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정은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두 아이를 당분간 이곳에 머물게 하고 우리가 틈날 때마다 와서 함께 돌보는 건 어때요? 아이들이 우리와 충분히 친해진 후에 데려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까.유남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좋아.”그러나 박민정은 여전히 걱정이 남았다.“하지만 이렇게 하면 어머니께서 부담스러워하지 않으실까요? 혹시라도 힘드시면 내가 직접 돌보는 게 낫겠어요.”유남준은 미소를 지었다.“전혀. 어머니께서는 오히려 두 아이를 더 오래 돌볼 수 있길 바라고 계셔. 아까도 만약 우리가 아이들을 데려가게 되면 언제든 찾아와 볼 수 있냐고 물으시더라.”“그렇다면 이렇게 하기로 해요.”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계를 흘끗 본 그녀는 어느새 시간이 늦었음을 깨달았다.“벌써 이렇게 늦었네요. 우리 이제 자요.”그녀는 피곤한 듯 하품을 하며 몸을 기울였으나 유남준은 그녀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너... 뭐 잊은 일은 없어?”“뭔데요?”박민정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지만 그 의미를 깨닫는 순간 얼굴이 불타오르듯 붉어졌다.그 순간, 방 안의 불이 꺼졌고 어둠 속에서 조용히 숨결이 섞여 들었다.다음 날 아침 10시가 지나서야 박민정은 밤새 쌓인 피로에 휩싸인 채 눈을 떴다. 씻고 난 후 그녀는 박윤우가 이미 학교에 간 것을 알았다.이때 하인이 아침 식사를 가져왔다.“남준 씨는요?”박민정이 물었다.“대표님께서는 아침 일찍 회사로 출근하셨습니다. 오늘 하루는 푹 쉬시라고 하셨고 퇴근 후 일찍 돌아오실 예정이라고 하셨어요.”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을 마친 후 그녀는 두 아이를 찾으러 나섰다. 정원에서는 두 아이가 작은 나비를 쫓으며 깔깔거리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고영란의 눈길에는 애정이 가득했다.박민정이 다가가자 고영란은 기쁜 얼굴로 손짓했다.“민정아, 어서 와서 앉아.”“네.”박민정은 고영란 옆에 앉았다.고영란은 아침부터 기분이 좋아 보였는데 유남
“이지원 씨, 오랜만이네요.”박민정의 입꼬리는 웃고 있었지만 눈빛은 차가웠다.이지원은 박민정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과 그 말투에 본능적으로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기운이 퍼져나감을 느꼈다.“박민정...”“그렇게 부르지 않는 게 좋겠네요.” 박민정은 가볍게 끊어 말했다. “우리 그 정도로 친한 사이 아니잖아요? 오히려 적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걸요.”이지원의 손이 서서히 주먹을 쥐었다.“...그때 일은 나 혼자 결정한 게 아니었어요. 전부 유남우가 날 몰아세웠다고요.”“시키면 뭐든 다 해야 했다는 거예요?” 박민정이 서늘하게 되물었다.“이게 나한테 하고 싶은 변명이라는 거예요? 내 아이를 빼앗아가고 날 벼랑 끝으로 몰아넣은 것에 대한?”이지원의 몸이 공포에 휩싸였다. 날씨는 선선했지만 그녀의 이마에는 이미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민정 씨, 내가 잘못했어요.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요.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줘요.”박민정의 눈빛이 더욱 날카로워졌다.“이미 한 번 용서했어요. 이번에도 용서한다면 그건 내가 어리석은 거죠.”한 마디 한 마디가 단호하게 박혔다. 이지원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몸을 돌려 촬영장으로 도망치듯 뛰어갔고 박민정은 그녀의 초라한 뒷모습을 줄곧 지켜보았다. 쫓아갈 필요도 없었으니까.결국 그녀는 상반부 촬영을 마치자마자 강제로 촬영장에서 내쫓겼다.박민정이 차 안에 앉아 눈썹을 찡그린 채 관자놀이를 문지르고 있을 때 정민기가 보고를 해왔다.“이제 어떻게 할까요?”박민정이 짧게 대답했다.“일단 높은 자리에서 끌어내려요.”지난 1년 그녀는 깨달았다. 착하게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때로는 단호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대가를 치루어야죠.”정민기는 그녀의 의도를 즉시 이해했다.“알겠습니다.”몇 시간 후, 각종 포털과 미디어 사이트에는 ‘이지원 은퇴’ 소식이 도배되었다.그녀가 맡았던 광고 계약들은 일제히 해지되었고 일부 브랜드에서는 손해 배상을 요구했다.순식간에
정수미는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때 이지원이 널 사칭하고 있었잖니?”“하지만 난 처음부터 이지원이 네가 아니라는 걸 느꼈어. 그래서 사람을 붙여 몰래 이지원의 뒤를 밟게 했고 그 과정에서 이지원이 저지른 추악한 짓들을 알게 되었지.”“그날 밤 이지원이 고용한 불량배들은 이미 내가 처리했어. 덕분에 하랑이는 아무 일도 당하지 않았단다.”모든 이야기를 들은 박민정은 가슴을 쓸어내렸다.“엄마, 저 하랑이한테 전화 좀 해야겠어요.”“그래, 다녀오렴.”박민정이 밖으로 나가 조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조하랑은 임신한 이후로 입덧이 심해 아무것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늘어지게 소파에 기대어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고 머릿속도 텅 빈 것 같았다.