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상자 안에서는 눅눅한 종이 냄새가 났다.
서윤은 제일 위에 있던 졸업 전시 도록부터 들어냈다. 구겨진 포스터와 쓰다 만 채색지가 그 밑에 끼어 있었다. 펴 놓을 자리가 모자라 도현의 자료 상자를 조금 밀고 바닥에 앉았다.
찾는 스케치북의 표지는 노란색이었다. 이사할 때 모서리가 찢어져 테이프를 붙여 둔 기억이 났는데, 막상 눈앞에 있는 것들은 모두 비슷한 회색으로 바래 있었다. 서윤은 책등을 하나씩 만져 보고 안쪽의 이름을 확인했다.
『닫는 시간』.
제목을 찾았을 때 밖에서는 쓰레기 수거 차량이 후진하는 소리가 났다. 서윤은 무릎 위에 스케치북을 올렸다. 첫 장에 써 둔 자기 이름이 잘 보이지 않아 책상 조명을 바닥 쪽으로 돌렸다.
한서윤. 단편 합평용.
그 아래에는 지운 제목이 하나 더 있었다. 처음에는 『돌려줄 열쇠』라고 썼다가 이야기가 너무 일찍 드러나는 것 같아 바꾼 것이었다. 서윤은 종이 가장자리를 누르며 다음 장을 펼쳤다.
빈 세탁소 앞에 선 여자.
닫힌 유리문 안쪽에 걸린 앞치마.
여자의 몸에 가려 반쯤만 보이는 의자.
채령의 소개서를 옆에 띄웠다. 옛 그림 속 여자는 운동화를 신고 있었고 새 작품의 여자는 구두를 신고 있었다. 가게 간판도 달랐다. 서윤이 연필로 대강 그어 둔 전깃줄 대신 화려한 건물 장식이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장면을 넘기는 순서는 같았다.
서윤은 첫 컷을 가린 채 다음 컷을 읽어 보았다. 여자 뒤로 보이는 의자가 무슨 의자인지, 그 주인이 어디로 갔는지 바로 알 수 없게 한 구도였다. 세탁소 유리문에 붙은 종이 때문에 실내가 한 번 더 가려졌고, 여자가 몸을 옮긴 다음에야 빈자리가 드러났다.
당시 합평에서는 가게 안을 먼저 보여 주라는 말을 들었다. 독자가 어디인지 알아야 따라온다고 했다. 서윤은 한 장을 다시 그려 갔다가 처음 순서로 되돌렸다. 여자는 사정을 아는데 독자만 모르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
소개서 속의 여자도 같은 순서로 빈 의자를 드러냈다.
우연일 수 있는 것이 어디까지인지 세어 보려다가 그만두었다. 세탁소, 앞치마, 빈 의자. 하나씩 떼어 놓으면 드문 소재는 아니었다. 그런데 유리문에 붙은 안내문 때문에 의자가 반쯤 가려지는 위치까지 같았다.
스케치북 뒤에는 같은 의자를 그린 연습이 여러 장 붙어 있었다. 정면에서 본 의자, 유리문에 반사된 의자, 팔걸이만 보이는 의자. 처음에는 주인이 떠났다는 대사를 먼저 넣었다가 지웠다. 여자가 비켜선 뒤에야 독자도 그 빈자리를 볼 수 있도록, 설명을 뒤로 미룬 것이었다.
서윤은 그 페이지를 따로 펼쳐 두었다. 시점을 바꿀 때마다 여자가 서는 위치도 조금씩 달라져 있었다. 마지막 구도를 고르기까지 거친 과정이 종이 몇 장에 남아 있었다.
서윤은 스케치북 끝에 붙어 있던 작은 종이를 떼지 않고 펼쳤다. 앞치마 옆으로 손이 나오는 장면의 수정안이었다. 이 부분을 바꾸기 전에 누구에게 보여 줬는지 떠올랐다.
채령이 종이를 가져간 것은 합평 모임이 끝난 뒤였다.
“선이 거칠어서 오히려 색 얹기 좋겠다.”
