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림 쇼핑몰에 도착한 박민정이 쇼핑을 하러 차에서 내리는데 정민기가 뒤따라오다가 갑자기 멈췄다.“누군가 우리를 미행하고 있습니다.”박민정이 그 말에 걸음을 멈췄다.“유남준 씨가 보낸 경호원인가요?”그리 먼 곳도 아니었고 박민정은 사람들이 많이 따라오는 것을 싫어했기에 그들이 올 가능성은 작았다.“아니요, 모르는 얼굴들입니다. 일단 쇼핑부터 하죠.”“그래요.”박민정은 정민기에게 항상 편안함을 느꼈다. 연지석은 평범한 사람 스무 명도 정민기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고 말했다. 정민기는 죽은 시체 더미 속에서 살아서 기어 나온 사람이었다.쇼핑몰 안에서 가족들의 옷을 고르던 박민정은 두 아이와 은정숙의 옷은 잘 골랐지만, 유남준의 옷에 대해서는 조금 망설였다. 과거 유남준이 입었던 옷은 고가의 맞춤옷이었고 온통 무채색에 전혀 화사하지 않았다. 그 생각에 박민정은 유남준을 위해 특별히 밝은 색상의 비싸지 않은 옷을 골라주었다. “정민기 씨도 몇 벌 입어보지 않을래요?”입구에 서 있던 정민기는 박민정의 말을 듣고는 잠시 당황하다가 곧바로 거절했다.“괜찮습니다. 고마워요.”박민정은 생각에 잠겼다. 전에 정민기가 고향 집에 약혼녀와의 결혼을 취소하러 간다는 말이 떠올랐다. 이제 여자 친구가 생겨서 자신이 옷을 사주는 게 불편한 걸까?박민정은 서둘러 해명했다.“오해하지 마세요. 직접 고르시고 저는 고용인으로서 돈만 내는 겁니다. 여자 친구가 알아도 화내지 않을 거예요.”여자로서 여자 친구나 아내가 있는 남자에게 옷을 사주는 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박민기의 차갑고 무뚝뚝한 얼굴에 묘한 표정이 교차했다.“여자 친구 없습니다. 월급만 있으면 되니까 거절한 겁니다.”약혼녀와 결혼을 취소한 이유는 정해진 결혼이라 사랑도 없거니와 약혼녀의 배신 때문이었다.박민정은 더욱 당황스러워졌다.“알았어요.”정민기는 상사가 주는 혜택도 거부하는 참된 경호원이었다.그녀는 이번 달 정산이 끝나면 정민기에게 월급을 몇 배로 올려줄 생각도
정민기는 정보를 알아낸 뒤 경찰에 신고해 그들을 보냈다.이윽고 그는 차에 올라타 박민정에게 알렸다.“누군가 시킨 것 같은데 돌아가서 확인해 보겠습니다.”“그래요.”박민정 역시 자신을 해치려는 사람이 누군지 알고 싶었다.한편 윤소현은 쇼핑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자신의 차에 남아 박민정의 초라한 몰골을 기다리던 중 비서로부터 전화를 받았다.“아가씨, 박민정이 아주 유능한 경호원을 옆에 두고 있어 우리 쪽 사람들을 쓰러뜨려서 경찰서로 보냈어요.”“경호원 혼자서 우리 쪽 사람들을 전부 때렸다고?”윤소현은 믿을 수 없었다.“네.”윤소현은 화를 내며 전화기를 꽉 움켜쥐었다.“그 여자는 운도 좋아. 그쪽은 뭐 하느라 그런 쓸데없는 놈들을 데려왔어요?”비서는 감히 대답하지 못했고 윤소현은 다시 물었다. “그 여자 작업실 처리하라는 건 어떻게 됐어요?”“아, 아직 스튜디오를 못 찾았습니다.” 비서는 감히 윤소현을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윤소현은 전화를 집어 들어 그녀를 향해 내리쳤다.“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비서는 머리가 찢어져 피가 새어 나왔다.윤소현이 더 욕하려던 찰나 문득 지나가는 행인들이 이쪽을 보는 시선이 느껴지자 바로 똑바로 앉았다.“빨리 차에 타서 출발하기나 해요.”그녀는 한층 누그러진 어투로 말했다.“조심 좀 하지. 내가 휴대폰 놓쳐서 하필 그쪽을 때렸네요. 나중에 돌아가서 의사 선생님께 치료해달라고 해요.”윤소현은 겉으로는 고고한 백조처럼 행동하면서 제법 너른 아량을 베푸는 척하고 있었다.“알겠습니다.”비서는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줄곧 고개를 숙인 채 들지를 못했다.윤소현은 이대로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지금 가장 큰 문제는 박민정이 진주에 없다는 것이다. 양쪽으로 뛰는 박민정을 상대하기에는 너무 힘들었다.윤소현은 밤이 되어서야 윤씨 저택에 돌아왔고 한수민은 일찍부터 그녀를 기다렸다.“소현아, 왔구나. 오늘 어디 갔었어?”“신림현, 왜?”윤소현은 가방을 옆으로 던져놓고 소파에 앉
애초에 은정숙의 말을 잘 들었던 박민정은 심지어 지금 은정숙이 아픈 상태였기 때문에 그녀의 뜻을 거스를 수 없어 일어나서 유남준을 방으로 데려가 옷을 입어보도록 도와주었다.박민정이 유남준을 위해 사준 옷은 대부분 캐주얼한 옷이라 입기 편했다.“옷 벗어요.”박민정은 이렇게 말한 후 새로 산 옷들을 모두 꺼내서 옆에 정리했다.준비를 마치고 유남준에게 가져다주려고 돌아서는 순간 온몸이 굳어버리며 동공이 커졌다.“왜, 왜 옷을 다, 다 벗었어요?”그런데 눈앞에 있는 남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있었다. 완벽한 비율의 몸매에 탄탄한 근육, 에잇팩 복근까지, 그리고…박민정은 당황한 나머지 얼굴에 불이 붙은 것 같은 느낌에 시선을 피했다.비록 예찬이와 윤우를 낳고 유남준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지만 두 사람이 관계를 맺은 횟수는 많지 않았다.이번에 돌아와서 유남준의 핏줄을 위해 능숙한 척 행동했지만 정작 본론으로 들어갔을 땐 유남준이 적극적으로 리드했다.유남준은 항상 자신의 몸에 만족하고 있었기에 잘생긴 얼굴에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안에 입을 옷도 있지 않아?”