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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화

Author: 유리구슬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6-13 10:59:46

금요일 저녁 7시.

서울 도심의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특급 호텔 '그랜드 앰배서더'의 최상층 한식당.

오늘 이곳의 VIP 프라이빗 룸에서는 서그룹과 대산건설, 두 거대 재벌가의 상견례가 예정되어 있었다.

지안은 약속 시간보다 30분 일찍 호텔에 도착했다.

단정한 화이트 실크 블라우스에 몸선을 우아하게 감싸는 H라인 블랙 스커트. 누가 봐도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하고 조신한 재벌가 예비 신부의 차림새였다.

하지만 거울에 비친 그녀의 눈동자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갑게 벼려져 있었다.

'강민우.'

전생의 오늘, 지안은 이 상견례 자리에서 강민우를 향해 수줍은 미소를 지었었다. 할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을 다정하게 챙겨주는 강민우가 진심으로 좋은 사람이라 믿었기에.

그 믿음의 대가는 처참한 배신과 죽음이었다.

"오늘이 네 제삿날이야."

지안은 화장실 거울 앞에서 붉은 립스틱을 덧바르며 낮게 읊조렸다.

바로 그때였다.

달칵-.

굳게 닫혀 있던 여자 화장실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지안이 흠칫 놀라 고개를 돌린 순간, 거대한 그림자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블랙 슈트를 짐승의 가죽처럼 빈틈없이 차려입은 남자. 차태경이었다.

"당신이 여길 어떻게……."

"내 아내가 될 여자가 딴 놈이랑 상견례를 한다는데. 남편 될 사람이 구경 정도는 와야 예의 아니겠어?"

태경이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띠며 다가왔다.

지안이 주위를 살필 겨를도 없이, 태경의 억센 손이 그녀의 허리를 휘감아 세면대 쪽으로 거칠게 밀어붙였다.

"읏……! 미쳤어요? 여긴……!"

"쉿."

태경의 크고 뜨거운 손바닥이 지안의 스커트 위를 스윽 훑어 내리더니, 슬릿 사이로 드러난 맨 허벅지 안쪽을 노골적으로 파고들었다.

차갑고 매끄러운 세면대 대리석과, 허벅지를 집요하게 문지르는 태경의 뜨거운 손가락. 극명한 온도의 대비에 지안의 입술 사이로 짧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하읏…… 차태경, 밖엔 사람들이……."

"그래서, 더 자극적이잖아."

태경의 낮고 긁는 듯한 목소리가 지안의 귓바퀴를 진득하게 핥았다.

그의 다른 한 손은 지안의 화이트 실크 블라우스의 단추를 가볍게 튕겨내듯 풀어헤쳤다. 하얗고 가녀린 쇄골이 드러나자, 태경은 망설임 없이 그곳에 입술을 묻었다.

쪽, 츕.

살갗을 강하게 빨아들이고 이빨로 살짝 깨무는 짐승 같은 애무.

"아……!"

지안의 허리가 반사적으로 활처럼 휘었다. 태경의 혀가 쇄골을 타고 올라와 목덜미를 진득하게 핥아 올리자, 그녀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 태경은 그런 지안을 제 단단한 허벅지로 지탱하며, 그녀의 귓가에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단정한 옷차림 밑에 이런 뜨거운 몸을 숨기고, 그 새끼 앞에서 조신한 척 웃어주려고?"

"이거 놔요…… 당장 들어가야, 하읍……!"

태경은 대답 대신 지안의 입술을 거칠게 집어삼켰다.

지난번 레지던스에서의 키스보다 훨씬 더 농밀하고 폭력적이었다. 그의 두꺼운 혀가 지안의 입안을 예고 없이 침범해 여린 점막을 구석구석 헤집고, 그녀의 혀를 옭아매어 거칠게 빨아들였다.

질척이는 타액 소리가 조용한 화장실 안을 음란하게 채웠다. 숨통을 조여오는 압도적인 키스에 지안은 몽롱해지는 정신을 다잡기 위해 태경의 어깨를 꽉 쥐었다.

허벅지 안쪽을 끈적하게 어루만지던 태경의 손이 위로 올라와, 얇은 블라우스 위로 지안의 봉긋한 가슴을 꽉 움켜쥐었다.

"흣……!"

엄지손가락으로 꼿꼿하게 선 돌기를 지그시 짓누르자, 지안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태경은 그 반응에 만족한 듯 입술을 떼고 낮게 으르렁거렸다.

"기억해."

그의 뜨거운 숨결이 지안의 젖은 입술 위로 흩어졌다.

"네 몸에 허락된 체온은 나 하나뿐이야. 그 잡종 새끼가 네 손끝 하나라도 건드리게 두면, 그땐 상견례장 문 부수고 들어가서 다 엎어버릴 테니까."