그때 채령은 선 몇 개로 분위기가 결정되는 그림이 좋다고 했다. 서윤이 완성도 안 된 거라고 하자 자신은 이렇게 거칠게 남겨 두는 게 더 어렵다고 웃었다. 칭찬을 들은 서윤은 뒤쪽 낙서까지 보여 줬다.
“이거 색 연습해 봐도 돼? 요즘 하던 거랑 다른 걸 해 보고 싶어서.”
“연습용이면 괜찮아요.”
“스캔해 둔 거 있어?”
당시에는 복사본을 먼저 건넸다. 나중에 파일을 보내 달라는 말을 듣고 회색 선이 잘 보이도록 다시 스캔했다. 어느 페이지는 가장자리가 비뚤어져 채령이 펴서 보내 달라고 했던 기억도 났다.
돌려받을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원본 스케치북은 자기 손에 있었고, 선배가 색을 얹는다고 이야기가 다른 사람 것이 되는 건 아니었다.
서윤은 휴대폰에서 채령의 대화방을 열었다. 최근에는 명절 인사와 도현의 작품 소식밖에 없었다. 대학 시절 연락은 지금 쓰는 대화방보다 오래된 일이었다. 위로 아무리 올려도 그날의 부탁이 나올 수는 없었다.
화요일에는 책상 서랍에 있던 저장장치를 하나씩 연결했다. 합평 때 쓰던 파일을 찾았지만, 옛 컴퓨터에서 옮겨 온 날짜가 먼저 보였다. 화면에 찍힌 숫자가 언제 그린 그림인지를 대신 설명해 주지는 못했다.
서윤은 파일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 처음 저장된 자리에 그대로 두고 확인할 사본만 옮겼다. 종이 원본과 전달했던 스캔, 채령의 소개서를 한 폴더에 섞어 넣으려다가 각각 나누었다.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게 있다면 자신부터 알아야 했다.
수요일 오전, 서윤은 봉투에 넣어 둔 책 2권을 챙겨 집을 나섰다. 어머니는 동네 사람들과 점심 약속이 있어 집을 비웠다. 문 앞에 책을 두었다고 알리니 사위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해 달라는 답이 왔다.
서윤은 답장 칸을 열었다가 화면을 껐다. 책은 전했으니 더 알릴 말이 없었다. 가방 안에는 사인된 책 대신 노란 스케치북이 남아 있었다.
근처 출력점에서 원고를 복사했다. 책등을 누르려던 직원에게 펼쳐지는 만큼만 찍어 달라고 부탁했다. 오래된 접착 부분이 벌어지고 있었다.
“가운데가 조금 어둡게 나올 텐데요.”
“괜찮아요. 억지로 펴지 말아 주세요.”
직원이 복사기를 조정하는 동안 서윤은 벽에 붙은 인쇄 견본들을 보았다. 작은 전시의 안내 엽서와 공연 포스터가 섞여 있었다. 자기 이름이 들어간 전시 포스터도 저 정도 크기였던 것 같은데, 그때 몇 장을 남겨 두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복사본을 받아 든 서윤은 원본과 나란히 놓았다. 연필이 약한 곳은 그림이 끊겼고 지우개를 쓴 자리는 짙어졌다. 새 복사본만 보면 처음부터 그런 선을 그린 줄 알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옛날 원고예요?”
직원이 물었다.
“네. 제가 학교 다닐 때 그린 거예요.”
“오래 갖고 계셨네요.”
서윤은 원본을 가방 안쪽에 넣었다. 파일로만 남겨 둔 줄 알았던 그림이었다. 이사할 때마다 버릴 것을 고르면서도 이 스케치북은 번번이 새 상자로 옮겼다.
출력점을 나와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데 채령에게 연락이 왔다.
[서윤아, 도현이한테 얘기 들었지? 자료 정리 좀 부탁하려고 했는데 일단 우리 쪽에서 찾고 있어. 너도 바쁠 텐데 괜히 번거롭게 한 것 같네.]
서윤은 신호가 바뀐 뒤에도 잠깐 서 있었다. 뒤에 있던 사람이 옆으로 비켜 가자 가방을 당겨 멨다. 길을 건너 건물 벽 옆에서 답장을 썼다.
