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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화. 지워진 서명

Author: YuIm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27 13:15:38

서윤은 마지막 컷 아래에 윤슬이라고 썼다.

그림을 가리지 않을 만큼 작은 글씨였다. 휴대폰 크기로 줄이면 알아보기 어려워 한 번 키웠다가, 다시 처음 크기로 돌렸다. 오른쪽 아래에는 이미 강도현이라는 이름이 들어가 있었다. 두 이름 사이가 멀었다.

월요일 아침, 식탁 위에는 사인을 받지 못한 책 2권이 그대로였다. 서윤은 그것들을 옆으로 밀어 두고 원고를 다시 읽었다. 남자가 의자를 빼 주는데 여자는 앉지 않는 장면이었다. 도현은 여자가 화난 표정을 짓기를 원했지만, 서윤은 의자 등받이를 잡은 손만 남겼다.

서윤에게는 그 손이 더 오래 보였다. 앉으라고 하면 앉고, 기다리라고 하면 기다려 왔던 사람이 처음으로 자기 자리를 옮기려는 장면이었다.

서명까지 들어간 화면을 따로 저장하고 도현의 작업실로 갔다. 문은 열려 있었고, 그는 전날 올라온 독자 반응을 읽고 있었다.

“다음 원고 봐 줘.”

“보냈어?”

“아직. 마지막에 넣은 게 있어서.”

서윤이 태블릿을 책상 위에 놓았다. 도현은 중간 부분을 빠르게 넘기다가 마지막 화면에서 손을 멈췄다.

“이건 뭐야?”

그가 가리킨 곳은 여자의 손이 아니었다.

“내 이름.”

“그건 아는데, 왜 여기다 넣었어?”

“나도 그렸으니까.”

도현은 태블릿을 자기 쪽으로 당겼다. 한동안 말이 없어 서윤은 그가 서명이 잘 보이는지 확인하는 줄 알았다. 화면을 확대하고 나서야 그의 입에서 짧은 숨이 나왔다.

“납품 표기는 맞춰야지. 갑자기 이것만 다르면 어떡해.”

“다음부터도 넣으면 되잖아.”

“회사랑 얘기된 것도 아니고.”

“그럼 얘기하자.”

서윤은 그 말을 하기 전부터 손에 힘을 주고 있었다. 막상 입 밖으로 나오니 목소리는 생각보다 작았다. 다시 말해야 할까 싶었는데 도현이 태블릿을 든 채 그녀를 보았다.

“너 토요일 일 때문에 이러는 거야?”

“그 일도 있고.”

“아직도?”

아직이라는 말에 대답할 말을 놓쳤다. 주말이 지났을 뿐이었다. 서윤이 식탁에 놓인 책 쪽을 바라보자 도현은 의자를 뒤로 밀며 일어났다.

“나도 밖에서 말하다 보면 실수할 때가 있어. 그 자리에서 다 설명할 수는 없잖아.”

“실수였으면 고치면 되잖아.”

“무슨 해명문이라도 내라고?”

“그렇게 말한 건 아니야. 다음엔 내가 그림 그린다고 말해 줘. 내 이름도 넣고.”

그는 책상 모서리를 짚었다. 서윤을 달래려고 할 때처럼 몸을 조금 낮추는 자세였는데, 이번에는 가까워진 얼굴을 보는 일이 편하지 않았다.

“그러면 사람들이 지금까지는 왜 안 넣었냐고 물어. 네가 하고 싶은 건 이름 하나 넣는 거겠지만 일이 거기서 끝나질 않아.”

“지금까지 안 넣었다고 계속 못 넣는 건 아니잖아.”

“누가 못 넣는대. 순서가 있다는 거지.”

“언제 얘기할 건데?”

도현이 답하는 대신 태블릿을 다시 켰다. 서윤은 남편의 손가락이 자기 이름 위로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원고를 그릴 때 선과 글자를 따로 둔 탓에, 서명이 있는 칸을 끄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흰 여백이 돌아왔다.

“일단 이걸로 보내. 나중에 의논하고.”

“그냥 지우지 마.”

그제야 도현의 손이 멎었다.

“없앤 게 아니라 안 보이게 한 거야. 파일에는 남아 있잖아.”

“내가 넣으려고 쓴 거잖아.”

도현은 잠깐 입을 다물더니 태블릿을 책상에 놓았다. 화면에서 손을 뗀 그는 더 이상 그림을 보지 않았다.

“오늘 꼭 이 얘기를 해야겠어? 행사 끝나서 좀 숨 돌리나 했는데.”

