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라엘은 서류 위에 그대로 적었다. 여인은 그 펜을 보며 등을 조금 굽혔다.“그걸 적으면 안 찾을 겁니까? 집 나갈 이유가 있었다고.”“소재를 확인하는 일은 계속합니다.”오렌의 대답 뒤에 마르타의 시선이 라엘에게 옮겨 왔다. 라엘은 여인이 묻고 싶은 말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았다.“찾으면 데려다주는 거죠?”이번에는 오래 침묵하지 않았다.“먼저 안전한지 확인할 거예요. 그리고 엘렌 씨가 집에 돌아오고 싶은지도 물을 겁니다.”마르타가 손을 움켜쥐었다.“싫다고 하면요.”“억지로 데려오지는 않을 거예요.”여인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라엘은 평가장 안에서 했던 대답을 떠올렸다. 그때는 종이 울리고 면담이 끝났지만, 지금 눈앞의 사람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녀는 펜을 내려놓았다.“그 말을 들으면, 딸을 영영 못 볼 것처럼 느껴지실 것 같아요.”마르타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눈가가 젖었지만 손으로 닦지는 않았다.“돌아오라는 말은 안 할게요.”한참 뒤 여인이 말했다.“살았는지만 알려 줘요. 내가 때렸다고 말해도 돼요. 화가 나서 아직 얼굴 보기 싫다고 해도…….”그녀의 목소리가 끊겼다. 라엘은 물잔을 권하려다 방에 물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렌이 작업실에 둔 주전자 쪽을 눈으로 가리켰다. 라엘은 허락을 받고 물을 따라 왔다.마르타는 잔을 받았지만 마시지 않았다.“문을 열어 놓고 자요. 혹시 와서 두드리는데 못 들을까 봐.”라엘은 약속할 수 있는 말을 골랐다.“다음 주 넷째 날에 다시 소식을 드릴게요. 그때까지 새로 확인된 것이 없어도 연락하겠습니다.”마르타가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그날 안 되면?”“늦어지기 전에 알려 드릴게요. 이건 담당자가 바뀌어도 볼 수 있게 기록하겠습니다.”여인은 탁자 위 달력을 끌어왔다. 손가락으로 날짜를 짚었다. 라엘이 같은 날짜를 확인해 주자 작은 동그라미가 그려졌다.⸻새로운 단서는 서랍 속에 있지 않았다.마르타는 엘렌이 가져간 물건을 설명하다 작업대 아래에서 얇은 상자를 꺼냈다.
동부 외곽으로 향하는 마차에는 황실 문장이 없었다.라엘은 무릎 위에 올려 둔 서류철을 다시 펼쳤다. 모서리가 닳은 신고서에는 열한 달 전의 날짜가 적혀 있었다. 실종자의 이름은 엘렌 바르트, 당시 나이는 열아홉. 회색 외투를 입고 갈색 천 가방을 든 채 집을 나갔으며, 마지막으로 목격된 장소는 동부 직조 공방 앞이었다.그 아래에는 신고인이 덧붙인 문장이 있었다.왼쪽 귀 뒤에 작은 흉터가 있음.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이 조금 휘어 있음.라엘은 그 문장 옆으로 시선을 옮겼다. 처음 신고를 받은 관리가 적은 내용은 두 줄뿐이었다. 공방에 확인했으나 해당 인물의 소재를 알 수 없음. 성인이므로 자발적 이탈 가능성 있음.그다음 조사 기록은 비어 있었다.맞은편에 앉은 선임 조사관 오렌은 창밖을 보다가 라엘이 같은 페이지를 세 번째 넘겼을 때 입을 열었다.“오늘은 새로운 사실을 알아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라엘은 고개를 들었다. 오렌은 사십 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외투 소매에는 오래된 기워 붙인 자국이 있었고, 서류를 넣은 가방의 잠금쇠는 한쪽이 다른 색이었다. 그는 황후라는 호칭 대신 수습 과정에서 쓰는 이름으로 그녀를 불렀다.“라엘 씨. 우리가 먼저 설명해야 할 건 왜 열한 달 동안 연락이 없었는지입니다.”“기록에는 담당자가 바뀌었다고 되어 있어요.”“두 번 바뀌었습니다. 그동안 신고서는 다른 서류와 함께 보관됐고요.”“그러면 그렇게 말씀드리면…….”말하던 라엘은 입을 다물었다. 담당자가 바뀌었다는 이유로 딸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답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가벼워지지는 않았다. 오렌은 그녀가 멈춘 것을 보고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설명하되, 그걸 이해해 달라고 요구하지는 맙시다.”마차가 큰길을 벗어나자 바퀴 아래에서 돌이 튀었다. 낮은 집들이 가까워졌고, 지붕 사이로 물에 젖은 가죽 냄새가 흘러들었다. 신고인 마르타 바르트는 구두를 수선하는 일을 한다고 했다. 라엘은 마지막 문의서에 적힌 주소를 확인한 뒤 서류철을 닫았다.그녀는 오늘
