تسجيل الدخول태성어패럴 대표실.
서도겸은 책상 위에 놓인 보고서를 넘기고 있었다.
검은 정장에 검은 넥타이. 흐트러짐 하나 없는 차림이었다. 단정하게 넘긴 검은 머리카락 아래로 드러난 짙은 눈동자는 서류의 작은 숫자 하나까지 놓치지 않을 듯 날카로웠다. 빈틈없이 잘생긴 얼굴에는 감정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무표정이 걸려 있었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최현석이 들어왔다.
“대표님, 다음 시즌 캠페인 관련해서 보고드릴 사항이 있습니다.”
도겸은 시선을 들지 않은 채 대답했다.
“말하세요.”
“백유라 씨 측에서 다음 시즌 캠페인 관련 미팅을 요청했습니다. 대표님 참석을 원한다고 합니다.”
그제야 도겸이 보고서에서 시선을 뗐다.
“시간 잡으세요.”
“이번 주 목요일 오후로 조율해 보겠습니다. 백유라 씨 측에서는 대표님과 직접 논의하고 싶은 사안이 있다고 합니다.”
“구체적인 안건은?”
“캠페인 방향과 계약 조건 전반이라고 합니다. 세부 내용은 미팅 전에 전달하겠다고 했습니다.”
도겸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료 먼저 받아 보세요. 검토할 가치가 있는 내용이면 직접 참석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현석은 태블릿을 확인하다가 문득 덧붙였다.
“백유라 씨는 이번 시즌에도 단독 캠페인 모델로 계약을 연장하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성과가 좋으면 연장하면 됩니다. 개인적인 친분과 계약은 별개니까요.”
“네, 대표님.”
현석이 물러나려던 순간이었다.
“아.”
도겸이 무언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백유라 씨가 지난번에 요청한 자료는 전달됐습니까?”
현석의 시선이 잠시 멈췄다.
백유라. 도겸이 그녀의 일을 직접 확인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았다. 두 사람은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고, 유라는 태성어패럴의 주요 캠페인을 담당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업무상으로만 설명하기에는 조금 자연스럽고, 그렇다고 다른 관계라고 단정하기에는 모호한 거리. 그 애매한 친밀함이 두 사람 사이에는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어제 전달했습니다. 백유라 씨 측에서도 확인했다고 합니다.”
“그럼 됐습니다.”
도겸은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
강남의 프라이빗 스튜디오.
“좋아요, 유라 씨. 이번에는 시선만 조금 더 아래로 내려 볼게요.”
카메라 셔터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백유라는 렌즈를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검은색 새틴 드레스가 몸의 곡선을 따라 매끄럽게 흘러내렸고, 한쪽 어깨를 드러낸 과감한 디자인은 그녀 특유의 도발적인 분위기를 한층 강조했다.
허리선은 가늘게 잡혀 있었고, 깊게 파인 네크라인과 길게 드러난 다리 라인은 세련되면서도 대담했다. 과하게 장식하지 않았는데도 시선이 머무는 옷차림이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어떤 스타일이 어울리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백유라의 외모는 한마디로 화려했다. 긴 흑갈색 머리카락은 굵은 웨이브를 그리며 어깨 아래로 흘러내렸고, 빛을 받으면 짙은 갈색으로 반짝였다. 선명한 눈썹 아래 자리한 눈매는 길고 매혹적이었다. 눈꼬리를 살짝 강조한 메이크업과 또렷한 아이라인이 눈동자의 깊이를 더했고, 윤곽이 뚜렷한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높은 콧대와 도톰한 입술, 날렵하면서도 우아한 턱선까지. 어느 각도에서 촬영해도 얼굴의 장점이 살아났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표정이었다. 유라는 웃을 때와 웃지 않을 때의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환하게 웃으면 친근하고 사랑스러운 인플루언서처럼 보였지만, 입술에 미소를 거두고 카메라를 바라보면 순식간에 사람을 긴장시키는 묘한 매력이 드러났다.