예전 같았으면 온라인 쇼핑몰 운영으로 바쁘게 지냈겠지만 이제는 그럴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과거의 박예찬이라면 벌써 그녀를 채근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는 그녀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 난 후, 더욱 세심하게 그녀를 챙겼다.과일을 씻어 가져다주는 것은 기본이고 밤마다 이불을 잘 덮고 자라고 신신당부했다.이런 다정한 모습에 조하랑은 마음 깊이 감동했고 아이를 반드시 낳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혔다.“하랑 아줌마, 엄마가 전화하셨어요.”전화벨은 한참이나 울렸지만 조하랑은 깊이 잠든 채 깨어날 기미가 없었다.박예찬은 박민정에게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싶어 그녀를 조심스레 흔들었다.조하랑이 힘겹게 눈을 떴다.“예찬아, 무슨 일이야?”“전화 왔어요.”박예찬이 그녀의 손에 핸드폰을 쥐여주자 조하랑은 하품을 하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민정아, 무슨 일 있어?”박민정은 방금 전 정수미에게 들은 이야기를 차분히 전했고 조하랑은 깜짝 놀랐다.“...아 그래서...”그녀의 목소리에 미묘한 어색함이 묻어났는데 박민정은 이를 금방 눈치를 챘다.“하랑아, 혹시... 너 이미 알고 있었어?”조하랑은 잠시 망설였다.그녀는 방 안에 아직 박예찬이 있다는 걸 깨닫고 그를
전화를 끊기 전, 조하랑은 잊지 않고 당부했다.“민정아, 아줌마께 꼭 감사 인사 전해 줘.”정수미가 아니었더라면 자신이 겪었을 일은 끔찍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응, 알았어.” 박민정은 짧게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한편, 이지원은 집에서 송달된 변호사 서한과 연이어 도착하는 계약 해지 통지서를 바라보며 극도의 불안에 휩싸여 있었다.그녀는 김인우나 유남준이 곧 자신을 찾아와 추궁할 거라 생각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그러나 시간은 잔인했다. 한 순간 한 순간이 지나갈수록 그녀의 불안은 더욱 깊어졌다.“어떡하지...?”이지원은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집어 들고 유남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이번에는 이전과 달랐다. 신호가 가더니 뜻밖에도 전화가 연결되었다.“무슨 일이에요?”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유남우의 목소리는 한결같이 차가웠으나 이지원의 목소리는 이미 갈라질 대로 갈라져 있었다.“남우 씨... 박민정이 전부 기억해 낸 것 같아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저 그때 당신을 도우려고 했던 거잖아요! 당신도 그때 절 보호해 주겠다고 했고요!”유남우는 병실 한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그의 시선은 곤히 잠든 작은 아이, 유다혜에게 고정되어 있었다.그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이지원 씨가 착각한 것 같군요. 난 당신이 다시 스타로 복귀할 기회를 주겠다고 했지, 평생 지켜주겠다고 약속한 적은 없어요.”“뭐라고요?”이지원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가까스로 억눌렀다. 아직 남은 이성이 그녀를 붙잡았다.“제발요. 한 번만 저를 도와주세요.”유남우는 잠시 말을 아꼈다.“...나도 지금 내 앞가림하기 바뻐요.”그는 짧게 덧붙였다.“스스로 잘 살아남아 봐요.”그렇게 말한 그는 곧바로 전화를 끊었고 휴대폰을 옆으로 던진 후 깊은 생각에 잠긴 채 다시 아이를 바라보았다.그때 간호사가 다가왔다.“어휴, 이 아이 엄마는 도대체 언제쯤 보러 오려는 걸까요? 가족이라고는 한 명도 없고...”그녀는 유남우를 힐끔 보며 물었다.“혹시 이 아이와
전화를 받자마자 저편에서 박민정의 차분하기 이를 데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한 번 만나죠.”그는 휴대폰을 꼭 쥔 채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좋아.”전화를 끊고 나니 박민정이 보낸 주소가 화면에 떠 있었다. 그는 운전기사에게 그곳으로 가라고 지시했다.옆자리에 앉아 있던 홍주영 역시 차가 방향을 바꾸는 것을 알아챘지만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유남우는 먼저 차에서 내렸고 홍주영을 돌아보며 말했다.“홍 비서, 차에서 기다려.”홍주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녀는 유남우가 카페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두고는 홀로 한숨을 내쉬었다.그때 운전사인 주범식이 그녀에게 농담조로 물었다.“홍 비서, 왜 그래? 혹시 연애가 잘 안 풀려?”직장에서의 딱딱한 모습과 달리 홍주영은 연장자인 주범식 앞에서는 좀 더 편안한 태도를 보였다.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아뇨, 연애는 할 만해요.”“할 만하다고?”주범식은 젊은이들의 말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그럼 언제 결혼할 건데?”결혼...그 한마디에 홍주영은 순간 말을 잃었고 머릿속에는 하민재의 장난기 어린 얼굴이 떠올랐다.그녀는 확신이 없었다.“...글쎄요,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하겠죠.”“그렇지. 하지만 우리 도련님 같은 사람을 옆에서 오래 보면 다른 남자는 눈에 안 들어올 수도 있어. 도련님은 따뜻하고 자상하잖아.”주범식이 말을 이었다.밖에서 본 유남우는 언제나 온화하고 신사적이며 부하 직원들에게도 한없이 친절한 사람이었다.홍주영은 다시 한 번 웃었으나 이번에는 어딘지 씁쓸한 미소였다.“네, 도련님은 정말 좋은 분이에요. 부디 행복해지셨으면 좋겠어요.”“응, 좋은 사람일수록 오히려 상처받는 일이 많다니까. 윤소현 씨는 너무 심했어. 저렇게 완벽한 남자를 두고 배신이라니.”주범식은 혀를 찼다.그는 단순한 외부인의 시선으로만 판단했다. 돈 많고 잘생기고 다정한 남자를 두고도 만
