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인지는 몰라도 유남준에게 이런 식으로 한바탕 굴려지고 나니 박민정도 더는 조급해지지 않았고 오히려 차분해지기 시작했다.회사에 도착한 후로도 난장판 속에서 침착하게 모든 것을 차근차근 처리해 나가기 시작했다.곧이어 진서연과 민수아도 회사에 도착했다.진서연은 곧장 설인하와 함께 조사를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한껏 화난 표정으로 돌아왔다.“조사 해봤는데 회사 직원이 한 짓이랍니다. 기밀문서를 팔아서 돈을 벌려고 했대요.”“단순히 돈을 버는 게 목적이었다면서 왜 회사까지 이렇게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은 걸까요?”박민정이 물었다.회사까지 오는 도중에도 박민정은 회사 내부 직원을 의심해 왔었다. 보안도 철저한 데다 감시카메라까지 있는 회사에 외부인이 침입하긴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단순히 화풀이를 하고 싶었대요. 회사에서 매일 힘들게 출근하고 근무하는 게 너무 짜증 나서 그런 짓을 했다고 하던데요.”하지만 진서연은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우리 회사는 다른 회사보다 사내 복지가 훨씬 좋은 곳이에요 그런데 힘들다고 이런 짓을 한다고요? 분명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게 분명해요.”진서연도 다 눈치챌 정도였으니 박민정이 눈치채는 것쯤은 시간문제였다.“우선 진정하고, 사라진 기밀문서들이 어떤 건지부터 확인해 보자.”“알겠어요.”진서연은 박민정과 유남준을 데리고 대표실로 향했다.사무실 안으로 들어선 순간,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박민정의 머리가 지끈거렸다. 조금이라도 중요하다 싶은 문서들은 전부 사라진 상태이었다.도대체 누가 그녀를 이 지경으로 만들려 한 걸까?박민정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그리고 하필 지금, XS 그룹의 기밀문서가 사라졌다는 기사가 외부로 알려지고 있었다.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관련 업체에서 전화가 걸려오더니 박민정에게 책임을 물으며 계약 파기를 요구했다.유남준은 그런 박민정이 순간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 걱정되어 직접 사태 수습에 나섰다.그리고 진서연은 이 모든 것을 그저 안타깝게 지켜봐야만 했다
“지석 씨가 정말 그렇게 생각해줬으면 좋겠네요.”유남준은 이 말만 남긴 채 사무실을 벗어났다.문을 열자 문 앞에 서 있는 에리가 보였다.단순히 사무실 앞에서 자신의 두 경쟁자가 서로를 공격하며 상처 주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에리는 자신의 예상과 달리 순조롭게 흘러가는 분위기에 당황스러워 보였다.유남준은 그런 에리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곧장 다른 업무를 처리하러 걸음을 옮겼다.그리고 뒤이어 사무실에서 나오던 연지석은 사무실 앞에 서 있던 에리를 발견하자마자 혐오 어린 눈길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에리 씨가 유 대표한테 내가 돌아왔다고 일부러 고자질한 거, 내가 모를 줄 알았어요? 저는 에리 씨처럼 음흉한 사람이 제일 소름 끼칩니다.”하지만 그 말을 들은 에리도 자신의 자존심을 굽히지 않고 반박했다.“사람마다 좋아하는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다를 뿐인데, 그걸 왜 소름 끼친다고 하세요?”그 말에 연지석이 가볍게 비웃음을 흘렸다.“정말 진심으로 민정이를 좋아하세요?”그 질문에 에리의 말문이 순간적으로 막혔다.“당연하죠.”“정말 민정이를 좋아한다면, 더 이상 민정이 곤란하게 하지 말고 행복하게 내버려 두세요.”연지석은 그렇게 에리의 어깨를 몇 번 두드리더니 자신의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에리는 그 자리에 가만히 얼어붙은 채, 조금 전 연지석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속으로 곱씹었다.그 역시 당연히도 박민정이 행복하길 바랐다.에리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연지석 같은 사람에게 에리 같은 연예인 한 명 나락 보내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라는 것을.지금 연지석은 단지 에리가 박민정의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그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는 중이었다.그리고 박민정은 자신의 사무실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모든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에게 이런 일을 벌일 인물이 누구일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사실, 박민정에게는 적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윤소현이나 최현아가 전부였다.요즘 들어 별다른 문제를