섹시하다는 말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외모였지만, 그저 노출이 많은 옷을 입는다고 만들어지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자신의 매력을 숨기지 않는 태도. 시선을 피하지 않는 눈빛. 그리고 자신이 주목받는 상황을 조금도 불편해하지 않는 여유. 그 모든 것이 백유라를 만들었다.
서른 살. 팔로워 수백만 명을 보유한 패션 인플루언서이자 여러 명품 브랜드의 캠페인 모델로 활동하는 유명 인사.
그녀가 착용한 옷과 가방, 액세서리는 게시물이 올라온 지 몇 시간 만에 검색어에 오르곤 했다. 브랜드들은 유라의 영향력을 원했고, 대중은 그녀의 일상을 궁금해했다. 유라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컷! 너무 좋아요. 마지막 사진만 한 번 더 갈게요.”
촬영 감독의 말에 유라가 미소를 지었다.
“네. 이번에는 조금 더 강한 느낌으로 갈까요?”
“맞아요. 지금 그 표정이 정말 좋아요.”
유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카메라 앞에 섰다.
찰칵, 찰칵.
촬영이 끝나자 스태프들이 모니터 앞으로 모여들었다.
“이번 화보 진짜 잘 나왔어요.”
“이 사진은 반응 엄청날 것 같은데요?”
유라는 모니터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마음에 들었다. 정확히 자신이 원했던 분위기였다.
그녀는 스태프들에게 가볍게 웃어 보인 뒤 대기실로 향했다. 문이 닫히자 비로소 휴대전화를 꺼냈다. 화면에는 아침부터 도착한 메시지가 여러 개 쌓여 있었다. 광고 일정, 브랜드 협찬 제안, 다음 주 행사 초청장. 그중 유라의 시선을 붙잡은 것은 소속사 담당자가 보낸 메시지였다.
[백유라 님, 태성어패럴 측에서 목요일 오후 미팅 가능하다고 합니다. 서도겸 대표님 참석 여부는 최종 확인 중입니다.]
유라는 메시지를 읽고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최종 확인 중이라. 그녀는 굳이 답장부터 보내지 않았다. 대신 연락처 목록을 열어 익숙한 이름을 찾았다.
서도겸. 통화 버튼을 누르려던 손가락이 잠시 멈췄다. 업무 일정 하나 확인하겠다고 직접 전화하는 건 이상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런 연락을 주고받을 만큼 오래 알고 지냈으니까.
하지만 유라는 잠시 생각을 바꿨다. 전화를 거는 대신 메시지를 보냈다.
[목요일 미팅 참석하신다면서요?]
답장은 곧바로 오지 않았다.
유라는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메이크업을 수정했다.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립스틱을 한 번 더 덧발랐다.
몇 분 뒤, 화면이 켜졌다.
[안건 확인 후 참석하겠습니다.]
유라는 메시지를 읽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한결같네.”
말투는 담담했지만, 표정에는 익숙한 애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다시 답장을 입력했다.
[대표님은 여전하시네요. 얼굴 보고 이야기하는 게 훨씬 빠르겠어요.]
이번에는 답장이 오지 않았다. 유라는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았다.
괜찮았다. 도겸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말이 많지 않았고, 상대가 무엇을 기대하는지 알면서도 굳이 맞춰 주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런데도 유라는 그에게 쉽게 싫증이 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만났던 다른 남자들과 달랐다. 유라의 외모나 유명세에 쉽게 휘둘리지 않았고, 관심을 얻기 위해 과장된 말을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 무심함이 신경 쓰였다.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대부분의 사람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서도겸은 달랐다. 그래서 더 오래 눈길이 갔다.
유라는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며 천천히 웃었다. 목요일이면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기분이 좋아졌다.
