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10화

Author: 금붕어
주민혁의 섬뜩한 기운을 느낀 주예린은 저도 모르게 겁을 먹고 움츠러들어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고마워요. 아저씨...”

주예린은 속상한 마음에 눈시울이 빨개졌지만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주예린은 아빠가 자신을 받아주려는 건 줄 알았다.

최수빈은 조금 전 상황에 깜짝 놀랐다. 주예린은 그녀의 반대 방향으로 넘어졌고 주예린을 받아주고 싶었으나 거리가 멀어서 그러지 못했다.

그래도 다행히 주예린은 다치지 않았다.

최수빈은 주예린을 주민혁의 품에서 건네받은 뒤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예린이 많이 놀랐지? 다치지는 않았어?”

주예린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말을 하면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옆에 있던 주시후는 그 모습을 보자 불쾌해졌다.

최수빈은 오랫동안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그를 안아주지도 않았다.

주시후는 어쩐지 엄마가 조금 보고 싶었다.

게다가 조금 전 최수빈이 그에게 너는 엄마가 없다고 했을 때 주시후는 살짝 슬펐다.

그러나 엄마가 없으면 하린 이모가 옆에 있어 줄 테니 그걸 생각하면 손해는 아닌 것 같았다.

어차피 엄마가 그를 진짜로 버리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조금 전에 한 말도 다 홧김에 한 말일 것이다.

최수빈은 주민혁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주예린을 안고 떠나려고 했고, 주민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최수빈의 태도가 예전과 많이 달라졌으니 아무리 주민혁이라고 해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최수빈은 대체 언제까지 심술을 부릴 생각인 걸까?

“아이도 감사하다고 할 줄 아는데 최수빈 너는 왜 아무 말도 안 해?”

최수빈은 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돌리며 차갑게 웃어 보였다.

“주민혁 씨가 예린이한테 빚진 거 이딴 걸로는 절대 못 갚아요.”

말을 마친 뒤 최수빈은 주민혁의 표정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주예린을 안고 떠났다.

주민혁은 최수빈이 왜 그런 말을 하는 것인지 알지 못했기에 미간을 찌푸리면서 차가운 분위기를 내뿜었다.

그의 착각이 아니라면 조금 전 최수빈의 눈동자에서 보였던 것은 증오였다.

진승우는 옆에서 코웃음을 쳤다.

“예전에는 형 앞에서 잘 보이려고 그렇게 애를 쓰더니 왜 갑자기 저렇게 차갑게 군대요? 설마 밀당하는 걸까요?”

주민혁은 얼굴을 찡그리면서 진승우가 말한 밀당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았다.

어쩌면 정말로 그런 걸지도 몰랐다.

그래야 모든 것이 설명되었다.

...

전시회가 끝난 뒤 최수빈은 주예린을 데리고 선생님과 함께 식사하러 가는 길에 송미연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받자마자 송미연이 불같이 화를 냈다.

“수빈아, 너 실시간 검색어 봤어?”

송미연은 최수빈의 소꿉친구였다. 송미연이 화를 내자 최수빈은 웃으며 말했다.

“실시간 검색어? 혹시 네가 좋아하는 연예인이 사고라도 쳤어?”

“지금 그런 농담을 할 때야? 네 남편 바람피웠어!”

송미연은 이를 악물었다.

“너 지금 어디야? 내가 지금 당장 너랑 같이 가서 그 빌어먹을 자식을 죽여버리겠어!”

최수빈은 흠칫한 뒤 고개를 숙여 실시간 검색어를 확인해 보았다. 대부분이 항공전과 관련된 검색어였고 사람들은 하나같이 우리나라의 국력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그사이에 조금 다른 내용의 검색어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주민혁이 가족들과 함께 항공전을 보러 왔다는 내용이었다.

최수빈은 그걸 본 순간 기분이 언짢아졌다.

사진 속에는 주민혁과 박하린, 주시후가 다정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행복한 가족 같아 보였다.

최수빈은 그들이 단순한 친구 사이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고 사진까지 찍힌 걸 보니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그동안 최수빈은 한심하게도 그들을 위해 남의 자식을 5년 동안 키웠다.

