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카페에서 마주 앉은 민지는 해원의 얼굴을 살피더니 먼저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왜?”
“너 표정이 이상해.”
“내 표정이 어때서.”
“괜찮은 척하는 표정.”
해원은 웃으려다 말았다.
민지는 오래된 친구였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차리는 것이 있었다.
“요즘 생각이 조금 많아졌어.”
“도겸 씨 때문이야?”
해원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 짧은 침묵만으로도 민지는 어느 정도 알아들은 듯했다. 하지만 더 캐묻지는 않았다. 대신 커피잔을 내려놓고 물었다.
“너는 요즘 행복해?”
해원은 눈을 들었다.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다.
“갑자기?”
“갑자기 아니야. 나 예전부터 궁금했어. 너 결혼하고 나서는 하고 싶다는 얘기를 거의 안 하잖아.”
“내가 뭘?”
“디자인.”
민지가 단호하게 말했다.
“너 진짜 기억 안 나?”
“뭘?”
“너 졸업 작품 발표했을 때 교수님이 뭐라고 했는지.”
“…….”
“네가 언젠가 자기 이름 걸고 브랜드 만들면 제일 먼저 투자하고 싶다고 했잖아.”
해원이 작게 웃었다.
“그게 벌써 몇 년 전인데.”
“그러니까.”
민지는 웃지 않았다.
“그렇게 잘하던 애가 왜 이제는 자기 재능까지 과거형으로 말하냐고. 네 브랜드 만들 거라고, 언젠가는 네가 디자인한 옷을 사람들이 입고 다니는 걸 보고 싶다고. 그랬던 애가 어느 순간부터 그 이야기를 안 하더라.”
해원은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냥... 결혼하고 나니까 상황이 달라졌잖아.”
“결혼하면 달라지는 거 많지. 그런데 네가 하고 싶은 걸 전부 미뤄야 하는 건 아니잖아.”
“도겸 씨도 바쁘고, 나도 집안일을 해야 하고. 지금 당장 뭘 시작하기에는...”
말끝이 흐려졌다. 민지는 재촉하지 않았다. 한참 뒤, 해원이 작게 웃었다.
“나 사실 오늘 예전 스케치북을 찾았어.”
“정말?”
“응. 오랜만에 봤는데, 아직도 좋더라.”
그 말을 하면서 해원은 자신이 조금 놀랐다. 아직도 좋다는 말. 너무 오래 입 밖으로 내지 않아 잊어버린 줄 알았던 감정이었다.
“다시 해 보고 싶어?”
해원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하고 싶었다. 하지만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몰랐다. 지금의 자신에게 실력이 남아 있을지도,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도 확신이 없었다.
“모르겠어. 자신은 없어.”
“그럼 자신이 생길 때까지 기다릴 거야?”
민지가 웃으며 물었다.
“너 원래 그런 애 아니었잖아.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도 일단 해 보고, 안 되면 될 때까지 붙잡고 있던 애였잖아.”
해원은 아무 말 없이 친구를 바라보았다.
그 말이 오래된 기억을 건드렸다. 맞았다. 예전의 자신은 실패를 두려워하면서도 시작하는 것까지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언제부터 시작하기 전에 먼저 포기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해원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나... 다시 디자인해 보고 싶어.”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그런데도 그 말을 꺼내고 나니 가슴 한구석이 조금 가벼워졌다.
민지는 환하게 웃었다.
“그래. 그럼 해 봐.”
“당장 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그려. 네가 좋아하는 옷부터.”
해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아무것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면 여전히 도겸과 같은 집에서 살아야 했고, 내일이면 다시 평범한 하루가 시작될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만큼은 알 것 같았다. 자신이 무언가를 원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도 된다는 걸.
***
밤 열한 시.
서도겸은 집으로 돌아와 넥타이를 풀었다. 거실은 조용했다. 불은 켜져 있었지만 해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강해원 씨?”