[보내 주신 소개서 봤어요. 미리보기 장면 때문에 물어볼 게 있어요.]
금방 읽음 표시가 붙었다. 답장은 조금 늦었다.
[어떤 장면?]
[세탁소 앞에서 여자가 돌아서는 부분이요. 예전에 제 콘티 드린 거 기억하세요?]
문장을 보내 놓고 서윤은 스케치북을 들고 선 자기 그림자가 발밑에 길게 놓인 것을 보았다. 전화가 올 줄 알았는데 화면에는 짧은 답이 떴다.
[그때 다 같이 봤던 것들 말하는 거야? 워낙 오래전이라. 금요일에 잠깐 보자.]
서윤은 시간을 물었다. 채령은 작업실 아래 카페 주소를 보내고 금요일 오전 11시가 괜찮으냐고 했다. 괜찮다고 답한 뒤 주소를 달력에 옮겼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채령의 복귀작을 검색했다. 소개서에 들어 있던 장면들이 공개 홍보 페이지에도 올라와 있었다. 일부는 아래가 잘려 있었지만, 인물이 가게 앞을 지나서 돌아서는 순서는 보였다.
공개된 날짜가 표시된 화면을 저장했다. 며칠 뒤 페이지가 바뀌면 자신이 어떤 그림을 보고 연락했는지 설명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파일을 저장하고 나서야 손이 조금 덜 서둘렀다.
도현은 저녁에 들어와 책을 전했느냐고 물었다. 서윤은 어머니에게 두고 왔다고 답한 뒤, 가방에서 복사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당신 이거 기억나?”
도현은 냉장고 문을 연 채 그림을 흘끗 보았다.
“학교 때 거네.”
“어떤 내용이었는지도?”
“세탁소 아니었나. 열쇠 나오는 거.”
서윤은 종이를 조금 더 펴 보였다. 그 정도는 기억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에 기다리던 말이 쉽게 나왔다.
“채령 언니 새 작품에 이 장면이 나와.”
도현은 물을 마시고 컵을 내려놓았다.
“그래?”
“순서랑 구도가 같아. 내가 보내 줬던 거.”
“그때 너희 같이 작업하지 않았어?”
“내 콘티에 색 연습해 보겠다고 가져갔지.”
“그런 얘기겠지. 나도 정확히는 기억 안 나.”
서윤은 채령의 미리보기를 띄우려 휴대폰을 꺼냈다. 도현은 화면이 켜지기 전에 오늘 통화를 오래 해서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씻고 나와서 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욕실로 갔다.
물소리가 들리는 동안 서윤은 식탁에 두 그림을 놓았다. 그가 나오면 어디부터 보여 줄지 순서를 정해 보았다. 가게 종류가 같다는 이야기부터 하면 흔한 장면이라고 할 것 같았다. 의자가 가려진 위치부터 짚는 게 나았다.
샤워를 마친 도현은 작업실로 들어갔다. 문이 열린 채여서 서윤은 종이를 들고 갔지만 그는 이미 헤드셋을 쓰고 통화하고 있었다. 조금만 기다리라는 손짓에 고개를 끄덕였다가, 종이를 내려놓고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기다리는 동안 할 수 있는 일은 남아 있었다.
서윤은 새 작품의 빛과 색이 다르다는 사실부터 메모했다. 채령이 그린 간판과 배경 장식도 따로 표시했다. 그것까지 모두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았다. 비슷한 기분이 든다는 말과 실제로 옮겨 간 장면을 구별해야 했다.
원본에서는 문 앞의 여자가 왼손으로 열쇠를 쥐고 있었다. 손바닥을 감추느라 손등만 보이게 그렸는데, 채령의 그림에서는 그 손에 작은 가방이 걸려 있었다. 열쇠 대신 가방을 들게 한 탓에 손목 아래의 선이 더 잘 보였다.
서윤은 의자를 당겨 앉았다. 스케치북 귀퉁이에 붙인 수정안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그 밑에는 지우지 않고 남겨 둔 첫 그림이 있었다.
