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인간들이 ‘재앙의 붉은 용’이라 부르는 레드 드래곤 아르셀리아. 어느 날 자신을 죽이러 온 용사를 가볍게 쫓아낸 그녀는 그가 들고 온 아름다운 성검만 전리품으로 챙긴다. 그런데 그날 밤, 보물고에 넣어둔 검이 아름다운 남자로 변해 나타났다. “성검 아스테리온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주인님.” 드래곤을 죽이기 위해 태어난 용살성검이 하필 드래곤을 자신의 진짜 주인으로 선택해 버렸다. 게다가 이 뻔뻔한 검은 보물고도 모자라 침실까지 따라오더니 매일같이 청혼한다. “주인님, 혼인합시다.” 그저 예쁜 검 하나를 주웠을 뿐인데, 아무래도 아주 귀찮은 것을 보물로 삼아 버린 것 같다.
Ver mais아르셀리아는 인간을 싫어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별로 관심이 없었다. 인간은 짧게 살았고, 빨리 늙었고, 아주 사소한 일에도 자주 흥분했다. 드래곤인 그녀가 보기에는 눈 깜짝할 사이에 태어나서 서로 싸우고, 사랑하고, 나라를 세우고, 나라를 무너뜨리다가 사라지는 존재들이었다. 굳이 싫어할 이유도 없었다. 문제는 인간 쪽에서 자꾸 그녀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상당히 귀찮은 방식으로. 콰아앙―! 화염궁의 남쪽 절벽 아래에서 굉음이 울렸다. 황금빛 햇살을 받으며 느긋하게 소파에 기대 있던 아르셀리아가 눈을 떴다. 손에 들고 있던 책이 무릎 위로 미끄러졌다. 잠시 뒤. 콰앙! 이번에는 조금 더 가까웠다. 아르셀리아는 말없이 천장을 바라보았다. 화염궁은 적염령에서도 가장 높은 화산 정상에 자리하고 있었다. 검붉은 현무암과 붉은 수정으로 만들어진 궁전 주변으로는 용암이 강처럼 흘렀고, 인간이라면 몇 발짝도 버티지 못할 열기가 사방을 감싸고 있었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애초에 올라올 생각부터 하지 않아야 했다. 그런데 인간들은 가끔 정상적이지 않았다. 특히 스스로를 ‘용사’라고 부르는 인간들이 그랬다. 콰아아앙―! 세 번째 폭발음. 아르셀리아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또 왔네.” 소파 옆 탁자 위에 엎드려 자고 있던 작은 불도마뱀이 고개를 들었다. 붉은 꼬리 끝에서 조그만 불꽃이 팔랑거렸다. “키륵?” “응. 인간.” “키륵.” 불도마뱀마저 질렸다는 듯 다시 고개를 내려놓았다. 아르셀리아는 책갈피를 끼운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닥을 스치는 검붉은 실내복 자락이 느릿하게 흔들렸다. 짙은 적발은 허리 아래까지 흘러내렸고, 머리카락 사이로 작은 붉은 뿔 한 쌍이 드러나 있었다. 오늘은 인간형으로 쉬고 있었다. 귀찮았다. 본체로 돌아가면 날개를 접는 것도 일이고, 인간들이 자신을 보고 더 크게 비명을 지르는 것도 시끄러웠다. 아르셀리아는 맨발로 창가까지 걸어갔다. 남쪽 절벽 아래. 인간 하나가 검을 들고 올라오고 있었다. 검. 아르셀리아의 시선이 잠시 멈췄다. “…….” 인간은 별로였다. 정말로. 붉은 망토를 두르고 있었고, 반짝이는 은빛 갑옷도 입었다. 얼굴도 인간 기준으로는 꽤 잘생긴 편일 것이다. 하지만 아르셀리아의 관심은 인간에게 있지 않았다. 그의 손에 들린 검이었다. 길고 곧게 뻗은 검신 위로 금빛 문양이 흘렀다. 손잡이 중앙에는 핏빛처럼 붉은 보석이 박혀 있었고, 햇살이 닿을 때마다 검 전체에서 희미한 신성력이 번졌다. 아르셀리아의 붉은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예쁘다. 상당히.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그대로 창문을 열었다. 뜨거운 바람이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절벽을 거의 다 올라온 인간이 그녀를 발견했다. 곧장 검을 치켜들며 외쳤다. “적염의 재앙, 아르셀리아 로하르트!” 아르셀리아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또 저 이름이다. 