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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금붕어
진승우는 최수빈을 빤히 바라보면서 경멸의 눈빛을 해 보였다.

“진짜 여기는 뭐 하러 왔대요? 설마 형 눈에 띄고 싶어서 그러는 거 아니에요?”

주민혁은 무심한 눈길로 최수빈을 힐끗 본 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최수빈은 비록 아주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지만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들의 주목을 한 몸에 받으며 누구보다도 눈부시게 빛나는 박하린과 비교하면 초라할 수밖에 없었다.

“형이 왜 집에 돌아가기 싫어하는지 알겠어요. 나였어도 하린 씨가 더 낫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학벌 좋고 능력도 있고 항상 열심히 하잖아요. 최수빈 씨는 하린 씨보다 나은 점이 하나도 없어요.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면서 형 돈만 펑펑 쓰잖아요.”

진승우와 주민혁은 같은 계층의 사람이었고 주민혁이 최수빈과 결혼했을 때부터 그는 최수빈을 진심으로 경멸했다.

주민혁을 함정에 빠뜨려 그와 잠자리를 가진 사람이 괜찮은 사람일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뻔뻔하게 이곳까지 쫓아온 걸 보니 기가 막혔다.

“왜 저기 서서 인터뷰까지 보는 거죠? 알아들을 수는 있대요?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최수빈 씨도 항공우주 산업계 사람인 줄 알겠네요.”

주민혁은 차가운 눈빛으로 진승우를 바라보았다.

“시끄러워.”

진승우는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주시후는 박하린이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걸 보자 자기도 우쭐해졌다.

박하린이 그의 엄마라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어도 괜찮았다. 박하린이 그를 가장 좋아하면 되니 말이다.

최수빈은 박하린이 사람들을 향해 비행기를 소개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자신감이 넘쳐 보였고 항공우주 산업계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최수빈은 심호흡하며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주민혁이 박하린을 좋아하는 이유가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가정주부와 능력이 출중한 커리어 우먼 중 한 명을 고르라면 당연히 후자를 고를 것이다.

이렇게 간단한 것을 지난 생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주예린은 동그란 눈으로 박하린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이 비행기를 설계한 사람이 하린 이모라니... 주시후가 하린 이모를 그렇게 좋아하는 이유가 있었어.’

...

이때 최수빈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육민성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그는 그들을 위해 시야가 좋은 좌석을 마련했으니 잠시 뒤에 그곳에서 전투기 에어쇼를 보라고 했다.

그녀는 주예린을 데리고 그곳으로 걸어갔다.

그 모습을 본 진승우는 최수빈이 자신은 박하린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딸을 데리고 도망치는 줄 알았다.

박하린이 인터뷰를 마치자 주시후가 그녀의 품으로 달려갔다.

“하린 이모, 최고예요!”

박하린은 주시후를 안으면서 그의 볼에 입을 맞췄다.

“고마워.”

주시후는 뽀뽀를 받게 되자 더욱 환하게 웃었다.

박하린은 입꼬리를 올리며 주민혁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한 손에 주시후를 안고 주민혁을 향해 팔을 벌렸다.

“민혁 오빠, 나 이렇게 잘났는데 축하의 의미로 한 번 안아줘야 하는 거 아니야?”

진승우는 웃으며 다가갔다.

“하린 씨, 나는요?”

그는 말을 마치고는 주민혁의 의사 따위 묻지 않고 그를 데리고 가서 박하린을 안았다.

그러고는 주민혁을 보며 말했다.

“잠시 뒤에 같이 밥이나 먹을까요?”

박하린은 주시후를 안고 주민혁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좋아요. 내가 쏠게요.”

세 사람은 멀리서 보면 다정한 가족 같아 보였다.

주예린과 최수빈은 아직 떠나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주민혁이 주시후, 박하린과 함께 있는 걸 본 주예린은 입술을 힘껏 깨물다가 그들을 보지 않기 위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나도 주시후처럼 잘났으면 아빠도 날 받아줬을까? 아빠는 나를 안 좋아해서 엄마도 안 좋아하는 걸 거야... 절대 엄마에게 짐이 되지 말아야지.’

육민성이 최수빈과 주예린을 위해 준비한 자리는 최고로 좋은 자리였다.

그곳은 정중앙 자리인 데다가 시야도 굉장히 좋았다.

“여기 앉으면 돼. 잠시 뒤 에어쇼가 시작될 거야.”

육민성이 웃으며 말했다.