과거, 유남우는 암살당할 뻔한 적이 있었다.그 순간, 박민정은 본능적으로 그의 앞을 막아섰고 등에 남은 깊은 상처를 입었는데 그 흉터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하지만 그녀는 줄곧 자신이 구한 사람이 유남준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줄곧 유남준이 자신에게 빚을 졌다고 믿어 왔다.유남우는 그녀의 말을 듣고 목이 텁텁해졌다.“어떻게 나한테 정신과 약을 먹일 수 있어요?”박민정은 다그치듯 물었다.아직도 믿을 수 없었다. 어린 시절 그렇게 다정했던 사람이 지금처럼 왜곡된 집착을 품게 될 줄은.유남우는 커피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 채 조용히 커피를 한 모금 머금었다.“다른 방법이 없었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었을 뿐이야.”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하지만 결국 넌 이미 마음을 돌렸어. 솔직히 말해서 너 처음부터 유남준을 좋아했던 거 아니야?”박민정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그녀는 이 사람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유남우는 곧바로 말을 덧붙였다.“유남준에 대한 기억을 잃었잖아. 그런데 왜 지난 1년 동안 나랑 함께 있으면서도 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 처음부터 마음이 떠 있었던 거, 아니야?”그는 잊을 수 없었다. 외국에서 함께했던 1년동안 그녀는 그의 손길을 본능적으로 피했다. 마치 몸이 스스로 거부하는 것처럼.그리고 이제 유남우의 시선이 그녀의 배로 향했다.“몇 개월이나 됐어?”“...네?”박민정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임신 몇 개월이냐고.”유남우의 목소리는 더없이 차가웠다.“얼마 전 조하랑이랑 병원에 갔었잖아.”그제야 박민정은 깨달았다. 그가 조하랑의 임신을 자신의 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가 해명하기도 전에 유남우가 먼저 말을 던졌다.“정말 실망이야. 형을 기억조차 못 하면서 형 아이를 가졌다고? 형이 강요한 거야? 아니면 네가 원한 거야?”그 순간 유남우의 태도는 더 이상 신사가 아니었고 그의 말
여느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결코 유남우가 저지른 일들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박민정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이런저런 사정이 있었겠죠. 아마도 스트레스가 너무 컸던 걸 거예요.”홍주영이 애써 변호하듯 말했다. 어쨌든 두 형제 가운데 무엇이든 유남준이 앞서는 상황이었으니까.박민정은 그가 유남우를 두둔하는 걸 보곤 더는 논쟁을 벌이지 않기로 했다. 마침 유남우가 커피숍에서 나오는 것이 보이자 그녀는 짧게 말했다.“그럼, 난 이만 가볼게요.”“네.”홍주영은 그녀가 멀어지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고 그때 유남우가 다가왔다.“방금 민정이랑 무슨 얘길 했어?”홍주영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별 얘기 아니었어요.”그러나 유남우의 눈빛에는 묘한 기색이 스쳤다.“가자, 회사로.”“네.”차 안에서 홍주영이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도련님, 이번 주말에 고향에 좀 다녀오려고요.”유남우가 의아하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무슨 일 있어?”“...약혼하려고요. 가족들이 서두르네요.”순간 차 안이 고요해졌다. 늘 홍주영에게 빨리 결혼하라고 등을 떠밀던 유남우였는데 이번만큼은 의외로 망설이는 기색이었다.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요즘 고씨 가문과의 협력이 중요한 시기인데, 좀 미룰 수는 없겠어?”홍주영은 깜짝 놀랐다.그는 항상 자기 뜻을 존중해 주었는데 이번엔 은근히 만류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연로한 할머니, 그리고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이 떠올랐다.“...이미 다 정해졌어요. 미루기 힘들 것 같아요.”잠시 침묵하던 유남우의 시선이 깊어졌다.홍주영은 그가 늘 하던 말처럼 ‘잘됐다’고 할 줄 알았는데 이번엔 묘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곧 담담하게 말했다.“그래, 널 붙잡아 둘 순 없지.”“감사합니다.”홍주영은 차분히 인사했다.“대신, 재정팀에 말해 놓을게. 약혼 선물로 두둑이 챙겨 줄 테니.”홍주영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그럴 필요 없어요. 그