인간들은 이상하게 그녀의 본명보다 ‘적염의 재앙’을 더 좋아했다. 처음 누가 붙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에드릭 벨로안! 성왕국의 검이자 신에게 선택받은 용사다!” “…….” “수백 년간 인간들을 괴롭혀 온 사악한 드래곤이여! 오늘 그 죄를 심판하겠다!” 아르셀리아가 창틀에 팔꿈치를 괴었다. 그리고 꽤 진지하게 물었다. “내가 뭘 했는데?” 에드릭의 기세가 순간 멈칫했다. “뭐?” “인간을 괴롭혔다며.” 아르셀리아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누구?” “그, 그것은…….” “이름.” “…….” “몇 명?” “…….”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아르셀리아는 예상했다는 듯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늘 이랬다. 그녀가 인간 마을 하나를 불태웠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왕국의 공주를 셋이나 납치했다는 전설도 있었다. 심지어 아기를 잡아먹는다는 이야기까지 있었다. 전부 사실이 아니었다. 아르셀리아는 인간 아기를 본 적조차 몇 번 없었다. 아기 인간은 너무 작고 약해서 가까이 가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난 네 나라가 어디 있는지도 몰라.” “거짓말!” “이름이 뭐였지?” “……벨로안 왕국.” “처음 듣는데.” 용사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르셀리아는 그 모습에 별 관심 없이 그의 검을 다시 바라보았다. 아까보다 가까이서 보니 더 마음에 들었다. 붉은 보석 안쪽에서 무언가 살아 있는 것처럼 빛이 움직이고 있었다. 좋다. 아주 좋다. 보물고의 세 번째 방. 붉은 수정 왕관과 황금 술잔 사이가 딱 비어 있었다. 저걸 두면 예쁘겠다. 아르셀리아가 말했다. “그거 두고 가.” 에드릭이 눈을 크게 떴다. “……뭐?” “검.” “…….” “두고 가.” 용사의 표정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변했다. “이것이 무엇인지 알고 하는 말인가?” “검.” “성검이다!” “그래.” “신께서 직접 축복하신 용살성검 아스테리온! 수많은 드래곤의 피를 마신 전설의 검이다!” 아르셀리아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용살성검. 그 말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검 자체는 여전히 예뻤다. “그래서?” “그래서라니!” 에드릭이 검을 꽉 움켜쥐었다. 금빛 신성력이 검신을 타고 폭발하듯 피어올랐다. “이 검으로 오늘 네 심장을 꿰뚫겠다!” 아르셀리아는 잠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창문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럼 직접 가져가야겠네.” “……무슨?” 에드릭이 말을 끝내기도 전이었다. 콰앙―! 화염궁의 창문에서 붉은 불꽃이 폭발했다. 아르셀리아의 모습이 사라졌다. 다음 순간. 에드릭의 눈앞에 그녀가 나타났다. 너무 빨랐다. “……!” 용사는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성검에서 찬란한 금빛이 터져 나왔다. 아르셀리아는 피하지 않았다. 맨손으로 검날을 잡았다. 콰아아앙―! 금빛 신성력과 붉은 화염이 충돌했다. 폭발적인 충격이 절벽을 흔들었다. 바위가 갈라지고 뜨거운 바람이 사방으로 퍼졌다. 에드릭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성검의 날이. 아르셀리아의 손바닥을 베지 못했다. 정확히는, 붉은 비늘이 손등과 손바닥 위로 솟아올라 검날을 막고 있었다. 아르셀리아는 자신의 손에 잡힌 검을 내려다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더 예뻤다. 금빛 문양의 결도 섬세했고, 붉은 보석도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맑았다. “마음에 들어.” “……뭐?” “이거.” 