“다른 곳은 가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사람이 워낙 많아서 자칫하면 길을 잃을 수도 있거든.”

“고마워요.”

최수빈은 그를 바라보았다.

“선배는 일 보러 가요. 우리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육민성이 떠난 뒤 최수빈은 좌석에 앉아 먼 곳에 있는 비행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청운x7은 멋지게 완성되었고 전시회에서도 몇 번이나 언급되었다.

오늘 인터뷰를 한 사람은 적지 않았다.

중심 자리에 항공우주 산업계 유명 인사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멀리 있던 주예린은 주민혁이 주시후를 안고 박하린과 함께 그들 쪽으로 오는 걸 보았다.

“너는 왜 여기 있어?”

주시후는 주예린을 보더니 짜증 난다는 표정을 해 보였다.

주예린과 최수빈이 어떻게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일까?

“여긴 잘난 사람들만 앉을 수 있어. 자기 자리도 아닌 데 앉았다가 쫓겨나면 창피하겠다.”

“예의 차려.”

주민혁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차갑게 말했다. 위압감 넘치는 모습이었다.

주민혁은 주시후를 아꼈지만 주시후는 사실 은근히 주민혁을 두려워했다.

주시후는 곧바로 입을 다물고 억울한 표정으로 박하린을 바라보았다.

박하린은 싱긋 웃었다.

“오빠, 시후는 아직 어려서 철이 없어. 앞으로 잘 가르치면 되지. 왜 그렇게 무섭게 굴어?”

최수빈은 그들을 힐끗 본 뒤 깔끔히 무시했다. 그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진승우는 경멸에 찬 미소를 지으며 최수빈을 무시했다.

뻔뻔하게 주민혁을 따라 이곳까지 오다니. 게다가 이 자리에 앉은 걸 보면 뭔가 수단을 쓴 듯한데 그들의 앞에서 도도한 척까지 했다.

‘우리가 그 속셈을 모를 것 같아?’

최수빈은 안쪽에 앉아 있고 주예린이 바깥쪽에 앉아 있었다. 주민혁은 힐끔 보더니 주예린의 곁에 앉았다.

주시후는 주민혁의 곁에 앉은 뒤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

“하린 이모, 앉아요!”

박하린은 싱긋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주민혁이 옆에 앉아 주예린은 긴장해서 작은 손으로 옷을 꽉 쥐며 조심스럽게 주민혁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주민혁은 아이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주시후와 박하린만 신경 썼고, 주예린은 진심으로 실망했다.

에어쇼가 시작되었다.

화려하고 웅장한 광경에 잇따라 환호가 터져 나왔고 어린아이들도 흥미진진하게 에어쇼를 관람했다.

“하린 이모, 이모는 앞으로 저런 전투기를 설계하는 건가요? 너무 멋져요!”

박하린은 웃었다.

“전투기가 좋아? 그러면 이모가 작은 모형을 만들어줄게.”

“좋아요!”

주예린은 그들의 대화를 듣고 부러워했다. 그녀도 전투기가 매우 좋았으나 티를 내지는 않고 속으로만 생각했다.

에어쇼가 끝난 뒤 앞에 있는 무대에서 공연이 이어졌다.

앞자리의 어른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바람에 주예린은 자리에서 일어나도 볼 수 없었다.

주민혁은 주시후를 안아 들었고 주시후는 주예린을 향해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주예린은 코웃음을 치면서 의자를 밟고 일어섰다.

“키 작은 애들은 안겨야 하지만 난 이러고도 볼 수 있어!”

주시후도 코웃음을 쳤다.

“난 앞으로 키 클 거야. 그리고 넌 아빠가 없잖아.”

그 말에 상처를 받은 주예린은 흥미진진하게 에어쇼를 보다가 금세 풀이 죽었다.

최수빈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주시후를 향해 차갑게 말했다.

“그래. 그리고 너는 엄마가 없지.”

주시후는 흠칫했다.

박하린도 놀랐다. 그녀는 최수빈이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주민혁은 언짢은 기색을 드러내며 말했다.

“최수빈, 왜 아이랑 싸우려고 들어?”

최수빈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는 주민혁 씨는 왜 여자랑 싸우려고 들어요?”

최수빈은 그를 무시하고 주예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엄마 여기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주예린은 이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민혁은 줄곧 표정이 굳어 있었다.

그의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요즘 들어 최수빈이 그를 매우 적대시하는 것 같았다.

공연이 끝날 때까지 주민혁과 최수빈은 말 한마디 섞지 않았다.

