻게 다치셨는지 기억 안 나십니까?”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던 조연아는 민지훈을 돌아보더니 조심스레 물었다.“여보, 나 어떻게 다친 거야?”“지금... 나한테 뭐라고 했어?”‘여보?’확실히 어딘가 이상한 모습에 민지훈은 다시 긴장하기 시작했다.“아, 남편이라는 호칭 불편해? 미안. 그러니까 그렇게 화난 표정 짓지 말아줘.”3년 전 그때로 다시 돌아간 것 같은, 조심스럽고 겁 많은 새 같은 모습. ‘뭐지?’혼란스러웠지만 민지훈은 애써 미소를 지어보였다.“아니. 남편 맞아. 화난 거 아니야.”그리고 다시 의사를 향해 고개를 돌린 민지훈이 꾸짖 듯 물었다.“별문제 없다면서요. 이게 무슨 상황이죠?”당황스러운 건 의사도 마찬가지였다.“그러게 말입니다. 뒤통수 가격으로 인해 출혈이 있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외상일 뿐입니다. 기억상실증까지 올 수준은 아닌데요... 물에 빠진 뒤 잠깐의 익수가 있었지만 구조가 빨랐기에 뇌손상도 거의 없었고요. 그런데도 기억을 잃은 거라면 트라우마로 인한 단발적인 기억상실증이 큽니다. 이 문제는 정신과 전문의와 상담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그럼 가장 실력 좋은 의사로 컨택해 주세요.”“네.”의사를 비롯한 의료진들이 빠르게 병실을 나서고 조용해진 병실, 조연아의 옆에
“너무 무리하지 마.”민지훈이 조연아를 끌어안았다.아무런 저항 없이 얌전히 안긴 모습, 모든 게 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이때 밖에서 요란스러운 인기척이 들려왔다.“뭐? 연아가 기억상실증? 그럴 리가 없어. 내가 당장 들어가서 확인해야지.”“이모님,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나 연아 이모야. 무슨 자격으로 날 막아!”그렇게 막무가내로 문을 열고 들어온 추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그리고 다급하게 그 뒤를 따르던 오민도 눈을 질끈 감았다.‘세상에 두분 지금... 서로 안은 거 맞지?’“이모.”이때 추연을 발견한 조연아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이모도 왜 병원복 차림이에요? 이모도 어디 아파요?”“너... 지금 뭐라고 그랬어?”충격을 받은 추연의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너... 진짜 아무것도 기억 안 나는 거야?”“네.”그리고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울화가 치미는 추연이었다.“민 대표, 두 사람 이렇게 스킨십하는 거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봤어 봐. 우리 연아 입장이 얼마나 난처해지겠어? 두 사람 이미 이혼한 사이잖아.”“이혼이요?”조연아가 깜짝 놀란 얼굴로 민지훈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우리 언제 이혼한 거야?”“이혼”이라는 단어에 기분이 상한 민지훈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이모님, 이만 나가주시죠. 이모님도 다치셨는데 푹 쉬셔야죠.”오민 역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네, 의사선생님께서 이모님도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하셨으니까 얼른 가시죠.”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추연이 아니었다.“얼마나 충격이 컸으면 기억상실증에... 걱정하지 마. 잃어버린 기억은 천천히 되찾으면 되니까. 아니, 영원히 찾지 못해도 상관없어. 그 동안 있었던 일 이모가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 줄 테니까. 네 옆에 서 있는 이 남자 때문에 네가 무슨 일을 당할 뻔했는지. 그리고 두 사람이 왜 이혼하게 된 건지 전부.”하지만 조연아의 맑은 눈동자는 여전히 혼란스러움으로 가득했다.“이모 말
오민이 어떻게든 버티려는 추연을 억지로 병실에서 내보내고 다시 조용해진 병실.조연아를 꼭 안고 있던 민지훈이 한 마디 내뱉었다.“연기 좋았어.”단호한 말투에 조연아의 몸이 순간 움찔했지만 곧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큭.”피식 웃던 민지훈이 하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상관없어. 연기가 맞든 아니든 난 협조할 테니까.”“...”말없이 민지훈의 품에 안긴 조연아의 눈동자가 살짝 가라앉았다.‘뭐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내 연기는 완벽했어. 그런데 왜... 들킨 걸까?’“나 피곤해.”대충 핑계를 대고 민지훈의 품에서 벗어난 조연아는 그를 등진 채 돌아누웠다.“재워줄까?”‘예전의 조연아라면 분명 그래 달라고 하겠지.’한편, 이미 들킨 거나 마찬가지지만 모르쇠를 대기로 했으니 조연아도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어떻게 재워줄까?”이때 조연아의 곁으로 훅 다가온 민지훈의 숨결이 그대로 그녀의 귀를 적셨다.‘미친 변태자식.’여전히 눈을 굳게 감은 조연아의 볼이 슬그머니 달아올랐다.착잡한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 일부러 그러는 건지 조연아의 볼에 뽀뽀를 하고 이불까지 잘 덮어준 민지훈은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눈을 감고 있고 돌아누워 등까지 진 상태였지만 그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지는 듯했다.어지러운 마음을 애써 다잡으며 조연아는 방금 전 추연의 말과 반응들을 다시 떠올렸다.‘추신수... 그 자식이 날 물속으로 잡아당길 때 분명히 봤어. 목에 걸린 옥 목걸이를.’그 옥 목걸이는 조연아의 어머니와 추연 두 자매의 어머니, 즉 조연아의 외할머니가 두 딸을 위해 특별 제작한 유일무이한 팬던트였다.‘하지만 엄마가 하고 있던 팬던트는 6년 전에 이미 깨졌어. 유품 정리할 때 분명 확인했다고. 그럼 추신수 목에 걸린 건 이모 거란 소린데... 이모 팬던트가 왜 추신수한테 있는 거지?’한번 불씨를 튼 의심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추신수