박민정은 그녀의 시선을 눈치채고는 부드럽게 말했다.“주말에 아이들을 데리고 올게요.”정수미는 기쁜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래.”그러고는 무언가 떠올랐는지 박민정의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민정아, 여기 일 마무리되면 나랑 함께 집에 다녀오자.”그녀가 말한 ‘집’은 서울을 뜻했다.정씨 가문은 진주시에도 사업을 운영하고 있었지만 진정한 본가와 본사는 서울에 있었다.박민정은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히 물었다.“무슨 일이라도 있어요?”정수미는 가볍게 웃었고 옆에 있던 비서가 참지 못하고 대신 설명했다.“아가씨, 대표님께서 정식으로 찾으신 만큼 이제 본가로 가서 가문에 인사드려야죠.”그러나 정수미는 그녀의 말을 막으며 부드럽게 정정했다.“그런 거창한 일은 아니야. 그냥 너의 집을 보여주고 싶을 뿐이야.”‘너의 집.’그 단어를 박민정은 처음 들어보았다. 지금까지 그녀에게는 박씨 집안, 유씨 집안, 혹은 친정과 시댁이라는 단어만 있었을 뿐이었다. 자신만의 집이란 것이 있었던가.그녀는 깊이 고민하지 않고 단번에 대답했다.“네, 갈게요.”정수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그래, 가면 친척들도 만나야 해. 모두 너를 보고 싶어 하거든.”‘친척들.'그 말을 듣자 박민정은 조금 불안해졌다.그녀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친척들의 따뜻한 환대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박씨 집안이든 한수민의 집안이든 모두 그녀를 그저 곁다리처럼 대했을 뿐이었다.“그게...”뭔가 말을 꺼내려던 순간 정수미가 핸드폰을 들고 이마를 툭 쳤다.“아이고, 깜빡했네! 너의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오래전부터 널 보고 싶어 하셨어. 가족 채팅방에 초대해달라고 하셨는데 내가 지금 추가할게.”박민정은 순간 당황했다. 그러나 그녀의 동요를 알아채지 못한 정수미는 이미 핸드폰을 조작해 그녀를 가족 단톡방에 초대했다.“자, 어서 수락해.”정수미의 들뜬 표정을 보고 차마 거절할 수 없었던 박민정은 천천히 버튼을 눌렀다.순간, 수백 명이 있는 거대한 가족 채팅방이 열렸다. 그
“엄마, 아빠랑 이혼 잘하셨어요.”유남우는 말을 마치자마자 유남준 앞을 지나치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내가 능력이 없어서 이번에도 졌네.”유남준은 그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째려봤다.유남우는 사실 그가 어떻게 반격할지 걱정되기보다 이번에도 졌다는 게 더 분통했다.밖으로 나온 뒤 그는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라도 걸고 싶었지만 딱히 연락할 사람이 없었다.연락처를 훑어보다가 홍주영에서 멈칫하더니 결국에는 통화버튼을 누르지도 못한 채 핸드폰을 다시 꺼야 했다.실내 안.거실은 유난히 조용했고 유지욱은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남우가 왜 저렇게 변했는지 모르겠어. 예전에는 말도 잘 듣고 착한 아이였는데.”고영란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그가 말하는 ‘예전’이 정확하게 언제인지도 감이 오지 않았다.고영란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모습에 유지욱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왜 그래?”“아니에요.”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다시 말을 이었다.“이번 달은 될수록 어디 가지 말고 집에 있어요. 그리고 이혼 숙려기간이 끝나는 대로 다시 가서 마무리 지으면 될 것 같아요.”고영란은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이혼하고 싶은데 지금 이혼하려면 한 달씩이나 기다려야 했다.그리고 위층으로 올라가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그리고 이 한 달 동안에 아버지로서 해야 할 일이 뭔지 좀 생각해 보고요.”말을 마친 뒤 유지욱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한편.박씨 가문의 옛 저택.박민정은 유남준이 너무 걱정되어 한걸음에 집으로 돌아왔다.비록 서다희가 괜찮다고는 했지만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이때, 밖에서 들리는 차 소리에 박민정이 다급히 차창 밖을 내다보니 유남준의 차도 마침 도착해 있었다.박민정은 빠르게 차에서 내린 뒤 유남준에게 달려가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괜찮아요?”그러자 유남준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당연하지, 다희가 나 괜찮을 거라고 알려줬잖아.”박민정은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