아르셀리아가 손목을 틀었다. 그것뿐이었다. 에드릭의 손에서 검이 빠져나왔다. “잠깐!” 성검이 공중을 돌았다. 아르셀리아가 자연스럽게 손잡이를 잡았다. 그 순간이었다. 웅― 이상한 진동이 검신을 타고 울렸다. 아르셀리아의 붉은 눈이 커졌다. 따뜻했다. 검에서 느껴질 리 없는 체온 같은 것이 손바닥에 닿았다. 곧이어 검에 새겨져 있던 금빛 문양들이 한 번에 밝아졌다. 촤아악―! 찬란한 빛이 산 정상 전체를 뒤덮었다. 에드릭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말도 안 돼.” 아르셀리아도 검을 내려다보았다. “왜 이래?” 에드릭의 입술이 떨렸다. “성검이…….” “응.” “주인을 인정할 때 나타나는 빛인데…….” 아르셀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너 주인 아니었어?” 에드릭의 얼굴이 처참해졌다. “…….” “아니었나 보네.” “그럴 리가 없어!” 용사가 달려들었다. 아르셀리아는 귀찮다는 듯 한 손을 들었다. 퍽! 붉은 마력이 에드릭의 이마를 정확히 때렸다. 그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 “으악!” 다행히 절벽 아래로 떨어지지는 않았다. 바위 위를 몇 번 구른 뒤 널브러졌다. 아르셀리아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안 죽었지?” “으…….” “그럼 됐어.” “성검…….” 에드릭이 떨리는 손을 뻗었다. “돌려…….” “싫어.” 단호했다. “그건…… 성왕국의…….” “이제 내 거야.” 아르셀리아는 검을 한 번 들어 올렸다. 붉은 햇살이 검신을 타고 반짝였다. 역시 예뻤다. 마음에 들었다. 아주 많이. 그녀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내려가.” “…….” “검은 두고.” 그렇게. 성왕국에서 삼백 년 만에 나타났다는 용사는 적염령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아르셀리아에게는 새 보물이 생겼다. 그날 오후. 아르셀리아는 꽤 오랜 시간을 보물고에서 보냈다. 화염궁 아래에는 일곱 개의 보물고가 있었다. 각 방마다 용도가 달랐다. 첫 번째 방에는 금화. 두 번째에는 보석. 세 번째에는 아름다운 장식품. 네 번째에는 마도구. 다섯 번째에는 고대 유물. 여섯 번째에는 이상한 물건. 일곱 번째에는 아직 분류하지 않은 것. 아르셀리아는 새로 가져온 성검을 세 번째 방으로 들고 갔다. 붉은 수정으로 만든 왕관 옆. 황금 술잔 맞은편. 검 하나를 세워 두기 딱 좋은 자리가 있었다. “여기.” 아르셀리아는 만족스럽게 성검을 세워 두었다. 금빛 검신이 주변 보석의 빛을 받아 반짝였다. 역시 잘 어울렸다. 그녀는 한 발짝 물러서서 바라보았다. 조금 왼쪽. 아니다. 다시 오른쪽. 아르셀리아가 검의 위치를 아주 조금 옮겼다. “이게 낫네.” 웅― 성검이 희미하게 떨렸다. 아르셀리아가 눈을 깜빡였다. “왜?” 당연히 대답은 없었다. 검이니까. 아르셀리아는 별생각 없이 검신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아까 전투하면서 먼지가 조금 묻어 있었다. 손끝으로 검신을 천천히 쓸었다. 순간. 웅! 검이 크게 떨렸다. 아르셀리아가 손을 멈췄다. “……?” 다시 한번. 손가락으로 검신을 문질렀다. 이번에는 더 선명하게 떨렸다. “고장 났나?” 용살성검이라더니 생각보다 이상했다. 아르셀리아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부드러운 천을 하나 집어 들었다. 검을 깨끗하게 닦아 둘 생각이었다. 그렇게 한참. 검신을 닦았다. 이상하게도 닦을 때마다 검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지만 아르셀리아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오래된 마도구는 가끔 그랬다. 마력이 흐르면 울거나 빛나거나, 심지어 비명을 지르는 것도 있었다. 이 정도면 얌전한 편이었다. “됐다.” 