대답이 없었다. 도겸은 시계를 확인했다. 평소라면 아직 잠들지 않았을 시간이었다. 그는 계단을 올라가 침실 문을 열었다. 해원은 침대 옆에 앉아 무언가를 정리하고 있었다. 도겸이 들어오자 고개를 들었다.
“오셨어요?”
“네. 아직 안 주무셨습니까?”
“조금 정리할 게 있어서요.”
해원의 옆에는 오래된 스케치북이 놓여 있었다. 도겸은 그것을 잠깐 바라보았다.
“그건 뭡니까?”
“예전에 그리던 것들이에요.”
“디자인입니까?”
“네. 결혼하기 전에요.”
해원은 스케치북을 가볍게 덮었다. 도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아는 해원은 결혼 전부터 옷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결혼한 뒤에는 그런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보시는 모양이네요.”
“네. 그러네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해원은 무언가를 더 말하고 싶었지만, 도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그는 화면을 확인하고 전화를 받았다.
“말씀하세요.”
업무에 관한 통화였다. 도겸은 곧바로 서재로 향했고, 해원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입 밖으로 꺼내려던 말은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스케치북을 내려다보던 해원은 천천히 손을 뻗어 표지를 쓸었다. 예전 같았으면 도겸의 통화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을 것이다. 그가 돌아오면 오늘 무엇을 했는지 이야기하고, 디자인을 다시 해 보고 싶다는 말도 조심스럽게 꺼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자신이 원하는 마음까지 접어 둘 필요는 없었다.
해원은 스케치북을 침대 옆 서랍에 넣었다. 아직 도겸에게 자신의 꿈을 이야기할 생각은 없었다. 그 꿈이 어떤 모습으로 다시 시작될지, 자신도 알지 못했으니까.
***
해원은 침실 한쪽에 앉아 서랍에 넣어두었던 스케치북을 꺼내어 펼쳤다.
미완성으로 남아 있는 디자인이 눈에 들어왔다. 종이 위의 선들은 여전히 서툴렀지만, 그 안에는 분명 자신이 있었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 있었고, 무엇을 만들고 싶은지 알고 있었으며, 언젠가 그 꿈을 이루겠다는 마음도 있었다.
해원은 그림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때의 자신은 지금보다 가진 것이 적었지만, 적어도 무엇을 원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지금은 어떨까. 좋은 아내가 되는 것. 도겸이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집을 만드는 것. 그의 곁에서 오래도록 함께 살아가는 것.
그 모든 것이 여전히 소중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자신의 삶이 충분한지 묻는다면, 해원은 아직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는 연필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미완성으로 남은 디자인의 옆에 작은 선 하나를 그었다. 아주 사소한 움직임이었다.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않을 그림이었고, 당장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결과물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해원은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오랜만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연필을 내려놓고 스케치북을 덮었다. 아직은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았다. 도겸을 사랑하는 마음도 그대로였다. 다만 이제는 그 사랑 안에서 자신을 잃고 싶지 않았다.
해원은 침대 옆에 스케치북을 올려 두었다. 그리고 불을 끄기 전, 조용히 중얼거렸다.
“나도 내 시간이 필요하겠지.”
아무도 듣지 못한 혼잣말이었다.