손을 그리던 날의 일이 기억났다. 손가락을 굽히는 위치를 여러 번 바꾸다가, 옆으로 뺀 선 하나를 남겨 뒀다. 합평 뒤 도현에게 보여 줬을 때 그가 손이 이상하다고 해서 뒤늦게 알아봤다.
그림 위에 얇은 종이를 덮고 고쳤지만, 채령에게는 고치기 전에 만든 스캔을 보냈다.
서윤은 미리보기의 손을 확대했다.
가방 손잡이를 감싼 손가락 옆에 짧은 선 하나가 더 있었다. 채색의 그림자일 수도 있어 밝기를 올려 보았다. 손잡이 바깥으로 나온 작은 손톱이 선 끝에 붙어 있었다.
원본을 덮은 수정 종이를 옆으로 젖혔다.
그림 속 여자의 왼손에는 손가락이 6개였다.
채령의 그림에도, 똑같이.
5월 7일 오후, 서윤은 입원 가방을 옆에 세워 놓고 다시 진료를 기다렸다. 아침에 예정했던 절차는 바뀌어 있었다. 몸 상태를 확인받고 필요한 처치를 받은 뒤 다음 진료를 잡을 때까지, 가방은 의자 옆에 그대로 있었다.직원이 일정을 확인하며 물었다.“다음에는 이 시간에 오실 수 있으세요?”“네. 올 수 있어요.”서윤은 수첩에 날짜를 적고 새 예약을 확인했다. 다음 날 다시 병원에 왔고, 이어진 조정을 거쳐 5월 12일 입원했다.짐을 풀자 가방 속에서 구겨진 안내지가 나왔다. 지난주에 쓰려던 종이였다. 그녀는 그것을 버리지 않고 다른 서류 밑에 넣었다.입원 중의 하루는 검사와 진료 시간에 맞춰 흘렀다. 그사이에는 병상에 누워 쉬었다.도현이 파일 위치를 물으면 폴더 이름만 답했다. 집에 언제 오느냐는 질문에는 퇴원 날짜를 아직 모른다고 했다. 병원에서 컴퓨터를 쓸 수 있는지 묻는 말은 답하지 않은 채 남겨 두었다.의사는 병이 위 바깥까지 퍼져 있다고 설명했다. 수술로 모두 제거하기 어려운 상태였고, 약물치료를 포함해 가능한 방법을 따져야 했다. 서윤은 설명을 들으며 수첩을 펼쳤다가 펜을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다 적으려고 하지 않고 먼저 들었다.“그럼 수술은 안 하는 거예요?”“지금 확인한 범위에서는 수술로 없애는 치료를 우선하기 어렵습니다. 병의 진행을 억제하는 치료를 검토하면서, 식사와 통증 문제도 같이 조절해야 해요.”“아무것도 못 하는 건 아니죠?”의사는 현재 할 수 있는 일과 몸 상태에 따라 조정해야 하는 일을 나누어 말했다. 서윤은 치료를 받고 싶다고 답했다. 가능하다면 언제 시작할 수 있는지도 물었다.입원 중에는 먹을 수 있는 양과 불편한 증상을 알리는 일도 치료의 일부였다. 덜 아프다고 대답하면 빨리 집에 갈 수 있을 것 같던 습관이 남아 있어, 간호사가 물을 때마다 서윤은 잠깐 생각해야 했다. 어느 때 더 아팠는지, 먹은 뒤 무엇이 불편했는지 말하고 나면 시간이 좀 걸렸다. 그래도 그 말을 적는 사람이 있었다.퇴원 수납을
5월 7일 아침, 여행 가방은 현관에 나와 있었다. 서윤은 병원에서 가져오라고 한 서류를 확인하고 휴대전화에 택시 호출 화면을 띄웠다. 아직 호출 버튼은 누르지 않았다. 도현이 뒤에서 종이 한 장을 내밀었기 때문이었다.“이거 한 줄만 봐.”서윤은 시간을 확인했다. 8시 55분이었다.“지금 나가야 해.”“병원 10시잖아. 읽는 데 1분도 안 걸려.”그가 가져온 것은 축하 영상의 대본이었다. 지난주에 자료를 보낸 뒤 추가 촬영용으로 다시 고쳐 달라는 요청이 왔다고 했다. 서윤이 쓰지 않은 문장이 중간에 들어가 있었다. 오래된 원고에서 인물의 대사를 떼어 작가 자신의 경험처럼 붙인 부분이었다.“이건 인물이 한 말이잖아.”“그래서 좀 이상하다고. 내가 한 말처럼 바꿔 줄 수 없어?”