유석진의 입에서 갑자기 자기 둘째 아들의 이름이 거론되자 고영란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또한 왜 두 아들 사이에 지금 저런 모순이 생긴 건지 알 수 없었다.유남준도 괜히 고영란이 중간에서 난처하게 된 것 같아 일부러 유남우를 빤히 바라보며 유석진에게 말했다.“이번 일은 사과한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에요. 큰아빠가 아무리 남우랑 같이 벌인 일이라고 해도 이번만큼은 가만있지 않겠습니다.”별로 무겁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이상하게 위협감이 느껴졌다.순간 유석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이때, 그의 며느리인 최현아가 앞으로 한 발짝 나서며 끼어들었다.“남준 씨, 그래도 한 가족인데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그러자 유성혁도 한마디 거들었다.“남준아, 우리도 잘못했단 걸 알고 있어. 아버지가 이제 연세도 많아서 상황판단이 안 될 때가 많아.”유석진도 사실 지금 자존심을 부려서 될 일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지금 네가 원하는 게 뭔데? 말해주면 내가 다 들어줄게.”사실 유남준은 이 말만을 기다렸다.“금방 인수한 시내 중심에 있는 그 건물을 저한테 넘겨주세요.”그 땅은 유명훈의 땅이고 죽기 전 유석진에게 물려준 유산인데 지금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살 수 없을 정도로 값이 올랐다.유석진이 이 땅의 주인이 됨으로써 그곳의 상권을 손에 쥔 거나 다름없었는데 나중에 아무 건축물을 세워 올려도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건 안되지!”역시나 유석진이 단번에 거절했다.그가 오랫동안 눈독 들였던 땅이었는데 유명훈이 죽어도 물려주지 않으려 해서 여태껏 애를 먹고 있었다가 이제 겨우 손에 들어온 땅이고 또 자기만의 계획이 따로 있었다.“그러면 조만간 IM 그룹의 변호사를 만나셔야겠네요.”유남준은 더 이상 그와 얘기하고 싶지 않았고 유석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집안 도우미에게 외쳤다.“모셔다드려!”그렇게 도우미들은 그들을 전부 밖으로 내보냈고 거실에는 유남준 가족들만이 남게 되었다.유지욱과 고영란은 눈앞의 두 아들에게 뭐라고 말했으면 좋을지
유남준이 잡혀갔다는 소식에 유석진 가족들은 조용히 자축하고 있었다.최현아도 너무 기뻐했지만 유독 유성혁만 우울한 얼굴로 그들에게 물었다.“아빠, 그래도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인데 꼭 이래야 할까요? 남준이가 잡혀가도 우리한테 아무런 이득도 없잖아요. 그리고 만약 다시 풀려나서 우리가 한 짓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요.”그러자 유석진이 미간을 찌푸리고 답했다.“왜 쓸데없는 일을 벌써 걱정하고 그래? 간이 그리도 콩알만 해서 큰일 하겠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유성혁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다만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유지훈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저는 할아버지가 한 행동이 맞다고 봐요. 사람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그러자 유석진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껄껄거리며 웃었다.“하하, 역시 우리 손자가 똑똑하다니까. 네 말이 맞아. 사람은 무조건 자기가 일 순위여야 해. 절대 네 바보 같은 아빠를 닮아서는 안 된다.”그러자 유지훈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할아버지, 저도 알고 있어요.”그리고 유석진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그러나 그들은 너무 일찍 기뻐했던 게 오후가 되자마자 유남준은 바로 풀려났다.그길로 옛 저택으로 오게 되었고 동시에 유석진네 식구들과 유남우를 전부 집으로 불러 모았다.이 시각, 유지욱도 마침 그곳에 있다가 눈앞의 상황에 어리둥절해서 물었다.“남준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아빠, 제가 지금부터 저 사람들의 실체에 대해 다 밝히려고요.”그리고 서다희가 한 무더기의 자료와 증명서를 건네주자마자 그는 유석진네 식구들에게 뿌려줬다.종이들이 공중에서 흩날리다가 전부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유석진은 그중 한 장을 주워 읽어보고는 너무 황당한 나머지 코웃음을 치며 그에게 말했다.“남준아, 다 오해야. 우리가 왜 그런 짓을 하겠니?”그러자 유남준이 눈살을 찌푸리고 그에게 되물었다.“우리 회사에 심어둔 사람들을 제가 다 데려올까
유남준은 사실 진작에 유남우와 유석진 쪽에 사람들을 붙여서 그들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었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파악하고 있었지만 도대체 무얼 하려는지 궁금해서 일단 내버려두고 있었다.이튿날, IM 그룹으로 세무국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그러자 서다희가 눈살을 찌푸리고 중얼거렸다.“대표님을 감옥에 보내려고 아주 별짓을 다 하네요. 이런다고 그 사람들한테 득이 되는 게 뭔지 정말 모르겠어요.”특히 유남우는 왜 자기 친형을 왜 이렇게까지 괴롭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조사해 보니 역시나 회사 장부에 문제가 있었고 회사 자금을 불법으로 돌렸다는 증거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그러나 이 모든 게 다 그들이 일부러 만들어낸 가짜 장부들이었다.그렇다고 해도 유남준은 회사 법인으로서 조사를 받아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연행되었다.가면서도 서다희에게 당부했다.