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은 두 사람을 박민정과 민수아가 있는 바로 옆방으로 안내했다.레스토랑 매니저는 박민정에게 잘 보이고 싶어 일부러 반투명 유리를 놓아주었다.서다희 쪽에서는 두 사람이 보이지 않지만, 두 사람은 서다희와 추경은이 똑똑하게 보였다.방으로 들어갔을 때, 장미꽃으로 만들어진 꽃길과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정교한 장식품을 보고서 추경은은 서다희의 팔짱을 꼭 껴안았다.고의로 그러한 것인지 분위기에 심취되어 그러한 것인지 아직 알 길이 없다.“와, 다희 오빠, 여기 너무 예뻐요.”박민정의 바로 앞에 앉아 있는 민수아는 그 광경을 보고서 하마터면 테이블을 엎을 뻔했다.“미친!”다행히도 서다희가 바로 추경은의 손을 빼버렸다.“경은 씨, 얼른 앉아서 밥 먹어요. 저한테 물어보고 싶으신 게 많으시다고 하시지 않았어요?”추경은은 그제야 의자를 밖으로 빼내면서 서다희의 바로 옆에 앉았다.“따로 앉을 자리가 없나 왜 하필 옆에 앉고 지랄이야.”서다희는 아직 자기 약혼녀랑 박민정이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하여 추경은에게 맞은 편으로 가서 앉으라고 말하지 않았다.말하기 부끄러워서 그냥 있었을지도 모른다.옆으로 의자를 살짝 옮긴 행동으로 본다면 말이다.“다희 오빠, 우리 남준 오빠 요즘 어때요?”“사장님께서 지금 편하게 지내시고 계세요. 걱정할 필요 없으세요.”서다희의 대답에 추경은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우리 남준 오빠 지금 잘 지내고 있지 않을 거예요.”“무슨 근거로요?”서다희는 의문이 들었다.“만약 잘 지내고 있다면 그렇게 홀로 나가서 지내려고 하지 않았겠죠. 요즘 두원 별장에서 홀로 새언니 챙기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세요? 새언니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할 줄 몰라요. 그동안 우리 남준 오빠만 고생했을 텐데... 우리 남준 오빠가 안타깝고 아까워요.”추경은이 넋두리를 두고 있는 동안 박민정은 민수아에게 추경은이 바로 유남준의 ‘사촌 동생’이라며 알려주었다.“사촌 동생? 전혀 그런 것 같지 않은데?”“혈연
“서 비서님이 추경은의 진짜 모습을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해.”박민정이 대답했다.“서다희 그 멍청한 놈이 어떻게 여우 년의 수단을 알아볼 수 있겠어?”민수아는 지금 초조하고 화가 나 있었다.그녀도 이런 상황을 처음이었다.사실 그녀는 소개팅으로 서다희를 만난 게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마음이 맞는 진짜 사랑이었으니 말이다.하지만 세상에는 순수한 사랑은 없다는 것을 이제 깨닫게 되었다.“남자는 바보가 아닌 이상 자기한테 꼬리 치는 여우 년을 구별 못할 리가 없어.”어떤 남자들은 그런 여자들의 칭찬과 아부를 즐기곤 했다.“일단 저들이 밥을 다 먹고 추경은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보자.”“그래.”민수아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박민정을 믿기로 했다.그녀도 알고 있었다. 지금 이대로 뛰어가봤자 추경은을 이기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걸.게다가 민수아의 집안은 분명 추경은을 따라갈 수 없었다.만약 서다희가 정말로 나쁜 놈이라면 민수아는 그냥 헤어지고 다시 소개팅해서 새로운 남자를 찾으면 된다고 생각했다.옆에 있는 룸에서.서다희는 추경은 앞에서 민수아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몇 가지 음식을 주문한 후 박민정 이야기를 꺼냈다.“오늘 사모님 회사에서 무슨 일을 했어요?”“별거 안 했는데요. 그냥 회의 문서 같은 걸 보더라고요.”추경은은 음식을 먹으면서 계속해서 박민정의 험담을 했다.“새언니가 진지하게 회사 다닐 생각 없는 것 같더라고요. 회의 서류를 하나 보는 데 한 시간 넘게 걸렸거든요. 서류가 영 안 읽혔는지 제가 방해가 된다며 나가 있으라고 눈치를 주더라고요.”서다희가 고개를 끄덕였다.“임산부는 감정 기복이 심하잖아요. 경은 씨, 고생 많았어요.”추경은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아니에요. 오빠를 조금이라도 도울 수 있다면 이 정도는 고생도 아니죠. 다희 오빠, 이 디저트 먹어봐요. 엄청 맛있어요.”서다희는 잠깐 망설였다.추경은은 화난 척하며 말했다.“다희 오빠, 제가 싫은 거예요? 예전에 오빠 찾아갔을 때는
민수아는 그녀의 말을 듣더니 웃음을 터뜨렸다.“네가 엄청 점잖고 고고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재밌는 줄은 몰랐네.”그녀는 눈물을 닦더니 말을 이어갔다.“맛있는 거 빨리 먹자. 안 그러면 다 식겠어.”“그래.”순수한 민수아에게 서다희가 정말 상처를 준다면 박민정은 절대 그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다행히 서다희와 추경은은 식사를 마치자마자 자리를 떴다.박민정과 민수아도 따라 나갔다.추경은은 서다희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다희 오빠, 저 돌아가기 싫어요. 같이 있어 주면 안 돼요?”서다희는 시간을 확인해 보니 이미 11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안 돼요. 여자친구에게 11시 전에 돌아가겠다고 약속했거든요.”“그럼 전화해서 저랑 같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면 안 돼요?”추경은이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니.