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0시.
여의도에 위치한 TK 화학 본사 꼭대기 층.
지안은 회장실의 푹신한 가죽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맞은편에는 백발이 성성한 TK 화학의 수장, 최석훈 회장이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서그룹 부회장도 아니고, 이제 갓 본부장 타이틀 단 어린애가 겁도 없이 내 집무실을 쳐들어와?"
최 회장이 들고 있던 찻잔을 테이블 위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서 회장이 손녀딸 교육을 어떻게 시켰는지 모르겠지만, 어른 대하는 예의부터 다시 배우고 오라고 전해. 내 금쪽같은 시간을 이렇게 빼앗다니."
재계에서 지독한 짠돌이이자 꼬장꼬장한 원칙주의자로 소문난 영감이었다.
하지만 지안은 그의 호통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오히려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테이블 위에 올려둔 태블릿 PC의 화면을 켰다.
"어른 대접은, 어른다운 분에게만 하는 게 제 원칙이라서요."
"뭐? 이 건방진 놈의 기집애가!"
"최 회장님. 고혈압 있으신데 진정하시죠. 제가 오늘 가져온 이야기는 혈압약으로도 커버가 안 될 텐데, 벌써부터 쓰러지시면 곤란하거든요."
지안의 오만한 태도에 최 회장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비서실장을 부르기 위해 인터폰으로 손을 뻗으려던 찰나, 지안의 차가운 목소리가 회장실의 공기를 갈랐다.
"마카오 타히티 호텔 스위트룸. 그리고 조세도피처인 버진아일랜드에 세워진 페이퍼 컴퍼니 '블랙 펄(Black Pearl)'."
허공을 맴돌던 최 회장의 손이 뚝 멈췄다.
그의 탁한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너, 너 지금 무슨 헛소리를."
"헛소리인지 아닌지는 회장님이 더 잘 아시겠죠. 평생을 청렴결백한 기업인 코스프레로 살아오셨지만, 뒤로는 회삿돈 수백억을 빼돌려 마카오 VIP 룸에서 바카라로 탕진하시지 않았습니까?"
"입 닥쳐! 어디서 그딴 시라소니 같은 소문을 듣고 와서 협박질이야!"
"소문이 아니라 팩트입니다. 회장님."
지안이 태블릿 PC를 최 회장 앞으로 스윽 밀어주었다.
화면에는 블랙 펄 명의로 개설된 홍콩 HSBC 은행의 계좌 내역, 그리고 최 회장이 마카오 카지노 정킷방에서 찍힌 선명한 사진들이 차례로 띄워져 있었다.
전생의 기억이었다.
정확히 1년 뒤, 최석훈 회장은 이 도박 자금 횡령 건과 숨겨진 사생아에게 회삿돈을 불법 증여한 사실이 내부 고발자에 의해 터지면서 철창신세를 지게 된다. 지안은 그 고발자가 누구인지, 증거 자료가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어젯밤, 지안은 심부름센터를 동원해 그 증거의 복사본을 미리 손에 넣었다. 차태경이 내린 미션을 완벽하게 부수기 위한 가장 치명적인 무기였다.
"HSBC 홍콩 지점. 계좌번호 끝자리 7701. 지난달 15일에도 이곳으로 회사 공금 50억이 세탁되어 넘어갔더군요. 아, 그리고 서초동 고급 빌라에 숨겨둔 회장님의 어린 내연녀와 그 아들에게 넘어간 건물 두 채의 자금 출처도 아주 흥미롭던데요."
"이, 이…… 독사 같은……!"
최 회장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져 내렸다. 평생을 쌓아온 철옹성 같은 명예가 눈앞의 20대 계집애의 세 치 혀에 의해 산산조각 나고 있었다.