공연이 끝날 때쯤 최수빈은 주시후를 내려놓았고 이때 주예린이 말했다.

“엄마, 저 화장실 가고 싶어요.”

“그래.”

주예린은 의자에서 뛰어내리려다가 실수로 발을 삐끗하여 넘어졌다.

“꺅!”

주예린은 눈을 꼭 감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아프지 않았다. 큰 손이 주예린을 안았기 때문이다.

뒤늦게 눈을 뜬 주예린은 자신이 아빠의 품에 안겨 있는 걸 발견했다. 아빠의 품은 아주 넓고 따스했다.

주예린은 살짝 놀랐지만 이내 코끝이 찡했다.

‘아빠가 나를 신경 쓰는 거 맞겠지?’

주예린은 저도 모르게 말했다.

“고마워요. 아빠...”

주민혁은 차가운 눈빛으로 주예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방금 뭐라고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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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1297화

    강지안은 침대 머리에 기대앉은 채 손끝으로 이불의 무늬를 가만히 쓸어내렸다. 눈빛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고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조금 전 부하가 내뱉은 ‘없었습니다’라는 한마디에 강지안은 그제야 완전히 깨달았다. 자신이 장성훈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를.장성훈에게 있어서 그녀는 그저 오래전부터 알던 사람, 옛 인연, 윗선의 지시로 지켜야 하는 대상, 딱 그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다.“그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강지안이 낮게 말했다.이런 부탁을 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부하가 잠시 멈칫했다.잠깐 망설이던 그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도련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문이 조용히 닫히고 병실에는 다시 적막이 내려앉았다.강지안은 창밖만 바라봤다.얼마나 기다렸는지도 알 수 없었다.기계음은 계속 같은 간격으로 울렸고 그 소리조차 어느 순간부터는 아무 감각 없이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그러다 병실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차례로 안으로 들어왔다.먼저 들어온 사람은 장성훈이었다.검은색 코트를 입은 그는 여전히 반듯하고 서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깊게 가라앉은 눈매와 굳은 인상은 여전했지만 늘 차갑기만 하던 얼굴이 오늘따라 조금은 부드럽게 느껴졌다.그리고 그의 옆에서 팔짱을 낀 사람은 민채영이었다.민채영은 정갈한 흰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단정한 화장에 다정한 미소까지 더해지니 마치 한겨울에 핀 하얀 장미 같았다.그녀는 강지안을 보자 장성훈의 팔에서 손을 풀고 앞으로 두 걸음 다가왔다. 말투는 친근한 척 부드러웠지만 그 속에 깔린 뜻은 너무도 분명했다.“지안 씨, 여기서 보게 될 줄은 정말 몰랐네요. 성훈 씨가 아는 사람 문병을 간다고 해서 저도 같이 왔어요. 불편하진 않으시죠?”예의 바른 말처럼 들렸으나 한마디 한마디가 은근하게 선을 긋고 있었다.강지아는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렸다.“괜찮아요.”담담한 목소리, 하지만 그녀는 민채영을 보지 않고 곧장 장성훈에게 시선을 주었다.안부를 묻지도, 따지지도, 서운하다는 기색조차 꺼내지 않았다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1296화

    하지만 카엔은 코웃음을 쳤다.“장성훈? 그게 누군데요? 여기선 우리가 법이에요.”말이 끝나기도 전에 놈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그리고 강지안은 배낭은 물론이고 휴대폰과 손목시계까지 순식간에 빼앗겼다. 값비싼 장비들은 모조리 털린 것이다.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한 남자가 그녀를 거칠게 밀어 넘어뜨렸다.강지안은 두꺼운 눈밭 위로 나동그라졌다. 살을 에는 한기가 방한복을 뚫고 파고들어 순식간에 온몸이 굳어 갔다.“그냥 여기 버려둬.”눈밭에 쓰러진 강지안을 내려다보며 카엔이 무심하게 말했다. 그 목소리는 이 극지의 바람만큼이나 차가웠다.“이 날씨면 세 시간도 못 버틸 거야. 금방 얼어 죽겠지.”놈들은 그 말에 배를 잡고 웃었다. 그런 다음 빼앗은 물건들을 챙겨 눈길용 개조 차량에 올라탄 뒤 그대로 떠나 버렸다.엔진 소리는 거센 눈보라 속으로 점점 멀어져 갔고 끝내 끝없는 설원 한가운데에는 강지안만 홀로 남았다.함박눈은 갈수록 거세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몸 대부분을 덮어 버렸다.매서운 바람이 칼날처럼 뺨을 후벼 팠다. 얼굴은 얼얼하다 못해 점점 감각마저 흐려졌다.어떻게든 몸을 일으켜 보려 했지만 온 힘이 바닥난 듯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절망이 서서히 그녀를 집어 삼켜갔다.강지안은 잿빛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흐릿해지는 시야 너머로 장성훈의 얼굴을 떠올렸다.늘 말없이 그녀의 뒤를 지키던 남자, 과묵했지만 그녀에게 위험이 닥치면 누구보다 먼저 달려오던 사람...결국 장성훈의 말이 맞았다. 이곳은 정말 위험했다.‘이제는 정말 다시는 못 보는 건가...’강지안의 의식은 점점 멀어졌다. 눈꺼풀은 천근만근 무거워졌고 그대로 감겨 들어갔다.그런데 완전히 정신을 잃기 직전, 멀리서 희미하게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점점 또렷해졌다. 꺼져 가던 마음속에 아주 희미한 희망이 다시 살아났다.하지만 이미 너무 지쳐 있는 탓에 몸은 완전히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고 눈앞은 점점 새까매졌다.그렇게 끝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1295화

