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81화
프레데리크는 책을 덮고 조용히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고른 숨을 내쉬며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는 한참을 지켜보다, 조심스럽게 한쪽 자리에 몸을 누였다. 말없이, 다정하게.
그렇게 두 사람 사이에 새벽의 온기가 스며들었다.
다음 날 아침.
지빌라는 희미한 따스함에 얼굴을 비비며 더 깊이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벽난로는 꺼져 있었지만, 이상하리만치 포근했다.
‘요제파…….’
무의식적으로 팔을 뻗어 끌어안았다. 그러다 문득, 단단하고 넓은 어깨, 낮고 거친 숨결이 느껴졌다.
“……!&r
89화프레데리크가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녀의 뼛속 깊은 곳이 먼저 반응했다. 마음이 먼저 무너지는지, 몸이 먼저 열리는지 알 수 없었다.그의 목소리는 낮고 천천히 내려앉아, 의식보다도 감각을 먼저 흔들었다. 새로운 감각이라기보다, 오래 참아온 감정이 마침내 틈을 찾은 느낌이었다.지빌라는 그 사실을 부정할 수도 없었다.잠깐 시선을 피했을 뿐인데, 그는 그 짧은 틈도 놓치지 않고 따라왔다. 그 눈빛은 격렬함이 아니라,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단단하고 담담했다.숨을 들이켰다.그런데 그 작은 호흡조차 그에게 향하는 것 같아 더 어지러웠다.그저 이름 하나 불렀을 뿐인데, 이토록 달라져버리는 스스로가 두렵고, 동시에 이상하게… 안도되었다. 마치 이제는 숨지 않아도 된다는 듯이.그녀는 고개를 살짝 젖혀 그를 바라보았다.빛이 거의 닿지 않는 좁은 방.얇은 벽 뒤의 세상이 그들을 잊은 듯 잠잠했다.그 적막함이 오히려 더 위험했다.그가 다시 입 맞추려는 순간, 지빌라는 본능적으로 그의 입술 위에 손가락을 댔다. 입술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속삭임보다 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정말… 소리 들리면 안 돼요.”그 말이 떨어지자 프레데리크의 움직임이 아주 잠깐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그 고요가
88화험한 산세가 이어지는 길이었다. 초겨울의 바람은 점점 차가워지고,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 것 같은 하늘이 낮게 깔렸다.산등성이마다 매서운 서리가 내려앉아 있었고, 바람이 스치는 소리는 마치 겨울이 문턱까지 왔음을 알리는 경고처럼 들렸다.대공과 대공비의 행렬은 최소한의 호위만 남기고 조심스레 이동 중이었다. 근처엔 성도, 마땅한 숙사도 없었기에 결국 작은 여관 하나를 빌려야 했다.대공성까지 가기엔 아직 며칠은 더 필요했다.“오늘 밤은 여기서 쉬는 수밖에 없겠군.”프레데리크의 낮은 말에 지빌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관은 오래되어 삐걱거렸고, 방도 딱 하나뿐이었다.어쩔 수 없이 둘은 한 방에 머물러야만 했다.프레데리크가 보좌관들, 호위들과 함께 주변 산세를 둘러보는 동안이었다. 시녀들이 작은 나무 욕조에 따뜻한 물을 채웠다.지빌라는 그들을 물리고 조용히 목욕을 준비했다. 하얀 김이 피어올라 방 안을 희미하게 흐려놓았다.몸을 담그자 피로가 스르륵 풀리는 듯했다.지빌라는 깜박 잠이 들어 문이 조용히 열리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작은 기척에 눈꺼풀을 들어 올린 그녀는 눈앞의 인영이 누구인지 알아차렸다.“프레데리크―!”놀란 지빌라는 반쯤 몸을 일으키려다 얼굴을 붉히고는 급히 수건으로 앞을 가렸다.프레데리크는 한 발짝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
87화다음 날, 예상대로 후작성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그 옷… 정말 우연이었을까?”“그래도 황녀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지?”“그래서 더 무서운 분이야. 아무 감정도 안 보이셨다잖아.”하녀들 사이에 은밀한 속삭임이 흘렀다.처음엔 단순한 수군거림이었으나, 곧 ‘황녀가 평소 레오노라 영애를 괴롭혔다더라.’는 방향으로 변질되었다.누군가의 ‘보았다’는 증언이 덧붙고, ‘참으려는 영애의 눈물’이라는 표현이 더해지자, 이야기에는 연민이 깃들었다.대공성으로 출발할 준비가 끝났을 때, 지빌라는 후작성을 뒤로한 채 말없이 마차에 올랐다. 그녀에게도 ‘위엄을 지킨다’는 명분 아래 삼켜버린 수많은 감정들이 있었다. 만찬장에서의 침묵도 그중 하나라고 여겼다.하지만 지금, 그 침묵이 오히려 자신을 고립시키고 있다는 사실이 서서히 와닿았다.“전하…….”레오노라가 살그머니 다가왔다.“이제 그만 참으셔도 돼요. 저를 용서치 마세요.”지빌라는 눈을 들었다. 레오노라의 얼굴에는 어제와는 다른 결의가 어렴풋이 비쳤다.“참는 것처럼 보였다니… 미안한 일이구나. 내가 화난 것처럼 보였니?&rd