“빼면 돼.”“그걸 빼면 앞에 영상이랑 안 맞는다니까.”도현은 종이를 돌려 그녀 쪽으로 더 밀었다. 서윤은 휴대전화를 식탁에 놓고 잘라낼 문장에 표시했다. 출발 시각을 늦추지 않고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라고 생각했다. 선을 긋자 도현은 그 뒤에 이어질 말을 물었다.“그건 당신이 해. 생각해 둔 게 있잖아.”“지금 이 상태로 넘기라는 거야?”서윤은 펜을 내려놓았다. 도현은 촬영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30분 안에 보내겠다고 말했다. 그녀에게 가능한지 묻지 않은 약속이었다.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서윤이 가방을 들자 그가 작은 방을 가리켰다.“원고도 같이 열어 봐야 해. 장면 순서가 달라져서.”“오늘 못 한다고 했어.”“입원해도 바로 뭘 하는 건 아니잖아. 접수만 조금 늦으면 되는 거 아니야?”“당신이 정할 일이 아니야.”목소리가 커지자 도현은 거실 창문 쪽을 보았다. 밖에서 들을 사람을 의식하는 그 동작 때문에, 서윤은 자신도 모르게 낮추려던 목소리를 그대로 두었다.“내가 병원에 가야 한다고 몇 번 말했어. 날짜도 2번 바꿨어.”“그러니까 오늘 끝내고 가라고.”도현은 같은 설명을 반복하며 촬영 담당자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통화가 끝나면 나갈 수
서윤은 돌려받은 봉투를 책상 서랍 안쪽에 넣었다. 은수가 보관할 원고 목록에는 그 봉투가 없었다. 목록을 접어 파일철에 끼운 뒤에도 책상 위에 남은 종이가 많아, 당장 필요한 병원 안내부터 가방에 챙겼다.4월 16일 진료에는 예약한 시각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다. 앞선 검사 자료가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확인하고 앉아 있으니, 간호사가 최근 식사량을 물었다. 서윤은 잘 먹고 있다고 답하려다가 전날 먹은 것을 차례로 말했다. 말하고 보니 스스로 생각했던 것보다 적었다.진료실에서는 검사 결과와 몸 상태를 함께 보았다. 의사는 병의 범위를 더 확인하고 치료 계획을 정하기 위해 입원 평가를 권했다. 먹는 양이 줄어든 문제도 같이 살펴야 했다.“며칠 정도 생각하면 될까요?”“검사와 상태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요. 우선 입원해서 필요한 평가를 진행하고 계획을 설명드리겠습니다.”서윤은 달력을 열었다. 의사가 기다려 주는 동안 남편의 일정이 화면에 나타나, 자기 예약을 적은 작은 수첩을 따로 꺼냈다. 4월 23일 옆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그날로 해 주세요.”그녀는 날짜를 받아 적었다. 병원에서는 그 사이에도 증상이 심해지면 예정일까지 기다리지 말고 연락하라고 했다.진료실을 나오자 다음 주 원고가 먼저 떠올랐다. 서윤은 메신저를 열려던 손을 멈추고 입원 준비물 안내부터 읽었다. 빠진 물건을 적어 둔 뒤 약국에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왔다.도현에게 날짜를 말한 것은 그날 저녁이었다. 그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얼마나 걸리느냐고 물었다.“아직 몰라. 