“민정이한테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줘.”서다희는 한껏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굳이 말하지 않아도 뉴스에서 하루 종일 보도될 예정이라 아마 얼마 안 돼서 알게 될 것이다.역시나 박민정은 출근길에 그에 관한 뉴스 기사를 보게 되었다.“어떻게 이럴 수가?”이때, 고영란도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왔다.“민정아, 남준이한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그러나 박민정도 아직 무슨 상황인지 모르고 있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저도 방금 기사를 봐서 잘 모르겠어요. 제가 지금 당장 다희 씨한테 전화해 볼 테니까 어머님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그래.”고영란은 착잡한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유지욱과 이혼하겠다고 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들한테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서다희는 빠르게 박민정에게 전화해서 유남준이 시킨 대로 알려줬고 모든 일은 다 대비되어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박민정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이때 서다희가 한마디 더 했다.“그런데 이 일은 절대 고영란 사모님한테 말하지 말아 주세요.”“알겠어요.”어쩌면 유남우 귀에도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나이니까 더 이혼하자는 거예요. 굳이 남은 인생을 당신한테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고영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방에 들어갔다.그러나 유지욱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문득 여태껏 이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심술부리는 원인이 분명 아버지 재산 때문인 것 같았고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이튿날.유명훈의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박민정의 친구들도 모두 오게 되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손연서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최현아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한쪽에서 사람들과 유명훈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욱과 고영란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렇게 유명훈의 장례는 총 3일 동안 진행 후 끝났다.고영란은 담담한 얼굴로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유남우에게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이만 갈라서려고 해.” 순간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유지욱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그는 원래 유명훈의 장례가 끝나면 계속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영란한테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일시적으로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지금 애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진짜 이혼하려고?”“네.”고영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저는 너무 괴로워요. 지금 당장 법원에 갑시다.”고영란은 지금 그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유지욱도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라 단번에 그러자고 하더니 두 사람은 법원으로 출발했고 두 아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자식들도 이미 다 컸고 자기 혼인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돌아가는 차 안