박민정은 감히 그를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내가 속옷 사준 것도 아니잖아요. 얼, 얼른 속옷 입어요.”그런데 유남준은 이렇게 말했다.“너무 급하게 벗어서 어디에 뒀는지 깜빡했는데 좀 찾아줄 수 있어?”박민정은 그가 일부러 그러는 것 같았지만 빨리 끝내야겠다는 생각에 그가 옷을 놓아둔 곳을 찾으러 갔다.하지만 속옷을 찾기도 전에 유남준이 뒤로 다가왔고 박민정의 몸이 굳어버렸다.그 순간 유남준은 온몸의 피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박민정은 그의 물건이 닿는 것을 느끼며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뭐 하는 거예요?”유남준은 곧바로 한발 물러섰다.“네가 못 찾는 것 같아서 내가 직접 찾으려고.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말을 하던 그는 목에 불이 붙은 것 같았고 귓불이 뜨거웠다.박민정은 재빨리 옷을 뒤지다가 겨우 옷을 찾아 그에게 건넸다.“빨리 입어요!”유남준이
유남준은 그녀를 품에 더 으스러지게 안고 싶었다.박민정이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자신을 가둔 그의 단단한 팔뚝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온몸이 뜨거워지는 동시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남준 씨, 이거 놔요!”목구멍이 꽉 멘 유남준은 이대로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오늘 밤 우리 같이 자자.”그의 뜨거운 입김이 귓속을 파고들자 박민정은 귓불이 빨개졌다.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벌써 두 팔로 그녀를 손쉽게 들어 올려 침대 위에 살포시 눕혔다.“이러지 마요...”거부하려고 하는 순간, 문밖에서 윤우가 다급하게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엄마...”그 소리에 유남준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박민정은 일어나려고 하였으나 그는 큰 바윗덩어리처럼 아무리 밀어도 미동조차 없었다.“남준 씨, 비켜요, 얼른.”목소리를 낮춰 다그쳤지만 그는 역시나 아랑곳하지 않고 문 쪽으로 향해 눈길을 돌렸다.“엄마가 자니까 내일 다시 찾아.”윤우는 문밖에서 그 말을 듣고 잠시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코앞에서 쓰레기 아빠가 엄마를 괴롭히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 윤우는 이내 더 세게 문을 두드리며 소리 질렀다.“아저씨 나쁜 사람이야. 빨리 우리 엄마 내보내요! 엉엉... 우리 엄마 내놔... 엉엉... 엄마, 엄마...”윤우의 울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분간할 수 없는 박민정은 너무 급한 나머지 유남준의 다부진 어깨를 덥석 깨물었다. 그 바람에 유남준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지만 여전히 끄떡도 하지 않고 오히려 그녀를 더 꽉 껴안았다.“민정아, 제발. 오늘은 나랑 같이 있어. 앞으로 네가 뭐라고 하든 다 네 뜻대로 할게.”박민정은 순순히 그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더 세게 깨물었다. 그러자 유남준의 잇새에서 아픔을 참는 나지막한 신음이 흘러나왔다.문밖에서 윤우는 아직도 쉴 새 없이 큰 소리로 떠들고 있었다.“나쁜 놈, 엄마 안 내놓으면 나 경찰에 신고할 거야!”박민정은 입에서 피비린내가 나는 것을 느끼고서야 잠시
그녀의 이부언니, 윤소현!이 답을 듣게 되는 순간 박민정은 약간 얼떨떨해졌으나, 귓가에서는 정민기의 목소리가 계속하여 들려왔다.“어제 그 일을 뒤처리하면서 그놈들한테서 들었는데, 계획대로라면 민정 씨를 잡아가서... 성폭행할 예정이었다고 하네요.”정민기는 입에 담기 어려운 듯 조금 경직된 말투로 그 세 글자를 내뱉었다.그의 말을 들은 박민정은 저도 몰래 주먹을 쥐었다.“알겠어요.”전화를 끊은 후 박민정은 생각에 빠졌다. 윤소현이 자신을 그 정도로 미워할 이유가 대체 뭘까...유일하게 미움을 살만한 일이라면 아마 유남우에 관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자신은 유남우와 아무런 관계도 아니지 않은가.생각 끝에 그녀는 비서 진서연한테 연락해 윤소현의 연락처를 보내달라고 했다. 전에 협력한 적이 있었으므로 진서연은 윤소현의 연락처를 갖고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소현의 전화번호가 찍힌 문자가 도착했다.진서연은 이어서 물었다.“보스, 윤소현과 또다시 협력하려고 그러시는 거예요? 제가 미처 얘기 드리지 못한게 있는데 며칠 전에 저한테 연락이 왔었어요. 보스님의 곡을 또 사고 싶다고 하더라고요.”박민정은 그녀한테 답장했다.“아니야. 사적인 일이야.”“아... 그러시구나.”진서연은 문득 또 다른 일이 생각나 박민정에게 말했다.“참, 보스. 최근에 누가 저희 해외에 등록한 유령 작업실을 몰래 조사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작업실은 박민정이 돌아온 후 만들어낸 대외용 멘트일 뿐이다.진서연의 말을 들자 그녀는 진주시의 누군가가 조사하고 있음을 바로 알아챘다.“넌 신경 쓰지 말고 네 일에 집중해.”“오케이.”만약 누가 감히 함부로 덤빈다면 혼쭐을 내주리라 진서연은 생각했다.귀엽고 온순한 외모와는 달리 진서연은 산타 국제전 여자 조에서 챔피언을 따낸 프로 선수급 유단자로서 보통 남자들은 전혀 그녀의 상대가 될 수 없다. 하나 이편에 있는 박민정은 그들이 누구인지 관심이 없었다. 유령 작업실을 등록 한 건자신이 하는 일을 유남준한테 들키지