그녀는 주시후를 친아들처럼 키웠지만 주시후는 친모가 돌아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박하린을 최고라고 여겼다.

박하린이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최수빈은 평생 주시후가 자신을 그렇게 싫어했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지난 생에 이때쯤 주시후가 항상 그녀를 차갑게 대하고 그녀에게 화를 낸 이유가 있었다.

5년간 주시후에게 애정을 쏟아부었건만 결국 헛수고였다.

최수빈은 차분히 말했다.

“전시회에서 만났어.”

“그런데 왜 이렇게 덤덤한 거야?”

송미연이 말했다.

“너무 화가 나서 미친 건 아니지?”

“미연아.”

최수빈이 말했다.

“나 이혼할 거야.”

“이혼?”

송미연은 당황했다. 그녀는 최수빈이 이런 결정을 내릴 줄은 몰랐다.

그녀는 최수빈이 주민혁을 얼마나 많이 사랑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최수빈이 갑자기 이혼을 결심했다는 건 아주 큰 상처를 받았다는 걸 의미했다.

“그 사람이 또 너한테 상처 준 거지?”

송미연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그런 거라면 내가 절대 가만 안 둘 거야. 이혼한다고 해서 그냥 넘어갈 수는 없어! 꼭 복수해야지.”

최수빈은 시선을 내려뜨렸다. 그녀는 송미연이 자신을 아껴서 그런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최수빈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런 건 아니야. 그냥 이제는 좀 정신을 차려야 할 것 같아서.”

송미연은 그 말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진짜야? 혹시 무슨 일 생기면 나한테 얘기해.”

“걱정하지 마. 무슨 일 생기면 꼭 너한테 얘기해서 네게 짐이 될 테니까.”

“그 사람이랑 일찌감치 이혼해야 했어. 그래도 이제라도 이혼한다니까 정말 다행이다.”

송미연은 끝없이 재잘댔고 최수빈은 그녀의 잔소리를 들으면서 엷은 미소를 지었다.

푸른 하늘 아래 딸의 손을 잡고 길을 거닐며 친한 친구의 잔소리를 들으니 행복했다.

행복이란 이토록 단순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난 생에는 주민혁에게만 신경을 쓰다 보니 이런 사소한 행복들을 전부 놓치고 말았다.

...

송미연과의 통화를 끝낸 뒤 최수빈은 육민성이 얘기한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그들은 프라이빗 룸을 예약했고 최수빈은 일찍 도착해서 그들을 기다렸다.

그녀가 잠시 뒤 어떻게 선생님을 마주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며 한재준과 육민성이 함께 들어왔다.

최수빈은 주예린을 데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생님.”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 사이 한재준은 많이 늙어서 흰머리가 많았다.

한재준은 대꾸하지 않았고 최수빈은 마음이 아파서 심호흡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한재준을 선생님이라고 부를 자격이 없었다.

커리어를 포기하고 결혼을 선택했을 때 그녀는 이미 그 자격을 박탈당했다.

최수빈은 입술을 깨물며 주예린을 향해 말했다.

“예린아, 할아버지한테 인사해야지.”

주예린은 순한 얼굴로 예의 바르게 말했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주예린은 목소리가 앳되고 귀여웠으며 웃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한재준은 주예린을 보는 순간 곧바로 미소를 지으며 주예린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최수빈을 바라보며 말했다.

“참 귀여운 딸을 낳았네.”

주예린은 주민혁과 최수빈의 유전자를 물려받아 얼굴이 인형처럼 귀엽고 예쁘장했다.

육민성이 입을 열었다.

“선생님, 앉아서 식사하시죠.”

육민성이 중간에서 노력하지 않았더라면 최수빈은 어떻게 한재준을 마주해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

한재준이 배은망덕한 그녀와 함께 식사를 해주는 것만으로도 최수빈에게는 크나큰 영광이었다.

그녀는 한재준이 자신을 평생 보지 않을 줄 알았다.

“시간이 참 빠르죠. 수빈이 예전에는 진짜 철없고 장난기도 많아서 매일 저랑 먹는 거로 다퉜잖아요. 그런데 이젠 이렇게 큰 딸까지 뒀어요.”

육민성은 과거를 회상했다. 그는 최수빈이 커리어를 포기했던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한재준은 차가운 표정으로 코웃음을 쳤다.