서윤은 태블릿을 가져왔다. 도현은 그녀가 문 쪽으로 움직이자 다툼이 끝난 줄 알았는지, 점심에 같이 나가자는 말을 했다. 근처에 새로 생긴 음식점이 있다고 했다.

“오늘은 안 나갈래.”

“왜. 맨날 집에만 있지 말고.”

“내가 정리할 게 있어.”

문턱을 넘을 때까지 도현은 언제 이름을 넣을지 말하지 않았다.

작은 방으로 돌아와 파일을 열었다. 서명이 있는 칸은 꺼져 있었고 도현이 저장한 시각이 찍혀 있었다. 서윤은 그것을 되돌려 덮어쓰지 않았다. 아침에 남겨 둔 사본을 옆에 띄우니 같은 그림 아래 한쪽에만 윤슬이 있었다.

어느 쪽도 버리지 않고 날짜가 적힌 폴더에 넣었다. 마지막 칸만 남긴 그림이 아니라, 지웠다가 다시 그린 선과 옮겨 놓은 말풍선이 함께 있는 작업 파일이었다.

도현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마지막 손은 좀 펴면 안 돼? 화난 것처럼 보여.]

서윤은 여자의 손을 확대했다. 잡고 있던 의자를 놓으려면 손가락을 펴야 했다. 하지만 아직 놓은 것은 아니었다. 여자가 다음 장면에서 무엇을 할지 생각하다 보니 도현에게 답할 말이 먼저 정리됐다.

[이 장면은 그대로 둘게. 다음에 손을 놓는 거라서.]

보내고 나서 휴대폰을 뒤집지는 않았다. 도현의 답이 오는지 보고 있었다. 한참 뒤에 알았다는 메시지가 떴다.

서윤은 그제야 원고를 전달했다. 작가 이름은 남편의 것만 보였다.

점심 무렵 주방으로 나왔을 때 도현은 식탁에 앉아 책의 비닐을 벗기고 있었다. 미숙이 보내 준 이름을 휴대폰으로 확인한 뒤 표지 안쪽에 사인을 했다. 펜을 바꿔 짧은 인사까지 덧붙였다.

“이거 어머님 갖다드리면 되지?”

“응.”

“받는 사람 이름 이렇게 쓰는 거 맞아?”

“응. 엄마가 보내 준 거야.”

서윤은 책을 받아 봉투에 넣었다. 도현은 뚜껑 닫은 펜을 굴리다가 자기 쪽으로 끌어왔다.

“아까는 나도 말이 좀 세게 나갔네.”

서윤이 봉투를 접던 손을 멈추자 그가 말을 이었다.

“예민한 시기에 갑자기 뭘 바꾸자고 하니까 그랬어. 너 잘하는 거 내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

“알면 얘기해 줘.”

도현은 잠시 그녀를 보다가 웃었다.

“그러니까 내가 안다고.”

서윤은 남은 봉투 끝을 접었다. 책 2권의 두께 때문에 한 번에 접히지 않았다. 도현은 식탁 위를 정리하는 동안 새로 받은 일정표를 열었다.

“이번 금요일엔 시간 돼?”

“왜?”

“채령이 복귀 준비하는 거 알지?”

서윤은 봉투를 내려놓았다.

문채령.

도현보다 먼저 이름을 들었던 사람이었다. 대학 때 합평 모임에 오던 선배였고, 색을 잘 쓰는 사람이라 후배들이 채령의 작업 화면 주위로 몰리곤 했다. 서윤도 그 뒤에 서서 여러 번 구경했다.

도현이 그녀를 오래 좋아했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남편이 말한 적은 없었다. 결혼 전 모임에서 누군가 둘을 놀리다가 서윤의 얼굴을 보고 화제를 바꾼 뒤로, 그 자리에 갈 때면 자신이 모르는 이야기가 어디까지 있는지 생각하게 됐다.

그렇다고 채령과 대놓고 불편하게 지낸 적은 없었다. 명절이면 인사를 주고받았고, 채령은 가끔 도현의 작품이 좋다는 말을 전했다. 서윤에게 따로 그림 이야기를 묻지는 않았다.

“새 작품 나온다고 들었어.”

“다음 주에 관계자들 모아서 간단히 보여 준대. 그 전에 자료를 좀 정리해야 하나 봐.”

“그걸 내가?”

“대단한 거 아니야. 예전 작업 사진 찾는 거랑, 소개 자료에 들어갈 이미지 고르는 정도.”