“현재, XS 그룹의 모든 업무는 중단된 상태입니다. 하지만 협력사들이 계속해서 박민정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준다고 하더군요. 일주일 내로 문제를 해결하기만 한다면 계속해서 거래를 이어나가겠다고 한 모양입니다.”정수미가 태연하게 물었다.“일주일 안에?”뒤이어 그녀가 서늘한 냉소를 흘렸다.“만약 정말 일주일 내로 해결한다면, 내가 직접 박민정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네.”정수미가 휴식을 취하려던 그때, 그녀의 전화벨 소리가 들려왔다. 확인해 보니 박민정에게서 전화가 걸려와 있었다.정수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여자가 감히 자신에게 전화를 걸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수신 버튼을 눌러 전화를 받은 정수미가 물었다.“민정이가 나한테 전화를 다 하다니, 무슨 일이지?”뒤이어 수화기 너머에서는 박민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정 대표님, 사업 경쟁을 하고 싶으면 정당한 수단으로 하셔야 하지 않겠어요? 제 기밀문서를 빼돌리시고, 제 회사 건물까지 침입하신 건 선을 넘은 것 같습니다만.”박민정은 이미 회사 직원에게서 모든 사실을 전해 듣게 되었다.정수미 역시 박민정이 이렇게나 빨리 배후를 알아차릴 줄 몰랐지만 굳이 놀란 티를 내지는 않았다.“그 선이 도대체 뭘까? 민정이 네가 함미현, 염혜란이랑 짜고 날 속일 때는 그 선이라는 걸 생각해봤니?”“아, 그 일 말씀이신가요?”박민정은 그제야 정수미가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을 벌였는지 알았다는 듯 말했다.“확실하게 말해드릴 수 있는 건, 저는 단 한 번도 정 대표님을 속인 적 없다는 겁니다. 정 대표님께서 사람을 똑바로 못 알아보신 건, 대표님 탓 아닌가요?”한편, 옆에서 모든 대화를 다 듣고 있던 비서의 손에는 벌써 식은땀이 흥건했다.정수미가 정씨 가문을 이끌어가기 시작한 후로 그 아무도 이런 식으로 그녀를 대한 적이 없었다.박민정은 정말 다른 의미로 용기가 대단한 사람이었다.정수미의 차분하던 표정이 조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굳이 네가 인정하길 바라진 않아. 그래봤자 너는 네
연지석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이사회가 모든 경영권을 저에게 넘겼으면, 저를 전적으로 믿어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네가 해외에 있다고 해서 우리가 널 모를 줄 알아? 너 지금 그 유부녀 때문에 이러는 거잖아! 이사회도 이미 만장일치로 결정했어. 네가 먼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이상 앞으로의 자금 지원은 없을 거야. 그리고, 그 여자는 네가 먼저 안 끊어낸다면 우리가 대신 처리해줄 수밖에 없어!”말을 마친 수화기 너머의 누군가는 곧장 전화를 끊었다.연지석은 있는 힘껏 손안의 휴대폰을 꽉 쥐었다.그는 적어도 자신이 해외에 있는 동안 만큼은 이 고집불통 꼰대들이 조금이라도 정신을 차릴 거라고 생각했지만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연지석은 곧장 하민재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늙은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너도 알고 있었어?”그 말에 하민재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처음부터 내가 얘기했잖아. 그 사람들이 형이랑 박민정이 무슨 사이인지 알게 된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네가 일러바친 거야?”연지석의 목소리가 순간적으로 서늘해졌다.그 목소리에 불안감을 느낀 하민재가 다급하게 해명했다.“당연히 아니지. 내가 어떻게 형을 배신할 수 있겠어? 벌써 잊은 거야? 내가 누구 때문에 유남준이 보낸 사람한테 그렇게 처맞았는데.”연지석 역시 하민재가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그럼 연우석이겠네.”연우석이라면 연지석의 형이자 명목상 연씨 가문의 후계자였다.하지만 그런 연우석의 위치는 최근 들어 연지석 때문에 계속해서 흔들리고 있었다.“그 형 원래 이런 짓 많이 하잖아. 조심해.”하민재가 당부했다.“응, 나도 알고 있어.”전화를 끊은 연지석은 답답한 마음에 책상을 초조하게 두드렸다....정씨 가문에서 XS 그룹을 고립시켰다는 소식은 빠르게 회사 전체에 퍼졌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주겠다던 회사들도 모두 다급하게 XS 그룹과 계약을 해지했다.결국, 남은 것은 손연서와
그 말에 오준수는 잠시 망설였다.그 모습에 이지원이 다시 한번 오준수를 부추기기 시작했다.“오 대표님, 설마 손연서가 두려우신 건가요? 여자가 너무 강해지면 안 돼요. 오 대표님께서 이혼하게 되신 이유는 다 손연서 씨 힘이 너무 커졌기 때문이에요.”오준수는 결혼 생활 내내 자신에게만 의지하던 손연서가 완전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모습을 떠올리며 자신의 결심을 굳혔다.“알겠습니다. 꼭 저를 떠난 걸 후회하게 해주죠.”사실 그에게는 아직 손연서와 재결합 하려는 마음도 남아 있었다. 이혼 후 그녀의 빈자리가 유독 크게만 느껴졌다.게다가 그의 아들인 성훈도 가끔씩 손연서의 이름을 언급하고 되뇌기까지 했으니 말이다....XS 그룹박민정은 모든 협력사와 계약을 해지하고 한순간에 초창기의 모습으로 돌아갔다.설인하를 포함한 직원들은 모두 풀이 죽어 있었다.결국, 참지 못한 진서연이 제안했다.“보스, 예전처럼 작곡만 하는 건 어때요? 그런다면 적어도 어느 정도 수입은 생길 겁니다.”하지만 박민정은 그녀의 제안에 고개를 가로저었다.“작곡만 한다는 건 먼 미래를 내다본 계획이 아니야.”게다가 정말 그렇게 한다면 박민정은 영원히 복수할 수 없게 된다.오늘의 이 굴욕은 계속해서 반복되고 되풀이될 것이다.“그럼 부사장님한테 도와달라고 해보는 건 어때요?”설인하가 입을 열었다.연씨 가문에서 연지석의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잘 알고 있던 박민정은 그런 설인하의 제안도 거절했다.“우리는 우리 스스로 힘을 키워가야 해요.”“오늘부터, 우리는 새로운 투자자를 찾을 겁니다.”그 순간, 밖에 있던 에리가 문을 두드렸다.“들어오세요.”박민정이 대답했다.안으로 들어선 에리가 말을 꺼냈다.“예전의 그 광고들은 다시 촬영 들어갔고, 야근이라도 해서 최대한 제때 끝낼 거야.”“고마워, 그럼 부탁할게.”박민정이 감사 인사를 건넸다.다른 연예인이었다면 엄두도 못 냈을 테지만 이미 누군가가 망쳐놓은 광고를 에리는 별다른 불만 없이 묵묵히 다시 찍고 있었다.“별거