“작은 사모님께서 방에서 뛰어내리셨어요!”저택 직원들의 비명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다.한편, 차가운 바닥에 쓰러진 조연아는 오장육부가 찢겨나가는 듯한 고통에 미간을 찌푸렸다.극심한 고통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순간, 희미한 시야로 승자의 자태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시어머니 송진희의 모습이 들어온다.“지훈아... 나 좀 살려줘...”어쩌면 생의 마지막 순간일지도 모르는 지금까지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민지훈 이름뿐이라니.‘기가 막히네...’사람은 죽기 직전 주마등을 본다고 했던가.돌이켜보면 그녀의 인생은 꽤나 비참했다.민지훈, 조연아. 두 사람이 사랑 없는 정략결혼으로 맺어진 사이라는 건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조연아의 어머니가 세상을 뜬 뒤로 “작은 사모님”으로서의 지위가 점차 위태로워지기 시작했고 결국 이렇게 “자살”로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되다니.사람들이 다들 쇼윈도 부부라고 수군거려도 조연아 본인은 당당했다.누가 뭐래도 그녀가 사랑한 건 민지훈의 와이프 자리가 아니라 민지훈이라는 남자 그 자체였으므로. 10년, 강산도 변한다는 세월 동안 한 남자만을 바라보았던 해바라기 같은 사랑.‘이 길고 긴 짝사랑도 이제 드디어 끝이네...’뜨거운 피가 조연아의 옷을 붉게 적시고 그녀의 의식은 검은 블랙홀 속으로 빨려들어간다......얼마나 지났을까?온몸이 부서지는 듯한 극심한 고통과 함께 조연아는 다시 눈을 뜬다.‘여긴 어디지? 천국인가? 아니... 설마 내가 살아있는 건가?’천천히 눈을 뜬 그녀가 미처 상황 파악을 끝내기도 전에 언제 들어도 매력적인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깼어?”익숙한 목소리에 조연아의 가는 손가락이 살짝 움찔거렸다.저택에서 추락하기 전 마지막 기억이 떠오르며 하얀 시트를 잡은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애초에 민지훈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다는 걸 알고 시작한 결혼 생활이었기에 남편으로 다정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아도 충분히 견딜 수 있었다.하지만... 민지훈이 사인한 이
‘나 때문이라고? 내가 죽인 거라고? 그럴 리가 없잖아. 내가... 내가 얼마나 바라왔던 아기인데... 지금 이 남자는 도대체 그녀를 어떤 사람으로 보고 있는 걸까? 아이를 이용해 자작극을 벌일 만큼 쓰레기라고 생각하는 걸까? 10년 동안 내가 사랑해 온 남자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 걸까...’10년을 알고 지낸 사이인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민지훈이 너무나 낯설게 느껴지는 조연아였다.조연아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당신 말이 맞아. 이제 연기 그만할래. 난 당신 사랑도 신뢰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인 것 같아. 그러니까 내가 이런 꼴을 당하는 것도 전부 내가 자초한 일이지.”두 눈을 질끈 감은 조연아는 투명한 눈물을 억지로 삼켜냈다. 한때 민지훈으로 인해 뜨겁게 불타는 심장이 똑같은 사람으로 인해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깊은 심호흡을 한 조연아가 다시 눈을 떴다. 어떻게든 눈물을 떨구지 않으려고 조연아는 침대 시트를 더 꽉 부여잡았다.‘울면 안 돼... 여기서 울면 정말 비참해지는 거야.’“하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하게 할게. 내 아기... 나 때문에 죽은 거 아니야. 그러니까 난 복수를 해야겠어.”이불을 확 젖힌 조연아는 수액 바늘을 거칠게 뽑아내곤 미친 듯이 병실을 뛰쳐나갔다.송진희...‘내 아이...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절대 못 넘어가.’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고통으로 비틀거렸지만 아이를 잃은 슬픔과 분노는 육체적 고통 따위가 누를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거실에서 여유롭게 딸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송진희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속에서 천불이 이는 기분이었다.“당신 때문에... 당신 때문에 내 아이가 죽었어!”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을 거칠게 내팽개친 조연아가 송진희의 멱살을 잡았다.“얘가 미쳤나!”평소 큰 소리 한번 낸 적 없던 며느리가 미친 여자처럼 달려드니 당황한 송진희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이혼하라고 해서 사인까지 했잖아. 그런데 나한테 왜 그랬어. 내 아이한테 왜 그랬냐고!”한편, 잔뜩 겁먹은 얼굴로