반짝반짝해진 검을 바라보며 아르셀리아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붉은 보석이 유독 밝게 빛나는 것 같았지만 그것 역시 마음에 들었다. “예쁘네.” 웅― 검이 아주 작게 울었다. 아르셀리아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이제 내 보물이야.” 그 순간. 성검 전체에서 금빛이 한 번 번쩍였다. 아르셀리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곧 다시 평범한 검으로 돌아왔다. “이상한 검이네.” 그녀는 그대로 보물고를 나갔다. 그리고 문을 잠갔다. 철컥. 그날 밤까지는. 정말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한밤중. 아르셀리아가 눈을 떴다. 처음에는 자신을 깨운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화염궁은 조용했다. 창밖으로는 붉은 달빛이 흘러들었고, 멀리 용암이 흐르는 낮은 소리만 들렸다. 아르셀리아는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붉은 머리카락이 어깨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때. 달칵. 아주 작은 소리가 들렸다. 아르셀리아의 눈동자가 세로로 가늘어졌다. 보물고 방향이었다. 잠이 순식간에 달아났다. 드래곤의 보물고를 건드리는 것. 그것은 인간이든 드래곤이든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아르셀리아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맨발이 바닥에 닿았다. 복도를 걸어가는 동안 그녀의 손끝에서 붉은 화염이 피어올랐다. 누구든. 오늘 꽤 크게 잘못했다. 보물고로 내려가는 계단. 첫 번째 방은 이상 없음. 두 번째도. 그리고 세 번째. 문이 열려 있었다. 아르셀리아의 눈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분명 자신이 잠갔다. 그녀는 소리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보석과 황금 사이. 누군가 있었다. 아르셀리아가 걸음을 멈췄다. “…….” 남자였다. 처음 보는 남자. 검은 머리카락이 어깨 가까이 흐르고 있었다. 희미한 금빛이 감도는 눈동자와 지나치게 반듯한 얼굴. 그리고. 아무것도 입지 않았다. 정확하게. 정말 아무것도. 아르셀리아는 한동안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남자도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색한 침묵. 아르셀리아는 그대로 뒤돌아 문밖으로 나갔다. 문을 닫았다. 철컥. 복도에 서서 잠시 생각했다. 다시 문을 열었다. 남자는 그대로 있었다. 이번에는 황금 천 하나를 허리에 둘러놓은 상태였다. 아르셀리아가 물었다. “누구야.” 남자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서운하군요.” “뭐가?” “낮에 그렇게 열심히 만지셨는데.” “……?” “벌써 잊으셨습니까?” 아르셀리아의 시선이 남자의 뒤로 향했다. 아까 분명 세워 두었던 성검이 없다. 붉은 수정 왕관 옆. 빈자리만 남아 있었다. 아르셀리아의 눈이 다시 남자에게 돌아왔다. 검은 머리. 금빛 눈. 그리고 그의 가슴 한가운데. 익숙한 붉은 보석과 똑같은 빛이 희미하게 박혀 있었다. 설마. 아르셀리아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너.” 남자가 웃었다. “예.” “검이야?” “정확히는 성검입니다.” 아르셀리아는 잠시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검이 왜 사람이 됐어?” “저도 여러 가지 사정이 있습니다.” “다시 돌아가.” “싫습니다.” 즉답이었다. 아르셀리아의 눈썹이 올라갔다. “내 보물이 내 말을 안 들어?” 남자가 멈칫했다. 아주 잠깐. 그 얼굴에서 처음으로 능글맞은 웃음이 사라졌다. “……내 보물.” 낮게 중얼거린 목소리가 묘하게 달라졌다. 아르셀리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왜.” 