윤소현은 꽁꽁 싸맨 채 뽀얗고 말간 얼굴만 드러내놓고 박민정이 걸어 들어오는 모습을 지켜봤다.오밀조밀한 이목구비에, 특히나 정성스레 그려진 듯한 눈매와 눈동자를 가진 박민정은 그녀가 봐도 미인임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아무리 많이 챙겨입었어도 볼륨감 있는 몸매가 감춰지지 않았다.자신도 뒤처지지는 않는다는 걸 물론 알고 있지만 뭔지 모르게 박민정보다 조금 부족한 것만 같았다.“그딴 걸 보낸다고 내가 졸 줄 알았어? 그런 건 나한테 아무런 소용 없어. 그러니까 힘 그만 빼.”이럴 땐 기선 제압이 중요하다고 윤소현은 생각했다.박민정은 속으로 콧방귀를 꼈다. 두려울 거 없는데 왜 일찌감치 여기 와서 앉아 있는건지. 하나 굳이 까발리지 않고 그녀 앞에 친자확인 서류를 내밀었다.의심스러운 눈길로 그 서류를 열어보던 윤소현의 눈동자에는 알지 못할 빛이 스쳤다.“나 뒷조사하고 있었어?”친자확인서를 들고 있는 윤소현의 첫마디가 친자관계 여부에 관한 질문이 아니라 뒷조사를 한 것에 대한 비난이자 박민정은 순식간에 멍해졌다.“한수민 씨의 딸이라는 걸 알고 있었네요.”그녀는 물음이 아니라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그러자 이 사실을 정수미한테 알릴까 봐 두려운 윤소현은 대뜸 해명했다.“나도 어제 금방 들어서 알게 된 거야, 네가 내 이부동생이라는 거.”윤소현은 손을 뻗어 박민정의 손을 꼭 잡았다.“진작에 알았다면 널 해치려고 안 했어. 우린 자매잖아. 난 박민호랑은 달라.”하지만 박민정은 손을 빼내며 냉담한 눈매로 그녀를 쳐다봤다. 참말이지, 윤소현의 연기 실력은 이지원의 발밑도 못 따라간다. 이지원한테서 하도 많이 당해, 이 정도는 눈을 감고도 진심인지 아닌지 변별해 낼 수 있었다.“오늘 여기 가족 상봉하러 온 게 아니에요. 경고하는 데, 이런 일이 또 있는 날엔 저도 가만히 안 있어요.”그 말에 윤소현은 얼굴이 굳어버렸다.박민정은 일어서며 또 한마디 남겼다.“윤씨 집안 아가씨가 무슨 벼슬이라도 되는 줄 아나 본데, 그 집안 재산은 모두
거실 안에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예전의 집안에서 부리던 가정부 따위가 감히 자신한테 이런 말을 할 줄 몰랐던 한수민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은정숙을 때리려고 손을 들었다. 그러자 간병인이 앞으로 나서서 말렸다.“이보세요, 사모님. 저희 집 어르신이 몸도 안 좋으신데 이러시면 곤란해요. 제가 경찰부를 수도 있어요.”한수민은 손을 허공에 든 채로 간병인의 말을 듣더니 입가에 냉소를 흘렸다.“어르신은 무슨. 저거 그냥 데려가는 남자 하나 없는 궁상맞은 여편네일 뿐이야. 운 좋게 내 딸을 좀 돌봐줬다고 지금 이런 호사를 누리고 있는 거고. 내 딸이랑 사위가 능력이 있어서 집에 모시고 있으니까, 진짜로 무슨 귀부인이나 되는 줄 아나 보지?”간병인은 조금 의아했다. 줄곧 은정숙이 박민정의 친척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고, 심지어 눈앞에 있는 이 사모님이 박민정의 친어머니였다.자세히 보니 확실히 좀 비슷하게 생겼긴 하였지만, 성격과 인품이 어찌 이리 다르단 말인가. 말투 또한 신랄하고 각박하기만 하다.하지만 고용주의 친어머니라는 생각에 뭐라고 할 수도 없어, 한쪽에 물러서서 일단 지켜보기로 하였다.은정숙은 한수민의 비꼬는 말에 대꾸했다.“난 아무리 가난해도 남자한테 의지 안 하고 제힘으로 꿋꿋이 잘 살아왔어요. 누구처럼 자식의 피까지 빨아먹는 짓은 절대 안 해요.”박민정의 성질머리가 누구를 닮았는지 한수민은 이제야 깨달았다. 모두 이 은정숙이란 여자한테서 배운 것이었다.화가 치밀어 오른 그녀는 다시 손을 들어 간병인이 채 반응하기도 전에 은정숙의 뺨을세게 내리쳐 바닥에 쓰러뜨렸다.“콜록콜록...”워낙에 몸이 안 좋은 은정숙은 바닥에 쓰러지자 격렬하게 기침 하기 시작했다.간병인은 황급히 그녀를 부축하며 물었다.“어르신, 괜찮아요?”연거푸 나오는 기침 때문에 은정숙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그 모습을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며 한수민은 전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은정숙이 점점 힘들어하며 숨이 넘어갈 것처럼 보이자, 박민정한테 전화를 걸어 한
“그래요, 누굴 만나실 건데요? 저랑 같이 가요.”박민정은 즉시 대답했다. 지금은 은정숙이 자신의 시야에서 잠시도 떨어지게 하면 안 될 것 같았다.“그냥 옆 마을 영천댁에 갔다 오려는 거야. 그 집 며느리가 손자를 낳았다는데 내가 한번 가보려고. 넌 집에서 곡이나 써, 나랑 같이 갈 거 없어.”은정숙이 부드럽게 말하자 박민정은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의사가 지금 푹 쉬셔야 한다고 했단 말이에요.”“바보야, 난 정말 괜찮다니까? 전에 그 전문가가 사오 년 사는 건 문제 없다고 했던 거 기억 안 나?”박민정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은정숙은 또 거짓말을 했다.“너 영천댁 기억 안 나니? 그 여편네는 다른 사람이 있는 걸 싫어해. 평생 친구라고는 나밖에 없어. 네가 가면 우린 얘기도 편하게 나누지 못해.”