서다희는 그녀가 그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고 생각하며 그녀의 손을 떼어냈다.“말 들어요. 운전기사한테 두원 별장으로 데려다주라고 할게요.”“두원 별장에 돌아가기 싫어요. 거기 가면 또 새언니한테 괴롭힘을 당할 거라고요.”서다희는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두원 별장에서 박민정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그녀가 사용인을 괴롭힌다는 말은 전혀 들어본 적이 없었다.‘설마 지금 사모님을 질투하고 있는 건가?’“그럼 호텔을 예약해 줄게요.”“여자 혼자서 호텔에 있는 건 너무 위험한 거 아니에요?”추경은은 계속해서 졸라댔다.서다희를 완전히 자기 옆에 묶어두고 이용해서 유남준을 차지할 계획이었다.서다희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 돌아가야 했으니 말이다.아니면 민수아는 걱정할 것이다.“진짜 가야 해요. 경호원을 붙여줄 테니까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두 사람은 한참 동안 실랑이를 벌였다.추경은 서다희가 떠나려고 하자 그에게 와락 안겼다.“다희 오빠, 고마워요.”서다희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혼자 차에 올라탄 후 집으로 돌아갔다.그가 떠나자마자 추경은은 눈가의 눈물을 닦고 다시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왔다.어렵게 진주에
추경은은 민수아에게 뺨을 맞고 난 후 한참 동안 멍해졌다.정신을 차리고 쫓아가려 했지만 민수아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민수아는 가까운 곳에 주차된 박민정의 차 안으로 숨어 들어갔다.추경은이 당황하며 주변을 둘러보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속이 좀 후련했다.“잘했어.”박민정이 말했다.“고마워.”민수아는 소매를 걷었는데 빨갛게 부어오른 손바닥을 발견했다. 그만큼 추경은을 때릴 때 얼마나 힘을 줬는지를 설명했다.그녀는 또 아까 녹음한 파일을 꺼내 보이며 말했다.“다 녹음했어. 서다희에게 들려줄 거야. 그럼 더 이상 변명할 여지도 없겠지.”“급할 것 없어.”박민정은 멀지 않은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추경은은 얼굴을 감싸고 있었는데 민수아를 찾을 수 없어 휴대폰을 꺼내 서다희에게 전화를 걸려던 참이었다.하지만 서다희가 민수아를 진심으로 사랑해 그녀의 편을 든다면 자기에게 불리할 수 있었다.추경은은 유남준을 목표로 하고 있었지, 서다희는 그저 도구일 뿐이었다.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결국 이 일을 꾹 참고 넘기기로 했다.휴대폰을 확인했는데 놀 수 있는 시간이 조금 더 있었다.그녀는 진주에서 가장 큰 클럽으로 향해 멋있는 남자들과 놀기로 했다.그러나 추경은은 자신을 미행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그 사람들은 이제 박민정과 민수아가 아닌, 박민기의 부하들이었다.박민정은 임신하고 있었기에 추경은을 계속 미행할 수 없어 차에 누웠다. 그리고 정민기더러 사람을 보내 추경은을 미행하고 사진을 찍으라고 했다.민수아도 옆에서 자고 있었다. 기분이 불쾌해져 서다희가 거듭 전화를 했음에도 받지 않았다.그녀는 서다희에게 문자를 보냈다.[오늘은 친구 집에 왔어. 안 돌아갈 거야.]서다희는 그 문자를 보고 실망했지만 다시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민수아는 계속해서 전화를 받지 않았다.결국 서다희는 또다시 문자를 보냈다.[자기야, 왜 전화를 안 받아?][친구 집에서 있다고 했잖아. 다 잠들었는데 전화 받으면 깨울 것 같아서.][알겠어. 그럼 내일
아무도 서다희에게 답을 알려줄 수 없었다.그는 사람 시켜 조사하고 싶었지만 민수아가 알게 되면 화를 낼까 봐 두려웠다.유남준은 오늘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다. 건강에 문제가 없다는 결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기억은 돌아오지 않았다.김인우도 함께 왔는데 그 소식을 듣고 한숨을 푹 쉬었다.“이거 정말 골치 아프네.”하지만 유남준의 반응은 무덤덤했다.“남준아, 안 돌아갈 거야? 형수 임신 중이잖아.”김인우는 요즘 박민정을 많이 걱정했기에 유남준을 당장이라도 집에 보내고 싶었다.“내가 준 돈으로 임신 중 필요한 건 다 해결할 수 있어.”유남준이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러고는 또 서다희에게 물었다.“오늘 추경은 쪽에서 무슨 소식 없었어?”서다희는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없었어요... 제가 전화해서 물어볼게요.”서다희는 밖으로 나가 전화를 걸었다.그리고 돌아오더니 유남준에게 말했다.“전화를 받지 않네요.”유남준은 더 묻지 않았다.김인우는 오늘 이 두 사람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두 사람 모두 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보였다.“다희 씨, 여자친구랑 싸웠어요?”김인우는 농담조로 말했다.서다희는 정신을 차린 후 김인우를 차갑게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김인우는 자기가 무심코 한 질문이 맞아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 조금 놀랐다.서다희 같은 성실한 사람이 여자 문제로 고민하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김인우는 속으로 안도했다.‘다행이야. 난 신경을 쓸 여자도 없다고. 두 사람처럼 절대 여자 문제에 휘둘리지 않지.’...호산 그룹, 옥상.추경은은 어제 너무 늦게까지 놀았는지 오늘 아침에도 돌아오지 않았다.그래서 박민정은 혼자 출근했다.홍주영은 박민정이 다른 부잣집 사모님처럼 그저 형식적으로 회사에 나오기만 할 줄 알았지만 박민정은 어제 대부분의 회의 자료를 읽고 정리까지 마친 상태였다.홍주영은 박민정에게 더욱 호감을 느끼며 문을 두드린 후 들어왔다.“사모님, 오늘 대표님과 함께 클라이