라엘의 면담은 카시안의 것보다 짧게 끝날 줄 알았다.서부 별관의 지하 창고에 들어간 시각과 안나를 발견한 경위, 칼베르에게서 열쇠를 넘겨받은 과정까지는 이미 경위서에 적었다. 그녀는 같은 내용을 한 번 더 확인하고 서명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헬레나 모렌은 첫 장을 넘기기도 전에 펜을 멈추었다.“문을 열었을 때 안나 벨로스가 먼저 한 말을 기억하십니까?”라엘은 창고 안을 떠올렸다. 낮은 천장과 벽에 기대앉아 있던 여인, 입을 막은 천을 풀자 터져 나온 기침. 안나의 손목을 붙들고 있던 밧줄이 젖어 있었다. 울음 때문에 말이 끊겼고, 라엘은 괜찮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다.“나가지 못하게 했다고…….”“칼베르 로딘이 그랬다는 이름도 그때 들으셨습니까?”라엘의 입술이 멈추었다. 이름은 들었다. 분명히 들었지만, 그것이 재갈을 풀어 준 직후였는지 물을 마신 뒤였는지까지는 선명하지 않았다. 여인이 자신을 따라 지하로 내려왔다고 말한 기억과 칼베르를 복도로 끌어내던 순간이 겹쳐 있었다.“그건 정확하지 않아요.”헬레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기록에 표시했다. 실망하거나 놀라는 기색은 없었다.“그럼 최초 발언에는 이름을 특정하지 않은 것으로 남기고, 이후 확인한 내용은 따로 구분하겠습니다. 칼베르의 열쇠로 문을 연 것은 직접 보셨습니까?”“네. 제가 열었어요.”“열쇠를 받은 시점에 문 안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까?”질문은 계속되었다. 라엘은 안나의 손목에 난 상처를 어디까지 직접 보았는지, 물그릇을 누가 옮겼는지, 칼베르의 소매에 묻은 소금을 자신이 먼저 확인했는지 하나씩 되짚었다. 몇 가지는 데미안이 말해 준 것이었다. 그때 함께 있었기에 자신이 보았다고 생각했던 장면도 있었다.면담실에는 작은 창문 하나가 있었다. 창틀에서 떨어진 햇빛이 탁자 끝을 따라 조금씩 움직였다. 라엘은 그 빛이 처음보다 손등에 가까워졌을 때야 자신이 한 시간 넘게 같은 의자에 앉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경위서 일부를 정정해도 될까요?”“물론입니다.”
침실로 돌아왔을 때는 동쪽 창문이 이미 희게 밝아지고 있었다.라엘은 문을 닫고서야 어깨에 힘을 풀었다. 지하 창고에서 맡았던 눅눅한 소금 냄새가 아직 옷깃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손을 몇 번이나 씻었는데도 손가락 사이에 밧줄의 거친 감촉이 남았다. 안나를 묶었던 매듭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겁에 질린 사람에게 시간이 얼마나 길게 흐르는지 알고 있어서, 칼로 끊어 내는 순간까지도 마음이 급했다.카시안은 창가에 서 있었다. 밤새 입고 있던 옷 그대로였다. 라엘이 다가가자 그가 먼저 시선을 내렸다.“손은?”“괜찮아. 화상 입었던 데도 안 벌어졌고.”그는 대답만 듣고 넘어가지 않았다. 라엘이 내민 오른손을 받아 손바닥과 손목을 차례로 살폈다. 붕대가 없어도 될 만큼 나은 자리에 엄지손가락이 아주 가볍게 닿았다. 전처럼 당장 의사를 부르겠다고 하지는 않았다. 대신 손을 놓지 않은 채 물었다.“안나 벨로스는.”“물을 조금 마셨어. 세레나가 곁에 있고. 잠들었다가 깨면 문부터 확인한대.”카시안의 턱이 굳었다. 라엘은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짐작했다. 자기 궁 안에서 사람이 사라졌고, 사흘 동안 누구도 제대로 찾지 않았다. 그 사이 궁에서는 식사가 올라왔고 회의가 열렸으며, 정해진 시간마다 복도의 등불이 꺼졌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네가 오늘 할 일은 있어.”그가 고개를 들었다.“궁인들 출입 기록을 조사관들에게 넘기는 것. 관련 부서에 기록 폐기 금지 명령을 내리는 것. 그리고 안나가 치료받는 동안 급료가 끊기지 않게 하는 것.”“처벌은?”“판결이 나온 뒤에.”카시안은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엘은 잡힌 손을 빼지 않고 한 걸음 더 다가갔다.“지금은 내가 할 수 없는 일도 있고.”“무엇이지.”“네가 잠드는 것.”그의 눈에 아주 옅은 웃음이 스쳤다. 오래 버티던 것이 조금 느슨해지는 얼굴이었다.“그건 명령인가.”“부탁. 당신 아내가 하는.”카시안은 라엘의 손등에 입술을 댔다. 짧은 입맞춤 뒤에도 고개를 들지 않