박민정은 은정숙이 요즘 종일 집에만 있다 보니 친구도 만나지 못하고 적적하셨을 거라 생각되어, 조금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그럼 그 댁까지 제가 모셔다드릴게요.”“그래.”약속을 한 후에야 박민정은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집에 돌아온 윤우는 은정숙이 다쳤다는 걸 알고 조용히 간병인한테 자초지종을 물었다.쓰레기 외할머니가 집에 왔을 뿐만 아니라 은정숙을 때려 다치게까지 했다는 걸 듣자 바로 예찬이한테 전화를 걸었다.“박예찬! 그 나쁜 여자, 아직도 혼을 안 낸 거야?”나쁜 여자?예찬이는 얼떨떨해서 물었다.“누굴 말하는 거야?”“그 늑대 외할멈 있잖아!”예찬이는 이제야 그 나쁜 여자가 누굴 가리키는지 알았다.늑대 외할멈이라는 단어는 처음 듣지만 또 왠지 잘 어울리는 호칭이었다.“한수민 계좌에는 돈이 없어. 돈은 다 그 여자 남편 윤석후가 갖고 있어. 그래서 요즘에 밤마다 윤석후 회사 시스템을 뚫고 있어.”그 말을 들은 윤우는 엄지를 내보이며 예찬이를 칭찬했다.“형, 진짜 짱이야!”예찬이는 어이가 없어 속으로 구시렁 거렸다.‘쓸모없을 땐 박예찬, 쓸모가 생기면 형이구나?’“됐어, 별일
“엄마, 아빠랑 이혼 잘하셨어요.”유남우는 말을 마치자마자 유남준 앞을 지나치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내가 능력이 없어서 이번에도 졌네.”유남준은 그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째려봤다.유남우는 사실 그가 어떻게 반격할지 걱정되기보다 이번에도 졌다는 게 더 분통했다.밖으로 나온 뒤 그는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라도 걸고 싶었지만 딱히 연락할 사람이 없었다.연락처를 훑어보다가 홍주영에서 멈칫하더니 결국에는 통화버튼을 누르지도 못한 채 핸드폰을 다시 꺼야 했다.실내 안.거실은 유난히 조용했고 유지욱은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남우가 왜 저렇게 변했는지 모르겠어. 예전에는 말도 잘 듣고 착한 아이였는데.”고영란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그가 말하는 ‘예전’이 정확하게 언제인지도 감이 오지 않았다.고영란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모습에 유지욱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왜 그래?”“아니에요.”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다시 말을 이었다.“이번 달은 될수록 어디 가지 말고 집에 있어요. 그리고 이혼 숙려기간이 끝나는 대로 다시 가서 마무리 지으면 될 것 같아요.”고영란은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이혼하고 싶은데 지금 이혼하려면 한 달씩이나 기다려야 했다.그리고 위층으로 올라가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그리고 이 한 달 동안에 아버지로서 해야 할 일이 뭔지 좀 생각해 보고요.”말을 마친 뒤 유지욱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한편.박씨 가문의 옛 저택.박민정은 유남준이 너무 걱정되어 한걸음에 집으로 돌아왔다.비록 서다희가 괜찮다고는 했지만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이때, 밖에서 들리는 차 소리에 박민정이 다급히 차창 밖을 내다보니 유남준의 차도 마침 도착해 있었다.박민정은 빠르게 차에서 내린 뒤 유남준에게 달려가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괜찮아요?”그러자 유남준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당연하지, 다희가 나 괜찮을 거라고 알려줬잖아.”박민정은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
유석진의 입에서 갑자기 자기 둘째 아들의 이름이 거론되자 고영란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또한 왜 두 아들 사이에 지금 저런 모순이 생긴 건지 알 수 없었다.유남준도 괜히 고영란이 중간에서 난처하게 된 것 같아 일부러 유남우를 빤히 바라보며 유석진에게 말했다.“이번 일은 사과한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에요. 큰아빠가 아무리 남우랑 같이 벌인 일이라고 해도 이번만큼은 가만있지 않겠습니다.”별로 무겁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이상하게 위협감이 느껴졌다.순간 유석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이때, 그의 며느리인 최현아가 앞으로 한 발짝 나서며 끼어들었다.“남준 씨, 그래도 한 가족인데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그러자 유성혁도 한마디 거들었다.“남준아, 우리도 잘못했단 걸 알고 있어. 아버지가 이제 연세도 많아서 상황판단이 안 될 때가 많아.”유석진도 사실 지금 자존심을 부려서 될 일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지금 네가 원하는 게 뭔데? 말해주면 내가 다 들어줄게.”사실 유남준은 이 말만을 기다렸다.“금방 인수한 시내 중심에 있는 그 건물을 저한테 넘겨주세요.”그 땅은 유명훈의 땅이고 죽기 전 유석진에게 물려준 유산인데 지금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살 수 없을 정도로 값이 올랐다.