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원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다리를 안고 있는 아이를 보았는데 눈동자엔 귀찮은 기색이 스쳤다. 하지만 그녀는 티를 내지 않고 허리를 굽혀 웃으며 말했다.“응, 나야.”“꼬마야, 너 왜 혼자 여기 있어? 부모님은?”그녀는 눈앞의 아이를 자세히 보았다. 아이의 오관은 입체적이었고 큰 눈은 사람을 홀릴 정도였다.딱 보아도 아이의 부모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박예찬은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지원을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사람들이 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아줌마가 제 아빠를 뺏었다면서요? 저한테 아빠를 돌려주실 수 있어요?”이지원의 몸은 순간 경직되었다.주위의 재벌 집 사모님들은 이 소리를 듣고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는데 눈동자엔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그들은 남자를 통해 지위를 올리려는 연예인을 가장 싫어했다.“정말 파렴치하네!”“유 대표님을 가졌으면 만족할 줄 알아야지. 어떻게 다른 남자를 꼬셔?”“이러니까 유 대표님이 이 여자랑 결혼하지 않았지. 그냥 갖고 놀기만 하면 되는 거였어.”이지원은 멘탈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간신히 화를 참고 웅크리고 앉아 박예찬을 바라보며 말했다.“꼬마야, 잘못 기억한 거 아니야?”“난 널 모르고 네 아빠도 몰라.”이렇게 말한 후, 그녀는 다시 박예찬에게 다가가 두 손을 아이의 어깨에 놓고 낮은 목소리로 협박했다.“나쁜 놈, 계속 헛소리했다간 물고기 먹이로 바다에 던져버릴 거야!”이지원은 박예찬이 그저 평범한 아이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는데 아이의 연기가 그렇게 좋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일 초 후, 아이는 그녀의 손을 힘껏 치더니 울먹이며 말했다.“아줌마, 제가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물고기 먹이로 절 바다에 던지지 말아 주세요...”이지원은 정말 아이의 입을 막고 싶었다.“아니에요...저 아이가 거짓말하고 있어요...”그녀는 급하게 해명했다.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왔다. 어쩔 수 없이 여자를 만나야 했던 김인우도 이곳을 보았다.그는 첫눈에 아이를 알아보았다.
“네.”우선 이 나쁜 놈을 기진맥진하게 만들 것이다.어쨌든 지금 어르신의 생일 파티가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니 소란을 피울 수 없었다.김인우는 지금 시간이 많았다....한편 유남준과 박민정은 선후로 연회장에 도착했다.박민정은 유씨 집안 사람들의 눈에 띄기 싫어 유남준이 들어간 후에야 들어갔다.유남준은 그녀의 속셈을 눈치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아까 해프닝을 겪고 이지원은 어렵게 연회장에 있는 기자를 매수했다.유남준이 온 걸 보자 그녀는 얼른 상태를 조절하고 다가갔다.“오빠, 연회도 이미 시작했고 다들 어르신께 축하 인사를 드리는데 왜 이제야 왔어요? 나 오빠 오래 기다렸단 말이에요.”유남준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한 일을 보고하는 버릇이 없었다.그래서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그럼 다음엔 기다리지 마.”이지원은 말문이 막혔다.그녀는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뒤에 들어오는 박민정을 본 후 뭔가 깨달았다.이지원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유남준이 오자마자 연회장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을 앗아갔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번 기회를 통해 유씨 집안의 젊은 대표에게 잘 보이려고 애썼다.고영란은 아들이 무척 자랑스러웠다.유남준은 우선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하얀 머리에 지팡이를 짚고 있으나 눈만은 밝은 어르신에게 생신 축하한다는 인사를 올렸다.이지원도 이 기회를 빌어 상류 사회에서 자신을 내세우고 싶었다.“할아버지, 저도 오늘 선물을 갖고 왔어요.”어르신은 비록 이지원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고영란처럼 손자가 하루빨리 결혼하기를 바랐다.게다가 며칠 전 이지원이 쓴 노래는 그녀가 얼굴만 반지르르한 게 아님을 증명했다.그래서 그는 이지원이 주는 선물을 묵묵히 받았다.그녀는 빛깔이 엄청 좋은 연옥을 선물했다.이런 물건은 재벌들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르신께서 받았으니 이지원이 이미 유씨 집안의 인정을 받았다는 것을 설명했다.박민정은 사람들 사이에 서 있으면서 그들의 의논 소리를 들었다.“정말 오리가 백조로 되었네.”