곧이어 두 사람이 탄 차는 IM 그룹 본사 정문에 도착했다. 그리고 박민정은 눈앞의 광경을 믿기 힘들었다.“남준 씨가 말한 회사가, IM 그룹이었어요?”유남준은 그런 박민정의 질문에 명확한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또 아까처럼 너 안고 내려서 보여줄까?”“아뇨, 됐어요. 저 혼자 내릴게요.”이때, 문 앞의 경호원이 다가와 차 문을 열어주었고 박민정은 배를 감싼 채 조심스레 차에서 내렸다.차에서 내려 거대하게 우뚝 서 있는 IM 그룹을 보는 그녀는 여전히 멍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유남준은 그런 박민정을 데리고 IM 그룹의 맨 위층에 있는 대표실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여기까지 올 동안 박민정은 여전히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듯했다.그때, 서다희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대표님...”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다희는 박민정을 발견하는 순간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그는 유남준이 일부러 박민정을 데리고 회사로 왔다는 것도 모른 채 애써 모르는 척을 하며 어떻게든 상황을 모면하려 애썼다.“대표님, 오늘은 IM 그룹 대표님께서 자리를 비우셨는데, 다음에 다시 오시는 게 어떠실지?”그 말에 박민정은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유남준을 바라보았다.만약 유남준이 정말 IM 그룹의 대표였다면 이때까지 숨길 리가 있을까? 역시 오늘 여기까지 온 이유는 단순히 협상을 위해서였을 것이다.유남준은 그런 서다희를 흘겨보다가 입을 열었다.“더 숨길 필요 없어. 내가 일부러 와이프를 회사까지 데리고 온 거니까. 그리고 민정이는 이 회사의 안주인으로서 당연히 회사 운영 상황에 대해 알 권리가 있는 사람이야.”그 말에 박민정은 또 한 번 멍해졌다.지금 그녀의 머릿속은 혼란 그 자체였다. 어쩌면 임신 때문에 지능까지 낮아진 건 아닐까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자신이 위급한 상황에 기지를 발휘했다고 생각했던 서다희가 황급히 사과했다.“죄송합니다, 사모님. 방금은 제가 말실수를 했어요.”박민정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물었다.“여기가 정말 유 대표님의 회사란 말이에요?”“
드디어 긍정적인 대답을 들은 유남준의 마음이 비로소 홀가분해졌다.“좋아, 방금 한 말 꼭 지켜야 해.”박민정이 되물었다.“내가 언제 남준 씨 속인 적 있어요?”그녀는 지금 유남준의 모습이 마치 어린아이처럼 느껴졌다.유남준은 그런 박민정을 더욱 힘껏 끌어안으며 말했다.“알지, 알지. 너보다 약속 더 잘 지키는 사람은 없지.”박민정은 애써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며 말했다.“너무 답답하고 더우니까 그만 해요.”유남준은 그렇게 텅 비어버린 자신의 손과 품을 느끼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드디어 박민정의 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차례대로 차에서 내렸다.오늘은 김인우와 박예찬, 그리고 조하랑까지 와 있었다. 박예찬와 박윤우는 따로 방 안에서 뭔가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정수미 그 망할 마귀할멈이 또 우리 엄마 괴롭혔어.”박윤우가 잔뜩 화난 표정으로 말했다.박예찬의 표정도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예전에 자신 역시 그 마귀할멈의 손에 명을 달리할 뻔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형, 우리한테는 무슨 방법이 없을까?”박예찬은 그저 주먹만 꽉 쥔 채 대답했다.“아쉽게도 우리가 아직 너무 어려.”“에휴...”박윤우가 아쉽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래도 어느 정도는 되갚아줄 수 있을지도 몰라. 이미 그 마귀할멈 집 주소도 알아냈고, 어떻게 들어가는지도 알거든.”박예찬이 말했다.“정말? 잘됐다. 그럼 우리 얼른 가자!”당장이라고 정수미에게 벌을 주고 싶어 안달 났던 박윤우가 말했다.하지만 박예찬은 그 말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넌 아직도 몸이 안 좋잖아. 거긴 나 혼자 가도 돼.”“싫어, 나도 갈래!”박윤우가 고집을 부렸다.“형,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항상 형이 먼저 나서잖아. 나도 곧 수술받으면 아무것도 못 하니까 이번엔 나도 엄마 지켜주고 싶어.”박윤우는 아무 도움 안 되는 쓰레기가 되기 싫었다.박예찬 역시 박윤우의 고집스러운 표정을 보며 더는 말려봤자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럼 우리 나중에 적당한 때를