하지만 그날 밤, 해원은 처음으로 자신의 삶에 관해 남편이 아닌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서도겸은 회의실 문을 열자마자 걸음을 멈췄다. 백유라가 창가에 서 있었다. 단정한 흰색 블라우스에 검은색 슬랙스. 긴 머리카락은 느슨하게 묶여 있었다. 그녀는 손에 든 서류를 읽고 있었다.“안녕하세요, 대표님.”도겸을 발견한 유라가 먼저 인사했다.“일찍 오셨군요.”“네. 자료를 조금 더 확인하려고요.”유라는 가볍게 웃었다.“이번에는 실수하고 싶지 않아서요.”도겸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 자리에 앉았다.“지난번 협상은 잘 마무리됐다고 들었습니다.”“네. 다행히 저희가 제안한 조건을 받아들였어요.”“고생 많으셨습니다.”유라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그러더니 조금 장난스럽게 웃었다.“대표님한테 그런 말씀 들으니까 기분이 좋네요.”도겸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성과가 있었으니 당연히 감사드려야죠.”“그렇긴 하죠.”유라는 의자를 빼고 앉았다.“그런데 대표님.”“네.”“저 이번 프로젝트, 정말 잘하고 싶어요.”도겸이 시선을 들었다.“충분히 잘하고 계십니다.”“아니요. 그냥 모델로서가 아니라요.”유라는 잠시 말을 멈췄다.“제 이름을 걸고 참여한 일이니까, 끝까지 책임지고 싶어요.”도겸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말은 의외였다. 그동안 유라는 뛰어난 모델이었다. 대중의 관심을 끄는 방법을 알았고, 카메라 앞에서는 누구보다 능숙했다. 하지만 사업적인 부분에 이토록 적극적으로 관여한 적은 드물었다.“좋은 자세입니다.”도겸이 말했다.“그런 마음이라면 앞으로도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유라는 미소 지었다.“그렇게 말씀해 주시니까 힘이 나네요.”그녀는 서류를 펼쳤다.“그럼 오늘도 열심히 해 볼까요, 대표님?”회의는 두 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유라는 예상보다 훨씬 꼼꼼했다. 해외 캠페인의 광고 문구부터 촬영 콘셉트, 모델의 이미지 활용 방식까지. 실무진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짚어 냈고, 몇 가지 대안을 직접 제안하기도 했다. 도겸은 그녀의 의견을 들으며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그 방향이 더 낫겠습니다.”“
도겸은 대표실에서 마지막 보고서를 확인하고 있었다. 최현석이 문을 두드렸다.“대표님, 오늘 일정은 여기까지입니다.”“수고하셨습니다.”“저녁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도겸은 시계를 확인했다. 여섯 시 십 분. 평소라면 아직 퇴근을 생각할 시간이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은 문득 해원이 떠올랐다. 며칠 전 함께 식사했던 날. 레스토랑에서 웃던 아내의 얼굴. 자신이 코트를 걸쳐 주자 조금 놀란 듯 바라보던 눈빛. 도겸은 잠시 생각하다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오늘 저녁은 집에서 먹겠습니다.]잠시 후 답장이 왔다.[네. 기다릴게요.]도겸은 그 문장을 바라보았다. 기다릴게요. 익숙한 말이었다. 해원은 언제나 자신을 기다렸다. 그런데 요즘은 그 말이 예전과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도겸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오늘은 이만 퇴근하겠습니다.”최현석이 조금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네, 대표님.”***저녁 일곱 시. 해원은 식탁에 음식을 차리고 있었다. 현관문이 열리자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오셨어요?”“네.”도겸은 재킷을 벗으며 말했다.“오늘은 일찍 끝났습니다.”“잘됐네요.”해원은 웃었다.“마침 저녁도 다 됐어요.”도겸은 식탁을 바라보았다. 따뜻한 국과 반찬들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그는 의자를 빼고 앉았다.“오늘은 뭐 하셨습니까?”해원이 잠시 멈췄다.“저요?”“네.”“작업실에 다녀왔어요.”“그렇습니까.”“오늘 드디어 옷 하나를 완성했어요.”해원의 목소리가 조금 밝아졌다. 도겸은 그녀를 바라보았다.“직접 만든 겁니까?”“네.”“어떤 옷입니까?”해원은 잠시 망설였다. 예전 같았으면 사진부터 보여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아직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남겨 두고 싶었다.“블라우스예요.”“그렇습니까.”“네.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지만요.”도겸은 고개를 끄덕였다.“완성했다니 축하합니다.”해원은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작게 웃었다.“고마워요.”별것 아닌 말이었다. 하지만 해원은 그 말이 기뻤다. 남편이