검사도 더 해야 하고, 치료 계획을 잡아야 한대.”“그럼 검사하는 데 시간을 얼마나 쓰는지도 모르는 거야?”“해 봐야 정할 수 있대.”서윤이 가방에서 안내를 꺼내 식탁에 놓았다. 도현은 종이를 읽는 대신 메신저에 올라온 수정 요청을 확인했다. 다음 주까지 넘겨야 하는 원고에 문제가 생겼다고 했다. 인물이 싸우는 이유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의견이었다.“내가 그 부분은 건드려 봤거든. 그런데 앞뒤가 또
원고를 가방에 넣으려니 가장 오래된 스케치북이 들어가지 않았다. 서윤은 모서리를 억지로 눌러 보다가 가방을 바꾸었다. 남편의 행사 자료를 넣던 큰 보조 가방이었다. 안쪽 주머니에서 지난 행사장의 안내 종이가 나와, 그것만 빼서 책상에 놓았다.4월 13일 오전, 바닥에 펼친 스케치북들은 크기부터 제각각이었다. 문구점에서 산 얇은 연습장 옆에는 표지가 떨어져 고무줄로 묶어 둔 것도 있었다. 종이마다 적힌 날짜는 몇 년씩 떨어져 있었고, 뒤쪽이 통째로 빈 공책도 눈에 띄었다. 남편의 원고가 급해질 때면 그리던 장을 덮어 두곤 했다.서윤은 완성한 그림에 붙여 둔 파란 표시를 확인했다. 말풍선과 동작만 잡아 둔 콘티에는 회색 표시를 붙였다. 선을 정리하지 못한 인물들은 얼굴이 동그라미뿐인 경우도 있었다. 어느 해의 것은 연필이 너무 흐려서, 나중에 촬영할 때 빛을 따로 비추어야 할 것 같았다.한 장을 넘기다가 여자가 혼자 빵을 먹는 그림에서 멈췄다. 봉투를 열기 전에는 맞은편에 의자가 하나 더 있었다. 먹기 시작한 뒤의 칸에는 여자가 벗어 놓은 외투 때문에 그 의자가 반쯤 가려졌다.서윤은 옷깃을 고쳐 그리려다 펜을 내려놓았다. 오늘은 고치는 날보다 무엇을 남길지 정하는 날에 가까웠다.몸이 허락하는 만큼만 하자고 생각하며 원고를 다시 묶었다. 다음 진료일이 적힌 종이는 가방 바깥 주머니에 넣었다. 계약을 한 다음에도, 원고를 고르는 아침에도 그 날짜는 필요했다.은수는 전날과 같은 상담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노트북 옆에 빈 파일철과 촬영용 받침대를 준비해 놓았다. 서윤이 가방을 내려놓자 은수가 손을 뻗다가 먼저 물었다.“꺼내도 될까요?”서윤은 스케치북부터 꺼내 달라고 했다. 원고의 크기가 달라 책상 위에 한꺼번에 펴 놓을 수는 없었다. 은수는 몇 권만 펼치고 나머지는 의자 위에 세워 놓았다. 두 사람이 앉은 책상 사이로 연필 자국과 지운 흔적들이 이어졌다.“이쪽은 완성본이고요. 여기부터는 콘티예요.”서윤은 표시 색을 설명했다. 은수는 회색 표
월요일 오전, 서윤은 진료 대기실에서 예약 문자를 다시 확인했다. 산부인과의 후속 진료를 마치면 같은 건물의 다른 층으로 가야 했다. 지난주에 잡아 둔 소화기 진료였다.의사는 유산 이후의 상태를 확인하고 이후에 살펴야 할 증상을 설명했다. 서윤은 안내를 듣고 나온 뒤 다음 진료과에 최근의 일을 알렸다. 임신 사실과 유산한 날짜를 말하는 동안, 접수 직원은 필요한 항목을 조용히 입력했다. 그 말을 끝까지 들은 사람에게는 별도의 변명이 필요하지 않았다.소화기 진료실에서 서윤은 몇 달 전부터 속이 답답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끼니가 늦어져서라고 생각했고, 다음에는 임신 때문인 줄 알았다고 했다. 의사는 어느 쪽으로도 바로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식사량과 통증, 최근의 변화에 관해 차례로 물었다.