정씨 가문 본가.정수미는 새로운 친자 확인 결과지를 받아들었다.그녀의 눈빛에는 냉기만 감돌았다.그리고 옆에 있던 비서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이지원 정말 겁도 없네요, 감히 이런 친자 확인 공문서까지 위조할 생각을 하다니.”정수미는 모녀 관계가 아니라는 친자 확인 감정서를 들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함미현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의 충격은 받지 않은 듯 평온해 보였다.“난 항상 최 선생을 믿어왔는데, 왜 그 사람이 이지원을 도와주는 거지?”최 선생이라면 정수미의 개인 주치의로서 그의 여러 유전자 감정을 도왔던 인물이다.며칠 전, 그는 아주 자신 있는 표정으로 감정서를 들고 정수미를 찾아와 그녀와 이지원은 모녀가 맞다는 말을 해주었지만 지금은 모든 게 달라져 있었다.항상 자신의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큰 신뢰를 가지고 있었던 정수미는 최 선생이 이지원에게 매수되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지금 당장 전화해서 최 선생 부르겠습니다.”비서가 입을 열었다.“그래, 우선 무슨 일인지는 알려주지 마. 그냥 내 몸이 좀 안 좋다고만 전해.”정수미는 자신의 계획이 들킬 것을 염려해 비서에게 재차 당부했다.“알겠습니다.”비서는 곧장 최민환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자리를 떴다.그 탓에 저택 안으로 몰래 숨어드는 두 아이를 발견하지 못했다.“여기야?”박윤우가 두 눈을 커다랗게 뜬 채 주위를 살폈다.“응, 조심해.”이미 이곳의 시스템을 완전히 파악한 박예찬은 일시적으로 모든 보안 시스템을 종료시켰다.빠르게 정수미가 지내는 곳을 발견한 두 아이는 멀리서 그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넌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니? 엄마가 어디가 그렇게 미워서 날 만나려고 하지도 않는 거야?”정수미는 자신의 딸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것 같은 기분에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박윤우는 그런 정수미의 모습을 관찰하며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뭐라고 저렇게 중얼거
“엄마, 아빠랑 이혼 잘하셨어요.”유남우는 말을 마치자마자 유남준 앞을 지나치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내가 능력이 없어서 이번에도 졌네.”유남준은 그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째려봤다.유남우는 사실 그가 어떻게 반격할지 걱정되기보다 이번에도 졌다는 게 더 분통했다.밖으로 나온 뒤 그는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라도 걸고 싶었지만 딱히 연락할 사람이 없었다.연락처를 훑어보다가 홍주영에서 멈칫하더니 결국에는 통화버튼을 누르지도 못한 채 핸드폰을 다시 꺼야 했다.실내 안.거실은 유난히 조용했고 유지욱은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남우가 왜 저렇게 변했는지 모르겠어. 예전에는 말도 잘 듣고 착한 아이였는데.”고영란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그가 말하는 ‘예전’이 정확하게 언제인지도 감이 오지 않았다.고영란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모습에 유지욱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왜 그래?”“아니에요.”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다시 말을 이었다.“이번 달은 될수록 어디 가지 말고 집에 있어요. 그리고 이혼 숙려기간이 끝나는 대로 다시 가서 마무리 지으면 될 것 같아요.”고영란은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이혼하고 싶은데 지금 이혼하려면 한 달씩이나 기다려야 했다.그리고 위층으로 올라가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그리고 이 한 달 동안에 아버지로서 해야 할 일이 뭔지 좀 생각해 보고요.”말을 마친 뒤 유지욱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한편.박씨 가문의 옛 저택.박민정은 유남준이 너무 걱정되어 한걸음에 집으로 돌아왔다.비록 서다희가 괜찮다고는 했지만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이때, 밖에서 들리는 차 소리에 박민정이 다급히 차창 밖을 내다보니 유남준의 차도 마침 도착해 있었다.박민정은 빠르게 차에서 내린 뒤 유남준에게 달려가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괜찮아요?”그러자 유남준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당연하지, 다희가 나 괜찮을 거라고 알려줬잖아.”박민정은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