서윤은 도현이 내민 휴대폰을 받지 않았다.

“그쪽 회사에서 하면 되잖아.”

“오래된 건 우리가 더 잘 알지. 대학 때 자료도 있다는데 너 정리 잘해 두잖아.”

“내 자료를 달래?”

“그런 뜻이 아니라. 너도 모임에 있었으니까 도와줄 수 있냐고.”

도현은 채령의 말을 대신 전하면서도 질문이 끝나기 전에 다음 일정을 보고 있었다. 서윤은 봉투를 식탁 한쪽으로 밀었다.

“어떤 자료가 필요한지 본인이 보내 달라고 해.”

“내가 보내 줄게.”

“아니, 채령 언니가. 내가 갖고 있는지도 봐야 하니까.”

도현이 휴대폰에서 눈을 들었다. 대답을 기다리던 서윤은 그가 불편한 표정을 짓기 전에 한마디를 보탰다.

“지금 해 준다고 약속하지는 마.”

도현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서윤은 봉투 끝을 눌러 접다가 손을 뗐다. 또 웃고 넘어가면 부탁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일을 맡은 사람이 될 것 같았다. 무슨 자료인지부터 알아야 한다고 다시 말했다.

결국 그가 채령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답은 금방 왔다.

[서윤이 자료 정리 진짜 꼼꼼하지. 급한 건 아니니까 내가 따로 얘기할게. 고마워.]

도현은 그 부분을 보여 주며 말했다.

“봐. 급한 거 아니래.”

서윤은 그 아래에 붙은 작은 하트를 보았다. 채령의 대화방에는 자료 이야기뿐 아니라 지난주의 안부도 남아 있었다. 저녁은 먹었는지 묻는 메시지가 잠깐 보였지만, 다음 내용을 읽으려고 손을 내밀지는 않았다.

“자료 오면 보고 답할게.”

“그래. 부탁 좀 하자.”

도현이 외출한 뒤 서윤은 어머니에게 책에 사인을 받았다고 알렸다. 미숙은 고맙다며 도현이 바쁜데 수고했다고 전해 달라고 했다. 언제 가져다줄 수 있는지는 묻지 않아 서윤이 수요일에 들르겠다고 먼저 썼다.

그날 오후 채령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서윤은 자기 폴더에 모은 그림을 읽었다. 수도꼭지 앞에서 손을 멈춘 여자와 창틀에 앉은 새가 화면에 있었다. 새는 날아갔는데 여자가 언제 다시 설거지를 시작할지는 아직 그리지 않았다. 잠깐 멈춘 다음의 이야기를 더 붙일지, 여기서 끝낼지 망설여졌다.

누가 기다리는 원고도 아니니 하루 더 두어도 됐다. 서윤은 결말을 적는 대신 파일 옆에 작은 물음표를 붙였다.

저녁을 준비하려고 일어났을 때 도현이 자료를 보내왔다. 채령의 복귀작 소개서였다. 표지에는 『불이 남은 집』이라는 제목과 문채령의 이름이 선명했다.

서윤은 제목보다 색에 먼저 눈이 갔다. 짙은 보랏빛 골목에 주황색 불빛이 얇게 번져 있었다. 어둠을 검게 메우지 않고 여러 색으로 겹쳐 쓰는 방식은 예전 채령의 그림에서도 보았던 것이었다.

소개서에는 복귀 이유를 묻는 인터뷰와 짧은 미리보기가 붙어 있었다. 다음 장을 넘기자 불 켜진 세탁소 앞에 여자가 서 있었다. 여자는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려다가 돌아서고, 화면 아래쪽으로 빈 의자 하나가 보였다.

서윤은 처음으로 되돌아가 다시 넘겼다.

가게 앞을 지나는 자전거, 세탁소의 안쪽 벽, 여자가 등을 돌린 방향. 채색이 화려해서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다. 의자의 등받이를 가리고 선 여자의 팔이 눈에 들어오자 식탁 쪽으로 향하던 발이 멈췄다.

서윤은 화면을 확대했다. 앞머리도 옷도 달랐고, 가게의 창문도 더 컸다. 그런데 여자가 비켜선 뒤에도 의자는 반쯤 가려져 있었다.

그 자리를 가리려고 얼마나 오래 사람을 옮겨 그렸는지 기억났다.

서윤은 자료함 맨 위에 얹힌 상자를 내렸다. 상자 옆면에는 아직 결혼 전 집에서 쓰던 주소가 붙어 있었다.

대학 때 그린 세탁소가 그 안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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