남자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다시 웃었다. 이번에는 조금 더 깊게. “그 말.” 그가 한 걸음 다가왔다. “마음에 듭니다.” 아르셀리아는 물러서지 않았다. 남자가 가까이 올수록 이상하게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금빛 신성력. 낮에 손으로 잡았던 검에서 느꼈던 바로 그 기운. 아르셀리아가 말했다. “이름.” “아스테리온.” “성검 이름?” “제 이름이기도 합니다.” 아르셀리아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스테리온.” 금빛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천 년 동안 수없이 불렸을 이름일 텐데. 이상할 정도로. 처음 듣는 것처럼. “보물고에서 살아.” 아르셀리아가 말했다. “나가지 말고.” 남자가 웃었다. “그건 조금 어렵겠습니다.” “왜?” “제가 인간형을 유지하려면 주인님의 마력이 필요해서요.” “…….” “멀리 떨어질 수 없습니다.” 아르셀리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벌써 귀찮았다. “얼마나 가까이 있어야 하는데?” 아스테리온이 생각하는 척했다. “가까울수록 좋습니다.” “구체적으로.” 그가 아주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침실 정도.” “안 돼.” “즉답이시군요.” “보물은 보물고에서 자.” “하지만 주인님.” 아스테리온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금빛 눈이 그녀와 같은 높이에 맞춰졌다. “살아 있는 보물을 보물고에 들이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십니까?” 아르셀리아가 눈을 깜빡였다. 안다. 드래곤이라면 모를 수 없었다. 살아 있는 존재를 자신의 보물고에 들이는 것. 특히 개인 보물고에 머물게 하는 것. 그 의미는 거의 하나뿐이었다. 반려. 아르셀리아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태연하게 말했다. “너 검이잖아.” 아스테리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지금은 남자인데요.” “다시 검이 돼.” “싫습니다.” “…….” “주인님.” “왜.” “혼인합시다.” 정적. 용암이 흐르는 소리만 멀리서 들렸다. 아르셀리아가 아스테리온을 바라보았다. 아스테리온도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아르셀리아가 말했다. “싫어.” “그렇습니까.” 아스테리온은 놀랍도록 담담했다. “그럼 내일 다시 여쭙겠습니다.” “왜?” “오늘은 거절하셨으니까요.” “내일도 싫다고 할 건데.” “모레 다시 여쭙겠습니다.” “계속?” “예.” 아르셀리아는 한동안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깨달았다. 오늘 낮. 자신은 단순히 예쁜 검 하나를 주웠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녀가 주워 온 것은. 상당히 귀찮은 것이었다. 그것도. 혼인하고 싶어 하는. 아주 뻔뻔한 성검을.화염궁으로 돌아온 첫날 밤.아르셀리아는 자신의 침실 앞에서 두 남자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한 명은 검은 머리에 금빛 눈.다른 한 명은 검은 머리에 검은 눈.색만 놓고 보면 비슷했지만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아스테리온은 아주 자연스럽게 침실 문 옆에 서 있었다. 마치 원래부터 이 방을 사용하던 사람처럼 태연했다. 반면 카르디안은 팔짱을 낀 채 그런 아스테리온을 노골적으로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있었다.그리고 아르셀리아는.피곤했다.“왜 둘 다 여기 있어.”카르디안이 먼저 대답했다.“의회에서 정한 동행 감시.”“그래서.”“네가 자는 동안도 주변을 확인해야 한다.”