유석진의 입에서 갑자기 자기 둘째 아들의 이름이 거론되자 고영란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또한 왜 두 아들 사이에 지금 저런 모순이 생긴 건지 알 수 없었다.유남준도 괜히 고영란이 중간에서 난처하게 된 것 같아 일부러 유남우를 빤히 바라보며 유석진에게 말했다.“이번 일은 사과한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에요. 큰아빠가 아무리 남우랑 같이 벌인 일이라고 해도 이번만큼은 가만있지 않겠습니다.”별로 무겁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이상하게 위협감이 느껴졌다.순간 유석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이때, 그의 며느리인 최현아가 앞으로 한 발짝 나서며 끼어들었다.“남준 씨, 그래도 한 가족인데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그러자 유성혁도 한마디 거들었다.“남준아, 우리도 잘못했단 걸 알고 있어. 아버지가 이제 연세도 많아서 상황판단이 안 될 때가 많아.”유석진도 사실 지금 자존심을 부려서 될 일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지금 네가 원하는 게 뭔데? 말해주면 내가 다 들어줄게.”사실 유남준은 이 말만을 기다렸다.“금방 인수한 시내 중심에 있는 그 건물을 저한테 넘겨주세요.”그 땅은 유명훈의 땅이고 죽기 전 유석진에게 물려준 유산인데 지금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살 수 없을 정도로 값이 올랐다.유석진이 이 땅의 주인이 됨으로써 그곳의 상권을 손에 쥔 거나 다름없었는데 나중에 아무 건축물을 세워 올려도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건 안되지!”역시나 유석진이 단번에 거절했다.그가 오랫동안 눈독 들였던 땅이었는데 유명훈이 죽어도 물려주지 않으려 해서 여태껏 애를 먹고 있었다가 이제 겨우 손에 들어온 땅이고 또 자기만의 계획이 따로 있었다.“그러면 조만간 IM 그룹의 변호사를 만나셔야겠네요.”유남준은 더 이상 그와 얘기하고 싶지 않았고 유석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집안 도우미에게 외쳤다.“모셔다드려!”그렇게 도우미들은 그들을 전부 밖으로 내보냈고 거실에는 유남준 가족들만이 남게 되었다.유지욱과 고영란은 눈앞의 두 아들에게 뭐라고 말했으면 좋을지
유남준이 잡혀갔다는 소식에 유석진 가족들은 조용히 자축하고 있었다.최현아도 너무 기뻐했지만 유독 유성혁만 우울한 얼굴로 그들에게 물었다.“아빠, 그래도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인데 꼭 이래야 할까요? 남준이가 잡혀가도 우리한테 아무런 이득도 없잖아요. 그리고 만약 다시 풀려나서 우리가 한 짓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요.”그러자 유석진이 미간을 찌푸리고 답했다.“왜 쓸데없는 일을 벌써 걱정하고 그래? 간이 그리도 콩알만 해서 큰일 하겠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유성혁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다만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유지훈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저는 할아버지가 한 행동이 맞다고 봐요. 사람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그러자 유석진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껄껄거리며 웃었다.“하하, 역시 우리 손자가 똑똑하다니까. 네 말이 맞아. 사람은 무조건 자기가 일 순위여야 해. 절대 네 바보 같은 아빠를 닮아서는 안 된다.”그러자 유지훈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할아버지, 저도 알고 있어요.”그리고 유석진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그러나 그들은 너무 일찍 기뻐했던 게 오후가 되자마자 유남준은 바로 풀려났다.그길로 옛 저택으로 오게 되었고 동시에 유석진네 식구들과 유남우를 전부 집으로 불러 모았다.이 시각, 유지욱도 마침 그곳에 있다가 눈앞의 상황에 어리둥절해서 물었다.“남준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아빠, 제가 지금부터 저 사람들의 실체에 대해 다 밝히려고요.”그리고 서다희가 한 무더기의 자료와 증명서를 건네주자마자 그는 유석진네 식구들에게 뿌려줬다.종이들이 공중에서 흩날리다가 전부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유석진은 그중 한 장을 주워 읽어보고는 너무 황당한 나머지 코웃음을 치며 그에게 말했다.“남준아, 다 오해야. 우리가 왜 그런 짓을 하겠니?”그러자 유남준이 눈살을 찌푸리고 그에게 되물었다.“우리 회사에 심어둔 사람들을 제가 다 데려올까
유남준은 사실 진작에 유남우와 유석진 쪽에 사람들을 붙여서 그들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었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파악하고 있었지만 도대체 무얼 하려는지 궁금해서 일단 내버려두고 있었다.이튿날, IM 그룹으로 세무국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그러자 서다희가 눈살을 찌푸리고 중얼거렸다.“대표님을 감옥에 보내려고 아주 별짓을 다 하네요. 이런다고 그 사람들한테 득이 되는 게 뭔지 정말 모르겠어요.”특히 유남우는 왜 자기 친형을 왜 이렇게까지 괴롭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조사해 보니 역시나 회사 장부에 문제가 있었고 회사 자금을 불법으로 돌렸다는 증거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그러나 이 모든 게 다 그들이 일부러 만들어낸 가짜 장부들이었다.그렇다고 해도 유남준은 회사 법인으로서 조사를 받아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연행되었다.