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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선을 넘게 만들지는 마.

Author: 노에빌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2 17:05:07

서아는 여전히 집에 돌아오면 곧장 책상 앞에 앉았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쉬는 시간에는 문제집을 펼쳤고, 점심시간에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성적을 올리는 것. 장학금을 받을 수 있을 만큼. 그것만 생각했다. 그래서 남에게 신세지길 싫어하면서도 도윤에게만은 도움을 요청했다.

전교 1등인 한도윤은 자신이 모르는 부분을 정확하게 짚어줬다. 불필요한 말도 하지 않았다. 서아에게는 그게 편했다.

“이 부분은 네가 개념은 아는데 응용에서 자꾸 막혀.”

도윤이 문제집을 가리켰다.

“이 유형만 따로 풀어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알겠어.”

서아는 필기했다.

“고마워.”

“별거 아닌데.”

“그래도.”

서아는 더 말하지 않았다. 도윤 역시 묻지 않았다. 그게 편했다.

하교 시간. 서아가 교문을 나서자 검은 차 한 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태준이었다. 서아는 차에 올라탔다.

“왔어요.”

“그래.”

짧은 대답. 평소와 같았다. 그런데 차가 출발하고도 태준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서아는 창밖을 바라봤다.

“오늘도 공부했어?”

“네.”

“누구랑.”

“한도윤이요.”

태준의 손가락이 운전대를 한 번 두드렸다.

“또?”

“네.”

“매일 붙어 있네.”

서아는 그 말에 태준을 바라봤다. 표정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공부를 잘 가르쳐줘서요.”

“선생을 붙여주겠다고 했잖아.”

“싫어요.”

“왜.”

“돈이 들잖아요.”

태준이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내가 내는 돈인데.”

“그러니까 싫어요.”

서아는 담담했다.

“제가 나갈 때까지 계속 빚지는 기분이 드니까.”

태준의 표정이 굳었다. 서아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도윤한테 배우는 건 제가 나중에 밥 한 번 사면 돼요.”

“그게 더 편하고?”

“네.”

차 안이 조용해졌다. 한참 뒤 태준이 말했다.

“그놈이 너한테 뭘 바라는 건 아니고?”

서아가 눈을 돌렸다.

“모르겠어요.”

“모르는데 계속 만나?”

“공부 때문에 만나는 거니까요.”

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아는 그 침묵의 의미를 짐작했다. 하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다음 날. 도서관. 서아가 문제를 풀고 있는데 도윤이 옆자리에 앉았다.

“이거 가져왔어.”

도윤이 작은 봉투를 내밀었다.

“뭔데?”

“필요한 문제집.”

서아가 봉투를 열어봤다.

“이거 비싼데.”

“중고야.”

“그래도.”

“나한테는 이미 있는 거라서.”

서아는 잠시 책을 바라봤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나중에 돌려줘.”

“알겠어.”

그때. 도서관 입구에 태준이 서 있었다. 서아는 그를 발견했다. 태준 역시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아는 다시 문제집으로 시선을 돌렸다. 도윤이 태준을 힐끗 봤다.

“저분…….”

“아저씨.”

“아저씨?”

“응.”

“무서운데.”

“원래 그래.”

서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그 말에 태준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잠시 후. 태준이 다가왔다.

“윤서아.”

“네.”

“가자.”

“아직 공부 안 끝났어요.”

“얼마나 남았는데.”

“한 시간.”

“오늘은 그만.”

서아는 문제집을 내려다봤다.

“싫어요.”

태준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하지만 서아 역시 물러나지 않았다.

“왜.”

“내가 데리러 왔으니까.”

“그건 이유가 아니잖아요.”

태준이 대답하지 않았다. 서아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문제집을 덮었다.

“알겠어요.”

의외로 순순했다. 도윤이 말했다.

“서아야, 내일 이 문제 같이 보자.”

“응.”

태준의 시선이 도윤에게 향했다.

“내일?”

도윤이 잠시 멈췄다.

“네.”

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서아에게 가방을 내밀었다.

“가.”

서아가 가방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도윤에게 말했다.

“내일 봐.”

“응.”

서아는 태준을 따라 도서관을 나왔다. 차에 올라타고도 아무 말이 없었다. 태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놈이랑 친해?”

“아니요.”

“그런데 왜 매일 만나.”

“공부 때문에.”

“그것뿐이야?”

“네.”

태준은 더 묻지 않았다. 하지만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서아가 그를 바라봤다.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아저씨.”

“왜.”

“제가 한도윤이랑 공부하는 게 싫어요?”

태준의 손이 운전대 위에서 멈췄다.

“…아니.”

“그럼 됐어요.”