그녀에게는 아들의 체면이 무엇보다 중요했다.“아버지, 진정하세요. 제가 바로 쫓아낼게요.”아직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는 이지원은 주위 사람들이 자신을 향한 날 선 눈빛에 이상함을 감지했다.고영란은 씩씩거리며 오더니 핸드폰을 그녀의 앞에 내던지며 말했다.“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봐라!”이지원은 핸드폰을 한 눈 보고는 단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았다.그녀가 막 입을 열고 해명하려 할 때, 고영란이 말을 가로챘다.“여기서 더 창피당하고 싶지 않으면 네 발로 나가라.”유씨 집안에서 연예인 한 명 내쫓는 건 파리 내쫓는 것 만큼 간단한 일이었다.이지원은 자기가 이런 꼴로 쫓겨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가정부의 차에서도 한참을 믿기 힘든 듯 멍하니 있었다.그러다 불현듯 박민정이 했던 말이 떠오르며 깨달았다.이 모든 건 그녀가 벌인 짓이란걸!...한편, 조하랑도 이지원에 관한 뉴스를 보게 되었다. 그 뉴스는 애초에 그녀와 박민정이 함께 계획한 일이었다.그리고 일부러 이 타이밍에 공개한 것이다.이지원이 쫓겨나고 나서 그녀는 박민정에게 문자를 보냈다.[저 불여시한테 제대로 골탕 한 번 먹였네. 그러게 누가 나대래.]조하랑은 이지원의 불쌍한 모양새를 보려고 몸을 일으켰다.그러나 그녀의 눈앞에 보인 건 익숙한 누군가의 모습이었다.“박예찬?”그가 왜 여기 있는 건지 어리둥절하던 그때,보디가드로 보이는 사람 몇 명이 그에게 다가오더니 한 손으로 그를 들쳐업고 김씨 가문의 도련님인 김인우에게로 데려갔다.박예찬은 그 짧은 두 다리로 아등바등했지만 그들의 긴 다리를 이겨내진 못했다.게다가 도망치다가 힘을 다 써버린 탓에 결국 꼼짝도 못 하고 잡혀버렸던 것이다.그는 자기가 아직 어린아이인 것이 너무 싫었다.“이 양아치 같은 놈, 겨우 잡았네.”김인우는 여유롭게 그를 보며 말했다.박예찬은 여전히 그에게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아저씨, 저 풀어주시면 안 될까요? 전 아저씨 몰라요.”그러자 김인우가 기가 찬 듯 웃었다.
내가 내 아들 패겠다는데 뭐가 문제지?김인우는 이 여자가 수를 쓴다고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 내가 먼저 내 아이임을 인정하게 만들려고.“나한테 접근하려고 꽤 애를 쓴 모양이네요? 전에 있었던 일도 다 당신이 시킨 거지?”조하랑은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리고 그건 박예찬도 마찬가지였다.그는 두 모자를 바라보며 서늘하게 말했다.“무슨 심산인지는 몰라도 아이는 내가 책임집니다. 하지만 여자는 아니에요.”조하랑은 어이가 없었다. 박민정이 그녀에게 김인우는 쓰레기라고 말해주긴 했었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하니 정말 굉장한 쓰레기인 것 같다.조하랑은 치미는 화를 더 참지 못하고 손을 올려 김인우의 곱상한 얼굴에 뺨을 후려쳤다.김인우는 그대로 굳어버렸다.“책임 같은 소리 하네. 개나 소한테 시집가는 일이 있어도 당신한테는 안 가!”김인우는 원래 조용한 곳에서 박예찬을 천천히 훈계할 생각이었는데 조하랑이라는 변수가 생길 줄은 몰랐다.설상가상으로 소란스러운 상황에 빠르게 구경꾼들이 몰렸다.2층에서 자기 집안 큰손자를 유심히 지켜보던 김인우의 할아버지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깜짝 놀랐다.“저 아가씨는 뉘 집 자식인가?”옆에 있던 비서가 빠르게 대답했다.“조씨 집안 큰딸입니다. 이름은 조하랑이고요.”“내 미래 손자며느리로 저 아이가 딱 좋겠군.”감히 김씨 가문의 큰손자를 때린 여자는 그녀가 처음이었다.한편, 박민정도 그 셋을 발견했다.그녀는 박예찬이 왜 이곳에 있는지, 그것도 김인우와 어쩌다 시비가 붙은 건지 도통 이해가 안 갔다.박민정이 유남준이 있는 방향으로 슬쩍 시선을 옮겨보니 그도 이미 이쪽 상황을 눈치챈 듯했다.박민정은 다급히 조하랑에게 전화를 걸어 김인우와 엮이지 말고 예찬이부터 데려가라 일렀다.한 시간 후,개인 별장 밖에는 또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방 안에는 박민정과 조하랑이 나란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들 앞에는 박예찬이 서있었다.“예찬아, 네가 왜 유 씨네 저택에 와있는 거니?”박민정이 차
조하랑은 그녀가 찾은 자료를 박민정에게 보여줬다.자료엔 이지원이 해외에서 어떻게 남자를 이용해 가수가 되었는지에 관한 모든 과정이 낱낱이 적혀 있었다.“이렇게 더러운 여자인 줄은 몰랐네.”“난 알았어.”박민정이 말했다.“그럼 왜 유남준 씨한테 말 안한거야?”조하랑은 어리둥절했다.그녀는 원래 박민정에게 이 사실을 알려 유남준이 알게 하려는 목적이었다.그럼 두 사람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도 있으니까.박민정도 그녀의 마음을 알고 씁쓸하게 말했다.“남준 씨도 사람 하나 알아보는 건 일도 아니야.”조하랑은 그제야 알 것 같았다.“그럼 대체 왜 이지원 그 여자를 좋아한 거래? 꾀를 쓰는 데에 반하기라도 한 거래? 난 어떤 남자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건지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박민정도 예전엔 이해할 수 없었다.