고영란도 유석진의 고함에 깜짝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여태껏 모든 집안일을 아내한테 떠넘긴 채, 홀로 밖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유지욱이 원망스럽기만 했다.한 사람에 대한 단념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실망감이 천천히 쌓이면서 식어가는 것이다.보아하니 오늘 저녁에도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유지욱이 도착해보니 유씨 가문의 모든 친척이 다 모여있었다.그리고 이미 상복으로 갈아입은 고영란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왜 진작에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그의 물음에 고영란은 실망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제가 말해주지 않았다고요? 한 달 전에 전 분명히 아버님 건강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으니까 와서 회사 일 좀 도와드리라고 귀띔해 줬어요.”“난 네가 우리 아버지 재산 때문에 나더러 오라는 줄 알았지.”유지욱의 말에 고영란은 큰 충격을 받고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유지욱 씨, 정말 어이없네요. 맞아요, 제가 빨리 돌아오라고 했던 원인이 아버님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지욱 씨한테도 나눠줬으면 했어요. 그런데 그 재산이 전부 아주버님한테 넘어갔네요?” 그러나 유지욱은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그깟 돈 몇 푼 가지고 왜 그래? 우리가 모두 한 식구인데 주면 줬지.”유지욱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님들을 맞이하러 떠났다.그리고 유석진과도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 고영란은 제대로 마음이 상했다.박민정도 손자며느리로서 유남준과 같이 손님들을 맞이하다가 우연히 시부모님이 서로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사실 유씨 가문에 시집온 이후로 시아버지인 유지욱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유지욱은 젊었을 때부터 고집불통에 집안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매일 여행이나 다니면서 자유롭게 사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여 유지욱과 고영란은 1년 중에도 만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살짝 다가가 그에게 말했다.“남준 씨, 가서 어머님 좀 위로해 주세요.”여자
유남준의 아버지, 유지욱은 계속 외국에서 살다보니 이 자리에 없었다.그러자 고영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지욱 씨는 지금 당장 오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방금 비행기 탔다고 했으니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거예요.”그러자 유석진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그러면 지욱이가 도착하고 나서 다시 말할 테니까 외부인은 참견하지 말아요.”순간 고영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 집에 들어와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줬는데도 제가 아직 외부인인가요? 저는 오늘 아버님께서는 왜 그리도 자식들을 편애하시지 꼭 물어봐야겠어요!”“제 아들들이 능력이 뛰어나면 이런 불공평한 대우도 다 받아들여야 하나요?”여태껏 유명훈은 많은 주식을 갖고 있었다.비록 유남준이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유명훈의 지분이 그대로 유석진네로 넘어가게 되면 유남준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더구나 유남우도 그의 재산이 필요한데 말이다!게다가 유명훈은 오랜 세월 동안 주식 말고도 분명 많은 재산을 모았을 텐데 그 돈마저 전부 저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고영란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유석진은 유명훈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여태껏 지욱이를 잘 붙잡아 두지 못한 제수 씨를 탓해야죠! 지욱이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없어요!” 고영란이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유남준이 그녀를 말렸다.“엄마, 그만해요.”여태껏 유명훈이 유석진네만 편애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던 그이기에 지금 아무리 그와 말싸움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유남우도 불쾌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 그녀에게 말했다.“엄마, 형 말이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결정하신 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싸울 필요 없어요.”이 시각, 침대에 누워있던 유명훈은 호흡이 점점 더 가빠져 헐떡거리기 시작했다.그런데도 눈앞에서 자식들이 자기 재산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기만 했다.“지욱이...”그는 힘겹게 유지욱을 불렀다.유지욱은 평소에도 그의 말을