아르셀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내가 잘 때까지?”“그래.”“안 돼.”“뭐가.”“귀찮아.”카르디안이 한숨을 쉬었다.“네 편의를 위해 온 게 아니다.”“그럼 누구 편의인데.”“칠색 의회.”“내 집이잖아.”“그러니까 더 문제다. 신전에서 이미 화염궁 위치와 구조를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어.”그 말에는 아르셀리아도 바로 반박하지 못했다.자신은 화염궁의 결계를 믿었다.적염령에서도 가장 깊은 곳.용암 계곡과 붉은 절벽 사이에 숨겨진 궁전.허락받지 않은 인간이 들어오기 어려운 곳.하지만 얼마 전까지도 신전이 아스테리온의 위치를 감지했고, 황금령까지 추적대를 보내지 않았던가.그래도.“침실까지는 안 돼.”아르셀리아가 단호하게 말했다.카르디안이 눈썹을 올렸다.“왜.”“내 방이니까.”“저 검은 들어가면서.”아르셀리아가 즉시 옆을 봤다.아스테리온이 얌전히 서 있었다.너무 얌전해서 더 수상했다.“얘는.”아르셀리아가 잠시 말을 고르다가 말했다.“마력 때문에.”“손 잡고 충전하면 보물고에서도 버틴다며.”아스테리온이 아주 부드럽게 끼어들었다.“요즘은 균열 때문에 인간형 유지가 불안정합니다.”카르디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그래서 꼭 침실 안이어야 하나.”“주인님의 마력에 가장 가까운 곳이니까요.”“보물고가 더 가까울 수도 있지.”“침실이 더
칠색 의회의 불꽃이 가라앉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정확히는.아르셀리아의 불꽃이 아니라.회의장 안의 분위기가.“그러니까.”아르셀리아는 아직도 붉어진 귀 끝을 숨기지 못한 채 아스테리온을 노려봤다.“다시는 의회에서 그런 말 하지 마.”아스테리온은 매우 온순한 얼굴로 물었다.“어떤 말씀이요?”“키스.”“아.”“아, 하지 마.”“알겠습니다.”너무 순순하게 대답해서 오히려 수상했다.아르셀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진짜 알아들었어?”“예.”“다시는 안 해?”“의회에서는.”“아스테리온.”“예.”금빛 눈이 웃었다.아르셀리아가 손을 들었다가 멈췄다. 한 대 치고 싶은데 아직 검신에 금이 가 있었다.그 사실을 떠올리는 순간 화가 조금 누그러졌다.그게 더 짜증 났다.이제는 화를 내다가도 ‘얘 아프지’가 먼저 생각났다.“왜 한숨을 쉬십니까?”“너 때문에.”“그렇게 자주 저를 생각하십니까?”“진짜 검으로 만들어 버릴까.”“그건 원래도 가능합니다.”“…….”“다만 지금은 인간형이 더 좋습니다.”아르셀리아가 이를 악물었다.옆에서는 세레니스가 이미 웃다가 지친 얼굴로 의자에 기대 있었다.“둘이 정말 반려 아니야?”“아니야.”아르셀리아가 즉시 대답했다.“정말?”“응.”“그럼 하나만 물어보자.”“뭔데.”세레니스가 턱으로 둘의 손을 가리켰다.“그건 언제 놓을 거야?”아르셀리아가 내려다봤다.손.아직도 잡고 있었다.정확히는 아스테리온의 손가락이 자신의 손가락 사이에 얽혀 있었다.회의가 거의 끝나 가는 지금까지.한 번도 놓지 않았다.아르셀리아가 바로 손을 빼려 했다.그러자.아스테리온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왜.”“아직 마력이 필요합니다.”“진짜?”“예.”아르셀리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거짓말 아니고?”“확인해 보시겠습니까?”“어떻게.”“놓아 보시면 됩니다.”아르셀리아가 잠시 고민했다.그리고 손을 놓았다.하나.둘.셋.아스테리온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금빛으로 만들어