하지만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면 그녀도 유남준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여전히 그를 선택한 것처럼 유남준도 이지원이 좋은 여자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그녀를 사랑한 걸지도.사랑이라는 게 원래 그렇지 않은가. 그 사람이 좋든 나쁘든, 착하든 말든 그 무엇도 상관없게 만드는 것.그러니 팜므파탈이 그렇게 인기를 끌고 있는 모양이다.박민정은 조하랑을 다독이며 말했다.“괜찮아. 어차피 나 이제 그 사람 사랑하지도 않아.”“응.”고개를 끄덕이는 조하랑.이튿날 아침 아홉 시,실시간 검색어에 이름을 올린 누군가.“톱스타 이지원 씨가 유씨 집안 축하연에서 추태를 부렸다는 소식입니다. 이지원은 아이를 괴롭히고 표절했다는 이유로 시댁 눈밖에 밀려나 집에 발을 들인지 십 분 만에 쫓겨났다고 합니다.”인터넷은 아침부터 발칵 뒤집혔다.한편, 주상 엔터테인먼트는 이지원의 지시로 빠르게 실시간 검색어를 지우기가 바빴다..하지만 그녀의 세력이 김인우만큼 크지 않다 보니 실시간 검색어는 내려갈 기미가 안 보였다.어쩔 수 어뵤이 이지원은 유남준의 비서 서다희에게 도움을 청했다.이건 그녀뿐만 아
멀리서 컴퓨터 앞에 앉아 일에 몰두한 모습의 그녀가 보였다.유남준은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가 노크도 없이 문을 열었다.갑작스러운 소리에 박민정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어 유남준의 얼음장 같은 얼굴을 보았다.오늘 아침에 이지원에 대한 뉴스가 보도 된 데다 예전에 그녀를 위해 나서던 유남준의 모습이 떠오르자 박민정은 본능적으로 그가 왜 찾아온 건지 알 것 같았다.이번에도 이지원을 위해 자기를 괴롭히기 위해 온거라 생각한한 박민정은 몸을 일으킨 후 저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대표님. 무슨 일이십니까?”경계 태세에 돌입한 그녀를 보면서도 유남준의 머릿속에는 온통 그 아이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지금 당장 나랑 집에 돌아가!”지금 그는 박민정이 기억을 잃은척하는 것 따위 신경 쓸 마음이 없었다.박민정은 황당했다.집?집에 가자고?그녀는 고개를 들어 날카로운 유남준의 얼굴을 한 눈 보았다.“대표님.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유남준은 목을 한 번 가다듬고는 더 말하지 않고 그녀의 손목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그의 걸음이 너무 빠른 탓에 박민정은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끌려갔다.그녀는 어리둥절한 상태로 차가 주차된 곳까지 끌려갔다. 유남준은 운전석에 앉아서도 그녀의 손목을 놓아주지 않았다.박민정은 이런 그의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절 데리고 어딜 가는 거예요?”유남준은 차 시동을 걸고 얇은 입술을 달싹이더니 말했다.“두원!”박민정은 그제야 그가 집에 가자고 했던 게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다.그녀는 기억을 잃은 연기도 잊지 않았다.“두원이 어딘데요?”“대표님. 잊으셨나 본데, 저희는 이미 이혼했어요.”그 말에 유남준은 브레이크를 확 밟으며 붉어진 눈시울을 하고서 박민정을 바라보았다.“우리가 이혼한 건 어디서 봤어?”멈칫하는 박민정.둘은 이미 이혼서류를 낸 상태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와 이혼숙려기간 때문에 이혼이 정식으로 성립된 상태는 아니었다.하지만 4,5년을 죽은 사람으로 살았는데 둘 사이 결혼생활은
가십거리가 돼?이곳 진주시에서 유남준과 엮이고 싶어 하지 않을 여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유남준은 박민정이 사라진 그 시간 동안 연지석이 그녀의 곁에 있었단 사실이 떠올랐다. 같이 지낸 시간이 많으면 자연스레 없던 정도 생긴다는데, 게다가 둘은 어릴 적부터 친구였으니 더 말할 것도 없겠다.“연지석 귀에 그런 소문이 들어갈까 봐 걱정되는 건 아니고?”그의 검은 눈동자에 냉기가 스쳤다.박민정의 얼굴에도 순간 그늘이 졌다.그녀는 유남준의 이런 말버릇을 받아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대표님. 저희가 결혼했든 하지 않았든 선택할 권리는 저에게 있습니다. 이건 지나친 간섭 아닌가요?”말을 마친 박민정은 더는 이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아 곧바로 유남준을 스쳐 지나갔다.유남준은 그녀에게 뺨이라도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분명 말 몇 마디 한 게 다인데 그는 심기가 굉장히 불편해졌다.뭐? 지나친 참견?멀어지는 박민정의 뒷모습을 보며 그는 그녀가 정말 자신에게서 멀어지고 있음을 느꼈다.유남준은 그런 느낌이 미치게 싫었다.그는 핸드폰을꺼내 서다희에게 전화를 걸었다.“무슨 수를 쓰든 그 아이 데려와.”“네.”“그리고 연지석 사업도 계속 공격해. 