“유산 전에도 먹는 양이 많이 줄었어요?”“네. 배가 고픈데 먹기 시작하면 금방 못 먹겠어요.”최근 검사 결과를 확인한 의사는 위내시경 검사를 권했다. 서윤은 검사 방법과 준비 사항을 듣고 가능한 날짜를 골랐다. 다음 날 아침이었다. 그 시간을 선택하면서도 남편의 작업 일정을 먼저 열어 보지는 않았다.4월 8일의 검사가 끝난 뒤, 그녀는 옷을 갈아입고 설명을 기다렸다. 의사는 병변이 있어 조직을 채취했다고 말했다. 검사 결과를 확인해야 한다는 말과 함께 추가 촬영 일정을 잡았다. 서윤은 그가 화면의 어느 곳을 가리키는지 보았지만 색과 형태만으로는 알아볼 수 없었다.“안 좋은 건가요?”“확인이 필요한 소견입니다. 조직검사와 영상검사 결과를 같이 보고 설명드릴게요.”집에 돌아와 내시경 사진을 펼쳤다가 다시 덮었다. 인터넷에서 비슷한 이미지를 찾아 나란히 놓아도 무엇이 같은지 알 수 없었다. 한 사람은 별일 아니었다고 했고, 다른 사람은 전혀 다른 결과를 적었다. 서윤은 검색 창을 닫고 병원에서 받은 다음 예약을 확인했다.도현은 그녀가 책상 앞에 오래 있지 않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날 저녁에도 컴퓨터가 꺼져 있는 작은 방을 들여다보았다.“검사 아직도 안 끝났
도현은 현관 거울 앞에서 셔츠 소매를 접고 있었다. 서윤이 부엌에서 물을 마시는 동안 그는 재킷을 걸쳤다가 벗었다. 문채령의 행사 사진에 어떻게 나올지 휴대전화로 확인하느라, 신발을 신고도 한참 나가지 않았다.“오늘 저녁은 늦어. 뒤풀이까지 가야 할 것 같아.”서윤은 벽 달력을 보았다. 4월 5일의 날짜 위에 남편이 행사 이름을 크게 적어 놓았다. 그 아래에 자기 약속을 덧쓰려던 흔적은 없었다. 병원 일정은 이제 작은 방에 둔 종이에만 적었다.“나 오늘은 쉬어야겠어.”“알아. 어제 보낸 부분은 봤어.”“원고 말고, 몸이 안 좋아.”도현은 손에 든 휴대전화에서 시선을 떼었다. 그녀의 앞에 놓인 물컵을 보더니 냉장고 쪽을 한번 돌아보았다.“먹을 게 없으면 시켜 먹어. 굳이 나 기다리지 말고.”현관문이 닫힌 뒤 서윤은 물을 조금 더 마셨다. 아랫배의 통증은 아침부터 있었다. 며칠 전 진료 이후 출혈이 줄어드는 듯해 안심했던 것이 전날 밤이었다. 지금은 화장실에 다녀올 때마다 상태를 확인해야 했다.병원에서 받은 안내지를 식탁에 펴 놓고 전화부터 했다. 토요일 진료 시간 안이었다. 증상을 설명하는 도중 통증이 심해져, 서윤은 잠시 말을 멈췄다. 수화기 너머의 간호사가 이름을 다시 불렀다.“듣고 있어요. 그런데 아까보다…….”그녀는 몸을 일으키다가 식탁에 다시 기대었다. 출혈이 갑자기 늘었고 어지러웠다. 간호사는 혼자 움직이지 말고 즉시 응급 도움을 받으라고 했다. 서윤은 통화를 마치자마자 119를 눌렀다.주소를 말하는 동안 휴대전화가 미끄러지지 않게 식탁에 올려놓았다. 현관문을 열어 두라는 안내를 듣고 천천히 걸어가 잠금을 풀었다. 가방은 가까운 의자에 있었다. 그녀는 병원 봉투와 신분증을 챙겨 넣은 뒤, 더 움직이지 말라는 말에 따라 현관 근처에 앉았다.도현에게 먼저 전화를 걸지 않았다. 누군가의 허락을 받거나 도착을 기다릴 시간이 아니었다. 현관문 밖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자 서윤은 안쪽에 있다고 답했다.병원에서는 비슷한 질문에 몇 번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