유석진이 이 땅의 주인이 됨으로써 그곳의 상권을 손에 쥔 거나 다름없었는데 나중에 아무 건축물을 세워 올려도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건 안되지!”역시나 유석진이 단번에 거절했다.그가 오랫동안 눈독 들였던 땅이었는데 유명훈이 죽어도 물려주지 않으려 해서 여태껏 애를 먹고 있었다가 이제 겨우 손에 들어온 땅이고 또 자기만의 계획이 따로 있었다.“그러면 조만간 IM 그룹의 변호사를 만나셔야겠네요.”유남준은 더 이상 그와 얘기하고 싶지 않았고 유석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집안 도우미에게 외쳤다.“모셔다드려!”그렇게 도우미들은 그들을 전부 밖으로 내보냈고 거실에는 유남준 가족들만이 남게 되었다.유지욱과 고영란은 눈앞의 두 아들에게 뭐라고 말했으면 좋을지
유남준이 잡혀갔다는 소식에 유석진 가족들은 조용히 자축하고 있었다.최현아도 너무 기뻐했지만 유독 유성혁만 우울한 얼굴로 그들에게 물었다.“아빠, 그래도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인데 꼭 이래야 할까요? 남준이가 잡혀가도 우리한테 아무런 이득도 없잖아요. 그리고 만약 다시 풀려나서 우리가 한 짓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요.”그러자 유석진이 미간을 찌푸리고 답했다.“왜 쓸데없는 일을 벌써 걱정하고 그래? 간이 그리도 콩알만 해서 큰일 하겠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유성혁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다만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유지훈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저는 할아버지가 한 행동이 맞다고 봐요. 사람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그러자 유석진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껄껄거리며 웃었다.“하하, 역시 우리 손자가 똑똑하다니까. 네 말이 맞아. 사람은 무조건 자기가 일 순위여야 해. 절대 네 바보 같은 아빠를 닮아서는 안 된다.”그러자 유지훈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할아버지, 저도 알고 있어요.”그리고 유석진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그러나 그들은 너무 일찍 기뻐했던 게 오후가 되자마자 유남준은 바로 풀려났다.그길로 옛 저택으로 오게 되었고 동시에 유석진네 식구들과 유남우를 전부 집으로 불러 모았다.이 시각, 유지욱도 마침 그곳에 있다가 눈앞의 상황에 어리둥절해서 물었다.“남준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아빠, 제가 지금부터 저 사람들의 실체에 대해 다 밝히려고요.”그리고 서다희가 한 무더기의 자료와 증명서를 건네주자마자 그는 유석진네 식구들에게 뿌려줬다.종이들이 공중에서 흩날리다가 전부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유석진은 그중 한 장을 주워 읽어보고는 너무 황당한 나머지 코웃음을 치며 그에게 말했다.“남준아, 다 오해야. 우리가 왜 그런 짓을 하겠니?”그러자 유남준이 눈살을 찌푸리고 그에게 되물었다.“우리 회사에 심어둔 사람들을 제가 다 데려올까
유남준은 사실 진작에 유남우와 유석진 쪽에 사람들을 붙여서 그들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었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파악하고 있었지만 도대체 무얼 하려는지 궁금해서 일단 내버려두고 있었다.이튿날, IM 그룹으로 세무국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그러자 서다희가 눈살을 찌푸리고 중얼거렸다.“대표님을 감옥에 보내려고 아주 별짓을 다 하네요. 이런다고 그 사람들한테 득이 되는 게 뭔지 정말 모르겠어요.”특히 유남우는 왜 자기 친형을 왜 이렇게까지 괴롭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조사해 보니 역시나 회사 장부에 문제가 있었고 회사 자금을 불법으로 돌렸다는 증거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그러나 이 모든 게 다 그들이 일부러 만들어낸 가짜 장부들이었다.그렇다고 해도 유남준은 회사 법인으로서 조사를 받아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연행되었다.가면서도 서다희에게 당부했다.“민정이한테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줘.”서다희는 한껏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굳이 말하지 않아도 뉴스에서 하루 종일 보도될 예정이라 아마 얼마 안 돼서 알게 될 것이다.역시나 박민정은 출근길에 그에 관한 뉴스 기사를 보게 되었다.“어떻게 이럴 수가?”이때, 고영란도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왔다.“민정아, 남준이한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그러나 박민정도 아직 무슨 상황인지 모르고 있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저도 방금 기사를 봐서 잘 모르겠어요. 