난 그 자식 것을 철저히 빼앗아야겠어.”전화를 끊은 그의 눈빛은 뭐든 집어삼킬 듯한 어둠에 휩싸였다.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미련 없이 떠나던 박민정의 모습뿐이었다.예전엔 분명 그만을 사랑하겠다고 했던 사람이!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지?이제 연지석을 사랑하게 된 건가?뭐가 어떻게 됐든 그는 반드시 박민정을 다시 뺏어올 거다.그의 것은 그가 버리는 한이 있어도 절대 남에게 주는 일은 없어야 한다.유남준은 차에 탄 후 담배를 피우며 아이의 사진을 다시 꺼내 봤다.정말 그의 아이라면 박민정은 왜 그를 해외에 숨겨뒀을까?그는 아이를 다시 데려온 후에 낱낱이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그리고 뭐가 어떻게 됐든 이번엔 반드시 박민정을 자기 옆에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다시는 그의 시선 밖으로 도망치지 못하
박예찬은 이제 막 어린이집에서 수업을 마쳤는데 기사님은 오늘 예전보다 조금 늦게 오는 듯싶다.옆에 있던 유지훈이 쉴 새 없이 재잘거렸다.“넌 매일 기사님이 데리러 와?”“안 그러면?”박예찬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유지훈은 거만하게 말했다.“난 매일 우리 집안 어르신들이 데리러 오거든. 증조할아버지는 내게 가족애를 느끼게 해주겠다고 말씀하셨어.”말을 마친 유지훈은 일부러 목소리를 낮추고 신비롭게 말을 이었다.“오늘은 누가 데리러 오는지 알아?”“누군데?”박예찬은 별로 안 궁금하지만 그냥 물어봤다. 대꾸를 안 하면 쉴 새 없이 재잘거릴 테니까.“우리 할머니.”유지훈이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박예찬은 그저 그러려니 했다.고영란은 그의 친할머니도 아닌데 뭐가 이렇게 기쁜 걸까?생각에 잠겨있을 때 고영란의 차가 도착했다.고급 리무진에서 내려오는 고영란은 세련된 생활한복 차림에 하이힐을 차려 신었다. 반 백 살 되는 나이에도 우아한 자태를 보존하고 있었고 제스처마다 고상한 아우라가 흘러넘쳤다.“할머니.”유지훈이 쪼르르 달려갔다.아이가 귀여운 목소리로 외쳤지만 고영란은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요 녀석의 부모가 해외에서 돌아오지 않았다고 남편이 친히 당부했으니 망정이지 그녀는 딴 사람 손자를 데리러 올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영란은 이렇게 생각했지만 겉으론 옅은 미소를 지었다.“가자.”그녀는 말하면서 박예찬을 힐긋 쳐다보다가 순간 눈빛이 부드러워졌다.“예찬아.”오늘 이리로 온 이유는 바로 제 아들 유남준의 어릴 때 모습을 쏙 빼닮은 박예찬을 보기 위해서이다.고영란은 일부러 조사해보았는데 박예찬은 최근에 금방 귀국하여 조하랑과 함께 지내고 있고 친아빠에 대한 정보는 없다.조하랑을 두어 번 정도 봤지만 그다지 친한 사이는 아니다.박예찬은 고영란의 부름에 얌전하게 대답했다.“안녕하세요, 할머니.”고영란은 예의 바른 아이의 모습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유지훈을 뿌리치고 예찬의 앞으로 다가가 쪼그리고 앉았다.“엄
“지금, 이 나이니까 더 이혼하자는 거예요. 굳이 남은 인생을 당신한테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고영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방에 들어갔다.그러나 유지욱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문득 여태껏 이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심술부리는 원인이 분명 아버지 재산 때문인 것 같았고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이튿날.유명훈의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박민정의 친구들도 모두 오게 되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손연서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최현아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한쪽에서 사람들과 유명훈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욱과 고영란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렇게 유명훈의 장례는 총 3일 동안 진행 후 끝났다.고영란은 담담한 얼굴로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유남우에게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이만 갈라서려고 해.” 순간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유지욱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그는 원래 유명훈의 장례가 끝나면 계속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영란한테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일시적으로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지금 애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진짜 이혼하려고?”