“시작됩니다.”에드릭의 말이 칠색 의회 한가운데 떨어졌다.그 한마디 뒤로 이상할 만큼 긴 정적이 이어졌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스테리온의 반환과 아르셀리아의 신전 출두를 두고 팽팽하게 갈리던 시선들이 이번에는 일제히 에드릭에게 모였다. 성왕국의 정식 사절로 들어온 용사가, 정작 자신을 보낸 신전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말라고 말했다.그것도.전쟁이 시작될 거라는 말과 함께.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에드릭 옆에 서 있던 사제였다.“용사님.”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지 알고 계십니까?”에드릭은 그를 보지 않았다.“알고 있습니다.”“성왕국의 공식 사절로 이 자리에 오셨습니다.”“그것도 압니다.”“그런데 왕국의 뜻을 거스르는 발언을―”“왕국의 뜻입니까.”그제야 에드릭이 고개를 돌렸다.피로가 짙게 남은 얼굴.붕대 아래로 아직 완전히 낫지 않은 상처가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흐리지 않았다.“아니면 신전의 뜻입니까?”사제의 표정이 굳었다.에드릭은 아주 천천히 말을 이었다.“제가 알기로 성왕국 의회에서는 아직 드래곤 영토에 대한 공식적인 군사 행동을 승인하지 않았습니다.”“용사님.”“국왕 폐하의 친서도 없고.”“그만.”“대신관의 명령만 있지요.”낮게 깔린 마지막 말에 회의장 분위기가 바뀌었다.아르셀리아는 옆에 선 아스테리온의 손을 여전히 잡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미세하게 차가웠던 손끝이 지금은 완전히 멈춰 있었다.그도 에드릭의 말을 듣고 있었다.집중해서.아르셀리아는 조용히 물었다.“그게 다른 거야?”에드릭이 그녀를 봤다.“많이 다릅니다.”“인간들끼리는?”“성왕국이라 해도 왕과 신전은 하나가 아닙니다.”“신을 믿는 나라잖아.”“그렇다고 대신관이 왕인 건 아닙니다.”아르셀리아는 잠시 생각했다.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신전이 멋대로 한 거네.”“현재까지는.”에드릭이 대답했다.“그렇게 봐야 합니다.”사제가 결국 앞으로 나섰다.“용사 에드릭 벨로안.”호칭이 바뀌었다.조금
칠색 의회는 드래곤들조차 쉽게 드나들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아르카디아의 일곱 영지가 맞닿는 중앙 산맥, 어느 색의 드래곤에게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 중립지대. 일곱 개의 거대한 첨탑이 원을 그리듯 세워져 있었고, 중앙에는 오래된 원형 궁전이 자리하고 있었다. 궁전 외벽에는 적색, 은색, 금색, 흑색, 청색, 녹색, 그리고 지금은 거의 사라진 백색의 마력석이 차례로 박혀 있었다.칠색 의회.드래곤들이 전쟁을 결정하고, 영지 간 분쟁을 조정하며, 인간 왕국과의 외교 문제를 논의하는 곳.아르셀리아는 그 앞에 도착하자마자 생각했다.귀찮다.아주 많이.“왜 그런 얼굴을 하십니까?”옆에서 아스테리온이 물었다.“돌아가고 싶어.”“아직 들어가지도 않았습니다.”“그래서 더.”아르셀리아는 원형 궁전 위로 떠 있는 일곱 개의 마력 고리를 올려다봤다.평소라면 이 장소에는 가까이 오지도 않는다. 칠색 의회의 소집장이 날아와도 웬만한 문제라면 대리인을 보내거나 아예 무시했다. 레드 드래곤 중에서도 아르셀리아 로하르트의 괴팍함은 제법 유명해서, 최근 백 년 사이에는 굳이 그녀를 부르지 않는 분위기까지 만들어져 있었다.그런 자신이.직접 왔다.그것도.아르셀리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아래로 내려갔다.맞잡힌 손.자신의 왼손과.아스테리온의 오른손.아침부터 계속 이 상태였다.황금령에서 의회까지 이동하는 동안 아스테리온의 인간형이 두 번이나 흔들렸기 때문이다.아직 균열이 완전히 안정되지 않았다.직접 마력을 공급하면 인간형을 오래 유지할 수 있었고, 손을 잡는 방식이 가장 부담이 적었다.문제는.“또 봅니다.”아스테리온이 말했다.아르셀리아가 고개를 돌렸다.“뭘.”“손.”“확인한 거야.”“무엇을요?”“문양.”“분명 제 손을 보고 계셨는데요.”“문양도 손목에 있잖아.”“그러면 손목을 보셨어야죠.”아르셀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놓을까?”아스테리온이 손가락에 힘을 줬다.“그건 안 됩니다.”“그러니까 조용히 해.”“예.”그는 순순히 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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