“겨우 남자 하나 때문에 뭐든 다 포기하려고 했으니 얼마나 어리석어.”

주예린이 있었기 때문에 한재준은 차마 심한 말을 하지 못했다.

최수빈은 딸을 보며 말했다.

“예린아, 할아버지와 아저씨를 위해서 여기 직원분께 우롱차를 가져다 달라고 해줄래? 그리고 예린이가 마시고 싶은 음료수도 가져오도록 해.”

“네.”

주예린은 그렇게 대답한 뒤 콩콩 뛰어서 밖으로 나갔다.

주예린이 떠난 뒤 한재준이 말했다.

“민성이가 그러더라. 너 곧 이혼할 거라고. 우리 업계에서 일하고 싶은 거니?”

“네.”

주예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당시에 석박사 통합 과정을 포기해서 지금은 일자리를 찾는 게 쉽지 않아요.”

지금은 학벌이 중요한 시대였다. 그녀가 주상 그룹에서 일한 적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건 도움이 되지 않았다.

“네가 넣은 이력서 봤어. 우리 연구원 기준엔 미달이야.”

최수빈은 거절당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 용서해달라고 할 낯짝도 없었다.

육민성은 분위기가 좋지 않자 곧바로 입을 열어 분위기를 풀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건데 그런 얘기는 접고 식사에 집중하죠.”

...

다른 한편, 주예린은 직원에게 차를 부탁한 뒤 냉장고 앞에 서서 음료수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 마침 주민혁 일행이 안으로 들어오며 주예린을 발견했다.

진승우는 주예린을 보더니 혀를 찼다.

“정말 징글징글하네. 밥 먹는 데까지 따라와? 아무리 우연인 척하고 싶어도 정도라는 게 있지. 어쩌면 이렇게 뻔뻔할까?”

주예린은 냉장고 안에 단 한 병 남은 음료수를 발견했고, 아주 맛있어 보여서 냉장고 문을 열어 그 음료수를 꺼내려고 했다.

그런데 이때 누군가 먼저 선수를 쳤다.

“잘됐다! 나 이거 좋아하는데!”

주시후는 주예린을 향해 으스대며 말했다.

“나 대신 냉장고 문 열어줘서 고마워.”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Comments (1)
goodnovel comment avatar
최복선
너무너무 잘잃고 있습니다감사합니다
VIEW ALL COMMENTS

Latest chapter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1855화

    (번외)모든 소동이 완전히 가라앉은 뒤, 도시도 서서히 평소의 일상을 되찾았다.강지안은 다시 자신의 심리상담실로 돌아왔다.늘 긴장과 위험이 따라다니던 외부 임무는 모두 정리하고 이제는 평범한 심리상담사로서의 삶에 집중하기로 한 것이다.상담실은 크지 않았지만 햇볕이 잘 들었다. 매일 정해진 내담자들을 만나고, 시간이 되면 퇴근하고, 제때 쉬었다.하루하루가 놀랄 만큼 평온하게 흘러갔다.심종연 때문에 엉망이 되었던 기억도, 그가 감옥에 들어가고 로라까지 죗값을 치르게 되면서 조금씩 마음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다.한때 강지안은 누군가의 손에 휘둘리는 말에 불과했다.약물에 당하고, 기억을 잃도록 조작당했으며, 주변 사람들은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졌으니 말이다.그런 와중에도 장성훈만은 달랐다.처음에는 그저 그녀를 지키는 경호원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둘 사이에는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감정이 끼어들었다.그러면서도 서로를 밀어내고, 거절하고, 다시 흔들리기를 반복한 끝에 결국 어색한 사이로만 남았다.사람들은 대부분 장성훈이 장씨 가문에서 강지안을 위해 붙여 준 전담 경호원이라고 알고 있었다.그녀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하지만 두 사람만은 알고 있었다. 경호원과 아가씨라는 관계 안에 이미 오래전부터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는 것을.그 감정은 몇 번이고 밀려나고 거절당했으며, 서로 당기고 밀기를 반복하다 끝내 애매한 거리만 남겨 놓았다.강지안이 일상으로 돌아온 지 석 달째가 되었을 때도 장성훈은 이 도시를 떠나지 않았다.예전처럼 상담실 문 앞을 하루 종일 지키지도 않았고, 그녀의 일정을 자기 마음대로 간섭하는 일도 없이 그저 아주 조용한 방식으로 곁을 지켰다.아침에 강지안이 집을 나서면 가끔 길모퉁이에 세워진 그의 차가 보였다.너무 가까이 다가오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멀어지지도 않은 채 뒤를 따라오다가 그녀가 무사히 병원에 도착한 것을 확인하면 조용히 사라졌다.밤에 퇴근해 건물 밖으로 나오면 길가에 세워진 차 안으로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1854화