태성어패럴 본사 회의실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대형 스크린에는 해외 캠페인 계약서의 수정 조항이 띄워져 있었다. 백유라는 차분하게 서류를 넘겼다.“문제는 이 부분이에요.”그녀가 화면을 가리켰다.“현지 에이전시에서 제 초상권 사용 범위를 변경했어요. 기존에는 아시아 지역 광고에 한정되어 있었는데, 이번 수정안에는 유럽 온라인 플랫폼까지 포함되어 있거든요.”홍보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계약 조건을 확대하려는 것 같습니다.”“단순한 확대가 아니에요.”유라는 서류를 한 장 넘겼다.“이대로 계약하면 제 이미지가 다른 브랜드의 프로모션에도 간접적으로 사용될 가능성이 있어요.”회의실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도겸이 물었다.“대안이 있습니까?”유라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네.”그녀는 준비해 온 자료를 스크린에 띄웠다.“초상권 사용 범위를 지역이 아니라 매체별로 제한하는 거예요. 그러면 태성은 글로벌 캠페인을 진행할 수 있고, 저도 이미지 사용을 관리할 수 있어요.”도겸은 자료를 살폈다.“현지 에이전시가 받아들이겠습니까?”“받아들이게 만들어야죠.”유라는 미소 지었다.“제가 직접 협의할게요.”홍보팀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하지만 상대 측에서 추가 비용을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그 부분도 생각했어요.”유라는 또 다른 자료를 내밀었다.“제가 유럽 일정 중에 진행하기로 했던 개인 화보가 있거든요. 그 촬영을 태성 캠페인과 연계하면 추가 제작비를 줄일 수 있어요.”도겸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개인 일정을 조정하겠다는 겁니까?”“네.”“그럴 필요까지는 없습니다.”유라는 고개를 저었다.“필요해요. 이번 캠페인은 저한테도 중요하니까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차분하게 덧붙였다.“저도 태성의 얼굴로 계약한 사람이잖아요. 제 역할은 제대로 해야죠.”도겸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았다.유라는 오늘 한 번도 사적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평소처럼 농담을 건네지도 않았고, 불필요하게 친근한 태도를 보이지도 않았다.
저녁 일곱 시. 도겸이 예약한 곳은 조용한 프렌치 레스토랑이었다. 해원은 안내받은 자리에 앉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은은한 조명과 정갈하게 놓인 식기. 창가 너머로 서울의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여기 예쁘네요.”“마음에 듭니까?”“네.”도겸은 메뉴판을 펼쳤다.“먹고 싶은 걸로 고르세요.”해원은 그를 바라보았다.“도겸 씨는요?”“저는 아무거나 괜찮습니다.”“그럼 제가 골라도 돼요?”“물론입니다.”해원은 메뉴판을 살폈다. 오랜만에 둘이서 외식하는 자리였다. 그녀는 조금 설렜다. 도겸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어쩌면 두 사람 사이도 조금씩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아서.식사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겸이 물었다.“디자인 공부는 잘되고 있습니까?”해원이 고개를 들었다.“네. 재미있어요.”“그렇습니까.”“요즘은 시간 가는 줄 모르겠어요.”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덧붙였다.“예전에 학교 다닐 때 생각도 나고요.”도겸은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렇게 좋아했습니까?”해원은 조금 놀란 듯 웃었다.“네. 정말 좋아했어요.”도겸은 잠시 생각했다. 결혼 전 해원이 디자인을 공부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일이 그녀에게 얼마나 중요한 의미였는지는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계속해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해원의 눈빛이 밝아졌다.“정말요?”“본인이 좋아하는 일 아닙니까.”“…네.”해원은 작게 웃었다.“그렇게 말씀해 주시니까 좋네요.”도겸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해원이 이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본 것이 언제였을까. 그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식사를 마치고 레스토랑을 나섰을 때였다. 도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최현석이었다.“네, 최 실장님.”—대표님, 죄송합니다. 급하게 확인하실 일이 생겼습니다.“무슨 일입니까?”—백유라 씨가 참여하는 해외 캠페인 계약 건입니다. 현지 에이전시에서 조건을 변경하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도겸의 표정이 굳었다.“계약서 보내 주세요.”—네. 그런데 백유라 씨 측