“네.”고영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저는 너무 괴로워요. 지금 당장 법원에 갑시다.”고영란은 지금 그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유지욱도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라 단번에 그러자고 하더니 두 사람은 법원으로 출발했고 두 아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자식들도 이미 다 컸고 자기 혼인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돌아가는 차 안
고영란도 유석진의 고함에 깜짝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여태껏 모든 집안일을 아내한테 떠넘긴 채, 홀로 밖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유지욱이 원망스럽기만 했다.한 사람에 대한 단념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실망감이 천천히 쌓이면서 식어가는 것이다.보아하니 오늘 저녁에도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유지욱이 도착해보니 유씨 가문의 모든 친척이 다 모여있었다.그리고 이미 상복으로 갈아입은 고영란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왜 진작에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그의 물음에 고영란은 실망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제가 말해주지 않았다고요? 한 달 전에 전 분명히 아버님 건강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으니까 와서 회사 일 좀 도와드리라고 귀띔해 줬어요.”“난 네가 우리 아버지 재산 때문에 나더러 오라는 줄 알았지.”유지욱의 말에 고영란은 큰 충격을 받고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유지욱 씨, 정말 어이없네요. 맞아요, 제가 빨리 돌아오라고 했던 원인이 아버님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지욱 씨한테도 나눠줬으면 했어요. 그런데 그 재산이 전부 아주버님한테 넘어갔네요?” 그러나 유지욱은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그깟 돈 몇 푼 가지고 왜 그래? 우리가 모두 한 식구인데 주면 줬지.”유지욱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님들을 맞이하러 떠났다.그리고 유석진과도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 고영란은 제대로 마음이 상했다.박민정도 손자며느리로서 유남준과 같이 손님들을 맞이하다가 우연히 시부모님이 서로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사실 유씨 가문에 시집온 이후로 시아버지인 유지욱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유지욱은 젊었을 때부터 고집불통에 집안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매일 여행이나 다니면서 자유롭게 사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여 유지욱과 고영란은 1년 중에도 만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살짝 다가가 그에게 말했다.“남준 씨, 가서 어머님 좀 위로해 주세요.”여자
유남준의 아버지, 유지욱은 계속 외국에서 살다보니 이 자리에 없었다.그러자 고영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지욱 씨는 지금 당장 오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방금 비행기 탔다고 했으니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거예요.”그러자 유석진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그러면 지욱이가 도착하고 나서 다시 말할 테니까 외부인은 참견하지 말아요.”순간 고영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 집에 들어와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줬는데도 제가 아직 외부인인가요? 저는 오늘 아버님께서는 왜 그리도 자식들을 편애하시지 꼭 물어봐야겠어요!”“제 아들들이 능력이 뛰어나면 이런 불공평한 대우도 다 받아들여야 하나요?”여태껏 유명훈은 많은 주식을 갖고 있었다.비록 유남준이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유명훈의 지분이 그대로 유석진네로 넘어가게 되면 유남준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더구나 유남우도 그의 재산이 필요한데 말이다!