태경은 지안의 흐트러진 블라우스 깃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단정하게 여며주었다. 방금 전까지 짐승처럼 그녀를 탐하던 손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섬세한 동작이었다.

"도살 잘하고 와. 서지안."

태경이 지안의 붉게 부어오른 입술을 엄지로 부드럽게 훔쳐내고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문이 닫히고 홀로 남은 지안은 거울을 바라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목덜미에는 태경이 남긴 붉은 잇자국이 선명했다. 옷깃을 끝까지 올려 그것을 완벽하게 가린 지안의 입가에, 서늘하고도 요염한 미소가 번졌다.

"당연하지. 뼈도 안 남길 테니까."

지안은 완벽하게 이성을 되찾고, VIP 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오오, 서 회장님! 오셨습니까!"

프라이빗 룸의 문이 열리자마자, 대산건설의 강 회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리를 90도로 굽혔다.

테이블 상석에는 지안의 할아버지이자 서그룹의 총수인 서 회장이 무거운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 옆으로 지안이 단정한 걸음으로 다가가 자리에 착석했다.

맞은편에는 강 회장 부부와, 오늘의 또 다른 주인공 강민우가 앉아 있었다.

"지안아. 오늘 정말 예쁘다. 오면서 차는 안 막혔어?"

민우가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지안을 향해 다정하게 물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지안의 손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지안은 물 잔을 집어 드는 척하며 교묘하게 그의 손길을 피했다.

조금 전까지 태경의 짐승 같은 열기에 휩싸였던 피부에, 민우의 축축하고 위선적인 손이 닿는 것조차 소름 끼치도록 역겨웠다.

"네. 괜찮았어요."

지안의 건조한 대답에 민우의 손이 허공에서 뻘쭘하게 멈췄다. 하지만 그는 이내 표정을 관리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손을 거두었다.

상견례의 분위기는 겉보기엔 화기애애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대산건설 쪽에서 서 회장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필사적으로 아양을 떠는 자리에 가까웠다.

"저희 민우가 지안 양을 얼마나 끔찍이 아끼는지 모릅니다. 집에서도 맨날 지안 양 이야기뿐이라니까요."

강 회장의 아내가 과장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서그룹과 저희 대산건설이 사돈의 연을 맺게 되면, 다가오는 영종도 신도시 개발 건에서도 엄청난 시너지가 날 겁니다! 하하하!"

강 회장은 벌써부터 서그룹의 자본을 제 것인 양 떠벌리며 샴페인 잔을 치켜들었다.

서 회장은 그들의 노골적인 탐욕에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사랑하는 손녀가 선택한 남자이기에 애써 점잖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코스 요리가 차례대로 서빙되고, 메인 요리인 한우 안심구이가 테이블에 올려질 무렵이었다.

"그래서 말입니다, 서 회장님. 아이들 결혼식은 올가을쯤으로 잡는 게 어떨지……."

"결혼식 날짜를 잡기 전에."

강 회장의 말을 자르고 들어온 것은 지안이었다.

은쟁반 위로 젓가락을 내려놓는 소리가 '탁' 하고 맑게 울려 퍼졌다.

순간, 룸 안의 모든 시선이 지안에게로 향했다.

지안은 냅킨으로 입가를 가볍게 닦아낸 뒤, 맞은편에 앉은 민우를 똑바로 응시했다. 서늘하고 깊은, 심연 같은 눈동자.

"오빠랑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어? 나랑? 지안아, 무슨 이야기인데 상견례 자리에서……."

민우가 당황한 듯 멋쩍게 웃으며 물었다.

"마카오, 타히티 호텔. 잊지 않았죠?"

지안의 입에서 튀어나온 뜬금없는 지명에 민우의 미소가 미세하게 굳어졌다.

"작년 11월이었지? 오빠가 대산건설 하청업체들 결제 대금 밀린 거 핑계로, 해외 시찰 다녀오겠다고 출국했던 날."

"지, 지안아.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그때 싱가포르에 설립한 페이퍼 컴퍼니. 이름이 '블루 호라이즌'이었나?"

쨍그랑-!

민우의 손에 들려 있던 와인잔이 테이블 위로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붉은 와인이 하얀 테이블보를 핏자국처럼 적셔 들어갔다.

민우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너,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블루 호라이즌 명의로 싱가포르 개발 은행에 개설된 차명 계좌. 그쪽으로 대산건설 자금 150억이 세탁돼서 들어간 거, 아버님은 아시나요?"

지안이 강 회장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차갑게 물었다.

강 회장의 눈이 터질 듯이 커졌다.

"1, 150억? 비자금? 민우야, 이게 대체 무슨 개소리냐!"