태성어패럴 본사 회의실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대형 스크린에는 해외 캠페인 계약서의 수정 조항이 띄워져 있었다. 백유라는 차분하게 서류를 넘겼다.“문제는 이 부분이에요.”그녀가 화면을 가리켰다.“현지 에이전시에서 제 초상권 사용 범위를 변경했어요. 기존에는 아시아 지역 광고에 한정되어 있었는데, 이번 수정안에는 유럽 온라인 플랫폼까지 포함되어 있거든요.”홍보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계약 조건을 확대하려는 것 같습니다.”“단순한 확대가 아니에요.”유라는 서류를 한 장 넘겼다.“이대로 계약하면 제 이미지가 다른 브랜드의 프로모션에도 간접적으로 사용될 가능성이 있어요.”회의실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도겸이 물었다.“대안이 있습니까?”유라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네.”그녀는 준비해 온 자료를 스크린에 띄웠다.“초상권 사용 범위를 지역이 아니라 매체별로 제한하는 거예요. 그러면 태성은 글로벌 캠페인을 진행할 수 있고, 저도 이미지 사용을 관리할 수 있어요.”도겸은 자료를 살폈다.“현지 에이전시가 받아들이겠습니까?”“받아들이게 만들어야죠.”유라는 미소 지었다.“제가 직접 협의할게요.”홍보팀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하지만 상대 측에서 추가 비용을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그 부분도 생각했어요.”유라는 또 다른 자료를 내밀었다.“제가 유럽 일정 중에 진행하기로 했던 개인 화보가 있거든요. 그 촬영을 태성 캠페인과 연계하면 추가 제작비를 줄일 수 있어요.”도겸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개인 일정을 조정하겠다는 겁니까?”“네.”“그럴 필요까지는 없습니다.”유라는 고개를 저었다.“필요해요. 이번 캠페인은 저한테도 중요하니까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차분하게 덧붙였다.“저도 태성의 얼굴로 계약한 사람이잖아요. 제 역할은 제대로 해야죠.”도겸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았다.유라는 오늘 한 번도 사적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평소처럼 농담을 건네지도 않았고, 불필요하게 친근한 태도를 보이지도 않았다.
저녁 일곱 시. 도겸이 예약한 곳은 조용한 프렌치 레스토랑이었다. 해원은 안내받은 자리에 앉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은은한 조명과 정갈하게 놓인 식기. 창가 너머로 서울의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여기 예쁘네요.”“마음에 듭니까?”“네.”도겸은 메뉴판을 펼쳤다.“먹고 싶은 걸로 고르세요.”해원은 그를 바라보았다.“도겸 씨는요?”“저는 아무거나 괜찮습니다.”“그럼 제가 골라도 돼요?”“물론입니다.”해원은 메뉴판을 살폈다. 오랜만에 둘이서 외식하는 자리였다. 그녀는 조금 설렜다. 도겸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어쩌면 두 사람 사이도 조금씩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아서.식사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겸이 물었다.“디자인 공부는 잘되고 있습니까?”해원이 고개를 들었다.“네. 재미있어요.”“그렇습니까.”“요즘은 시간 가는 줄 모르겠어요.”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덧붙였다.“예전에 학교 다닐 때 생각도 나고요.”도겸은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렇게 좋아했습니까?”해원은 조금 놀란 듯 웃었다.“네. 정말 좋아했어요.”도겸은 잠시 생각했다. 결혼 전 해원이 디자인을 공부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일이 그녀에게 얼마나 중요한 의미였는지는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계속해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해원의 눈빛이 밝아졌다.“정말요?”“본인이 좋아하는 일 아닙니까.”“…네.”해원은 작게 웃었다.“그렇게 말씀해 주시니까 좋네요.”도겸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해원이 이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본 것이 언제였을까. 그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식사를 마치고 레스토랑을 나섰을 때였다. 도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최현석이었다.“네, 최 실장님.”—대표님, 죄송합니다. 급하게 확인하실 일이 생겼습니다.“무슨 일입니까?”—백유라 씨가 참여하는 해외 캠페인 계약 건입니다. 현지 에이전시에서 조건을 변경하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도겸의 표정이 굳었다.“계약서 보내 주세요.”—네. 그런데 백유라 씨 측