백유라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서도겸의 목소리가 귓가에 남아 있었다.‘앞으로 제 아내에게 개인적으로 연락하지 마세요.’‘제 아내와 관련된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유라는 천천히 와인잔을 내려놓았다.“도겸 씨.”—네.“혹시 화나셨어요?”—화가 난 건 아닙니다. 다만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저는 사모님이랑 친하게 지내고 싶었을 뿐인데요.”—그 마음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해원 씨가 원하지 않는다면 개인적으로 만나실 필요는 없겠죠.유라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사모님이 뭐라고 하셨어요?”—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유라 씨와 저는 업무로 만나는 사이입니다. 앞으로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업무로 만나는 사이. 유라는 그 말을 속으로 되뇌었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다. 함께 해외 행사에 참석한 적도 있었고, 중요한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뒤 둘이서 축하한 적도 있었다. 도겸은 언제나 선을 지켰다. 그런 남자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유라는 자신만큼은 조금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고작 한해원 때문에.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한다고? 유라는 손가락으로 와인잔의 가장자리를 천천히 쓸었다.“알겠어요.”목소리는 놀라울 만큼 부드러웠다.“제가 생각이 짧았네요.”—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앞으로 조심할게요. 사모님께도 불편하게 해 드려서 죄송하다고 전해 주세요.”—알겠습니다.“그리고 도겸 씨.”—말씀하세요.유라는 잠시 숨을 골랐다.“저희 사이도 괜히 오해받지 않게 조심해야겠네요.”도겸은 대답하지 않았다. 유라는 작게 웃었다.“그럼 다음 회의 때 뵐게요, 대표님.”통화가 끝났다. 유라는 한동안 휴대전화를 내려다보았다. 대표님. 일부러 그렇게 불렀다. 그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업무적인 관계로 돌아가 줄 생각이었다. 적어도 겉으로는.유라는 천천히 소파에 등을 기댔다.“좋아요, 서도겸 씨.”그녀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그렇게 선을 지키고 싶다면...”잠
오후 세 시. 청담동의 한 호텔 라운지.백유라는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해원이 들어서자 그녀는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사모님, 여기예요.”“안녕하세요.”“갑자기 연락드렸는데 와 주셔서 감사해요.”“아니에요.”해원은 맞은편에 앉았다. 유라는 그녀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연한 베이지색 블라우스와 검은색 스커트. 화려한 장신구도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눈에 거슬릴 만큼 단정했다.“지난번보다 얼굴이 좋아 보이세요.”“그런가요?”“네. 요즘 디자인 공부하시느라 바쁘시죠?”해원은 조금 놀랐다.“기억하고 계셨네요.”“그럼요. 사모님이 직접 옷을 만드신다고 하셔서 인상 깊었거든요.”유라는 웃으며 커피잔을 들었다.“도겸 씨도 알고 계세요?”“네.”“아, 말씀하셨구나.”해원은 잠시 시선을 내렸다. 정확히는 자신이 말한 것이 아니었다. 도겸은 유라에게서 그 사실을 들었다. 유라는 그 미묘한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사실 도겸 씨가 사모님 이야기 잘 안 하시거든요.”해원의 손이 멈췄다.“그러세요?”“네. 워낙 사적인 이야기 안 하는 분이잖아요.”유라는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저랑은 오래 알고 지내서 그런지 가끔 개인적인 이야기도 하시지만요.”해원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라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마치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아, 맞다. 어제 사진 보셨어요?”“...네.”“아휴, 댓글 때문에 정말 놀랐어요.”유라는 민망하다는 듯 웃었다.“사람들이 도겸 씨랑 저를 자꾸 엮더라고요.”해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혹시 사모님, 저 때문에 불편하셨어요?”그 질문은 지나치게 다정했다. 그래서 오히려 대답하기 어려웠다. 해원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업무 때문에 함께하신 거잖아요.”“그렇죠.”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제가 괜히 신경 쓰여서요. 도겸 씨가 워낙 표현이 없는 분이라 사모님이 오해하실까 봐.”해원은 천천히 눈을 들었다.“제가 오해할 일이 있나요?”유라의 미소가 잠깐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