게다가 유명훈은 오랜 세월 동안 주식 말고도 분명 많은 재산을 모았을 텐데 그 돈마저 전부 저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고영란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유석진은 유명훈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여태껏 지욱이를 잘 붙잡아 두지 못한 제수 씨를 탓해야죠! 지욱이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없어요!” 고영란이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유남준이 그녀를 말렸다.“엄마, 그만해요.”여태껏 유명훈이 유석진네만 편애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던 그이기에 지금 아무리 그와 말싸움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유남우도 불쾌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 그녀에게 말했다.“엄마, 형 말이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결정하신 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싸울 필요 없어요.”이 시각, 침대에 누워있던 유명훈은 호흡이 점점 더 가빠져 헐떡거리기 시작했다.그런데도 눈앞에서 자식들이 자기 재산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기만 했다.“지욱이...”그는 힘겹게 유지욱을 불렀다.유지욱은 평소에도 그의 말을
최현아는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지만 박민정은 그저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그러자 그녀는 뻘쭘해진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일은 무슨, 윤소현이 드디어 판결받았다고 해서 축하해주려고 왔지.”박민정은 분명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다.지금 최현아와 그의 시아버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왠지 그럴수록 더 수상했다.“감사합니다.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일 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박민정이 뒤돌아서니 역시나 최현아가 빠르게 그녀의 팔을 부여잡았다.“민정아,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박민정은 이제 와서 한 식구라는 그녀의 말이 그저 가소로웠다.“도대체 할 말이 뭔가요?”그리고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최근에 할아버지 건강이 점점 악화하면서 동서랑 남준 씨가 그립기도 하고 우리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도 보고 싶은가 봐. 혹시 오늘 밤 할아버지 뵈러 같이 가지 않을래?”최현아는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사실 박민정도 할아버지의 건강이 여태껏 좋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도 아마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네, 알겠어요.” 최현아는 그제야 박민정의 팔을 놓아줬지만 그녀가 떠나가자마자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그리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껏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재수 없는 것, 운발로 지금 자리에 올라앉은 주제에.” 차에는 낯선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박민정한테 화낼 필요 없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할아버지의 주식이랑 모든 돈을 너한테 넘길 수 있도록 잘 구슬리는 거야.”그러자 최현아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나도 알아, 저번에 이미 할아버지랑 말해봤다니까? 유남준 씨랑 민정이는 괜히 고고한 척하면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한 상황이라 우리 쪽에 전부 몰리게 되어있긴 한데, 난 지금 성혁 씨 얼굴만 봐도 짜