"이 자료가 검찰청 금융조사부나 내일 아침 조간신문 1면에 뿌려진다고 생각해 보세요. TK 화학 주가는 반토막이 날 거고, 회장님은 남은 여생을 차가운 감방에서 보내셔야겠죠. 그 잘난 원칙주의자 타이틀은 전국적인 조롱거리가 될 테고요."
지안이 핸드백에서 검은색 서류 봉투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차태경이 건네주었던 바로 그 땅의 양도 계약서였다.
"선택하세요."
지안이 서류를 최 회장 앞으로 내밀며 차갑게 선고했다.
"에이펙스의 차태경 이사에게 명동 4구역 땅을 넘기세요. 가격은 현재 공시지가 그대로. 단 1원도 더 얹어줄 수 없습니다."
"……뭐라고? 그 더러운 사생아 새끼한테 내 피 같은 땅을 공짜나 다름없이 넘기라고?!"
"피 같은 땅 잃기 싫으면, 회장님 피가 말라 죽는 꼴을 보시든가요."
지안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시간 없습니다. 3초 드릴게요. 3."
"서, 서 본부장! 잠깐만!"
"2."
"알았어! 알았다고! 찍어! 도장 찍을 테니까 그 입 다물어!"
결국 최 회장이 서랍을 거칠게 열고 인감도장을 꺼냈다.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손으로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그의 모습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오만했던 재계의 늙은 호랑이는 완벽하게 지안의 발밑에 엎드렸다.
지안은 도장이 선명하게 찍힌 계약서를 여유롭게 챙겨 들었다.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비밀은 무덤까지 가져가 드리죠. 아, 그리고 도박은 이쯤에서 끊으세요. 손목 날아가기 전에."
지안은 얼빠진 최 회장을 뒤로하고 미련 없이 회장실을 나섰다.
완벽한 사냥이었다.
수요일 오전 11시 30분.
기한으로 정해둔 정오를 불과 30분 남겨둔 시각.
청담동 최고급 레지던스 펜트하우스.
차태경의 개인 프라이빗 공간이었다.
탁 트인 통유리창 너머로 한강의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거대한 거실.
태경은 방금 샤워를 마친 듯,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바 카운터에 기대어 있었다. 헐렁하게 걸친 블랙 실크 가운 사이로 탄탄하게 갈라진 가슴 근육과 선명한 타투가 아슬아슬하게 드러났다.
그의 시선은 벽에 걸린 아날로그시계를 향해 있었다.
'안 오려나 보군.'
태경이 실소하며 위스키 잔을 집어 들려는 찰나였다.
띠리릭-.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육중한 현관문이 열렸다.
태경의 눈동자가 흥미롭게 반짝였다.
거침없는 구두 굽 소리가 넓은 대리석 바닥을 울리며 다가왔다. 몸에 핏되는 다크 네이비 슈트를 입은 지안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승리자의 오만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보안이 꽤 허술하네요. 에이펙스 실세의 집 치고는."
지안이 거실 한가운데에 멈춰 서며 툭 내뱉었다.
"아랫사람한테 미리 올려보내라고 지시해 뒀으니까. 설마 진짜로 올 줄은 몰랐거든."
태경이 위스키 잔을 내려놓고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래서. 결과물은?"
지안은 대답 대신 들고 있던 서류 봉투를 거실 중앙의 대리석 테이블 위로 가볍게 던졌다.
사락.
봉투 밖으로 삐져나온 서류 끝자락에, 붉은색 인주가 선명하게 찍힌 것이 보였다.
태경의 걸음이 멈칫했다.
그가 테이블로 다가가 서류를 꺼내 들었다.
[부동산 양도 계약서]
매도인: 최석훈.
매매 대금: 시세 동일. 단 1원의 프리미엄 없음.
서류를 읽어 내려가는 태경의 서늘한 눈매가 미세하게 경련했다. 아무리 그라도 이번만큼은 진심으로 경악한 눈치였다.
절대 불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그 독종 영감탱이를, 단 3일 만에, 그것도 돈 한 푼 안 들이고 굴복시켰다니.