유남우는 주현승이 박민정 때문에 회사 이미지를 망칠 수 있다는 말에 얼굴색이 금세 어두워졌다.“그래요?”유남우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주현승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끼고는 웃으며 말했다.“장난이에요. 사실 얼굴에 흉터가 있는 미인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법이죠.”주현승은 유남우가 온화하고 겸손한 후배이지, 유남준처럼 잔인한 성격이 아니라는 생각에 거침없이 말을 내뱉었다.유남우는 더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박민정에게 말했다.“민정아, 먼저 가서 쉬고 있어.”박민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여기 계속 있을 필요가 없다는 말인가요?”“그래. 가도 돼.”“알겠어요.”박민정도 더는 이곳에 남아 주현승의 불쾌한 말을 듣고 싶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고는 휴게실로 향했다.그녀가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골프장 밖에서는 비명과 용서를 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주변 사람들은 경호원에 의해 막혀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시닉 그룹의 대표가 지금 무릎 꿇고 용서를 빌고 있었다.“유 대표님, 정말 죄송합니다. 대표님이 좋아하시는 여자란 걸 정말 몰랐습니다. 무례하게 굴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주현승은 무릎을 꿇은 채 사과했다.유남우가 손에 든 골프채는 주현승을 때릴 때 이미 휘어져 있었다.주현승은 바닥에 엎드렸는데 상처투성이가 되어 벌벌 떨며 말했다.“유 대표님, 제발 용서해 주세요.”유남우는 여전히 차분한 표정을 지으며 골프채를 옆에 던졌다.“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해요.”“네. 알겠습니다.”주현승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그는 겨우 목숨을 건진 줄 알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더 끔찍한 일이었다.몇 명의 경호원이 그를 끌고 갔다.유남우는 손을 깨끗이 씻고서야 휴게실로 향했다.박민정은 의자에 기대어 잠깐 눈을 붙이고 있었다.유남우는 잠이 든 그녀의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그의 손이 박민정에게 닿으려는 순간, 그녀는 눈을 떴다.“다 끝났어요?”박민정이 의아해하며 물었
박민정은 택시 탄 후 운전기사더러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유남우는 회사로 돌아가지 않고 몰래 그녀의 뒤를 따라 뭐 하러 가는지 지켜보려고 했다.병원에서.윤소현은 합의서를 꽉 쥔 채 한수민을 노려보며 말했다.“어떻게 해야 나와 연을 끊겠어요?”한수민의 배에서는 극심한 고통이 몰려왔다.하지만 윤소현이 주는 정신적인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소현아, 나는 네 친엄마야. 어떻게 나랑 연을 끊을 생각을 해?”윤소현은 한수민이 계속 동의하지 않자 짜증이 났다.“이렇게 빌게요, 네? 나 같은 딸이 없다고 생각하면 되잖아요.”한수민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그렇게 예뻐하던 딸이 자기를 이렇게 대할 줄은 전혀 몰랐다.“동의하면 모든 의료비와 생활비를 부담할게요. 하지만 동의하지 않으면 저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윤소현이 또 협박했다.병실 안은 쥐 죽은 듯한 정적이 흘렀다.박민정이 도착하자 간병인은 서둘러 그녀에게 달려갔다.“박민정 씨, 왜 이제야 오셨어요? 동생을 좀 말려보세요. 자기 친엄마와 연을 끊겠다는 걸 보니 정말 양심이 없는 것 같아요.”박민정은 재미난 구경을 보러 온 것이지, 윤소현을 비난하거나 한수민을 도우러 온 건 아니었다.“네.”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인 후 병실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윤소현과 한수민은 발소리를 듣고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박민정을 발견하자 두 사람 모두 입을 다물었다.“소현아, 오늘 일은 내가 못 들은 걸로 할 테니까 얼른 돌아가.”한수민은 박민정에게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윤소현도 오늘은 합의서에 사인받지 못할 걸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주먹을 꽉 쥐고는 자리를 떴다.밖으로 나간 후 차가운 목소리로 간병인에게 말했다.“앞으로 저 사람을 돌볼 필요 없어요. 월급을 주지 않을 거니까요. 아줌마는 해고예요.”간병인은 어이가 없어 벌컥 역정을 냈다.“윤소현 씨, 이런 짓은 왜 하는 거예요? 천벌 받는 게 두렵지도 않아요?”윤소현은 코웃음을 쳤다.“천벌이요? 천벌이