조하랑은 그제야 화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그러면 왜 저 여자한테 찾아갔어요?”“당연히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러 갔죠. 그리고 이지원에 대해 정신감정도 의뢰했거든요. 만약 진짜로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거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게 다 쇼하는 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어요.”김인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다가 조하랑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예전에 제가 지원이한테 어떻게 가스라이팅 당했는지 하랑 씨도 잘 알잖아요. 만약 저를 구해줬던 사람이 형수님이었단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절대 그 애를 도와주지도 않았을 겁니다.”“지금은 그저 마땅히 받아야 할 벌만 받았으면 좋겠고요.”조하랑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인우 씨가 또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여자한테 찝쩍거린다고만 생각했어요.”그녀의 말에 김인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되물었다.“하랑 씨,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순간 조하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누, 누가 질투한다는 거예요? 그저 저를 배신한 인우 씨한테 화나고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나한테 실망했을 뿐이라고요!”“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 의사도 임산부가 흥분하면 아이한테 안 좋다고 말했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는 다정하게 조하랑을 품에 안았는데 순간 그녀는 얼굴이 더욱 빨개진 채 온몸이 굳어버렸다.당연히 김인우도 눈치채고는 빠르게 물었다.“왜요, 부끄러워요?”“그, 그럴 리가요...”조하랑은 말까지 더듬으며 애써 덤덤한 척했다.“저도 안을 줄 알거든요?”그리고 똑같이 김인우를 꼭 안아줬는데 이번에는 김인우가 속으로 움찔했다.추운 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꼭 껴안아 줬는데 거리를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 멈춰졌다 가곤 했다.조하랑도 어느새 그걸 느꼈는지 재빨리 김인우를 밀쳐냈다.“됐어요. 이제 병실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인우 씨도 그만 돌아가요.”“저랑 같이 안 가고요?”김인우의
김인우는 유남준의 마지막 한마디까지 다 듣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그러면 지금 하랑 씨가 형수님이랑 같이 있다는 거지?”“응.”김인우가 왠지 자신이 방금 했던 말을 귀담아듣지 않은 것 같아 유남준은 다시 한번 주의를 줬다.“결혼 전에는 아무 여자나 끼고 놀아도 상관없겠지만 지금은 결혼도 했고 아이까지 있는 마당에 좀 조심해야 하지 않겠어?”김인우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황당하다는 듯이 그에게 답했다.“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 버릇 고친지가 언젠데, 예전의 내가 아니야.”“응, 그러면 다행이고.”“그러면 지금 하랑 씨는 병원에 있는 거야?”“응.”유남준은 대답하자마자 전화를 끊었는데 보아하니 오늘에도 독수공방해야 할 것 같았다.김인우는 그길로 빠르게 조하랑 보러 병원으로 달려갔다.그리고 가는 길에 방금 유남준이 했던 말을 곱씹어 보았다.‘설마 하랑 씨가 오해한 건가?’그러다가 눈이 번쩍 뜨이더니 무언가가 생각난 듯 자기 머리를 퍽퍽 내리쳤다.“이 멍청한 놈, 그때 통화하는 걸 분명 옆에서 다 들었던 거야!”그는 곧바로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이지원의 영상을 자기한테 보내라고 했다.드디어 병원에 도착했다.조하랑이 막 잠들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누구세요?”박민정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간호사인가? 내가 가볼게.”“응.”박민정이 슬리퍼를 신고 문어구에 다가가 문을 열어보니 눈앞에 김인우가 서 있었다.“형수님, 하랑 씨 여기에 있나요?”김인우는 다급하게 물었다.박민정은 그가 이렇게 빨리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해 살짝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네.”“제가 들어가도 될까요?”그러나 박민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조하랑은 김인우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빠르게 다가와 차갑게 말했다.“아니요. 민정아, 너는 일단 먼저 자. 내가 나가서 말할게.”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를 한번 쏘아보더니 그대로 밖으로 나갔고 김인우도 서둘러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하랑 씨, 진짜 오해예요.”그러나 조랑