제가 지금 당장 다희 씨한테 전화해 볼 테니까 어머님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그래.”고영란은 착잡한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유지욱과 이혼하겠다고 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들한테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서다희는 빠르게 박민정에게 전화해서 유남준이 시킨 대로 알려줬고 모든 일은 다 대비되어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박민정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이때 서다희가 한마디 더 했다.“그런데 이 일은 절대 고영란 사모님한테 말하지 말아 주세요.”“알겠어요.”어쩌면 유남우 귀에도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나이니까 더 이혼하자는 거예요. 굳이 남은 인생을 당신한테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고영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방에 들어갔다.그러나 유지욱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문득 여태껏 이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심술부리는 원인이 분명 아버지 재산 때문인 것 같았고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이튿날.유명훈의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박민정의 친구들도 모두 오게 되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손연서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최현아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한쪽에서 사람들과 유명훈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욱과 고영란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렇게 유명훈의 장례는 총 3일 동안 진행 후 끝났다.고영란은 담담한 얼굴로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유남우에게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이만 갈라서려고 해.” 순간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유지욱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그는 원래 유명훈의 장례가 끝나면 계속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영란한테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일시적으로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지금 애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진짜 이혼하려고?”“네.”고영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저는 너무 괴로워요. 지금 당장 법원에 갑시다.”고영란은 지금 그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유지욱도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라 단번에 그러자고 하더니 두 사람은 법원으로 출발했고 두 아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자식들도 이미 다 컸고 자기 혼인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돌아가는 차 안
고영란도 유석진의 고함에 깜짝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여태껏 모든 집안일을 아내한테 떠넘긴 채, 홀로 밖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유지욱이 원망스럽기만 했다.한 사람에 대한 단념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실망감이 천천히 쌓이면서 식어가는 것이다.보아하니 오늘 저녁에도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유지욱이 도착해보니 유씨 가문의 모든 친척이 다 모여있었다.그리고 이미 상복으로 갈아입은 고영란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왜 진작에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그의 물음에 고영란은 실망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제가 말해주지 않았다고요? 한 달 전에 전 분명히 아버님 건강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으니까 와서 회사 일 좀 도와드리라고 귀띔해 줬어요.”“난 네가 우리 아버지 재산 때문에 나더러 오라는 줄 알았지.”