최현아는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지만 박민정은 그저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그러자 그녀는 뻘쭘해진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일은 무슨, 윤소현이 드디어 판결받았다고 해서 축하해주려고 왔지.”박민정은 분명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다.지금 최현아와 그의 시아버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왠지 그럴수록 더 수상했다.“감사합니다.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일 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박민정이 뒤돌아서니 역시나 최현아가 빠르게 그녀의 팔을 부여잡았다.“민정아,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박민정은 이제 와서 한 식구라는 그녀의 말이 그저 가소로웠다.“도대체 할 말이 뭔가요?”그리고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최근에 할아버지 건강이 점점 악화하면서 동서랑 남준 씨가 그립기도 하고 우리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도 보고 싶은가 봐. 혹시 오늘 밤 할아버지 뵈러 같이 가지 않을래?”최현아는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사실 박민정도 할아버지의 건강이 여태껏 좋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도 아마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네, 알겠어요.” 최현아는 그제야 박민정의 팔을 놓아줬지만 그녀가 떠나가자마자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그리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껏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재수 없는 것, 운발로 지금 자리에 올라앉은 주제에.” 차에는 낯선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박민정한테 화낼 필요 없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할아버지의 주식이랑 모든 돈을 너한테 넘길 수 있도록 잘 구슬리는 거야.”그러자 최현아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나도 알아, 저번에 이미 할아버지랑 말해봤다니까? 유남준 씨랑 민정이는 괜히 고고한 척하면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한 상황이라 우리 쪽에 전부 몰리게 되어있긴 한데, 난 지금 성혁 씨 얼굴만 봐도 짜
조하랑은 그제야 화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그러면 왜 저 여자한테 찾아갔어요?”“당연히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러 갔죠. 그리고 이지원에 대해 정신감정도 의뢰했거든요. 만약 진짜로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거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게 다 쇼하는 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어요.”김인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다가 조하랑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예전에 제가 지원이한테 어떻게 가스라이팅 당했는지 하랑 씨도 잘 알잖아요. 만약 저를 구해줬던 사람이 형수님이었단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절대 그 애를 도와주지도 않았을 겁니다.”“지금은 그저 마땅히 받아야 할 벌만 받았으면 좋겠고요.”조하랑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인우 씨가 또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여자한테 찝쩍거린다고만 생각했어요.”그녀의 말에 김인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되물었다.“하랑 씨,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순간 조하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누, 누가 질투한다는 거예요? 그저 저를 배신한 인우 씨한테 화나고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나한테 실망했을 뿐이라고요!”“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 의사도 임산부가 흥분하면 아이한테 안 좋다고 말했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는 다정하게 조하랑을 품에 안았는데 순간 그녀는 얼굴이 더욱 빨개진 채 온몸이 굳어버렸다.당연히 김인우도 눈치채고는 빠르게 물었다.“왜요, 부끄러워요?”“그, 그럴 리가요...”조하랑은 말까지 더듬으며 애써 덤덤한 척했다.“저도 안을 줄 알거든요?”그리고 똑같이 김인우를 꼭 안아줬는데 이번에는 김인우가 속으로 움찔했다.추운 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꼭 껴안아 줬는데 거리를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 멈춰졌다 가곤 했다.조하랑도 어느새 그걸 느꼈는지 재빨리 김인우를 밀쳐냈다.“됐어요. 이제 병실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인우 씨도 그만 돌아가요.”“저랑 같이 안 가고요?”김인우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