가면서도 서다희에게 당부했다.“민정이한테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줘.”서다희는 한껏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굳이 말하지 않아도 뉴스에서 하루 종일 보도될 예정이라 아마 얼마 안 돼서 알게 될 것이다.역시나 박민정은 출근길에 그에 관한 뉴스 기사를 보게 되었다.“어떻게 이럴 수가?”이때, 고영란도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왔다.“민정아, 남준이한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그러나 박민정도 아직 무슨 상황인지 모르고 있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저도 방금 기사를 봐서 잘 모르겠어요. 제가 지금 당장 다희 씨한테 전화해 볼 테니까 어머님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그래.”고영란은 착잡한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유지욱과 이혼하겠다고 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들한테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서다희는 빠르게 박민정에게 전화해서 유남준이 시킨 대로 알려줬고 모든 일은 다 대비되어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박민정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이때 서다희가 한마디 더 했다.“그런데 이 일은 절대 고영란 사모님한테 말하지 말아 주세요.”“알겠어요.”어쩌면 유남우 귀에도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나이니까 더 이혼하자는 거예요. 굳이 남은 인생을 당신한테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고영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방에 들어갔다.그러나 유지욱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문득 여태껏 이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심술부리는 원인이 분명 아버지 재산 때문인 것 같았고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이튿날.유명훈의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박민정의 친구들도 모두 오게 되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손연서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최현아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한쪽에서 사람들과 유명훈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욱과 고영란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렇게 유명훈의 장례는 총 3일 동안 진행 후 끝났다.고영란은 담담한 얼굴로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유남우에게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이만 갈라서려고 해.” 순간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유지욱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그는 원래 유명훈의 장례가 끝나면 계속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영란한테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일시적으로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지금 애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진짜 이혼하려고?”“네.”고영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저는 너무 괴로워요. 지금 당장 법원에 갑시다.”고영란은 지금 그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유지욱도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라 단번에 그러자고 하더니 두 사람은 법원으로 출발했고 두 아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자식들도 이미 다 컸고 자기 혼인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돌아가는 차 안