윤소현은 잠시 멈칫하다가 곧바로 거짓말을 지어냈다.“계모가 암에 걸렸다고 했잖아요. 계모를 보러 왔어요.”“그래? 그럼 왔던 김에 뵈러 가면 좋겠는데?”유남우는 윤소현이 어떻게 거짓말을 이어 나가는지 보고 싶었다.윤소현은 즉시 거절했다.“괜찮아요. 지금 주무시고 있으니까 방해하지 마요.”“알겠어.”윤소현은 아직 이용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으니 이대로 사이가 틀어지면 안 되었다.차가 출발하여 서서히 병원을 떠났다.병실 안에서.한수민의 머릿속에는 윤소현의 말이 계속 맴돌았다.“내 엄마는 정수미뿐이야.”그녀의 머릿속은 복잡했다.얌전하고 착할 뿐만 아니라 능력 있는 딸이 다른 사람을 엄마로 받아들일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박민정이 병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한수민의 말라붙은 얼굴은 생기가 없었다. 눈동자도 초점을 잃어 기운이 없어 보였다.박민정이 간병인에게 말했다.“한 여사님과 단둘이 있게 해주실 수 있나요?”“네, 알겠습니다.”간병인은 박민정을 믿고 병실을 나섰다.간병인이 떠나자 병실 안은 박민정과 한수민만 남아 유난히 조용했다.박민정은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가 의자에 앉았다.“여사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한수민은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는 아련한 눈빛으로 박민정을 바라봤다. 왜인지 모르지만 후회가 몰려왔다.박민정이 물었다.“아버지 사고, 여사님과 관련이 있죠?”그 말은 폭탄처럼 한수민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그녀는 즉시 부인했다.“그게 무슨 헛소리야? 네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어.”“정말이에요? 그런데 아버지가 탔던 차, 여사님이 전날에 운전했었다고 하더군요. 그때 차에 여사님 혼자밖에 없었고요.”박민정은 목이 메었다.“또 차의 브레이크 패드에 문제가 있다는 게 발견되었어요. 그건 절대 단순한 교통사고가 아니었다고요.”한수민은 아직도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뭐?”박민정은 한수민이 아직도 모르는 척 연기하고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왜 아직도 진실을 얘기하지 않는
“엄마, 아빠랑 이혼 잘하셨어요.”유남우는 말을 마치자마자 유남준 앞을 지나치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내가 능력이 없어서 이번에도 졌네.”유남준은 그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째려봤다.유남우는 사실 그가 어떻게 반격할지 걱정되기보다 이번에도 졌다는 게 더 분통했다.밖으로 나온 뒤 그는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라도 걸고 싶었지만 딱히 연락할 사람이 없었다.연락처를 훑어보다가 홍주영에서 멈칫하더니 결국에는 통화버튼을 누르지도 못한 채 핸드폰을 다시 꺼야 했다.실내 안.거실은 유난히 조용했고 유지욱은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남우가 왜 저렇게 변했는지 모르겠어. 예전에는 말도 잘 듣고 착한 아이였는데.”고영란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그가 말하는 ‘예전’이 정확하게 언제인지도 감이 오지 않았다.고영란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모습에 유지욱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왜 그래?”“아니에요.”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다시 말을 이었다.“이번 달은 될수록 어디 가지 말고 집에 있어요. 그리고 이혼 숙려기간이 끝나는 대로 다시 가서 마무리 지으면 될 것 같아요.”고영란은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이혼하고 싶은데 지금 이혼하려면 한 달씩이나 기다려야 했다.그리고 위층으로 올라가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그리고 이 한 달 동안에 아버지로서 해야 할 일이 뭔지 좀 생각해 보고요.”말을 마친 뒤 유지욱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한편.박씨 가문의 옛 저택.박민정은 유남준이 너무 걱정되어 한걸음에 집으로 돌아왔다.비록 서다희가 괜찮다고는 했지만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이때, 밖에서 들리는 차 소리에 박민정이 다급히 차창 밖을 내다보니 유남준의 차도 마침 도착해 있었다.박민정은 빠르게 차에서 내린 뒤 유남준에게 달려가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괜찮아요?”그러자 유남준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당연하지, 다희가 나 괜찮을 거라고 알려줬잖아.”박민정은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