86화지빌라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작은 미소를 띠며, 천천히 손끝으로 카드를 밀어 일렬로 펼쳤다.“좋아요. 그 진심이 진실이라면, 카드가 응답할 거예요.”그녀가 첫 번째 카드를 꺼내 드는 순간, 촛불이 한 번 크게 흔들리며 벽에 긴 그림자를 만들었다.첫 번째 카드— ‘죽음에서의 해방’“이 카드는…….”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되풀이된 죽음, 피할 수 없었던 비극의 고리가 이제 끊어진다.”프레데리크의 시선이 흔들렸다. 두 사람 다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베라트 가문의 저주.지빌라는 안도의 숨을 삼켰다. 모호했던 미래가 조금씩 그녀가 원하는 대로 완성해 나간다는 뜻이었다.그녀는 아르카나를 시전하는 동안, 카드가 전하는 말을 언제나 고해야만 했다. 입은 스스로 닫히지 않았고, 진실만이 흘러나왔다.그러나 이번에 이어진 말은, 차갑게 그녀의 가슴을 쳤다.“하지만 그 대가는… 한쪽의 희생일 수도 있다.”그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굳었다.“누군가 대신 짊어진다면, 그건 또 다른 비극이군.”지빌라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한쪽의 희생이 그녀라고 해도 그녀는 물
85화“괜찮아. 레오노라.”지빌라는 최대한 부드럽게 레오노라의 이름을 다시 불렀다.“와인은 닦으면 돼. 고개를 들어.”그러나 그 말은 공기 속에서 힘없이 흩어졌다.주변의 귀부인들은 오히려 지빌라를 향해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의 침착함이 냉정함처럼 비쳤기 때문이다.레오노라는 손끝을 덜덜 떨며 일어났다. 손수건을 꺼내 들며 고개를 숙였다.“전하의 옷을 더럽혔으니, 제 손으로 닦겠습니다….”가늘게 떨리는 음성, 젖은 눈가. 그 모습은 너무 완벽히 ‘가련’했다. 주변에서 조용히 한숨이 새어 나왔다.후작 부인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레오노라, 몸부터 가다듬거라. 전하께서도 놀라셨을 테니….”프레데리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깊었으나,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았다.그날 밤, 만찬의 온기는 완전히 식어버렸다. 대공과 황녀의 화합을 찬미하던 그 자리에서 사람들은 은밀히 속삭였다.“역시 황녀가 레오노라를 곁에 둔 이유가 있었어.”“불쌍하더라. 무릎까지 꿇던데.”방으로 돌아온 레오노라는 거울 앞에 섰다. 치맛자락엔 아직도 붉은 얼룩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미세하게 미소 지었다.
84화프레데리크의 팔이 지빌라의 허리를 단단히 감쌌다. 말의 거친 숨소리, 그리고 너무 가까운 거리.지빌라의 심장이 요동쳤다. 손끝이 그의 옷깃에 닿았다. 잠시, 모든 소리가 멎은 듯했다.그가 낮게 속삭였다.“…내가 잡고 있으면, 괜찮겠지?”대답 대신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차가운 북부의 바람보다 더 깊게 스며들었다.프레데리크는 눈을 감은 지빌라를 한참 내려다보았다. 그가 무엇을 하려 했는지, 그 자신도 알지 못했다. 그때 요제파가 또다시 짧게 울며 발굽을 튕겼다.지빌라의 몸이 뒤로 기울자, 프레데리크가 그녀의 허리를 더 단단히 감았다. 그의 품 안으로 더 파고든 순간이었다.두 사람 사이로 요제파의 거친 숨결이 느껴졌다. 그러나 곧바로 요제파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진정했다.지빌라는 놀란 가슴을 누르며 말의 갈기를 쓸었다.“괜찮아, 요제파. 왜 그러는 거야…….”프레데리크가 시선을 내렸다. 그의 애마 레오니스가 요제파를 향해 나직이 울고 있었다.그는 미묘하게 웃었다.“레오니스 때문인 것 같군.”“레오니스요?”“요제파가 계속 저 녀석을 밀어내더니, 요즘은… 좀 달라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