유지욱의 말에 고영란은 큰 충격을 받고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유지욱 씨, 정말 어이없네요. 맞아요, 제가 빨리 돌아오라고 했던 원인이 아버님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지욱 씨한테도 나눠줬으면 했어요. 그런데 그 재산이 전부 아주버님한테 넘어갔네요?” 그러나 유지욱은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그깟 돈 몇 푼 가지고 왜 그래? 우리가 모두 한 식구인데 주면 줬지.”유지욱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님들을 맞이하러 떠났다.그리고 유석진과도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 고영란은 제대로 마음이 상했다.박민정도 손자며느리로서 유남준과 같이 손님들을 맞이하다가 우연히 시부모님이 서로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사실 유씨 가문에 시집온 이후로 시아버지인 유지욱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유지욱은 젊었을 때부터 고집불통에 집안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매일 여행이나 다니면서 자유롭게 사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여 유지욱과 고영란은 1년 중에도 만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살짝 다가가 그에게 말했다.“남준 씨, 가서 어머님 좀 위로해 주세요.”여자
유남준의 아버지, 유지욱은 계속 외국에서 살다보니 이 자리에 없었다.그러자 고영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지욱 씨는 지금 당장 오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방금 비행기 탔다고 했으니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거예요.”그러자 유석진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그러면 지욱이가 도착하고 나서 다시 말할 테니까 외부인은 참견하지 말아요.”순간 고영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 집에 들어와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줬는데도 제가 아직 외부인인가요? 저는 오늘 아버님께서는 왜 그리도 자식들을 편애하시지 꼭 물어봐야겠어요!”“제 아들들이 능력이 뛰어나면 이런 불공평한 대우도 다 받아들여야 하나요?”여태껏 유명훈은 많은 주식을 갖고 있었다.비록 유남준이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유명훈의 지분이 그대로 유석진네로 넘어가게 되면 유남준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더구나 유남우도 그의 재산이 필요한데 말이다!게다가 유명훈은 오랜 세월 동안 주식 말고도 분명 많은 재산을 모았을 텐데 그 돈마저 전부 저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고영란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유석진은 유명훈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여태껏 지욱이를 잘 붙잡아 두지 못한 제수 씨를 탓해야죠! 지욱이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없어요!” 고영란이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유남준이 그녀를 말렸다.“엄마, 그만해요.”여태껏 유명훈이 유석진네만 편애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던 그이기에 지금 아무리 그와 말싸움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유남우도 불쾌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 그녀에게 말했다.“엄마, 형 말이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결정하신 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싸울 필요 없어요.”이 시각, 침대에 누워있던 유명훈은 호흡이 점점 더 가빠져 헐떡거리기 시작했다.그런데도 눈앞에서 자식들이 자기 재산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기만 했다.“지욱이...”그는 힘겹게 유지욱을 불렀다.유지욱은 평소에도 그의 말을