유석진의 입에서 갑자기 자기 둘째 아들의 이름이 거론되자 고영란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또한 왜 두 아들 사이에 지금 저런 모순이 생긴 건지 알 수 없었다.유남준도 괜히 고영란이 중간에서 난처하게 된 것 같아 일부러 유남우를 빤히 바라보며 유석진에게 말했다.“이번 일은 사과한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에요. 큰아빠가 아무리 남우랑 같이 벌인 일이라고 해도 이번만큼은 가만있지 않겠습니다.”별로 무겁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이상하게 위협감이 느껴졌다.순간 유석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이때, 그의 며느리인 최현아가 앞으로 한 발짝 나서며 끼어들었다.“남준 씨, 그래도 한 가족인데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그러자 유성혁도 한마디 거들었다.“남준아, 우리도 잘못했단 걸 알고 있어. 아버지가 이제 연세도 많아서 상황판단이 안 될 때가 많아.”유석진도 사실 지금 자존심을 부려서 될 일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지금 네가 원하는 게 뭔데? 말해주면 내가 다 들어줄게.”사실 유남준은 이 말만을 기다렸다.“금방 인수한 시내 중심에 있는 그 건물을 저한테 넘겨주세요.”그 땅은 유명훈의 땅이고 죽기 전 유석진에게 물려준 유산인데 지금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살 수 없을 정도로 값이 올랐다.유석진이 이 땅의 주인이 됨으로써 그곳의 상권을 손에 쥔 거나 다름없었는데 나중에 아무 건축물을 세워 올려도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건 안되지!”역시나 유석진이 단번에 거절했다.그가 오랫동안 눈독 들였던 땅이었는데 유명훈이 죽어도 물려주지 않으려 해서 여태껏 애를 먹고 있었다가 이제 겨우 손에 들어온 땅이고 또 자기만의 계획이 따로 있었다.“그러면 조만간 IM 그룹의 변호사를 만나셔야겠네요.”유남준은 더 이상 그와 얘기하고 싶지 않았고 유석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집안 도우미에게 외쳤다.“모셔다드려!”그렇게 도우미들은 그들을 전부 밖으로 내보냈고 거실에는 유남준 가족들만이 남게 되었다.유지욱과 고영란은 눈앞의 두 아들에게 뭐라고 말했으면 좋을지
유남준이 잡혀갔다는 소식에 유석진 가족들은 조용히 자축하고 있었다.최현아도 너무 기뻐했지만 유독 유성혁만 우울한 얼굴로 그들에게 물었다.“아빠, 그래도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인데 꼭 이래야 할까요? 남준이가 잡혀가도 우리한테 아무런 이득도 없잖아요. 그리고 만약 다시 풀려나서 우리가 한 짓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요.”그러자 유석진이 미간을 찌푸리고 답했다.“왜 쓸데없는 일을 벌써 걱정하고 그래? 간이 그리도 콩알만 해서 큰일 하겠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유성혁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다만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유지훈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저는 할아버지가 한 행동이 맞다고 봐요. 사람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그러자 유석진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껄껄거리며 웃었다.“하하, 역시 우리 손자가 똑똑하다니까. 네 말이 맞아. 사람은 무조건 자기가 일 순위여야 해. 절대 네 바보 같은 아빠를 닮아서는 안 된다.”그러자 유지훈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할아버지, 저도 알고 있어요.”그리고 유석진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그러나 그들은 너무 일찍 기뻐했던 게 오후가 되자마자 유남준은 바로 풀려났다.그길로 옛 저택으로 오게 되었고 동시에 유석진네 식구들과 유남우를 전부 집으로 불러 모았다.이 시각, 유지욱도 마침 그곳에 있다가 눈앞의 상황에 어리둥절해서 물었다.“남준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아빠, 제가 지금부터 저 사람들의 실체에 대해 다 밝히려고요.”그리고 서다희가 한 무더기의 자료와 증명서를 건네주자마자 그는 유석진네 식구들에게 뿌려줬다.종이들이 공중에서 흩날리다가 전부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유석진은 그중 한 장을 주워 읽어보고는 너무 황당한 나머지 코웃음을 치며 그에게 말했다.“남준아, 다 오해야. 우리가 왜 그런 짓을 하겠니?”그러자 유남준이 눈살을 찌푸리고 그에게 되물었다.“우리 회사에 심어둔 사람들을 제가 다 데려올까
유남준은 사실 진작에 유남우와 유석진 쪽에 사람들을 붙여서 그들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었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파악하고 있었지만 도대체 무얼 하려는지 궁금해서 일단 내버려두고 있었다.이튿날, IM 그룹으로 세무국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그러자 서다희가 눈살을 찌푸리고 중얼거렸다.“대표님을 감옥에 보내려고 아주 별짓을 다 하네요. 이런다고 그 사람들한테 득이 되는 게 뭔지 정말 모르겠어요.”특히 유남우는 왜 자기 친형을 왜 이렇게까지 괴롭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조사해 보니 역시나 회사 장부에 문제가 있었고 회사 자금을 불법으로 돌렸다는 증거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그러나 이 모든 게 다 그들이 일부러 만들어낸 가짜 장부들이었다.그렇다고 해도 유남준은 회사 법인으로서 조사를 받아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연행되었다.