    “사람 붙여. 한 발짝도 떨어지지 말고 따라붙어.”장성훈은 화장실에 가는 척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비서에게 음성 메시지를 남겼다.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딱딱했다.“무슨 일 생기면 바로 보고하고. 그리고 아가씨가 고용한 무장 인력들 신원도 전부 확인해.”통화를 끊은 뒤, 장성훈은 세면대 앞 거울을 바라봤다. 거울 속 남자의 표정은 잔뜩 굳어 있었다.그는 강지안이 어떤 사람인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겉으로는 부드러워 보여도 속은 질길 만큼 단단한, 한번 마음먹은 일은 누가 말려도 절대 돌아서지 않는 사람이었다.그녀가 기어이 남극 심부로 들어가겠다고 고집하는 이유는 뻔했다. 바로 최수빈과 주민혁을 구해내기 위해서였다.하지만 지금 그곳으로 들어가는 건, 제 발로 덫 안에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걸 강지안은 모르고 있었다.다음 날 새벽.하늘이 막 희뿌옇게 밝아오던 시각, 남극 인근의 중간 기지는 벌써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강지안은 두꺼운 극지 방한복을 입고 고글까지 착용한 채, 개조된 설상차 옆에 서서 장비를 하나하나 점검하고 있었다.그녀의 뒤로는 위장복 차림의 무장 인원 열댓 명이 따라붙어 있었다. 하나같이 덩치가 크고 표정은 무뚝뚝했으며 허리춤에는 총까지 차고 있어 분위기부터 심상치 않았다.“아가씨, 장비는 다 준비됐고 가이드도 구해놨습니다. 바로 출발하시면 됩니다.”선두에 선 남자는 카엔이었다. 이 근방에서 제법 이름이 알려진 무장팀 대장이었고 강지안에게서 적지 않은 계약금을 받은 뒤 끝까지 안전하게 지켜주겠노라 큰소리쳤던 사람이었다.강지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배낭에서 달러 뭉치를 꺼내 카엔에게 건넸다.“남은 돈이에요.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하면 추가로 더 드릴게요.”카엔은 손에 쥔 돈다발을 툭툭 두드려 보더니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걱정 마십시오. 절대 실망시키는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그렇게 일행은 길을 나섰다.설상차는 끝도 없이 펼쳐진 설원을 가르며 빠르게 달렸다. 바퀴가 두껍게 쌓인 눈을 짓이길 때마다 하얀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1294화