최현아는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지만 박민정은 그저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그러자 그녀는 뻘쭘해진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일은 무슨, 윤소현이 드디어 판결받았다고 해서 축하해주려고 왔지.”박민정은 분명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다.지금 최현아와 그의 시아버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왠지 그럴수록 더 수상했다.“감사합니다.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일 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박민정이 뒤돌아서니 역시나 최현아가 빠르게 그녀의 팔을 부여잡았다.“민정아,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박민정은 이제 와서 한 식구라는 그녀의 말이 그저 가소로웠다.“도대체 할 말이 뭔가요?”그리고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최근에 할아버지 건강이 점점 악화하면서 동서랑 남준 씨가 그립기도 하고 우리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도 보고 싶은가 봐. 혹시 오늘 밤 할아버지 뵈러 같이 가지 않을래?”최현아는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사실 박민정도 할아버지의 건강이 여태껏 좋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도 아마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네, 알겠어요.” 최현아는 그제야 박민정의 팔을 놓아줬지만 그녀가 떠나가자마자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그리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껏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재수 없는 것, 운발로 지금 자리에 올라앉은 주제에.” 차에는 낯선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박민정한테 화낼 필요 없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할아버지의 주식이랑 모든 돈을 너한테 넘길 수 있도록 잘 구슬리는 거야.”그러자 최현아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나도 알아, 저번에 이미 할아버지랑 말해봤다니까? 유남준 씨랑 민정이는 괜히 고고한 척하면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한 상황이라 우리 쪽에 전부 몰리게 되어있긴 한데, 난 지금 성혁 씨 얼굴만 봐도 짜
조하랑은 그제야 화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그러면 왜 저 여자한테 찾아갔어요?”“당연히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러 갔죠. 그리고 이지원에 대해 정신감정도 의뢰했거든요. 만약 진짜로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거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게 다 쇼하는 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어요.”김인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다가 조하랑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예전에 제가 지원이한테 어떻게 가스라이팅 당했는지 하랑 씨도 잘 알잖아요. 만약 저를 구해줬던 사람이 형수님이었단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절대 그 애를 도와주지도 않았을 겁니다.”“지금은 그저 마땅히 받아야 할 벌만 받았으면 좋겠고요.”조하랑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인우 씨가 또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여자한테 찝쩍거린다고만 생각했어요.”그녀의 말에 김인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되물었다.“하랑 씨,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순간 조하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누, 누가 질투한다는 거예요? 그저 저를 배신한 인우 씨한테 화나고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나한테 실망했을 뿐이라고요!”“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 의사도 임산부가 흥분하면 아이한테 안 좋다고 말했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는 다정하게 조하랑을 품에 안았는데 순간 그녀는 얼굴이 더욱 빨개진 채 온몸이 굳어버렸다.당연히 김인우도 눈치채고는 빠르게 물었다.“왜요, 부끄러워요?”“그, 그럴 리가요...”조하랑은 말까지 더듬으며 애써 덤덤한 척했다.“저도 안을 줄 알거든요?”그리고 똑같이 김인우를 꼭 안아줬는데 이번에는 김인우가 속으로 움찔했다.추운 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꼭 껴안아 줬는데 거리를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 멈춰졌다 가곤 했다.조하랑도 어느새 그걸 느꼈는지 재빨리 김인우를 밀쳐냈다.“됐어요. 이제 병실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인우 씨도 그만 돌아가요.”“저랑 같이 안 가고요?”김인우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