가면서도 서다희에게 당부했다.“민정이한테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줘.”서다희는 한껏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굳이 말하지 않아도 뉴스에서 하루 종일 보도될 예정이라 아마 얼마 안 돼서 알게 될 것이다.역시나 박민정은 출근길에 그에 관한 뉴스 기사를 보게 되었다.“어떻게 이럴 수가?”이때, 고영란도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왔다.“민정아, 남준이한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그러나 박민정도 아직 무슨 상황인지 모르고 있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저도 방금 기사를 봐서 잘 모르겠어요. 제가 지금 당장 다희 씨한테 전화해 볼 테니까 어머님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그래.”고영란은 착잡한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유지욱과 이혼하겠다고 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들한테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서다희는 빠르게 박민정에게 전화해서 유남준이 시킨 대로 알려줬고 모든 일은 다 대비되어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박민정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이때 서다희가 한마디 더 했다.“그런데 이 일은 절대 고영란 사모님한테 말하지 말아 주세요.”“알겠어요.”어쩌면 유남우 귀에도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나이니까 더 이혼하자는 거예요. 굳이 남은 인생을 당신한테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고영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방에 들어갔다.그러나 유지욱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문득 여태껏 이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심술부리는 원인이 분명 아버지 재산 때문인 것 같았고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이튿날.유명훈의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박민정의 친구들도 모두 오게 되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손연서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최현아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한쪽에서 사람들과 유명훈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욱과 고영란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렇게 유명훈의 장례는 총 3일 동안 진행 후 끝났다.고영란은 담담한 얼굴로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유남우에게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이만 갈라서려고 해.” 순간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유지욱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그는 원래 유명훈의 장례가 끝나면 계속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영란한테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일시적으로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지금 애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진짜 이혼하려고?”“네.”고영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저는 너무 괴로워요. 지금 당장 법원에 갑시다.”고영란은 지금 그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유지욱도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라 단번에 그러자고 하더니 두 사람은 법원으로 출발했고 두 아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자식들도 이미 다 컸고 자기 혼인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돌아가는 차 안