"아, 아버지! 아닙니다! 지안이가 뭔가 단단히 오해를 한 모양인데……!"

민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손을 내저었다.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있었다.

지안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등받이에 기대어 팔짱을 꼈다. 전생의 기억은 너무나 선명했다. 강민우는 저 150억을 빼돌려 유라와 함께 도망칠 자금을 마련했고, 그 죗값을 서그룹과 할아버지에게 뒤집어씌웠었다.

"오해? 대산건설 재무팀 박 상무가 오빠 지시로 장부 조작한 내역. 그리고 그 돈이 홍콩을 거쳐 싱가포르로 넘어간 자금 흐름표. 내가 지금 당장 할아버지 비서실장님 통해서 여기로 팩스 넣어줄까?"

"서, 서지안……!"

"아, 그것만 있으면 섭섭하지. 그 150억 중 일부가 청담동 최고급 오피스텔 매입에 쓰였던데. 명의자가 '강유라'. 오빠 회사 디자인 팀장이자…… 내 대학 동기."

유라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민우의 다리가 완전히 풀려버렸다. 그가 털썩 소리를 내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오빠가 나한테 거짓말하고 밤마다 그 오피스텔 들락거린 CCTV 화면도 필요해? 150억 횡령에, 배임, 그리고 더러운 양다리까지. 오해라는 단어로 덮기엔 너무 추악하지 않아?"

프라이빗 룸 안은 폭탄이 터진 것처럼 고요해졌다.

강 회장 부부는 충격에 빠져 입만 뻐끔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안의 곁에 앉아 있던 서 회장의 안색이 무섭도록 차갑게 가라앉았다. 산전수전 다 겪은 재계의 거목이 손녀의 말에서 한 치의 거짓도 없음을 직감한 것이다.

"강 회장."

서 회장의 묵직한 목소리가 방 안을 짓눌렀다.

"이게 사실입니까?"

"서, 서 회장님! 모, 모함입니다! 우리 민우가 그럴 리가 없습니다! 지안 양이 뭔가 질 나쁜 찌라시를 보고……!"

"할아버지."

지안이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서 회장을 불렀다.

"제가 아무 증거도 없이 상견례 자리에서 이런 말을 꺼냈을 리 없잖아요. 뒷조사는 이미 완벽하게 끝냈습니다. 내일 아침, 저들이 빼돌린 자금 내역서가 대산건설 감사팀과 검찰 조사실로 동시에 들어갈 거예요."

"지, 지안아! 제발!"

민우가 테이블을 짚고 기어오듯 지안을 향해 매달렸다. 다정했던 가면은 온데간데없고, 벼랑 끝에 몰린 비루한 쥐새끼의 얼굴을 한 채였다.

"내가 잘못했어! 그 돈, 회사 살리려고 어쩔 수 없이 융통한 거야! 유라, 유라는 그냥…… 잠깐 스쳐 가는 실수였어! 네가 내 전부라는 거 알잖아! 어?"

민우가 지안의 손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짝-!

지안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민우의 뺨을 세차게 내리쳤다.

고개가 돌아간 민우가 얼빠진 표정으로 지안을 쳐다보았다.

"내 몸에 그 더러운 손 대지 마."

지안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쓰레기를 내려다보는 듯 철저한 경멸로 가득 차 있었다.

"서그룹은 범죄자와, 그리고 짐승만도 못한 쓰레기 집안과 엮일 생각이 없습니다."

지안이 강 회장 부부를 향해 분명하게 선고했다.

"이 혼담은, 오늘부로 완벽하게 파혼입니다."

"서, 서 본부장! 이러지 말고 우리 대화로……!"

강 회장이 다급하게 일어났지만, 서 회장이 그보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 회장의 눈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대화는 검찰청에 가서 조사관들하고 나누시지. 감히 내 귀한 손녀를 능멸하려 들어? 대산건설, 내일부터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서 회장은 지팡이를 거칠게 바닥에 짚고 룸을 나섰다.

지안은 바닥에 주저앉아 덜덜 떠는 민우를 마지막으로 내려다보았다.

"기대해, 강민우. 이건 네가 겪게 될 지옥의 아주 작은 예고편에 불과하니까."

지안은 핸드백을 챙겨 들고 미련 없이 프라이빗 룸을 빠져나왔다.

뒤통수 너머로 강 회장이 민우의 뺨을 때리며 쌍욕을 퍼붓는 소리와, 물건들이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복도를 걸어 나오는 지안의 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첫 번째 사냥이 끝났다.

그리고, 완벽하게 성공했다.

지안은 호텔 로비를 빠져나오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목덜미에 남은 태경의 잇자국이, 마치 악마와 맺은 맹세의 낙인처럼 선명하게 열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제, 시작이야."

서지안의 복수, 그리고 차태경과의 진짜 동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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