백유라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서도겸의 목소리가 귓가에 남아 있었다.‘앞으로 제 아내에게 개인적으로 연락하지 마세요.’‘제 아내와 관련된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유라는 천천히 와인잔을 내려놓았다.“도겸 씨.”—네.“혹시 화나셨어요?”—화가 난 건 아닙니다. 다만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저는 사모님이랑 친하게 지내고 싶었을 뿐인데요.”—그 마음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해원 씨가 원하지 않는다면 개인적으로 만나실 필요는 없겠죠.유라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사모님이 뭐라고 하셨어요?”—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유라 씨와 저는 업무로 만나는 사이입니다. 앞으로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업무로 만나는 사이. 유라는 그 말을 속으로 되뇌었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다. 함께 해외 행사에 참석한 적도 있었고, 중요한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뒤 둘이서 축하한 적도 있었다. 도겸은 언제나 선을 지켰다. 그런 남자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유라는 자신만큼은 조금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고작 한해원 때문에.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한다고? 유라는 손가락으로 와인잔의 가장자리를 천천히 쓸었다.“알겠어요.”목소리는 놀라울 만큼 부드러웠다.“제가 생각이 짧았네요.”—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앞으로 조심할게요. 사모님께도 불편하게 해 드려서 죄송하다고 전해 주세요.”—알겠습니다.“그리고 도겸 씨.”—말씀하세요.유라는 잠시 숨을 골랐다.“저희 사이도 괜히 오해받지 않게 조심해야겠네요.”도겸은 대답하지 않았다. 유라는 작게 웃었다.“그럼 다음 회의 때 뵐게요, 대표님.”통화가 끝났다. 유라는 한동안 휴대전화를 내려다보았다. 대표님. 일부러 그렇게 불렀다. 그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업무적인 관계로 돌아가 줄 생각이었다. 적어도 겉으로는.유라는 천천히 소파에 등을 기댔다.“좋아요, 서도겸 씨.”그녀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그렇게 선을 지키고 싶다면...”잠
오후 세 시. 청담동의 한 호텔 라운지.백유라는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해원이 들어서자 그녀는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사모님, 여기예요.”“안녕하세요.”“갑자기 연락드렸는데 와 주셔서 감사해요.”“아니에요.”해원은 맞은편에 앉았다. 유라는 그녀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연한 베이지색 블라우스와 검은색 스커트. 화려한 장신구도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눈에 거슬릴 만큼 단정했다.“지난번보다 얼굴이 좋아 보이세요.”“그런가요?”“네. 요즘 디자인 공부하시느라 바쁘시죠?”해원은 조금 놀랐다.“기억하고 계셨네요.”“그럼요. 사모님이 직접 옷을 만드신다고 하셔서 인상 깊었거든요.”유라는 웃으며 커피잔을 들었다.“도겸 씨도 알고 계세요?”“네.”“아, 말씀하셨구나.”해원은 잠시 시선을 내렸다. 정확히는 자신이 말한 것이 아니었다. 도겸은 유라에게서 그 사실을 들었다. 유라는 그 미묘한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사실 도겸 씨가 사모님 이야기 잘 안 하시거든요.”해원의 손이 멈췄다.“그러세요?”“네. 워낙 사적인 이야기 안 하는 분이잖아요.”유라는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저랑은 오래 알고 지내서 그런지 가끔 개인적인 이야기도 하시지만요.”해원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라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마치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아, 맞다. 어제 사진 보셨어요?”“...네.”“아휴, 댓글 때문에 정말 놀랐어요.”유라는 민망하다는 듯 웃었다.“사람들이 도겸 씨랑 저를 자꾸 엮더라고요.”해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혹시 사모님, 저 때문에 불편하셨어요?”그 질문은 지나치게 다정했다. 그래서 오히려 대답하기 어려웠다. 해원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업무 때문에 함께하신 거잖아요.”“그렇죠.”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제가 괜히 신경 쓰여서요. 도겸 씨가 워낙 표현이 없는 분이라 사모님이 오해하실까 봐.”해원은 천천히 눈을 들었다.“제가 오해할 일이 있나요?”유라의 미소가 잠깐 멈췄다