신고서를 끝까지 읽은 라엘은 곧바로 카시안을 바라보았다.“서부 별관을 봉쇄해야 해.”조금 전까지 남아 있던 사적인 온기는 두 사람의 얼굴에서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카시안은 신고서를 받아 시녀의 이름과 마지막 목격 시각을 확인했다.실종된 시녀의 이름은 안나 벨로스.스물넷. 선황 레오폴드가 연금된 서부 별관의 식사와 세탁을 담당했다. 사흘 전 밤, 동료 시녀에게 선황의 침실 벽에서 아스테리아의 목소리가 들린다고 말했다. 다음 날 새벽에는 평소처럼 별관에 출근했으나 정오가 지나도록 나오지 않았고, 출입 기록에는 오전 열한 시에 퇴근한 것으로 적혀 있었다.하지만 정문 경비병 가운데 안나가 나가는 모습을 본 사람은 없었다.“별관 책임자는 누구지?”라엘이 물었다.“칼베르 로딘.”카시안의 대답이 짧게 굳었다.“선황 시절부터 황궁 내무관을 맡았던 사람이다. 아버지의 연금이 시작된 뒤에는 본인이 직접 별관 관리를 자청했어.”“백관과의 관계는?”“공식 기록에는 없다.”“비공식 기록은?”카시안은 잠시 침묵했다.“내가 아직 확인하지 못했거나, 아버지가 숨긴 기록 안에는 있을 수 있겠지.”라엘은 신고서의 접수 시간을 확인했다. 의회가 설립안을 통과시킨 지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아직 조사원장은 선출되지 않았고, 정식 조사관 채용도 시작되지 않았다. 법적으로 제국민 권리조사원이 수사에 착수할 수 있는 시점은 일주일 뒤였다.그러나 안나가 별관 안에 갇혀 있다면 일주일을 기다릴 수 없었다.“백관 피해조사위원회 명의로 긴급 구조 수사를 시작할게. 제국민 권리조사원이 정식 출범하면 사건을 이관하고.”카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필요한 인원을 말해.”“위원회 조사관 네 명, 황궁 구조를 아는 기술관 두 명, 의무관 한 명. 성기사는 별관 밖의 출입만 통제해. 내부에는 황실과 이해관계가 없는 조사관만 들어갈 거야.”“나는?”“들어오면 안 돼.”카시안의 눈빛이 굳었다.“실종 사건이 일어난 곳은 내 아버지가 있는 별관이야.”“그래서 안 돼.”
제국민 권리조사원 설립안은 첫 번째 표결에서 부결됐다.찬성 스물여덟.반대 서른하나.기권 아홉.결과가 발표되는 순간 회의장 안이 크게 술렁였다. 귀족원 쪽에서는 안도의 한숨이, 시민 대표석에서는 노골적인 탄식이 흘러나왔다. 몇몇 사람은 재표결을 요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누군가는 처음부터 귀족들에게 결정권을 준 것이 잘못이었다고 소리쳤다.라엘은 발언대 앞에 선 채 표결판을 바라보았다.법안이 부결될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귀족원에서 반대 의견이 쏟아질 것이라 예상했고, 각 지역 대표를 직접 만나 설득하기도 했다.그러나 표결 결과를 눈앞에서 확인하자 속이 서늘해졌다.반대표를 던진 사람 중에는 며칠 전까지 설립안에 찬성하겠다고 약속한 시민 대표도 있었다. 찬성표를 던진 귀족도 예상보다 많았지만, 법안을 통과시키기에는 세 표가 부족했다.의장이 망치를 두드렸다.“정숙하십시오. 제국민 권리조사원 설립안은 의결 정족수를 충족하지 못했으므로 부결되었습니다.”“피해자를 보호할 기관을 만들자는 법안입니다!”서부 노동자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귀족원의 허가가 없으면 귀족을 조사할 수 없는 지금의 제도로 무엇을 바꾸겠다는 겁니까?”맞은편에 있던 북부 후작이 즉시 반박했다.“황후 폐하께서 지휘하는 조사기관이 황실과 무관하다고 믿으라는 말입니까? 황제의 배우자가 원장이 되어 제국 전역의 귀족을 소환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황권의 확대입니다.”“설립안 어디에도 황후 폐하께서 원장이 된다고 쓰여 있지 않습니다.”“모두가 그렇게 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후작의 말에 회의장 곳곳에서 동의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라엘은 반박하지 못했다.그동안 제국민 권리조사원을 설명할 때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라엘이 원장을 맡으리라 생각했다. 백관 피해조사위원회를 이끈 경험이 있고, 벨루아 사건까지 해결했으니 당연하다고 여겼다.라엘 역시 그것을 분명하게 부정하지 않았다.원장이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책임지는 편이 빠르다고 생각했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