“제발. 나 좀 믿워줘. 정말 그런 거 아니야. 내가 봤어. 날 민 건 분명 어머님이었다고!”훌쩍이던 조연아가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민지훈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제발 나 좀 믿어줘.’하지만 진심으로 빛나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는 민지훈의 얼굴에는 조연아를 향한 경멸만이 가득했다.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한 민지훈이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놓았다.‘아, 이 남자는 날 믿지 않는구나. 내가 아무리 해명해도 내 말 따윈 듣지 않겠구나...’말보다 확실한 행동에 조연아는 절망스러웠다.남들 앞에서는 누구보다 인자하고 고상한 사모님인 송진희가 그녀에게만큼은 그 누구보다 악독한 시어머니라는 걸, 사람들 앞에서는 착하고 애교 많은 민지아가 사실은 누구보다 가식적인 사람이라는 걸 어떻게 증명하면 좋을까?조연아가 아무리 목이 터져라 외쳐도 사람들의 눈에 그녀는 영원히 악녀일 뿐이었다.정신력으로 겨우 버텨오던 다리가 휘청이던 순간.“조연아, 나가. 다신 너 보고 싶지 않아.”이 말을 마지막으로 민지훈은 저택을 나섰다.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조연아는 드디어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그리고, 아들 앞에서는 그렇게도 억울한 척하던 송진희, 민지아가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너도 참 멍청하다. 지훈이 내 아들이야. 설마 정말 네 말을 믿을 거라 생각하는 거야? 도대체 무슨 자신감인지 모르겠네?”팔짱을 낀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송진희는 패자를 경멸하는 승자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네가 아직도 너희 집안에서 오냐오냐 떠받들던 공주님인 줄 알아? 너희 엄마는 죽었고 너희 아버지는 벌써 내연녀, 사생아랑 살림까지 차렸다면서. 추산그룹도 너희 그 덜떨어진 삼촌이 물려받았다면서? 부모 사랑도 재산도 이제 네 몫은 없어. 그 잘난 집안 하나 믿고 우리 집에 시집온 거잖아? 이제 네 이용 가치가 없어졌으니 이만 떨어져 나가는 게 당연한 거 아니겠어?”차가운 바닥에 누운 조연아는 멍한 눈동자로 천장을 바라보았다.온몸이 욱신대는 고통보다 송진
하지만 추현의 분노에도 송진희, 민지아 두 사람은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피식 웃은 송진희가 한 발 앞으로 다가섰다.“추현도 죽었겠다. 그 집안에 얘 편 들 수 있는 사람이 있긴 해? 아, 당신? 당신이 뭔데.”추연이 다시 화를 내려던 그때, 이제 더 이상 버티기 힘들어진 조연아가 스르륵 쓰러졌다.“연아야!”깜짝 놀란 추연의 목소리가 저 동굴 깊은 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연아야! 정신 좀 차려봐. 어머, 피가...”하체에서 주르륵 흘러내리는 피를 발견한 추연의 안색 역시 창백해졌다....‘꿈인가?’깊은 잠에 빠진 조연아는 신혼여행 날의 꿈을 꾸었다.다른 점이라면 혼자 있었던 현실과 달리 민지훈이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었다.‘아, 꿈이구나...’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조연아는 밝게 웃어 보였다. 깨어나 곧 맞이할 현실이 아무리 잔혹하다 해도... 이 순간의 행복을 즐기고 싶었다.하지만 그녀의 바람과 달리 코를 찌르는 소독수 냄새와 규칙적인 기계음은 다시 그녀를 현실로 끌어당겼다.“윽...”겨우 눈을 뜬 조연아가 얕게 신음을 내뱉었다.“연아야?”그 소리를 들은 추연이 벌떡 일어섰다.“이모...”초췌해진 안색의 추연이 초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너 이틀이나 누워있었어. 이모가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 지금은 좀 어때? 아직도 많이 아파?”“이틀이나 누워있었다고요?”조연아는 아직도 천근만근인 머리를 굴려보려 애썼다.“그래. 출혈이 심했는데 다행히 잘 잡혔대. 절대 안정이라니까 당분간 아무 생각하지 말고 푹 쉬어.”“고마워요, 이모.”“가족끼리 고맙다는 말 하는 거 아니야. 정 고마우면 얼른 낫든가.”조연아를 위해 물을 따라준 추연이 물었다.“그런데... 너랑 민 서방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이혼이라니.”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가족들은 민지훈에 대한 조연아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지독한 시집살이와 남편의 냉대에도 그에 대한 사랑 하나만으로 지옥 같은 결혼생활을 버텨온 그녀인데 왜 갑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