    결혼식 당일, 모든 일정은 이른 새벽부터 시작됐다.새벽 다섯 시가 되자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신부 대기실로 찾아와 최수빈의 단장을 시작했다.주민혁이 미리 준비해 둔 전통 혼례복과 화려한 머리 장식, 정교한 베일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그가 직접 디자인한 웨딩드레스가 걸려 있었다.송미연은 그런 최수빈을 바라보다 미소 지으며 말했다.“고생 끝에 드디어 좋은 날이 왔네.”최수빈은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봤다. 언젠가 자신에게도 이런 날이 올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그렇다. 정말 고생 끝에 찾아온 행복이었다.어쩌면 여기까지 오는 모든 과정이 결국 오늘을 위한 것이었는지도 몰랐다.정해진 시간이 되자 신랑 측 행렬이 도착했다.흥겨운 음악이 울려 퍼졌고 규모가 컸지만 지나치게 요란하지는 않았다.반듯한 검은색 예복 차림의 주민혁은 꼿꼿하게 선 모습과 달리 최수빈을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한없이 부드러웠다.하객 입장부터 개식 선언, 화촉 점화까지 결혼식 순서가 하나씩 차분하게 이어졌다.어느 하나 허투루 넘기는 법이 없었다.마침내 본식이 시작되자 최수빈은 집안 어른의 팔을 잡고 꽃잎이 흩뿌려진 붉은 길 위를 천천히 걸었다.주민혁은 예식대 한가운데 서서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눈빛에는 감출 생각조차 없는 애정이 가득했다.양가 어른께 절을 한 뒤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맞절했다.마지막으로 합환주까지 나눠 마시자 결혼식이 끝났음을 알리는 우렁찬 박수가 하객석을 가득 채웠다.두 아이는 꽃다발을 품에 안고 예식대로 올라와 부모의 양옆에 섰다.네 식구가 나란히 선 모습은 그날 가장 따뜻하고 아름다운 장면이었다.피로연장에서는 친척과 친구들이 연이어 잔을 들며 두 사람의 앞날을 축복했고 곳곳에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과거 함께 위험을 헤쳐 왔던 동료들도 빠짐없이 자리를 지켰다.송미연 역시 하객석에 조용히 앉아 행복해 보이는 네 식구를 바라보며 진심으로 축하를 보냈다.배신과 상처를 겪으며 한때는 놓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1853화

    주민혁은 한쪽 무릎을 꿇고 주머니에서 심플한 디자인의 다이아몬드 반지를 꺼냈다.무광으로 마감된 링에 박힌 다이아몬드는 크지 않았지만 충분히 눈부셨다. 최수빈의 취향에 맞춰 주민혁이 직접 디자인 과정에 참여해 만든 반지였다.“수빈아, 힘든 일은 우리 둘이 같이 다 견뎌 냈잖아.”주민혁이 그녀를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앞으로 찾아올 평온한 날들도 너랑 같이 보내고 싶어.”“나랑 결혼해 줘. 이제 우리, 진짜 한 가족이 되자.”저녁 바람이 불어와 최수빈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흔들었다.최수빈은 한쪽 무릎을 꿇은 주민혁을 바라보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그동안 참고 견뎌야 했던 수많은 순간과 쉼 없이 뛰어다녔던 시간, 마음 졸이며 버텨 온 날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제는 그 모든 기억이 따뜻한 안도감으로 바뀌어 가슴을 채웠다.오래 고민하는 기색 없이 최수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금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래요.”주민혁은 그녀의 왼손 약지에 반지를 조심스럽게 끼워 준 뒤 자리에서 일어나 최수빈을 품에 꼭 안았다.저무는 햇살이 두 사람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았다.수많은 소란과 시련이 지나간 끝에, 마침내 두 사람의 행복이 시작되고 있었다.다음 날, 두 사람은 평일 오전에 잠시 시간을 내 조용히 구청을 찾아 재혼 절차를 밟았다.많은 사람에게 알리지도 않았다.이번 선택이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내린 확고한 결심이라는 사실은 두 사람만 알고 있으면 충분했다. 더 이상은 이해관계도, 현실적인 계산도 없이 그저 서로의 곁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번호표를 뽑고 서류를 작성한 뒤 서명까지 마쳤다. 절차는 생각보다 간단했고 금세 끝났다.그리고 마침내 이혼신고서를 받아 든 순간,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다 나란히 웃었다.벅찬 마음에 소리를 지르거나 요란하게 기뻐하지는 않았다.대신 오랫동안 마음속에 떠 있던 무언가가 비로소 제자리를 찾은 듯한 편안함이 밀려왔다.구청을 나온 주민혁은 최수빈의 손을 잡은 채 곧장 두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1852화