    “틀렸어요.”주민혁의 목소리는 낮고 담담했다.“나와 심 대표님은 애초에 같은 부류가 아닙니다.”그는 한 번도 권력에 정점에 서고자, 세상을 집어삼킬 만큼 거대한 판도를 손에 쥐고자 한 적이 없었다.그가 원한 건 오직 최수빈의 무사함, 묻혀버린 그해의 진실, 그리고 주상 그룹이 끝까지 떳떳한 길을 걸어가는 것이었다.심종연의 얼굴에서 마침내 웃음기가 사라졌다.“그러니까... 내 제안을 거절하겠다는 건가요?”“네.”주민혁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난 심 대표님과 손잡지 않을 겁니다.”심종연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봤다. 깊게 가라앉은 눈빛이 주민혁의 말에 거짓이 섞여 있는지 끝까지 가늠하는 듯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그제야 심종연은 천천히 입꼬리를 올리며 차갑고 서늘한 웃음을 띠었다.“좋아요, 아주 좋습니다. 역시 끝까지 꺾이지는 않는군요.”심종연은 침대 머리맡 탁자 위에 놓아둔 시가를 다시 집어 들었다. 손가락 사이에 끼웠지만 끝내 불은 붙이지 않았다.그러더니 주민혁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 얼굴을 뼛속에 새겨두기라도 하려는 사람처럼 말이다.“굳이 가장 험한 길을 고르겠다면, 어디 끝까지 한번 지켜보죠.”심종연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그 선택, 나중에 후회하지 않길 바라요.”이 말을 끝으로 그는 몸을 돌려 병실을 나갔다.문이 닫히는 순간이 되어서야 주민혁은 천천히 눈을 감고 침대 머리에 기댔다.가슴의 상처가 다시 욱신거리기 시작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만큼은 고요했다.심종연을 거절했다는 건 앞으로도 계속 임하은에게 붙들려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 싸움은 더 힘들어질 테고 그가 견뎌야 할 시간도 길어질 것이다.그래도 다른 선택은 없었다.그는 최수빈의 안전을 걸고 모험할 수 없었다. 더구나 나라와 직결된 기밀까지 내던지며 이런 더러운 거래에 손을 댈 수도 없었다....한편, 도심 한가운데 있는 최고급 영화관.VIP 상영관 안은 숨이 막힐 만큼 어두웠지만 그 희미한 빛조차 민채영의 사랑스러운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1293화

    임하은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실 문이 다시 조용히 열렸다.심종연이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다. 경호원도 없이 혼자였다.몸에 걸친 검은색 코트는 흠잡을 데 없이 잘 재단돼 있었고 옷깃은 아무렇게나 풀어놓은 듯했지만 오히려 더 여유로워 보였다.손가락 사이에는 여전히 불도 붙이지 않은 시가 한 개비가 끼워져 있었다. 눈매에는 늘 그렇듯 여유로움이 돋보였다.그는 창가로 걸어가 병상에 누운 주민혁에게 등을 보인 채 멈춰 섰다.“하은 씨가 내건 조건이 듣기에는 꽤 괜찮더라고요?”먼저 입을 연 건 심종연이었다. 낮은 목소리로 병실을 울렸다.“약혼하고, 혼인신고까지 마친 뒤 해외로 떠난다. 그 뒤로는 누구의 방해도 없이 마음대로 살 수 있다... 나쁘지 않은 얘기 아닌가요.”주민혁은 여전히 창백한 얼굴을 한 채 침대 머리에 기대앉아 있었다.그러고는 시선을 들어 심종연의 뒷모습을 바라봤는데 눈빛에 온기라고는 한 점도 없었다.“지금 그 여자 편들려고 온 거 아니잖아요.”묻는 말이 아니라 단정이었다.심종연과 임하은은 어디까지나 서로 필요해서 손을 잡은 사이일 뿐이었다. 거기에 무슨 의리나 정이 있을 리 없었다.심종연은 낮게 웃더니 몸을 돌려 주민혁을 바라보았다. 값비싼 전리품이라도 감상하는 듯 훑어보는 눈빛이었다.그는 병상 옆 의자에 앉아 시가를 침대 머리맡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손가락 끝으로 팔걸이를 천천히 두드리기 시작했다. 규칙적으로 울리는 소리가 숨 막히는 병실 안에서 유난히 거슬렸다.“물론 아니죠.”심종연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난 민혁 씨에게 다른 방법을 소개해주러 왔어요.”그는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였다.“하은 씨의 말은 안 들어도 돼요. 대신 나랑 손잡읍시다.”주민혁은 아주 조금 미간을 찌푸렸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그를 바라보며 다음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조건은 간단해요.”심종연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민혁 씨가 알고 있는 모든 기밀을 내게 넘겨요. 07전투기 프로젝트에 관한 것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1292화