"……어떻게 한 거지?"
태경이 계약서에서 눈을 떼지 않고 낮게 으르렁거렸다.
"사냥꾼이 사냥감에게 덫의 구조를 설명할 의무는 없잖아요? 결과물을 가져왔으니, 이제 당신이 약속을 지킬 차례라는 것만 아시면 됩니다."
지안이 팔짱을 끼며 여유롭게 턱을 치켜들었다.
"확인 끝났으면, 이틀 전 그 서류 가져와요. 내 혼인 계약서."
태경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지안을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지안의 발끝에서부터 매끄러운 다리 선을 타고 올라와, 오만한 눈동자에 닿았다. 평소의 서늘했던 눈빛과는 달랐다.
사냥감을 발견한 맹수의 눈빛. 지독한 소유욕과 원초적인 흥미가 뒤엉킨, 지극히 수컷다운 시선이었다.
탁.
태경이 계약서를 테이블 위에 거칠게 던졌다.
그리고 순식간에 지안의 앞으로 다가왔다. 큰 보폭으로 단 두 걸음. 숨결이 닿을 만큼 거리가 좁혀졌다.
"서지안."
태경의 낮고 긁는 듯한 목소리가 지안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네가 방금 무슨 짓을 했는지, 넌 몰라."
지안이 한 걸음 물러서려 했지만, 태경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강하게 낚아챘다.
"읏……!"
지안의 몸이 태경의 단단한 가슴에 속절없이 밀착되었다.
그의 가운 사이로 드러난 뜨거운 맨살의 온기가 지안의 얇은 블라우스 너머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짙은 스킨 향과 쌉싸름한 시가 냄새, 그리고 샤워 직후의 젖은 수기가 뒤섞여 지안의 폐부를 어지럽게 채웠다.
"이거 놔요."
지안이 매섭게 쏘아붙이며 그의 가슴을 밀어냈지만, 태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안의 허리를 감싼 손에 힘을 더 주어, 두 사람의 하반신이 빈틈없이 맞닿게 만들었다.
"나라는 미친개를 네 목줄에 채우겠다고 찾아왔을 때부터, 이런 상황 정도는 각오했어야지."
태경의 반대쪽 손이 지안의 턱을 부드럽지만 억센 힘으로 틀어쥐었다.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붉은 아랫입술을 지긋이 짓누르며, 그가 나른하게 속삭였다.
"계약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야. 네가 원하는 대로 완벽한 서그룹의 사위이자, 강민우를 물어뜯을 사냥개가 되어주지."
태경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지안의 입술 위로 노골적으로 흩어졌다.
"그런데, 서지안. 넌 나한테 뭘 줄 건데?"
"……나는 당신에게 완벽한 명분을 줬……."
"그딴 비즈니스적인 개소리 말고."
태경의 눈동자가 짙은 정욕으로 일렁였다.
"쇼윈도 부부? 서로의 사생활에 간섭하지 않는다? 웃기지 마. 내 구역에 발을 들인 이상, 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철저하게 내 통제 아래에 있어야 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태경의 입술이 지안의 입술을 거칠게 집어삼켰다.
"읍……!"
지안의 눈이 커졌다.
단순한 위협이나 장난이 아니었다. 상대를 완전히 포식하려는 듯한 맹렬하고 폭력적인 키스였다. 태경의 혀가 지안의 다물린 입술을 비집고 들어와 여린 점막을 헤집었다.
숨이 막힐 듯한 농밀한 압박.
지안은 반사적으로 주먹을 쥐고 그의 어깨를 내리쳤지만, 태경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벽 쪽으로 강하게 밀어붙였다.
쾅-!
지안의 등이 차가운 대리석 벽에 닿음과 동시에, 태경의 두터운 허벅지가 지안의 두 다리 사이를 파고들어 퇴로를 완벽하게 차단했다.