    어느 비 내리는 밤, 육민성은 여느 때처럼 송찬 그룹 건물 아래에서 송미연을 기다리고 있었다.빗줄기가 거세게 쏟아져 차창 너머의 풍경마저 희뿌옇게 흐려졌다.퇴근해 건물 밖으로 나온 송미연은 작은 우산 하나에 의지한 채 비를 맞고 서 있는 육민성을 발견했다. 옷은 이미 흠뻑 젖어 있었다.이번에는 그를 피해 돌아가지 않았다.송미연은 육민성 앞까지 걸어가 그의 머리카락을 타고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다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이제 그만해요. 계속 이래 봤자 우리 둘 다 힘들기만 해요.”그러자 육민성이 피로가 짙게 밴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그냥 받아들이기가 싫어. 우리가 이렇게 돼 버렸다는 게... 너무 억울하고 미련이 남아.”“그건 오빠의 감정이죠. 내가 책임져야 할 일은 아니잖아요.”쏟아지는 빗소리 속에서도 송미연의 목소리는 또렷했다.“지나간 일은 이제 정말 지나간 일로 남겨 둬요. 오빠는 천공을 잘 이끌고, 나는 송찬 그룹을 잘 꾸려 가면서 각자 자기 삶을 사는 것. 그게 우리한테는 가장 좋은 결말이에요.”말을 마친 송미연은 우산을 든 채 몸을 돌려 빗속으로 걸어갔다.육민성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남아 차가운 빗물을 온몸으로 맞았다.그리고 그제야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었다. 혼자 붙잡고 이어 온 이 관계는, 애초부터 되돌릴 수 없는 것이라는 걸....심종연은 감옥에 들어갔고, 로라 역시 죗값을 치르게 되면서 천공연구원을 둘러싼 소동도 마침내 완전히 끝이 났다.송미연 역시 조금씩 과거의 그늘에서 벗어나 송찬 그룹의 업무에 전념했고 삶은 서서히 평온을 되찾았다.그리고 주민혁과 최수빈의 관계에도 변화가 찾아오고 있었다.국경에서 목숨을 걸고 함께 추격전을 벌인 뒤로, 두 사람 사이의 호흡은 이미 평범한 사업 파트너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지 오래였다.두 사람은 해외 프로젝트에서 나란히 뛰고, 위험한 순간마다 서로의 등을 지켜 주었으며, 이후에는 심종연이 남긴 문제까지 함께 수습했다.수많은 고비를 함께 넘는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1851화