밤 열한 시. 도겸이 집으로 돌아왔다. 해원은 소파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오셨어요?”“네.”“행사는 잘 다녀오셨어요?”도겸이 잠시 멈췄다.“알고 있었습니까?”“사진을 봤어요.”“아.”도겸은 넥타이를 풀었다.“협찬사 행사였습니다.”“네. 알아요.”해원은 책을 덮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백유라 씨랑 많이 친하세요?”도겸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오래 알고 지낸 사이입니다.”“그렇군요.”“왜 묻습니까?”해원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사진 속 두 사람이 떠올랐다. 그녀는 입술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괜한 오해를 하고 싶지 않았다.“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요.”도겸은 고개를 끄덕였다.“업무상 자주 만날 뿐입니다.”“...네.”그의 대답은 간결했다. 해원은 더 묻지 않았다.하지만 그날 밤. 그녀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며칠 전 자신을 끌어안으려던 남편의 손길이 떠올랐다. 그리고 오늘 사진 속에서 백유라가 그의 팔을 자연스럽게 잡고 있던 모습도.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자신이 예민한 것일까. 아니면 정말. 두 사람 사이에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것일까.***한편, 같은 시각.백유라는 침대에 누워 휴대전화를 보고 있었다. SNS에 올린 사진은 빠르게 퍼지고 있었다.그녀는 댓글을 하나씩 읽었다. 그러다 문득 해원의 얼굴이 떠올랐다.청담동 쇼룸에서 만났던 여자.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에게 말하던 모습.‘저는 제 힘으로 해 보고 싶어요.’유라는 천천히 미소 지었다.“한해원 씨.”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생각보다 재미있어지겠는데.”그녀는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처음에는 그저 궁금했을 뿐이었다. 서도겸이 선택한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하지만 이제는 조금 달라졌다. 자신이 그토록 가까워지고 싶었던 남자의 곁에,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듯 서 있는 여자. 그 자리가 문득 거슬리기 시작했다.유라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걸었다.‘그렇게 당연하게
미팅은 예상보다 빨리 끝났다. 도겸은 마지막 보고서를 덮었다.“오늘 논의한 내용대로 진행해 주세요. 수정안은 최 실장님 통해서 전달하겠습니다.”“네.”유라는 서류를 정리하다 문득 물었다.“도겸 씨, 이번 주 금요일 저녁에 시간 있으세요?”“무슨 일입니까?”“제가 참석하는 브랜드 행사요. 태성어패럴에서도 관계자 몇 분 오시잖아요.”“확인해 봐야겠습니다.”“가능하면 도겸 씨도 오셨으면 좋겠어요.”유라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이번 캠페인에 중요한 자리니까요.”도겸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일정 확인 후 말씀드리겠습니다.”“기다릴게요.”유라는 웃었다.그의 대답은 언제나 비슷했다. 가능하다고도, 불가능하다고도 쉽게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라는 알고 있었다. 서도겸은 업무상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결국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그 점을 이용하면 됐다.***같은 날 오후. 해원은 윤정숙의 작업실에서 첫 번째 블라우스를 완성하고 있었다.“해원 씨, 마지막 단추만 달면 되겠네요.”정숙이 말했다. 해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바늘을 움직였다.연회색 원단으로 만든 블라우스였다. 과하지 않은 볼륨의 소매와 부드럽게 떨어지는 어깨선이 특징이었다. 마지막 단추를 단 뒤 해원은 옷을 마네킹에 걸었다.정숙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어머.”해원은 긴장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어때요?”“예쁜데요?”정숙은 옷의 옆선을 살펴보았다.“특히 이 부분이 좋아요. 허리선을 너무 강조하지 않으면서도 실루엣이 살아 있네요.”해원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정말요?”“네. 첫 작품치고 아주 잘했어요.”해원은 마네킹 앞에 섰다. 오랜만에 자신의 손으로 완성한 옷이었다.아직 부족한 부분도 많았다. 봉제선이 조금 고르지 못한 곳도 있었고, 소매 끝은 한 번 더 수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분명 자신이 만든 옷이었다.“사진 찍어도 될까요?”“그럼요.”해원은 휴대전화를 꺼내 옷을 여러 각도에서 촬영했다. 그리고 민지에게 사진을 보냈다. 잠시 후 답장이 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