고영란도 유석진의 고함에 깜짝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여태껏 모든 집안일을 아내한테 떠넘긴 채, 홀로 밖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유지욱이 원망스럽기만 했다.한 사람에 대한 단념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실망감이 천천히 쌓이면서 식어가는 것이다.보아하니 오늘 저녁에도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유지욱이 도착해보니 유씨 가문의 모든 친척이 다 모여있었다.그리고 이미 상복으로 갈아입은 고영란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왜 진작에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그의 물음에 고영란은 실망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제가 말해주지 않았다고요? 한 달 전에 전 분명히 아버님 건강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으니까 와서 회사 일 좀 도와드리라고 귀띔해 줬어요.”“난 네가 우리 아버지 재산 때문에 나더러 오라는 줄 알았지.”유지욱의 말에 고영란은 큰 충격을 받고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유지욱 씨, 정말 어이없네요. 맞아요, 제가 빨리 돌아오라고 했던 원인이 아버님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지욱 씨한테도 나눠줬으면 했어요. 그런데 그 재산이 전부 아주버님한테 넘어갔네요?” 그러나 유지욱은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그깟 돈 몇 푼 가지고 왜 그래? 우리가 모두 한 식구인데 주면 줬지.”유지욱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님들을 맞이하러 떠났다.그리고 유석진과도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 고영란은 제대로 마음이 상했다.박민정도 손자며느리로서 유남준과 같이 손님들을 맞이하다가 우연히 시부모님이 서로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사실 유씨 가문에 시집온 이후로 시아버지인 유지욱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유지욱은 젊었을 때부터 고집불통에 집안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매일 여행이나 다니면서 자유롭게 사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여 유지욱과 고영란은 1년 중에도 만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살짝 다가가 그에게 말했다.“남준 씨, 가서 어머님 좀 위로해 주세요.”여자
유남준의 아버지, 유지욱은 계속 외국에서 살다보니 이 자리에 없었다.그러자 고영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지욱 씨는 지금 당장 오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방금 비행기 탔다고 했으니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거예요.”그러자 유석진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그러면 지욱이가 도착하고 나서 다시 말할 테니까 외부인은 참견하지 말아요.”순간 고영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 집에 들어와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줬는데도 제가 아직 외부인인가요? 저는 오늘 아버님께서는 왜 그리도 자식들을 편애하시지 꼭 물어봐야겠어요!”“제 아들들이 능력이 뛰어나면 이런 불공평한 대우도 다 받아들여야 하나요?”여태껏 유명훈은 많은 주식을 갖고 있었다.비록 유남준이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유명훈의 지분이 그대로 유석진네로 넘어가게 되면 유남준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더구나 유남우도 그의 재산이 필요한데 말이다!게다가 유명훈은 오랜 세월 동안 주식 말고도 분명 많은 재산을 모았을 텐데 그 돈마저 전부 저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고영란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유석진은 유명훈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여태껏 지욱이를 잘 붙잡아 두지 못한 제수 씨를 탓해야죠! 지욱이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없어요!” 고영란이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유남준이 그녀를 말렸다.“엄마, 그만해요.”여태껏 유명훈이 유석진네만 편애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던 그이기에 지금 아무리 그와 말싸움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유남우도 불쾌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 그녀에게 말했다.“엄마, 형 말이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결정하신 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싸울 필요 없어요.”이 시각, 침대에 누워있던 유명훈은 호흡이 점점 더 가빠져 헐떡거리기 시작했다.그런데도 눈앞에서 자식들이 자기 재산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기만 했다.“지욱이...”그는 힘겹게 유지욱을 불렀다.유지욱은 평소에도 그의 말을