    송미연은 애써 짜증을 억누른 채 입을 열었다.“분명히 말했잖아요. 난 오빠 용서할 생각 없고, 우리 사이가 예전으로 돌아갈 일도 없어요. 지금 이렇게 해 봤자 나만 난처해질 뿐이에요. 아무 소용도 없다고요.”육민성은 굳어 있는 그녀의 표정을 바라보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다시는 놓치고 싶지 않아서 그래. 그땐 내가 어리석었어. 다른 사람 말에 휘둘려서 상처를 줬지. 그래서 이제라도 만회하고 싶어.”“만회라는 건 이런 게 아니에요.”송미연이 미간을 찌푸렸다.“상대가 원하는 걸 존중하는 게 만회지, 자기 혼자 옳다고 생각하는 걸 억지로 해 주는 게 아니라고요. 출퇴근할 때 데려다주고, 먹을 걸 챙겨 주고, 필요한 인맥이나 자료를 알아봐 주는 것도 전부 오빠가 좋다고 생각해서 하는 거잖아요. 정작 내가 그걸 원하는지는 한 번도 물어본 적 없고.”“지금 당장은 마음을 돌리기 힘들다는 거 알아. 기다릴게.”육민성은 여전히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기다려도 소용없어요.”송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이미 생긴 상처는 없어지지 않아요. 나중에 오빠가 아무리 많은 걸 해도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그날 법원 앞에서, 로라 씨 때문에 나를 두고 그대로 돌아섰을 때... 난 이미 마음을 정했어요.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겠다고.”육민성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토록 굳게 붙들고 있던 마음이 처음으로 흔들렸다.하지만 천공으로 돌아와 텅 빈 사무실을 바라보고 있자니, 지난 일들이 하나둘 머릿속을 스쳤고 결국 그는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그 뒤로는 방식을 바꿨다.일부러 우연을 가장해 마주치려 하지도 않았고, 그녀를 귀찮게 하지 않는 선에서 조용히 필요한 일을 챙기기 시작했다.송미연이 맡은 해외 법무 프로젝트 하나는 절차가 복잡한 데다 해외 조항까지 여럿 얽혀 있어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다.육민성은 몰래 구룡의 법무팀에 부탁해 관련 참고 자료를 한데 정리하게 한 뒤, 익명으로 송미연의 업무 메일에 보냈다.메일을 연 송미연은 자료만 훑어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1850화

    육민성은 송미연의 식습관부터 세심하게 살폈다.위장이 약해 맵고 차가운 자극적인 음식을 피하고 부드러운 가정식 백반을 즐겨 먹는 그녀였다.육민성은 전담 요리사에게 매일 영양을 고루 갖춘 따뜻한 도시락을 싸게 한 뒤, 직접 송찬 그룹 안내 데스크를 찾아가 꼭 송미연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하곤 했다.처음에 송미연은 안내 데스크 직원에게 돌려보내 달라고 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돌려보내자 안내 데스크 직원들도 난처해하는 기색을 보였고 결국 송미연은 도시락을 받아 든 뒤 야근하는 직원들에게 전부 나누어 주었다.육민성은 도시락이 다른 사람들의 몫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화를 내지 않았다.다음 날에도 그는 어김없이 같은 시간에 도시락을 보냈다. 위에 부담이 적은 영양죽부터 정갈한 반찬, 식후 디저트까지 매일 메뉴를 바꿔가며 정성을 들였다.가끔 송미연이 늦은 밤까지 야근하는 날이면 육민성은 따뜻한 차와 핫팩을 차 안에 챙겨둔 채 건물 아래에서 묵묵히 기다렸다.어느 겨울밤 기온이 영하로 곤두박질쳤던 날, 퇴근길에 오른 송미연의 눈에 칼바람을 맞으며 홀로 서 있는 육민성의 모습이 들어왔다.코트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채 서 있는 그의 코끝은 추위에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그 순간 송미연의 가슴 한구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 동요는 이내 가라앉았다.그녀는 천천히 다가가 이혼 후 처음으로 그에게 먼저 길게 말을 건넸다.“매일 이렇게 지키고 서 있을 필요 없어요. 우리 이미 이혼했잖아요. 이런다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육민성은 하얀 입김을 길게 내뿜으며 그녀를 바라봤다.“나한테 아무런 자격이 없다는 거 알아. 그저 뭐라도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서 그래. 용서해 주지 않아도 좋아. 그저 네가 무사히 출퇴근하는 것만이라도 지켜보게 해줘.”송미연은 대답 없이 제 차를 향해 곧장 걸어갔고 홀로 남겨진 육민성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멈춰 섰다.하지만 육민성은 포기하지 않았고 어떻게든 송미연의 일상 속에 스며들 방법을 찾아 헤맸다.송미연이 매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