고영란도 유석진의 고함에 깜짝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여태껏 모든 집안일을 아내한테 떠넘긴 채, 홀로 밖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유지욱이 원망스럽기만 했다.한 사람에 대한 단념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실망감이 천천히 쌓이면서 식어가는 것이다.보아하니 오늘 저녁에도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유지욱이 도착해보니 유씨 가문의 모든 친척이 다 모여있었다.그리고 이미 상복으로 갈아입은 고영란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왜 진작에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그의 물음에 고영란은 실망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제가 말해주지 않았다고요? 한 달 전에 전 분명히 아버님 건강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으니까 와서 회사 일 좀 도와드리라고 귀띔해 줬어요.”“난 네가 우리 아버지 재산 때문에 나더러 오라는 줄 알았지.”유지욱의 말에 고영란은 큰 충격을 받고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유지욱 씨, 정말 어이없네요. 맞아요, 제가 빨리 돌아오라고 했던 원인이 아버님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지욱 씨한테도 나눠줬으면 했어요. 그런데 그 재산이 전부 아주버님한테 넘어갔네요?” 그러나 유지욱은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그깟 돈 몇 푼 가지고 왜 그래? 우리가 모두 한 식구인데 주면 줬지.”유지욱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님들을 맞이하러 떠났다.그리고 유석진과도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 고영란은 제대로 마음이 상했다.박민정도 손자며느리로서 유남준과 같이 손님들을 맞이하다가 우연히 시부모님이 서로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사실 유씨 가문에 시집온 이후로 시아버지인 유지욱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유지욱은 젊었을 때부터 고집불통에 집안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매일 여행이나 다니면서 자유롭게 사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여 유지욱과 고영란은 1년 중에도 만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살짝 다가가 그에게 말했다.“남준 씨, 가서 어머님 좀 위로해 주세요.”여자
유남준의 아버지, 유지욱은 계속 외국에서 살다보니 이 자리에 없었다.그러자 고영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지욱 씨는 지금 당장 오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방금 비행기 탔다고 했으니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거예요.”그러자 유석진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그러면 지욱이가 도착하고 나서 다시 말할 테니까 외부인은 참견하지 말아요.”순간 고영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 집에 들어와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줬는데도 제가 아직 외부인인가요? 저는 오늘 아버님께서는 왜 그리도 자식들을 편애하시지 꼭 물어봐야겠어요!”“제 아들들이 능력이 뛰어나면 이런 불공평한 대우도 다 받아들여야 하나요?”여태껏 유명훈은 많은 주식을 갖고 있었다.비록 유남준이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유명훈의 지분이 그대로 유석진네로 넘어가게 되면 유남준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더구나 유남우도 그의 재산이 필요한데 말이다!게다가 유명훈은 오랜 세월 동안 주식 말고도 분명 많은 재산을 모았을 텐데 그 돈마저 전부 저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고영란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유석진은 유명훈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여태껏 지욱이를 잘 붙잡아 두지 못한 제수 씨를 탓해야죠! 지욱이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없어요!” 고영란이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유남준이 그녀를 말렸다.“엄마, 그만해요.”여태껏 유명훈이 유석진네만 편애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던 그이기에 지금 아무리 그와 말싸움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유남우도 불쾌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 그녀에게 말했다.“엄마, 형 말이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결정하신 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싸울 필요 없어요.”이 시각, 침대에 누워있던 유명훈은 호흡이 점점 더 가빠져 헐떡거리기 시작했다.그런데도 눈앞에서 자식들이 자기 재산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기만 했다.“지욱이...”그는 힘겹게 유지욱을 불렀다.유지욱은 평소에도 그의 말을