김인우는 집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조하랑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식은땀이 맺힌 채로 급히 박예찬과 김훈에게 달려가 물었다.하지만 김훈은 일부러 모른 척하며 그가 이번 기회에 정신 좀 차리길 바랐다.“나도 몰라. 하랑이가 방에 없다고? 화장실 간 거 아니야? 화장실은 찾아봤어?” 김훈이 일부러 태연하게 말하자 김인우는 인상을 찌푸렸다.“거기도 없어요.”“그거 참 이상하네.”김훈은 걱정스러운 척하며 말했다.“그럼 멀뚱멀뚱 서서 뭐 하는 거냐? 어서 찾아봐야지. 지금 임신 중이잖아.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가만두지 않겠다.”박예찬도 거들었다.“오늘 아줌마가 좀 안 좋아 보이긴 했어요. 혹시 가출하신 거 아니에요?”그 말에 김인우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그는 곧장 조하랑을 찾아 나섰다.한편, 조하랑은 이미 병원에 도착해 있었다. 박민정이 곁을 지키고 있었고 둘은 정수미와 잠깐 이야기를 나눈 뒤 병실로 들어가 조용히 대화를 이어갔다.“하랑아, 너 그냥 이렇게 온 거야? 가족한테는 말 안 했어?”조하랑은 고개를 저었다.“응. 그냥 조용히 나왔어. 지금은 누구 얼굴도 보기 싫어.”“그래도 집에 한 통은 전화해. 안 그러면 걱정하실 텐데.”박민정이 말했다.“괜찮아. 다들 내가 자는 줄 알 거야. 내일 아침에 슬쩍 들어가면 돼.”조하랑은 개의치 않는 듯 말했다.임신 후로 김인우와는 방도 따로 쓰고 있었기에 자신이 방에 없다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알겠어.”박민정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후 조심스레 물었다.“그런데, 하랑아. 너 아까 말한 그 여자, 혹시 누군지 짐작은 가?”조하랑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난 김인우 주변 사람들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어.”박민정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그럼 내가 남준 씨한테 한 번 물어볼게. 혹시 오해일 수도 있으니까.”“응, 좋아.”조하랑도 더 큰 싸움으로 번지는 건 원치 않았다.박민정은 조하랑 앞에서 유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유남준도 막
조하랑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걱정 마, 민정아. 나 그냥 좀 화가 났을 뿐이야. 아직은 냉정해.”그리고는 씁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야. 그냥... 기분이 나빠서 그래. 내가 지금 그 사람 아이까지 품고 있는데 저렇게 행동하면 기분이 어떻게 안 상하겠어.”박민정은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잠시 후, 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민정아, 나 네가 있는 곳으로 가도 될까?”“당연하지. 내가 데리러 갈게.”박민정은 임신한 친구의 감정이 요동칠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걱정된 마음에 바로 나섰다.하지만 조하랑은 코끝이 붉어진 채 대답했다.“아냐, 이미 차 탔어. 지금 가는 중이야.”그녀는 더 이상 그 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 김인우가 눈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둘 수가 없었다.박민정은 그녀가 이렇게 단호하게 움직일 줄은 몰랐던 지라 속으로 적지 않게 놀랐다.“알겠어. 그럼 내가 문 앞에서 기다릴게.”“응, 고마워.”...한편, 김인우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길가에 있는 꽃집을 발견했다.그는 운전기사에게 차를 세우게 하고는 직접 차에서 내려갔다. 잠시 후, 그는 품에 형형색색의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돌아왔다.차에 다시 올라타자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가자. 좀 빨리 가 줘.”예전에도 김인우는 여자를 위해 꽃을 보낸 적이 있었지만 그건 대부분 비서가 대충 주문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꽃다발은 그가 직접 고르고 색을 맞춰 정성껏 고른 것이었다.운전기사도 그의 얼굴에서 어쩔 수 없이 번지는 미소를 보고는 감탄하듯 말했다.“사모님은 참 복도 많으시네요. 이사님께서 뭐든 다 챙기시니.”김인우는 입꼬리를 높이 올리며 웃었다.“당연하지. 내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사람이잖아. 그 정도는 해야지. 사실 하랑 씨가 임신하지 않았더라도 난 여전히...”하지만 마지막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그는 조하랑을 보기 위해 한 걸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