최현아는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지만 박민정은 그저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그러자 그녀는 뻘쭘해진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일은 무슨, 윤소현이 드디어 판결받았다고 해서 축하해주려고 왔지.”박민정은 분명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다.지금 최현아와 그의 시아버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왠지 그럴수록 더 수상했다.“감사합니다.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일 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박민정이 뒤돌아서니 역시나 최현아가 빠르게 그녀의 팔을 부여잡았다.“민정아,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박민정은 이제 와서 한 식구라는 그녀의 말이 그저 가소로웠다.“도대체 할 말이 뭔가요?”그리고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최근에 할아버지 건강이 점점 악화하면서 동서랑 남준 씨가 그립기도 하고 우리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도 보고 싶은가 봐. 혹시 오늘 밤 할아버지 뵈러 같이 가지 않을래?”최현아는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사실 박민정도 할아버지의 건강이 여태껏 좋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도 아마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네, 알겠어요.” 최현아는 그제야 박민정의 팔을 놓아줬지만 그녀가 떠나가자마자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그리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껏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재수 없는 것, 운발로 지금 자리에 올라앉은 주제에.” 차에는 낯선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박민정한테 화낼 필요 없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할아버지의 주식이랑 모든 돈을 너한테 넘길 수 있도록 잘 구슬리는 거야.”그러자 최현아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나도 알아, 저번에 이미 할아버지랑 말해봤다니까? 유남준 씨랑 민정이는 괜히 고고한 척하면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한 상황이라 우리 쪽에 전부 몰리게 되어있긴 한데, 난 지금 성혁 씨 얼굴만 봐도 짜
조하랑은 그제야 화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그러면 왜 저 여자한테 찾아갔어요?”“당연히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러 갔죠. 그리고 이지원에 대해 정신감정도 의뢰했거든요. 만약 진짜로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거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게 다 쇼하는 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어요.”김인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다가 조하랑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예전에 제가 지원이한테 어떻게 가스라이팅 당했는지 하랑 씨도 잘 알잖아요. 만약 저를 구해줬던 사람이 형수님이었단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절대 그 애를 도와주지도 않았을 겁니다.”“지금은 그저 마땅히 받아야 할 벌만 받았으면 좋겠고요.”조하랑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인우 씨가 또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여자한테 찝쩍거린다고만 생각했어요.”그녀의 말에 김인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되물었다.“하랑 씨,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순간 조하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누, 누가 질투한다는 거예요? 그저 저를 배신한 인우 씨한테 화나고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나한테 실망했을 뿐이라고요!”“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 의사도 임산부가 흥분하면 아이한테 안 좋다고 말했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는 다정하게 조하랑을 품에 안았는데 순간 그녀는 얼굴이 더욱 빨개진 채 온몸이 굳어버렸다.당연히 김인우도 눈치채고는 빠르게 물었다.“왜요, 부끄러워요?”“그, 그럴 리가요...”조하랑은 말까지 더듬으며 애써 덤덤한 척했다.“저도 안을 줄 알거든요?”그리고 똑같이 김인우를 꼭 안아줬는데 이번에는 김인우가 속으로 움찔했다.추운 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꼭 껴안아 줬는데 거리를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 멈춰졌다 가곤 했다.조하랑도 어느새 그걸 느꼈는지 재빨리 김인우를 밀쳐냈다.“됐어요. 이제 병실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인우 씨도 그만 돌아가요.”“저랑 같이 안 가고요?”김인우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