서아는 다시 창밖을 봤다. 그녀는 더 묻지 않았다. 태준도 더 설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부터였다. 서아가 학교에서 공부하는 날이면. 태준은 이상할 정도로 정확한 시간에 차를 보내기 시작했다.

한 시간. 딱 한 시간이었다. 그 이상 늦으면 반드시 연락이 왔다.

[윤서아. 끝났으면 나와.]

서아는 그 메시지를 볼 때마다 잠시 화면을 바라봤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남자는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자신이 나가겠다고 했을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러라고 했다.

그런데. 막상 다른 남자와 가까워지는 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서아는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묻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기대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아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미래를 맡길 생각이 없었다.

특히. 강태준에게는 더더욱.

***

며칠이 지나자 서아도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태준이 자신을 데리러 오는 시간이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하교 시간에 맞춰 오더니. 그다음부터는 도서관에서 공부를 시작한 지 한 시간만 지나면 차가 와 있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서아가 문제집을 풀고 있던 중. 휴대전화가 짧게 울렸다.

[끝났으면 나와.]

서아는 화면을 바라보다가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았다. 아직 풀 문제가 남아 있었다. 도윤이 옆에서 물었다.

“안 나가?”

“조금 있다가.”

“괜찮아?”

“응.”

서아는 다시 문제집을 펼쳤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도서관 문이 열렸다. 서아가 고개를 들었다. 태준이었다.

검은 셔츠 차림의 태준이 입구에 서 있었다. 도서관 안에 있던 학생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에게 향했다. 태준은 그런 시선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서아만 바라봤다.

“윤서아.”

서아가 펜을 내려놓았다.

“왜 직접 왔어요?”

“안 나오길래.”

“공부 중이었어요.”

“알아.”

태준의 시선이 책상 위로 내려갔다. 문제집. 노트. 그리고 그 옆에 앉아 있는 도윤. 태준의 눈빛이 순간 차갑게 가라앉았다. 도윤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태준은 짧게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서아에게 말했다.

“가자.”

“조금만 더 할게요.”

“오늘은 안 돼.”

“왜요?”

“시간 늦었어.”

서아가 시계를 봤다. 아직 저녁 일곱 시였다.

“안 늦었는데요.”

“내 기준에는 늦었어.”

“그건 아저씨 기준이고요.”

태준이 서아를 바라봤다. 서아는 태연하게 펜을 내려놓았다.

“저 열아홉이에요.”

“알아.”

“학교도 다니고 있고요.”

“알아.”

“공부도 해야 하고요.”

“그것도 알아.”

“그럼 왜 자꾸 데리러 와요?”

태준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 시선이 다시 도윤에게 향했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네가 혼자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서아는 그 말을 듣고 잠시 태준을 바라봤다. 도윤 역시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은 듯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서아가 천천히 책을 정리했다.

“가요.”

태준이 그녀의 가방을 받아 들었다.

“제가 들게요.”

“됐어.”

“무거워요.”

“알아.”

태준은 자연스럽게 가방을 들고 먼저 걸었다. 서아가 그 뒤를 따라갔다. 도윤이 뒤에서 말했다.

“서아야.”

서아가 돌아봤다.

“내일은 아침에 일찍 와. 오늘 못 푼 거 같이 보자.”

“응.”

태준의 걸음이 멈췄다. 하지만 돌아보지는 않았다. 서아가 그에게 다가갔다.

“왜요?”

“아무것도 아니야.”

차에 올라탄 뒤에도 태준은 말이 없었다. 서아는 창밖을 바라봤다. 그러다 문득 말했다.

“내일도 공부해야 해요.”

“그래.”

“도윤이랑.”

태준의 손이 운전대를 단단히 잡았다.

“그래.”

목소리는 평온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이상했다. 서아가 그를 바라봤다.

“싫어요?”

“뭐가.”

“제가 그 사람이랑 공부하는 거.”

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아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참 뒤. 태준이 낮게 입을 열었다.

“윤서아.” 

“네.”

“네가 누구랑 공부하는지 내가 간섭할 생각은 없어.”

“…….”

“누구를 만나든, 어디서 뭘 하든.”

 

태준의 목소리가 차갑게 이어졌다.

“네 인생이니까.”

서아는 그 말에 조금 안도했다. 그런데. 이어진 말에 표정이 굳었다.

“다만.”

태준이 말했다.

“내가 싫어하는 선을 넘게 만들지는 마.”

서아가 천천히 그를 바라봤다.

“그게 무슨 선인데요?”

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차가 신호에 걸려 멈췄다. 그가 그녀를 바라봤다. 차갑고 깊은 눈이었다. 그리고 아주 낮게 말했다.

“나도 이유 없이 거슬리는 건 처음이라.”

서아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태준은 그녀를 보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당분간은.”

짧은 침묵.

“내가 싫어하는 짓은 하지 마, 꼬맹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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