    그 광경을 지켜보던 심종연은 눈을 살짝 가늘게 뜨며 묘한 흥미를 드러냈다. 시선은 임하은에게 머물렀고 말투에는 감탄이 배어 있었다.“하은 씨, 나보다 더 독했군요?”그는 마치 흥미로운 연극이라도 감상하듯 가볍게 손뼉을 쳤다.“주씨 가문의 기반도, 주 대표님도 전부 다 갖겠다는 거네요. 욕심이 꽤 큰데요?”임하은은 고개를 돌려 심종연을 바라봤다.“내가 원하는 건 그 정도가 아니에요.”그녀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그때 임씨 가문이 빼앗긴 것들, 전부 하나씩 되찾아 올 거예요. 남김없이.”심종연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피식 비웃었다.“주 대표님이 나중에 다시 일어나서 복수하러 올까 봐 안 무서워요? 그땐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될 텐데.”임하은은 주민혁을 바라봤다. 눈빛에 집착에 가까운 광기가 스쳐 지나갔다.그리고 그녀는 피식 웃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이상할 만큼 단호했다.“돌이킬 수 없게 된다고요?”그녀는 천천히 주민혁의 창백한 얼굴로 시선을 내렸다.“그런 건 겁 안 나요. 민혁 씨를 내 곁에 붙잡아 둘 수만 있다면, 민혁 씨가 오직 내 사람이 되는 걸 볼 수만 있다면, 지옥에 떨어져도 상관없어요. 영영 망가진다 해도 기꺼이 감수할 거예요.”주민혁의 시선은 최수빈에게 닿아 있었다. 눈빛에 미안함과 애틋함이 가득했다.입술을 달싹거리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끝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그도 알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내딛는 이 선택이 결국 눈앞의 갈증만 잠시 달래는 독이라는 걸.하지만 다른 길이 없었다.최수빈은 그런 주민혁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마음 한구석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주민혁이 고개를 끄덕인 그 순간부터, 두 사람은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으니 말이다....임하은은 주민혁의 휠체어를 밀고 최수빈의 병실을 빠져나왔다.주민혁은 그녀를 바라보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수빈이 풀어줘.”그러자 임하은은 몸을 돌려 주민혁을 보더니 차갑게 웃었다.“뭐가 그렇게 급해요?”그녀는 천천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576화

    남자의 말 속에는 어딘가 떠보려는 듯한 기색이 담겨 있었다.최수빈은 처음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이내 그가 이번에 돌아온 이유가 어쩌면 권력을 빼앗기 위해서라는 걸 어렴풋이 알아차렸다.주선웅의 눈에는 야망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고 그 욕망은 더 이상 숨겨지지도 않았다.하지만 어떤 이유든 그건 결국 주씨 가문의 일이자 주민혁과 주선웅 두 사람 사이의 문제일 뿐이지 그녀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최수빈은 살짝 눈을 내리깔고 감정 하나 담기지 않은 평온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그럼 바라시는 일 모두 이루길 바라요.”그 말을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549화

    조윤미의 말에 박하린은 머리가 점점 지끈거리는 게 느껴졌다.그녀는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가볍게 문질렀다.박하린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말했다.“이 일은 제가 따로 시간 내서 한 번 심사 위원분이랑 잘 얘기해 볼게요. 정보는 지금 보내주세요.”이 모든 일은 그녀의 미래와 직결된 문제였으니 결코 소홀히 할 수 없었다.아무리 주민혁이 박하린을 사랑한다고 해도 미래는 스스로 계획하고 그려나가야지, 그에게만 의지할 수는 없었다.조윤미는 전화를 끊은 후, 심사 위원의 정보를 박하린에게 넘겨주었다.박하린은 그 정보를 자세히 살펴보았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577화

    주민혁이 그녀를 보기를 원하지 않을 때, 박하린은 그를 만날 수 있는 어떤 경로도 가질 수 없었다.심지어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주시후는 굵은 빗줄기 속에 그대로 서 있는 박하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아줌마, 엄마 좀 들여보내 주세요.”한참을 비 맞고 서 있는 엄마가 안쓰러웠다.“이렇게 비 맞으면 분명 감기 걸릴 거예요. 지금 아빠한테 전화해서 오라고 할게요.”도우미는 주시후의 눈에 담긴 감정을 읽으며 말없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주씨 가문 일은 겉보기보다 훨씬 더 복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559화

    박하린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든, 늘 그 독특한 내면의 자존감과 내적 동력으로 인해 자신 외의 그 누구도 진심으로 인정하지 않았다.그런 그녀를 향해 최수빈은 느릿하게, 그러나 날카롭게 한마디를 던졌다.“이정도 멘탈이니 남의 가정에도 떳떳하게 끼어들 수 있었겠죠.”말소리는 오직 두 사람만 들을 수 있을 만큼 작았다.하지만 박하린의 표정은 그 말에 즉각 일그러졌고 눈빛도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진승우는 무대 위 두 사람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입씨름에 있어서는 박하린은 늘 최수빈에게 밀렸다.최수빈의 입은 억지를 부려도 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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