최현아는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지만 박민정은 그저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그러자 그녀는 뻘쭘해진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일은 무슨, 윤소현이 드디어 판결받았다고 해서 축하해주려고 왔지.”박민정은 분명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다.지금 최현아와 그의 시아버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왠지 그럴수록 더 수상했다.“감사합니다.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일 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박민정이 뒤돌아서니 역시나 최현아가 빠르게 그녀의 팔을 부여잡았다.“민정아,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박민정은 이제 와서 한 식구라는 그녀의 말이 그저 가소로웠다.“도대체 할 말이 뭔가요?”그리고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최근에 할아버지 건강이 점점 악화하면서 동서랑 남준 씨가 그립기도 하고 우리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도 보고 싶은가 봐. 혹시 오늘 밤 할아버지 뵈러 같이 가지 않을래?”최현아는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사실 박민정도 할아버지의 건강이 여태껏 좋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도 아마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네, 알겠어요.” 최현아는 그제야 박민정의 팔을 놓아줬지만 그녀가 떠나가자마자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그리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껏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재수 없는 것, 운발로 지금 자리에 올라앉은 주제에.” 차에는 낯선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박민정한테 화낼 필요 없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할아버지의 주식이랑 모든 돈을 너한테 넘길 수 있도록 잘 구슬리는 거야.”그러자 최현아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나도 알아, 저번에 이미 할아버지랑 말해봤다니까? 유남준 씨랑 민정이는 괜히 고고한 척하면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한 상황이라 우리 쪽에 전부 몰리게 되어있긴 한데, 난 지금 성혁 씨 얼굴만 봐도 짜
조하랑은 그제야 화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그러면 왜 저 여자한테 찾아갔어요?”“당연히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러 갔죠. 그리고 이지원에 대해 정신감정도 의뢰했거든요. 만약 진짜로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거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게 다 쇼하는 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어요.”김인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다가 조하랑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예전에 제가 지원이한테 어떻게 가스라이팅 당했는지 하랑 씨도 잘 알잖아요. 만약 저를 구해줬던 사람이 형수님이었단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절대 그 애를 도와주지도 않았을 겁니다.”“지금은 그저 마땅히 받아야 할 벌만 받았으면 좋겠고요.”조하랑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인우 씨가 또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여자한테 찝쩍거린다고만 생각했어요.”그녀의 말에 김인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되물었다.“하랑 씨,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순간 조하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누, 누가 질투한다는 거예요? 그저 저를 배신한 인우 씨한테 화나고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나한테 실망했을 뿐이라고요!”“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 의사도 임산부가 흥분하면 아이한테 안 좋다고 말했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는 다정하게 조하랑을 품에 안았는데 순간 그녀는 얼굴이 더욱 빨개진 채 온몸이 굳어버렸다.당연히 김인우도 눈치채고는 빠르게 물었다.“왜요, 부끄러워요?”“그, 그럴 리가요...”조하랑은 말까지 더듬으며 애써 덤덤한 척했다.“저도 안을 줄 알거든요?”그리고 똑같이 김인우를 꼭 안아줬는데 이번에는 김인우가 속으로 움찔했다.추운 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꼭 껴안아 줬는데 거리를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 멈춰졌다 가곤 했다.조하랑도 어느새 그걸 느꼈는지 재빨리 김인우를 밀쳐냈다.“됐어요. 이제 병실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인우 씨도 그만 돌아가요.”“저랑 같이 안 가고요?”김인우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