그의 뜨겁고 단단한 열기가 지안의 가장 은밀한 곳을 압박해 왔다.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낯설고 아찔한 감각.
지안은 전생에서도 강민우와 이토록 노골적이고 짐승 같은 스킨십을 해본 적이 없었다. 태경의 키스는 이성적인 판단을 마비시킬 만큼 압도적이었다.
'이대로 잡아먹힐 수는 없어.'
지안은 몽롱해지는 정신을 다잡고, 오히려 태경의 목에 양팔을 감았다. 피하지 않겠다는 도발이었다. 그녀는 태경의 혀가 얽혀오는 타이밍에 맞춰, 그의 아랫입술을 날카롭게 깨물었다.
"큭."
비릿한 피 맛이 두 사람의 혀끝에 맴돌았다.
태경이 짧은 신음을 내며 입술을 뗐다. 그의 입술 한구석에서 붉은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팽팽하게 얽혔다.
지안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젖은 입술을 엄지로 닦아냈다. 그녀의 눈빛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오만했다.
"키스치고는 꽤 난폭하네요. 차태경 이사님."
지안이 도발적으로 웃으며 태경의 가슴에 묻은 핏자국을 손가락으로 툭툭 털어냈다.
"착각하지 마요. 내가 당신을 선택한 건, 당신이 내 밑에서 쓸 만한 사냥개이기 때문이지, 내가 당신 먹잇감이 되려고 온 게 아니니까."
태경은 입술에 고인 피를 혀로 핥아 올리며 낮게 웃었다.
분노가 아니라, 뼛속까지 짜릿해지는 극도의 흥분이었다.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 고양이. 아니, 자신과 동류인 지독한 맹수.
이 여자는 평생을 곁에 두고 씹어 먹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마음에 들어."
태경이 지안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이고 낮게 속삭였다.
"네 그 건방진 혀도, 날카로운 발톱도. 모조리 다 내 침대 위에서 꺾어버리고 싶을 만큼."
태경이 지안의 허리를 한 번 더 강하게 끌어당겨 자신의 은밀한 열기를 고스란히 느끼게 한 뒤, 천천히 그녀를 놓아주었다.
허공에 맴돌던 지독한 긴장감이 그제야 조금씩 흩어졌다. 지안은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애써 태연한 척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태경이 책상 서랍을 열고, 지안이 이틀 전에 주고 갔던 혼인 계약서를 꺼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서류의 맨 뒷장에 자신의 거친 필체로 서명을 갈겨썼다.
[차태경]
서명이 끝난 계약서가 다시 지안의 손에 쥐어졌다.
"약속대로, 서류에는 도장 찍었어."
태경이 가운의 끈을 느슨하게 다시 묶으며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앉았다.
"이번 주 금요일. 서그룹과 강민우 네 집안의 공식 상견례 자리라고 했지?"
"네. 그곳에서 강민우의 숨통을 완벽하게 끊어놓을 겁니다."
지안이 계약서를 핸드백에 집어넣으며 차갑게 대답했다.
"재밌겠네. 내 여자가 될 사람이 전 약혼자 새끼를 어떻게 도살하는지, 구경이나 가볼까."
"방해만 하지 마세요. 내 방식대로 철저하게 부숴버릴 테니까."
지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현관을 향해 걸어갔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순간까지, 태경의 맹렬하고 끈적한 시선이 지안의 등 뒤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지안은 닫히는 문을 보며, 그제야 꾹 참고 있던 숨을 깊게 토해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입술에는 여전히 태경의 체온과 거친 숨결이 생생하게 남아 화끈거렸다.
'미친개인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가장 위험하고도 완벽한 무기를 손에 쥐었으니까.
"기다려, 강민우. 유라야."
지안의 서늘한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지옥에서 돌아온 악귀의 본격적인 복수가, 이제 막 그 화려한 막을 올리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